진보의 역설 - 우리는 왜 더 잘살게 되었는데도 행복하지 않은가
그레그 이스터브룩 지음, 박정숙 옮김 / 에코리브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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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류는 지난 300여 년 동안 전반적으로 엄청난 경제적 발전을 이루었다. 물론 이 발전의 열매가 세계 전체에 골고루 분배되지는 않고 있지만, 그 전반적인 발전의 양상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적어도 행복하다고 여기지 않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이 책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다.


책의 첫 두 장은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나아지고 있는 지표에 관해 말하고 있다. 몇몇 통계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과 조금 달라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 오늘날 고등학교 졸업자 중 2/3가 대학에 진학하고 있고, 고등학교 중퇴자 비율은 10% 이하라고 한다. 반면 1940년대까지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일을 시작했다. 또, 미국인의 14% 정도만이 의료보험에 가입하지 못했는데, 그 14%도 전혀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그에 반해 우리는 미국의 공교육은 사실상 무너졌고, 의료보험 체제도 비참할 정도라는 식의 과장된 수사들을 쉽게 접해오지 않았던가)


그러면 왜 현대인들은 이렇게 발전한 사회에서 살면서도 그토록 불행하다고 느낄까? 저자는 다분히 심리적인 차원의 요인들이 작동하고 있다고 본다. 우선은 과거 사람들은 앞으로 좀 더 많은 것을 갖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현실의 불편함을 버텨낼 수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갖고 있어서 그 이상의 것을 얻겠다는 기대를 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을 꼽는다. 또, 이미 이룬 성과가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질 지도 모른다는 붕괴 불안 심리도 작동하고.


한편으로 현대인들은 불평에 지나치게 익숙해져 있다. 언론은 범죄 현황에 대한 과장된 보도를 즐겨하고, 보통 사람들은 따라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삶을 사는 부자들의 생활에 관한 정보가 쉽게 퍼지는 것도 불평을 늘리는 원인 중 하나다. 사람들은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더 사치스러운 삶을 추구하는데, 당연히 모두가 그 기준치를 충족하기는 어렵다.




저자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말한다. 우리가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것들(사랑, 우정, 존경, 가족, 지위, 재미)은 값을 매길 수 없는 것들이고, 어떤 것에 가격을 매길 수 없다면 그건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통계에 따르면 어느 정도의 수입 증가는 행복감을 늘려주지만, 연간 약 1만 달러의 수입을 전후해서 그 효용감은 크게 떨어진다고 한다. 즉 돈은 행복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말이다. 자연스러운 결론으로 저자는 우리가 물질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또, 좀 더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 감사와 용서의 중요성을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심리적인 해결책만 제시하는 건 아니다. 책의 후반 두 장 정도는 최저임금을 좀 더 올려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대기업 CEO들이 악랄한 한탕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도 보인다. 또, 국제적인 관계에서는 이른바 공정무역이나 저개발국가에 대한 관세 인하 같은 정책의 필요성도 주장한다. 물론 이 부분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비판과 지적이긴 한데, 책의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약간 이질적이라는 느낌도 준다. 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지면을 심리적인 것에 할애해 왔으니까 말이다.


“진보의 역설”이라는 책의 제목은, 경제적으로는 분명 크게 상황이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진보 때문에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을 느낀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발전을 하려고 하는 걸까? 어떻게 보면 이 문제는 물질적인 것에만 지나치게 집착해 온,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해 온 지난 한 세기 인류의 주류적 사고가 낳은 부작용일 지도 모르겠다. 다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물질적인 차원에만 집중하는 건(물론 우리는 물질적인 번영도 필요하다) 최종적인 답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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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의 헌법 - 국회의원 박주민의 헌법 이야기
박주민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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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국회의원 박주민이 쓴 헌법 전문 소개서이다. 헌법 전문에 이어 제1조부터 제130조까지, 그리고 부칙까지 헌법에 실려 있는 모든 조항들을 실었고, 여기에 간단히 저자의 안내 코멘트가 덧붙여 있다. 전반적으로 어려운 법 용어를 비법조인인 평범한 시민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풀어내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헌법은 오랫동안 그저 상징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모든 권력기관에서 제정하는 법과 규칙들의 가장 상위에 있는 원칙과 비슷한 느낌인지라, 실생활에 막상 어떤 영향을 끼칠까에 대해서는 큰 효능감을 보여주지 않았다. 개헌 논의가 종종 나오긴 했지만, 대부분은 권력구조, 그러니까 대통령 임기를 어떻게 바꾸고, 단임제를 중임제로 하고 뭐 그런 얘기만 크게 보도되는 지라, 더더욱 그들만의 이야기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었다.


