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
애슐리 도슨 지음, 추선영 옮김 / 두번째테제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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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하루에도 100여 종의 생명체가 멸종되고 있다고 말한다이게 정확한 수치일까 의심부터 든다일 년이면 36,500종의 생물이 멸종된다는 얘기고, 10년이면 어림잡아 36만 종이 멸종된다는 말이다이런 속도로 멸종하면 지구에 있는 모든 생물종이 곧 사라지는 건 아닐까?


     그러면 지구상에 총 몇 종의 생물이 있을까찾아보니 보고된 것만 150만 종이라고 한다그러면 정말 큰 일 아닌가? 5년 후에 지구상의 모든 생물종이 사라진다는 말이니까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라아직 발견(보고)되지 않은 게 최소 1000만 종에서 많게는 1억 종까지 있을 거라는 추정이다그러면 지구상의 모든 종이 멸종할 때까지 최소 300년에서 3천 년 정도가 걸린다물론 지금처럼 하루에 100종씩 멸종을 계속하고새로운 종이 만들어지지(분류되거나 발견되지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이 별 거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하루에 100종이라니... 그래도 엄청난 수가 아닌가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의문이 든다그렇게 많은 수가 멸종하는데왜 우리는 그걸 실감하지 못할까.


     첫 번째 가능한 이론은 멸종되는 생물이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만 살고 있다는 것이다오늘날처럼 전 세계가 이어져있고정보가 공개되는 시대에 좀처럼 가능할 것 같지 않다또 하나의 이론이 있어야 하는데그 이라는 게 매우 미시적인 구분으로애초에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환경에만 적응 가능했던 소규모 무리혹은 매우 작은 특징으로 나뉘는 학문적 성격의 구분이었다는 설명이다.


     아마도 진실은 두 번째 이론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매일 100종이 넘게 멸종된다는 말은 듣는 사람에게 확실히 위기감을 안겨주지만그 말을 들었을 대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런 그림과 실제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물론 그런 좁은 범위에 사는 적은 수의 개체 종들을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니다다만 만약 앞서 한 추정이 옳다면그 적은 수의 종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복잡하거나(각각에 맞는 대책을 세워야 하니최소한 하루에 100개의 계획을 세우고 실천해야 한다), 아주 단순하다(지금부터 환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행위를 모두 중단하면 된다).


     그러나 어느 쪽에 생각하는 일에 비해실천하는 건 어려워 보인다. 1년에 36만 개 종을 보호하는 계획을 실현하는 건 너무 복잡해 보이고(이 정도로 민감한 종들이라면 하나를 보호하기 위한 어느 행동으로 인해 다른 둘이 멸종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당장에 우리의 삶을 중단하는 것도 적절치 않아 보인다.


     그런데 저자는 내가 보기에 이 두 번째 방법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다책은 이 대규모 멸종의 원인으로 인간을문명을제국을그리고 나중엔 자본주의를 지목한다지나치게 단순한 도식이 실제 벌어지는 일을 제대로 반영하는지도 모르겠고문제의 원인을 이렇게 지목하면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너무 좁아진다.


     당장에 문명을 파괴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고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급격한 다운사이징(Downsizing)을 통해 지금 누리고 있는 많은 문명의 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당연히 이 계획에 얼마나 동참할지 모르겠다우리가 자동차를스마트폰을인터넷망을 포기할 수 있을까?

 


     저자가 말하는 환경정의를 추구하는 광범위한 반자본주의 운동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인지는 의심스럽다환경을 파괴하는 북반구의 선진국들이 재정을 내서 남반구에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결론부에 위치해 있지만어떻게 그 재정을 분배할 것이고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을지어떻게 선진국들로부터 그 재원을 얻어낼지는 불분명하다당장에 저개발국가들에서 코로나로 매일 수만 명씩 쓰러져 죽어가지만 선진국들은 백신을 독점한 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 게 현실 아닌가.


     심지어 그렇게 해도 앞서 말한 하루 100종의 멸종을 막을 수는 없을 것 같다사실 멸종되어가는 100종에 관한 이야기는 책의 중후반으로 가면 더 이상 등장하지도 않는다.(저자도 그리 관심을 두지 않는 이야기를 이 리뷰 초반에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대책이 있어야 비판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너무 큰 이야기도식적이기만 한 구조비판에 매몰되다보면 외곬만 보이게 되고타협과 협상의 여지가 사라진다당연히 실제적 문제해결로부터도 멀어질 테고그리고 환경정의를 추구하는 광범위한 반자본주의 운동이란 듣기만 해도 좀 무시무시하지 않은가이 반자본주의 운동이 하루에 몇 개의 종의 멸종을 막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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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만만해지는 책 - 한 번 배우고 평생 써먹는 숫자 감각 기르기
브라이언 W. 커니핸 지음, 양병찬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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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숫자에 약하다는 말을 많이 하곤 한다물론 그 중에서도 나는 좀 중증이라서한 공간에 몇 명쯤 와 있는지내 방 책장 하나에 책이 몇 권이나 꽂혀 있는지우리 집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편의점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대충이라도’ 말을 하지 못하는 편이다.

