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부모의 탄생 - 공동체를 해치는 독이 든 사랑
김현수 지음 / 우리학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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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잇따라 학부모들의 괴롭힘으로 목숨을 끊은 교사들의 이야기가 보도되면서 관련 문제의 심각성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누구보다 나서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교사들마저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일어섰고, 초유의 대규모 교사 시위까지 벌어졌다. 처음엔 늘 하던 대로 협박과 위협으로 대충 넘기려던 정부도 결국 교사들을 일단 진정시키자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 애초부터 이런 데 익숙하지 않았던 교사들의 시위도 더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급한 불만 끄자는 식이었던 정부의 대처는 이후에도 변변한 게 없었고, 최근에는 애초의 도화선이 되었던 한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과 관련된 학부모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소식도 들린다. 몇 가지 조치들이 시행되긴 했지만, 여전히 교사에 대한 학부모 괴롭힘의 문제는 그대로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건 아닌가 보다. 우리와 문화적으로 가까운 일본이나 홍콩 등지에도 비슷한 문제들이 있었고, 일본에서는 그런 학부모들을 가리켜 ‘괴물 부모’라는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네이밍 센스를 보여주었다.


이 책은 정신과 전문의가 그런 일본과 홍콩 등의 실태 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괴물 부모의 특징과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 그리고 그것이 자녀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나아가 문제 해결을 위한 몇 가지 제안을 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략 짐작할 수 있지만, 괴물 부모가 되는 건 단지 개인적 차원의 요인만 작용하는 건 아니다. 책에서는 독박육아와 그로 인한 스트레스, 부담감 등이 아이에 대한 과도한 애착관계로 변질되어 나타났다고 진단한다. 그 근저에는 자기 증오와 자기 연민이라는 양가적 감정이 깔려 있어 문제는 좀 더 복잡해진다.


괴물 부모는 단지 교사들만 괴롭히는 게 아니다. 과잉보호, 과잉 간섭, 과잉 통제 아래서 자란 아이들에게는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들은 상처받기 쉬운, 그리고 부모가 결정해 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인간이 되거나, 부모에 대한 강한 원망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당연히 괴물 부모는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교사를 괴롭힌다. 별 시답지 않은 꼬투리로 자신과 같은 또 다른 새끼 괴물 부모들을 결집해 담임교사를 몰아내려 하거나, 학교 현장에 분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확인하려는 병적 욕구를 드러내거나 하는 모습은 글로만 읽어도 끔찍하다.




결론부에서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대책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 문제를 단순히 교사 개인이 입는 피해 정도로 생각하지 말고, 사회적 고발이 이루어져야 하는 문제임을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 일본의 경우 이 주제로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하는데,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더 글로리”라는 드라마가 학교폭력에 대한 경계심과 대책마련의 여론을 불러온 것과 비슷한 모양이었나 보다.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애초의 원인을 제거하거나 개선하는 일이 필수다. 그런데 이 괴물 부모의 문제의 배경에는 산업화 이후의 우리 역사와 문화가 전반적으로 개입되어 있는지라 더 풀기 어려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일이라는 건 당장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는 거고, 교사들의 희생을 더 이상 우리 사회가 그냥 넘겨서는 안 되는 상황이기도 하니까.


전형적인 저개발국가의 공통점 중 하나는 교사나 경찰 같은 사회밀착형 공무원들의 처우가 굉장히 낮다는 점이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도 교사에 지원하는 학생들의 숫자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고, 일부 교대의 경우 미달 사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은 기초교육의 질을 더욱 떨어뜨리고, 다시 교육에 대한 불신을 높여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할 것이다. 이제 어서 좀 본격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텐데... 지금까지 하는 걸 보면 이 정부에서는 별 기대가 되지 않는다는 게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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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대남은 동네북이 되었나 -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대한민국 이대남 보고서
이선옥 지음 / 담담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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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갔다가 제목이 눈길을 끌어서 집으로 데려온 책이다. 20대 남성을 뜻하는 이대남이라는 표현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듣기 힘들지만, 어느 순간부터 언론기사에 종종 등장하더니 이제는 익숙한 말이 되어버렸다. 이대남에 관한 일반적인 인상은 젊지만 정치적으로는 보수성향이 강하고, 자기들만의 공정 개념에 빠져서 여기저기를 치받는 어린 것들 정도?


책 제목에도 이런 일반적인 인상이 드러난다. “동네북”이라는 용어다. 여기에는 “모두의 공격을 받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으니까. 분명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들을 거슬려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동시에 “동네북”이라는 표현에는 이들이 억울한 공격을 받고 있다는 뉘앙스도 담겨 있다. 저자는 다분히 이런 의식을 갖고 이대남에 가해지는 “억울한” 비판을 방어하며, 그들이 왜 이런 성향을 갖게 되었는지를 변호하려고 이 책을 썼다.