하지만 실제로 헌법 조문에는 우리의 삶에 꽤나 밀접하게 다가오는 다양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얼마 전 대통령이 추천한 대법원장 후보자가 낙마를 한 적이 있다. 다양한 의혹들이 제대로 소명되지 않았기에 다수인 야당에서 임명제청안을 부결시켜버린 것인데, 비슷한 인사청문회에서 야당의 부적격의견을 받았던 여러 장관후보자들이 결국 대통령에 의해 임명 강행된 사례들을 보면 결과적으로 좀 다른 모양새였다.


이유는 헌법에 대법원장의 경우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내용(104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케이스는 국무총리(86조)와 감사원장(98조)도 포함되는데, 현대국가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인 행정부 권력의 비대화를 견제하기 위한 조치로서도 국회의 임명동의권이 좀 더 강화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국회 동의를 받아 임명된 감사원장이 지난 1년 반 동안 저지른 일들을 보면 국회의 동의가 또 만능은 아니겠지만.





헌법 조항 중에 흥미로운 내용들이 꽤 보인다. 농지에 관련해서 121조는 실제로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만 농지의 소유권을 주도록 해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고, 123조에는 국가가 중소기업을 보호, 육성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을 두고 있기도 하다. 근데 대기업 위주의 경제정책만 짜는 건 위헌 아닌가?


또, 같은 조문에는 국가가 농수산물의 수급균형과 유통구조를 개선해 가격안정을 통해 농어민의 이익을 보호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농수산물과 관련해서 자주 제기되는 게 중간유통업자들의 폭리인데, 헌법에 따르면 이런 부분도 국가는 손을 대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 같고.


여기에 현재는 운영되지 않는, 흥미로운 위원회가 하나 헌법에 규정되어 있다. 제90조에 나오는 국가원로자문회의라는 기구다. 의무설치 기구가 아니긴 한데, 이 회의의 의장이 전직 대통령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정권교체가 되었다면 상대 당 출신의 전직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에게 자문을 하는 공식적인 자리가 만들어지는 셈인데, 잘만 운영 된다면 협치의 좋은 통로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또 퇴임 후에도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존재하는 듯하다.



물론 완전한 법이라는 건 있을 수 없지만, 적어도 헌법에 규정된 내용들만이라도 제대로 실천된다면 꽤나 괜찮은 나라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좀 더 자주 헌법을 이용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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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빌리의 비참
알베르 카뮈 지음, 김진오.서정완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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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 카뮈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사람이 많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가니까. 가난한 집안의 아홉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던 카뮈는 건강 상의 문제로 교수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신문 기자 생활을 했는데, 이 책은 그가 기자 생활을 하던 시절 썼던 열한 편의 기사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책 제목에도 나오는 카빌리는 20세기 초반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던 북아프리카 알제리의 한 지역의 이름이다. 변변한 자원도 없고, 무엇보다 식량부터가 부족한 가난한 마을 사람들의 삶을 옆에서 취재하면서 생생한 어조로 그 비참함을 묘사한다.


하지만 이 묘사는 선정적이지 않다. 흔히 빈곤 포르노라고 부르는, 가난을 일종의 시선을 끌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짓은 하지 않는다. 대신 작가의 글에는 분노가 배어있다. 상황을 이렇게 만들어 놓은 멍청한 정책들, 사려 깊지 못한 행정 담당자들, 그리고 곳곳에 숨어 있는 부패와 불합리한 규제들이 그 분노의 대상이다.