 


     이 책의 저자 브라이언 커니핸은 나처럼 숫자에 어두운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우선 저자는 어려워 보인다고 해서 숫자를 외면하면 안 된다고 충고한다대체로 숫자들은 우리에게 뭔가를 팔아먹거나우리가 특정한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다잘못된 숫자혹은 숫자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우리에게 결과적으로 큰 손해가 될 수 있다.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대략적인 계산만 할 줄 알아도 숫자의 세계에서 큰 손해를 입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이 책 전반에 걸쳐 저자는 어림수와 간단한 사칙연산을 통해서 계산을 직접 해보라고 권한다물론 필요할 때마다 정확한 수치를 찾아보거나 할 수도 있지만, 10~20% 정도의 오차를 내는 어림계산만 있어도 일상을 살아가는 데 큰 문제는 피해갈 수 있다는 것.


     책은 숫자가 어려워지지 않게 만드는 다양한 팁을 제공해 준다지나치게 큰 숫자를 대할 때는 피부에 와 닿는 좀 더 작은 단위로 쪼개서 생각해 보고부피와 길이넓이를 나타내는 단위들을 정확하게 구분하고(이건 제곱세제곱으로 숫자가 늘어날 수 있으니 특히 조심해야 한다), 통계나 그래프를 읽을 때는 기준점이나 단위수치의 왜곡이 일어나지 않는지 살펴야 하고.

 


     조금은 뻔해 보이는 이야기들이긴 하지만워낙에 숫자를 가지고 장난을 치는 얼치기 기자들이 널려있는 시대에한 번쯤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들이다정확한 인과관계나 규모에 대한 이해 없이 누군가가 과장을 섞어혹은 왜곡해 전달하는 말만 듣고 견해를 갖기 일쑤인 정보과잉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메모지 한 장을 펴놓고 간단한 계산을 하는 연습부터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책에서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는 미국식 숫자 셈법 자체가 꽤 혼동하기 쉽겠구나 하는 점이었다밀리언(million)과 빌리언(billion), 트릴리언(trillion) 같은 단위들은 각각 천 배씩의 차이를 내는 단위인데꽤나 유명한 신문이나 잡지들에서도 이를 혼동해 엄청난 오보를 내는 실 예가 수두룩하다반면 만 배씩의 차이를 내는 억경 같은 단위를 사용하는 우리들은 이 정도의 착오는 좀 적지 않나 싶기도 하고.(이게 우리 기자들이 특별히 계산에 밝기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막연한 인상비평과 가짜뉴스에 우르르 휩쓸리는 일이 잦은 오늘날이런 기본을 강조하는 이야기들이 좀 더 귀하게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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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상상력 - 기후위기와 불평등의 시대, 정치란 무엇인가
김병권 지음 / 이상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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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의당의 정책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는 저자가 우리나라 진보정치세력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무엇인지 짚어보는 책이다. 1장과 2장은 각각 디지털 플랫폼 경제와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탄소중립 정책을 살펴보는 실제적인 주제를 다루는 장이고, 3장과 4장은 좀 더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플랫폼 사업과 관련된 노동자들의 상황을 분석하는 1장이 가장 인상적이다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수준으로 일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다는 편의성어차피 남는 시간남는 공간남는 차량 등을 나누면서 자원절약도 실천할 수 있다는 등등 좋은 이야기들로 포장되어 있지만실제로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실태는 그리 좋지 못하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플랫폼 노동자들이 법적으로 노동자로서의 지위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기업의 인력 운용형태가 기존에 법으로 규제를 받고 있던 기업들과 다르기에즉 법의 사각지대에서 장사를 하고 있기에 벌어지는 문제다그렇다면 저자의 말처럼얼른 새로운 기업형태에 맞는 노동관계법을 제정하면 될 일인데기득권 정당들은 좀처럼 이런 문제에 앞장서 나서지 않는다어떤 형태든 내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를 받는다면 노동이라고 인정하면 될 일을 말이다.


     1장 후반부의 블록체인을 이용한 가상화폐 문제를 다루는 부분도 흥미롭다분권적이이라서 중앙의 힘이 좌지우지할 수 없는 기술로 홍보되었던 블록체인과 가상화폐가 실제 운용에 있어서는 굉장히 중앙집권적이라는 지적은 새롭다.