책 제목에도 들어가고 분명 여러 차례 이대남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지만, 정작 책은 이대남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정의조차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 단어가 그냥 일부 언론이나 호사가가 만들어 낸 단어이기 때문에 그 기준 같은 게 모호한 데가 있다. 대충 따져도 10년의 나이 격차가 있는 한 쪽 성별에 속한 모든 사람이 하나같이 같은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건 무리다.


그래도 분명 이런 성향을 띠는 사람들이 있는 건 분명하니, 저자는 일단 이 부분을 전제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듯하다. 책의 첫머리에서 저자는 “이대남”의 탄생은 일종의 반응이었으며, 그들을 향한 페미니즘 진영의 가시돋힌 독설과 편견이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자연히 이 책은 이대남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그들을 매도하는, 나아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페미니즘(과 정체성 정치, PC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데 집중한다.


정체성 정치나 PC주의의 기저에 깔린 교만과 혐오 코드의 위험성, 그리고 오늘날 주류가 되어버린 남성혐오주의적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책의 내용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을 하며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페미니즘에 대한 거친 공격적 표현들은 한편으로 저자의 주장에 대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읽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이쪽이 좀 더 우세적인 포지션이었다.




총평을 하자면 저자의 주장에 타당한 점이 많이 있다. 선동과 혐오에 기초한 오늘날 주류 페미니즘이 일으키는 문제를 조곤조곤 지적하는 부분은 귀담아 들을 만한 내용이 많다. 관련 내용은 앞서 오세라비나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책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던 내용이긴 했다.


다만 페미니즘 사이의 차이를 전혀 무시하는 측면이라든지 하는 몇몇 부분은 저자의 주장이 좀 지나치다 싶다. 뭐 애초에 이 책이 논문이나 사회학 연구서보다는 대중적인 성격을 좀 더 강하게 띠고 있긴 하지만.


또, 책 제목에도 이대남이라는 단어가 큼직하게 쓰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책에서 이대남을 분석하는 내용은 정교하지 못하다. 그저 모든 건 페미니스트들의 만행 때문이라는 단순한 내용만 보인다. 이 점 역시 아쉬운 부분.




비단 페미니즘 뿐 아니라 어떤 사상이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릴 때 사람들은 쉽게 이성적인 판단 대신 맹목적인 신종을 택하곤 한다. 당연히 그 과정에서 희생자들이 속출하고, 다양한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한 때는 평등을 주장했던 많은 사상들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는지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자주 목격하곤 한다.


다양한 가치와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어울려 살면서 서로의 차이를 조율, 타협해 나가며 함께 발전해 나가는 것이 민주사회의 최상의 모습이라면, 그저 상대를 깎아내리거나 상대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은 그 안에서 자리를 배정받아서는 안 된다. 이런 차원에서 우리가 무비판적으로 옳은 것으로 여기고 있는 생각들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 끊임없이 자문하는 일은 중요하다. 사람에 따라 이 책에 실린 내용이 불편할 수도 있지만, 여기에 담긴 비판을 그저 무시하며 자기 주장만 하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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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걸어가면 길이 됩니다
파울로 프레이리 외 지음, 프락시스 옮김 / 아침이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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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페다고지』로 유명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루 프레이리와 1930년대 “하이랜더” 성인교육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던 마일스 호튼의 대화집이다. 두 사람 모두 교육과 관련된 일로 유명한 인물인지라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는 교육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의 성장기라든지 하는 개인적인 일화도 등장한다.


프레이리에 대해서는 그가 쓴 책을 앞서 몇 권 읽어본 적이 있는지라 대략적으로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호튼에 대해서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 알게 된 내용이 많았다(여전히 내 지식은 얕다). 그가 시작했던 “하이랜더”는 흑인들의 문해교육을 하기 위해 시작한 학교 밖 교실이었다.


당시 미국 테네시주는 투표권자 등록을 위해 글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는데, 이 때문에 많은 수의 흑인들과 노동자들은 투표에 참여할 수 없었다. 호튼과 그의 동료들은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기 위한 교실을 열었는데, 이 때 그 교육의 이념은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 사람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었다. 전문가가 나서서 무엇인가를 가르치려고 하는 대신, 배우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도록 하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자연스럽게 함께 학습해 나가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프레이리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프레이리 역시 체제를 강화하기만 하는 공교육의 방식과 내용에 반대하며 조금은 다른 방식의 교육을 꿈꾸던 사람이었으니까. 예컨대 프레이리는 “공부란 사랑과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정해진 수업 시간표에 따라서 학습을 요구받는 행위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사랑에는 시간표가 있을 수 없”으니까(58).