식민지에서 재배되는 작물에 대한 적절한 가격을 매기지 않는 당국, 산림법으로 땔감조차 채집하지 못하게 막는 당국, 바닥에 떨어진 죽은 나뭇가지를 숯으로 만들어 팔려고 나갔다가 판매 허가를 못 받았다고 모든 걸 압류 당하는 농민들, 심지어 공공사업에 참여해 받은 쥐꼬리만 한 보수에서 밀린 세금부터 원천징수해 뺏는 빌어먹을 관행들까지...





문제는 카뮈의 시대로부터 1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관행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언제나 돈은 있는 사람들에게 모이고,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진 기회는 바늘구멍처럼 좁기만 하다. 온갖 규제들은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가질 수 있게 도울 뿐,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힘든 사람에게 법은 가혹하기만 하다.


책에는 이런 비참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나름의 대책을 고민해 제안한다. 단지 문제를 지적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고통 받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면서 진짜 대책을 내놓았다. 이런저런 보조금은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어디론가 스며들어 정작 필요한 사람들의 손에 주어지지 않으니, 주민들에게 적절한 수입이 생길 수 있는 일자리와 산업을 만들고, 이를 지원하는 쪽으로 예산을 사용하자는 제안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카뮈는 이 현실을 차곡차곡 고발한다. 물론 그가 자신을 식민지 주민들과 동일선상에 두기 보다는 제국주의 국가 쪽에서 정체성을 찾았다는 점을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 말미에 적혀 있듯, “식민 정복을 정당화할 수 있는 최소한의 구실은, 정복당한 민족이 정체성을 지키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라는 지적은 이런 한계를 지니고 있더라도 기억해 둘만한 문장이다. 오늘의 언론은 이런 결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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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은 쉽고 민주주의는 어렵다 - 민주주의를 오염시키는 선동의 수사학
패트리샤 로버츠-밀러 지음, 김선 옮김 / 힐데와소피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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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 신간 코너에 재미있는 제목의 책이 있어서 데리고 왔다. 이 책은 특히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온갖 선동 작업이 어떤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왜 사람들이 그런 저질 선동에 넘어가는지, 선동가들을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에 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책의 판형 자체가 작기도 하고, 페이지도 겨우 140페이지 정도라(그런데 가격도 14,000원;;;) 그리 어렵지 않게 읽어나갈 수 있다.



선동가들은 공통적으로 사안에 관한 정밀한 합리적 접근을 거부하고, 대신 정체성 정치에 집중한다. 쉽게 말하면, 문제가 무엇인지보다 누가 이 주장을 했는지를 더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우리 편이 하는 말이면 무조건 옳고, 상대 편이 하는 말은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식이다. 흔히 이런 종류의 정체성 정치는 포스트모더니즘이 확산되면서 함께 퍼져나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선동가들은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다 있어왔다.


얼마 전 한 포털 사이트에서 아시안게임 축구 경기 응원 페이지에 이상한 결과가 있었다. 분명 우리나라 페이지인데도 우리를 응원하는 것보다 중국팀을 응원하는 비율이 90% 가까이 나왔던 것. 알고 보니 해당 페이지는 로그인이 없이도 얼마든지 응원 버튼을 누를 수 있었고(대부분의 스포츠 응원 페이지가 그렇다. 나도 내가 응원하는 야구팀의 응원버튼을 마음 내키는 대로 누르곤 한다), 두 개의 외국 서버에서 자동클릭을 하는 프로그램을 돌린 것으로 밝혀졌다.


뭐 여기까지는 별 시답잖은 것들이네 하고 넘기면 그만이다. 축구 응원버튼을 누가 더 많이 눌렀는지가 뭐 그리 중요한가. 하지만 대한민국의 집권 여당측 인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그 포털 사이트에서 여론조작이 행해지고 있다면서 무슨 대단한 범죄라도 저지른 양 수사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정확히 선동으로 넘어가는 순간이다.