     비트코인의 전 세계 채굴양의 90%를 상위 10대 업체가 독점하고 있고그 중 3개의 중국업체가 50%를 점유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가? 0.0001%의 블록을 형성해 거래처리를 할 때까지 99.9999%의 사용자들은 기다려야 하고그 소수가 어떤 사람의 트래젝션을 처리해 줄지는 전적으로 그들 마음이라는 부분도 그렇고결국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전 세계적인 투기판만 열렸을 뿐실제로 우리 삶을 변화시킬 만한 내용은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기후 위기에 대한 해법을 설명하는 중 이런 내용이 있다저자는 미래 공상 영화에 나온 것처럼 어마어마한 기계들과 빽빽한 철골 건물지상을 넘어 하늘까지 뒤덮은 자동차와 비행기의 모습은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그런 미래는 지금보다 수십 배의 에너지와 자원이 없으면 구축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후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결국 화석연료의 사용을 중단하고 태양열 등의 친자연적 에너지를 사용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하지만 저자 역시 인정하듯이런 에너지는 그 효율이 매우 낮기 때문에 화려한 미래는커녕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수준의 편의성도 보장하지 못할 가능성이 다분하다결국 끝없는 팽창을 추구하는 현재의 생산활동을 절제하고노동시간조차 단축하면서(주 15시간 노동제좀 더 (경쟁이라는 측면에서) ‘느슨한 사회를 꿈꾸는 듯하다.


     문제는 과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 하는 점이 아닐까 싶은데... 과연 인류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편리함을 기꺼이 내어놓고 친환경적 삶을 따라 살려고 할까당장 스마트폰과 인터넷자가용을 포기할 수 있을까이런 상황에서 어떤 정치세력이 이 일에 앞장서서 실현할 수 있을지.


     그리고 책에는 언급되지 않지만그 친환경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적지 않은 에너지와태양열 패널 폐기물 같은 문제들이 확실하게 해결되지 않는 한어떤 것도 근본적으로 친환경적이지는 못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진보세력이 나아가야 할 철학적사상적 미래를 설명하는 책의 후반부는 확실히 집중도가 떨어진다.(이 책을 받은 장혜영 의원이 목차와 1장을 보고 답을 했던 이유가 이거였을까몇 페이지 되지 않는 지면에 하나의 사상을 담아낸다는 일이 쉬운 일도 아니고그렇다고 설명이 흥미롭지도 않다.


     현재 우리나라의 여당과 제1야당이 모두 기득권에 사로잡혀 있다는 레토릭은 지겹게 반복되어온 내용이고그럼 진보정당은 어떻게 자신의 입장을 현재의 제도권 안에서 관철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방법론은 잘 보이지 않는다심지어 저자는 점진적’ 변화를 넘어서는 대개혁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말이다.


     여기에 진보라는 그릇에 담아내려고 하는 재료가 너무 많다는 생각도 사라지지 않는다. “노동조합실업자들불안정 노동자들여성주의자들생태주의자들반제국주의자들사회민주주의자들민주적 사회주의자들까지 모두 포괄하는게 진보의 미래인가. LGTB와 기후위기청년문제는 진보의 미래에서 같은 무게를 가지는 걸까애초에 섞이지 않는 이질적인 생각들이 그저 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진보의 열차의 같은 칸에 끼워 넣어진 건 아닌지 모르겠다이들 사이에는 철학적 충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정치적 진보 섹터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사람이 알고 있어야 할 내용들을 나름 잘 담아낸 책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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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고뇌의 땅 레바논에 서다
노엄 촘스키 외 지음, 강주헌.유자화 옮김 / 시대의창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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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저명한 진보적 학자이자 사회운동가인 노엄 촘스키가 지난 2006년 레바논을 여드레 동안 방문한 후 그에 관한 기록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책 표지에도 촘스키의 얼굴이 크게 박혀 있고제목에도 그러하니 책의 내용이 촘스키의 생각으로 채워져있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총 12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그가 직접 강연이나 원고의 형태로혹은 인터뷰로 목소리를 낸 것은 네 개 장(2, 3, 4, 7)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다른 필사들의 글로 채워져 있다물론 그 내용도 읽어볼 만한 내용들이긴 했지만살짝 아쉬운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촘스키가 이 여행을 감행한 2006년은팔레스타인 자치구역에서 실시된 선거에서 그 동안 대()이스라엘 무력투쟁에 앞장서던 하마스가 집권당으로 선택을 받은 해이다이스라엘과 미국은 이를 위협으로 여겼고자치정부 안의 내분을 조장하는 동시에 팔레스타인 자치구역인 가자 지구에 대한 무력공격을 개시한다이 때문에 발생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바로 북쪽에 인접한 레바논으로 쏟아져 들어가게 되었고이스라엘은 이것이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국경지대의 안정을 해친다는 명분으로 레바논까지 전격적으로 침공한다.