가르치는 사람이 전문가의 권위를 덧입은 채, 일방적으로 무엇인가를 주입하려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학교와 학원,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모습이 발견되지 않던가. 하지만 우리는 대단이 있느냐며, 현재의 방식을 그냥 되풀이할 뿐이다.


물론 여기엔 현재 권력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의 권력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심리도 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해서 교수가 되었는데, 내가 어떻게 해서 이런 저런 전문가가 되었는데 하는 식의. 문제는 이런 식의 테크노크라시가 지나치게 확산되면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일을 소수의 몇몇 기술관료들이 멋대로 결정하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는 점이다. 요컨대 각종 세금이 줄줄 새는 건 소수의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큰 이권이 걸린 일들을 결정해 버리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공론화라는 작업이 좀 더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다. 단순한 여론 조사와 달리 조금 더 깊이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일을 결정하겠다는 건데, 여기에도 반발이 적지 않다. 재판 과정에 일반인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일을 우리나라 법조계에서는 여전히 극렬하게 반대한다. 지난 정부 때 원자력발전소를 계속 지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두고 일반 시민들을 모아 공론화 위원회를 만들어 의사를 물었던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도 자칭 원자력 전문가들이 나서서 그 사람들이 복잡한 원자력 발전의 개념에 대해 뭘 안다고 결정을 하느냐는 식으로 꼰대짓을 했었다. 정작 그 일로 영향을 받는 건 그 “아는 게 없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인데도.




호튼과 프레이리가 제안하는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분명 대규모 인원을 대상으로 표준적인 교육과정을 만들어 평균적인 수준의 지식 주입으로 필요한 노동자를 양산하겠다는 산업화 시대의 교육모델과는 크게 다르다. 노조운동이니, 시민운동이니 하는 반발은 산업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독재적 정권에게도 눈엣가시였을 게 분명하고.


하지만 이미 정보화사회로 넘어가고, 인공지능이 사람이 하던 수많은 일들을 대신하게 될 미래가 코앞에 다가와 있는 지금, 여전히 그런 과거의 교육 패러다임에만 매몰되어 있는 건 분명 문제가 아닐까. 어쩌면 이 시대에는 스스로 배울거리를 찾아나서고, 탐구하는, 진정한 공부가 무엇인지 알게 해주어야 한다는 이 두 사람의 주장이 더욱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이미 이곳저곳에서 공교육이 흔들리고 무너지고 있다는 뉴스들이 들려온 지 오래다. 이제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 상황이란 말인데, 우리는 좀 새로운 길로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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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워드로 읽는 불평등 사회 - 사회학자에게 듣는 한국사회 불안을 이기는 법
조형근 지음 / 소동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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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을 얼마 앞두고 요새 유튜브나 신문, 방송 등에서 이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가짜 정보들이 나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예전에도 종편채널에서는 꽤나 편향된 거짓 주장들을 한 트럭씩 실어 나르긴 했지만, 요샌 소위 공영방송이라는 데까지 그런 식의 정보로 오염되고 있다. 그 분야도 다양해서, 정치 영역은 물론, 경제, 사회,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한다.


사회가 복잡해지고, 지식의 수준이 고도화 되면서 우리는 어떤 영역을 한 눈에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게 어려워졌다. 다양한 매체들에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중 일부를 떼어다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하고 해서 전달하기 마련인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꽤 높은 빈도로 왜곡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그게 실수나 능력의 한계라면 또 그럴 수도 있지 하겠지만, 문제는 다분히 의도가 뻔히 보인다는 점이다.


아마도 이 책은 우리가 가진 다양한 영역의 지식 사이사이에 박혀 있던 편견이나 선입관을 줄이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MBC의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고정적으로 출연해 나누었던 주제와 대화들을 엮은 책이다. 물론 여기에도 문제를 이해하는 저자의 관점이 들어가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적어도 우리가 클릭 몇 번으로 얻은 수준의 지식보다는 좀 더 균형이 잡혀 있으니까.




가장 자주 소개되는 건 경제 영역이다. 상속세, 경자유전 원칙, 기본소득, 최저임금, 공공임대 주택, 공매도, 주식에서의 차등의결권 등 나름 우리 사회의 핫한 주제들이 다양하게 망라되어 있다. 관련 주제들에 대해 어느 정도 상식적인 이해를 하고 싶다면 한 번 읽어볼 만한 일.