여론조작과 스포츠 응원 버튼 사이에는 어떤 개연성도 없다.(당연히 의혹을 제기한 선동가들도 당연히 근거를 대지 못했다. 그냥 그런 게 있다는 선동 멘트만 반복할 뿐) 양쪽의 매커니즘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우리 동네 편의점에 불이 났으니 옆 동네에 있는 카페가 위험하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무슨 말이냐고? 난들 이해가 되겠냐고.





사실 더 이해가 되지 않은 이런 선동가들의 말을 철썩 같이 신뢰, 아니 신봉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이었다. 책의 내용 중에는 이와 관련한 부분도 보인다. 자신의 지도자가 기이한 언행을 보일수록 그에게 카리스마적 리더십이 생기고(보통사람은 생각할 수 없는 일까지 하다니 역시 대단해!?) 그런 사람에게 자신의 권력을 넘겨줌으로써 오히려 스스로 더 강해진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도자가 자신이 한 말에 대해 정확성을 기하거나, 논리적 함의나 결과에 대해 인정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지거나, 책임감 있게 행동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책임한 행동을 하는 것이 지도자가 가진 권력을 보여주는 방식 중 하나라고까지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이런 사회를 독재사회라고 부르고, 북한이나 러시아, 벨라루스 같은 나라들에서 그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그리고 꽤나 가까운 곳에서도)


당연히 이런 사회는 큰 문제를 안게 된다. 건전한 비판과 반대가 허용되지 않는 조직이나 사회는 발전의 동기도, 의욕도 생길 수 없으니까. 하지만 일단 이렇게 선동가들이 득세하기 시작하면, 사회는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면 이제 선동에 동참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배신자 소리를 듣거나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 악화는 양화를 구축하기 마련이다.




저자는 분명 미국과 러시아의 상황을 깊이 인식하면서 이 책을 써 내려간 것 같다. 구체적으로 트럼프나 부시 부자, 그리고 푸틴 같은. 그런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이게 그냥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로 쉽게 여겨지지 않는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 이 책의 제목이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어순은 바뀌었지만 내용은 동일하다. 민주주의는 어렵고, 선동은 쉽다. 선동은 다른 편의 사람들과 숙의를 해 가며 해결책을 찾아가는 것보다 그들을 공격하면서 느끼는 쾌감을 더 즐거워할 때 발생한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에서 민주주의는 성숙할 수 없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다수결이 아니니까.


물론 역사를 보면 한 나라의 정치 발전은 직선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르락내리락, 발전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크게 보면 서서히 발전해 오긴 했다. 하지만 얼마든 급격한 후퇴를 할 수도 있는 법이라.... 최근 온라인을 뒤덮고 있는 온갖 혐오의 선동 글들을 보고 있으면 그냥 한숨만 나온다. 이미 특정한 정치인들만이 아니라 너무 멀리, 그리고 깊숙이 전이되어버린 상태인 것 같아서 말이다. 우리에겐 희망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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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교사와 교사 되기 - 우리의 교사와 학생들이 세계의 BTS(The best teacher and student)가 되기를 꿈꾸며
이혁규 지음 / 교육공동체벗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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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잇따라 교사들이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교직사회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언론에서 이러쿵저러쿵 기사를 쓰기는 하지만, 요새 언론들이야 클릭장사가 가장 중요한 사업인지라 선정적인 내용만 각색해 보도하는 게 일반적이다. 문제의 배후에 있는,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듣기에는 신문은 적절한 매체가 아니다.


그래서 손에 든 것이 이 책이다. 사실 근래의 문제는 학부모들의 교사에 대한 갑질, 괴롭힘이지만, 이 책은 그런 문제를 직접 다루지는 않는다. 대신 한국 교육계가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들, 한국 교사들을 얽어매고 있는 내적, 외적 요인들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피고 있다. 하지만 문제라는 게 대개 그렇듯이 저 깊숙한 곳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곤 한다.