이외에도 차별금지법이나 난민 문제, 사실적시 명예훼손죄 같은 사회적 이슈들도 다루는데, 몇몇은 서로 다른 토막에서 반복적으로 보인다. 그만큼 저자가 관심이 있는 주제라는 의미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진보적 관점을 띄고 있는데, 그건 워낙 그동안 소위 보수지에서 관련 주제에 관한 헛소문을 많이 퍼뜨려놨기 때문에 교정차원에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소위 진보적 주장만 강요하는 건 물론 아니다. 대부분의 사안에 관해서 다양한 정보를 제시한 뒤 함께 고민해 나가야 할 문제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또, 의사협회의 자율규제라는 주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찬성 쪽에 가까운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읽고 나면 또 그런 면도 있겠구나 싶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제대로 된 지식을 얻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단편적인 정보를 모아 편향된 관점을 담은 영상들이 수두룩해서, 요샌 그런 쪽은 추천이 뜰 때마다 아예 “채널 추천 안함” 버튼을 누르곤 한다. 대개 시선을 끌기 위해 누군가를 폄하하거나 특정한 대상에 대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게 메인이어서 보고 나면 기분도 썩 좋지 않다.


여전히 이런 책들의 쓰임이 있다는 말이다. 다양한 주제들을 간단하게 정리했지만, 그 깊이가 아주 얕지는 않으니 분명 도움이 될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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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컨슈머 -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
J. B. 매키넌 지음, 김하현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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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책의 장르나 내용에 대한 예상이 틀렸다. “소비하지 않는 소비자들이 온다”는 부제 때문이기도 했는데, 애초에 짐작하기로는 현실 경제에서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상황을 경제학, 혹은 경영학 차원에서 분석한 내용일 줄 알았다. 물론 그런 내용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 책은 디컨슈머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우리더러 디컨슈머가 되어야 한다는 일종의 당위를 어필하는 사회학에 가까운 책이었다.

 

그리고 살짝 당황했던 또 하나의 포인트는 이 책을 낸 출판사가 “문학동네”라는 것. 내가 아는 그 “문학동네”가 맞는 건가? 뭐 “문학동네”에서 늘 문학만 내라는 법은 없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발견한 출판사명을 보고 살짝 웃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이 책은 “당위”를 주장한다. 우리는 지금 하는 것처럼 소비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지나치게 많이 소비하고 있어서, 더 이상 지구의 환경과 자원이 버틸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뭐 이 부분은 직관적으로도 쉽게 짐작이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문제는 오늘날 대다수의 사회가 선택한 경제구조가 이런 과소비를 바탕으로 쌓아올려져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소비가 GDP(물론 이 의심스러운 계산수치는 여러 비판을 받고 있다)를 올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누가 남의 집 유리창을 깨고, 지나가던 사람을 칼로 찌르고, 키우던 반려동물을 잔혹하게 죽인다고 해도 GDP는 올라간다. 그 때마다 우리는 새 유리창을 사고, 치료에 필요한 도구들을 구입하고, 새로운 동물을 살 테니까.

 

저자 역시 이런 우려들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동의한다. 분명 디컨슈머가 늘어나면 경제는 침체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고, 그들의 삶의 질이 떨어질 것은 자명하다. 하지만 그게 꼭 나쁘기만 하지는 않을 거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물론 경제의 성장률은 지금보다 떨어지겠지만, 사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성장률은 거의 0에 수렴했었다. 우리는 그래도 살 수 있었다는 말이다.

 

뿐만 아니라 소비에 중독된 채 불태워버리던 시간이, 이제는 좀 다른 일들을 하는데 사용될 수도 있다.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잇고, 우리의 생활에 여유를 더해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전망이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볼 여지도 있지만.

 



 

어지간히 소비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는, 당장 이 책의 조언처럼 소비를 줄인다면 꽤나 불편함을 느낄 것이다. 열 개가 넘는 화장품을 화장대에 놓고 쓰고 있다면, 옷장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많은 옷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늘 입을 게 없다고 푸념을 하고 있다면, 한 번만 보고 책장에 꽂아둔 책들이 20권이 넘어간다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이런 개인적인 불편함을 넘어 역시 관건은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축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신성한 권위”를 부정할 수 있는가 일 것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나는 이 책의 제안이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지지와 동참을 이끌어내기엔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탐욕은 이상적인 계획을 쉽게 좌절시킨다는 게 그동안의 역사가 아니었는가. 탐욕을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여기는 천박한 사상이 지배하고 있는 세상에서, 과연 무엇인가 달라질 여지가 있을까.

 

아마도 곧 다가올 기후위기도, 우리나라의 치명적인 인구감소도, 전 세계적인 청년층의 박탈감과 일탈도, 우리는 막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티핑 포인트를 넘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와서, 어쩔 수 없이 이제까지의 삶을 방식을 바꿔야만 하는 때가 온다면, 어쩌면 그 때는 디컨슈머로서 살 수 있게 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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