책에서 주로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건 교사 교육 과정의 부족함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비슷한 예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이 교사를 지망하는 특이한 나라다. 하지만 정작 그런 학생들들 좋은 교사로 길러내기 위한 교육제도는 모자람이 많은 상황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교대의 수업 구성인데, 중등 교사를 길러내기 위한 사범대학의 경우 실제 교과가 아니라 일반적인 학문 구성에 따른 교육을 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말이냐면 사회 교과 교사를 키우기 위한 강의가 아니라 그 안의 다양한 과목들, 즉 지리나 역사, 경제, 정치 같은 분야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사회과 교사이지만 정치를 잘 모르고, 역사를 어려워하는 교사가 탄생한다. 이런 엉뚱한 교육현실의 배경에는 기득권과 밥그릇이 연관되어 있고.


교사의 승진과 관련된 문제도 생각보다 심각하다. 현행 제도에서 교사들은 크게 세 가지 진로를 택하게 된다고 한다. 하나는 교장이 되려고 애쓰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학생들에게 집중하는 길, 그리고 나머지는 이도 저도 관심 없고 혼자 유유자적하는 길. 세 부류 중 어느 쪽이 비중이 높은 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현행 제도에서 교장이 될 수 있는 교사의 수는 매우 적다는 걸 생각해 보면 세 번째 길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수가 적지 않을 것 같다는 짐작은 된다.


교사들 자신의 문제도 분명 존재한다. 자신의 수업을 공개하기를 꺼리고, 다른 교사들을 비롯한 다양한 교육주체들과의 연계를 위한 노력도 부족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그들이 그렇게 하는 건, 다른 방식을 선택할 유인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단지 사명감으로 무슨 행동을 유인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그리고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교원 양성 계획의 실패로 인한 임용대기자 문제다. 쉽게 말해 교육은 다 받았는데 정작 교사로 임용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원인은 정부의 정책실패에 있는데, 여전히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예비 교사들의 희생만 늘어가고 있는 상황.




이 모든 요인들이 결합되면 결국 교사들은 의욕을 잃고, 보신주의에 빠져서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집단이 된다. 어떻게든 문제가 되는 상황에 연루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승진점수를 얻을 수 있는 길만을 모색하게 된다. 그들이 학부모들에게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건 이런 구조적인 문제에서 나오는 비극적 결과 중 하나일 것이다.


문제는 교권 보호를 위한 법을 하나 만든다고 해결되지 않을 것 같다. 물론 없는 것 보다야 나을지 모르지만, 교사 개개인의 자기 효능감이 떨어져서 의욕을 상실한 상황에서 무슨 일이 제대로 될까?


책을 읽고 나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교사의 정체성 부분이다. 우리는 교사를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는 걸까? 최근 우후죽순 출몰하는 갑질 부모들의 경우 내 자식을 떠받들어야 하는 시종쯤으로 여기는 것 같지만, 이건 애초에 논외로 해도 상관이 없는 망상일 뿐이다. 그러면 교사는 교육을 담당하는 공무원일까? 또는 (십수 년 전만해도 실제로 그렇게 가르쳤다는) 일종의 성직으로 봐야 하는 걸까? 양쪽 다 지나친 면이 있다.


저자는 교사를 교육 전문가로 봐야한다고 말한다. 이건 교사를 바라보는 외부의 인식만이 아니라 교사들 스스로도 그래야 한다는 것. 그래야 교사 양성 과정에서 내실을 기할 수 있고, 교사들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도 자연스럽게 요구될 것이다. 당연히 다양한 제도들(예컨대 승진 제도)도 여기에 맞춰 재설정되어야 하고.




어느 영역이든 개혁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일은 여기저기서 조금씩 손을 대는 식으로는 오히려 덧나기 쉽다. 워낙에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만족시키기 위한 개혁은 모두의 반발을 사곤 하니까. 특히 교육 영역은 몇 년에 한 번씩 새로운 교육과정을 내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정확히 이런 방식의 개혁을 시도해 왔었다.


물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쉽지 않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있다간 더 큰 카타스트로프를 맞이할 게 분명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고 피해를 받을지 모른다. 우리는 과연 개혁을 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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