     이 책은 이스라엘의 이 무력공격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주민들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입혔는지(이 책에서 촘스키 이외의 필자들이 쓴 글은 대개 이 주제를 담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윤리적인 전쟁을 용인하고나아가 지원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룬다.


     석유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니는 미국과그런 미국에 의존해 중동에서의 대리인으로 행동하는(그러면서 마치 미국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던 일을 지역 단위에서 저지르는이스라엘의 모습이 인상을 찌푸리게 한다.

 


     폭격으로 무너진 집과 죽은 가족들을 두고 괴로워하는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의 아이들의 얼굴을 앞에 두고는어떤 거창하고 숭고한 전쟁의 명분도 힘을 잃는다. 물론 하마스며헤즈볼라며 하는 단체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크게 내기 위해 테러를 일삼았던 것은 사실이다하지만 촘스키는 바로 이 지점에서그러니까 그들 테러 조직원만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인종과 민족혹은 지역주민들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논리로 폭력과 무력행사를 하는 건 정확히 테러리즘의 논리라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큰 피해가 일어나는 상황에서는누가 먼저 잘못했고누구의 잘못이 더 크고 하는 걸 따지는 게 무의미해진다아무렴 어떤가앞으로 더 큰 피해와 문제를 일으킬 텐데물론 실제 정치와 외교에서는 온갖 폼을 잡다가 엄청난 피해를 서로 입은 후마지 못하는 식으로 합의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일반인들은 고위 공무원들이나 외교관들이 엄청나게 탁월한 식견과 전략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곤 하지만언제나 실제의 현실은 광고에 나오는 것처럼 빛나지도매끄럽지도 못한 법이다.

 


     촘스키가 방문을 했던 레바논(헤즈볼라)-이스라엘 전쟁은 결국 이스라엘군의 철수로 끝났지만여전히 레바논은 안정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얼마 전 일어났던 베이루트시의 대규모 폭발사고도 사고지만다양한 문화적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레바논이라는 나라의 독특한 정치구조도 한 몫을 했던 것 같다시리아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라는 (이유는 다르지만조금은 버거운 이웃들을 둔 것도 있고.


     책을 다 읽고 나서도레바논에 어떤 빛이 비출 수 있을까 떠오르지 않는다극도로 현실주의적인 국제 외교전에서 약소국의 미래는 늘 이렇게 불안하고 걱정된다이미 UN도 강대국들의 이권 다툼의 장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고그 반대급부로 지역별 블록이 강화되면서 최소한의 기사도적 용기와 명예를 기대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해져버렸고이들은또 우리는 이런 시대를 잘 살아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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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에 없는 언어 - 생각보다 헌법은 구체적입니다
정관영 지음 / 오월의봄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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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학을 공부하고 한동안 법과 관련된 정부기관에서 일하기도 했던 저자가왠지 추상적인 문구로 잔뜩 쓰여서 우리의 일상과 직접 관계가 없을 것 같은 헌법을 살펴보면서그 적절한 적용에 관한 고민을 담은 책그렇다고 학술적 성격의 글은 아니고세상의 이런저런 사건들을 인용하면서 쉽게 풀어낸에세이에 가깝다.

 


     서문에서 저자는 헌법정신이라는 것을 부정한다그것이 구체적인 논거를 제시하지 않고구렁이 담 넘어가듯 자기 생각이 헌법 정신에 부합한다는 식의 아전인수격 해석을 하는 데 단골로 사용되는 용어이기 때문이다사실 세종시로의 수도이전을 경국대전과 관습헌법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들어 저지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으로 전 국민이 진작 확실히 알게 되었지만.


     저자는 이 책에서 헌법의 조항들을 우리 현실의 삶으로 가지고 내려오는 작업을 시도한다강원랜드 채용비리조교를 성추행한 교수한 항공사의 비행기 조종사의 턱수염 금지 조항 등 뉴스에 한 번씩 나와서 들어봤을 만한 사건의 판결들을 되짚어 보면서 헌법에 보장된 인권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게 하는 1부로 시작해헌법으로도 보장된 노동 3권이 실제 법정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을 주로 다루고 있는 2다양한 형태의 소수자 차별과 평등의 문제를 다루는 3부가 이어진다책의 마지막 부분인 4부에서는 헌법에 규정된 시민들의 여러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이를 실제로 뒷받침할 수 있는 법률이 제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언젠가 법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으로부터 우리나라 헌법이 참 잘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상식에 맞지 않는 판결들이 왜 이렇게 많으냐는 내 푸념에 대한 대답이었다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헌법을 만들 때외국의 좋은 점들을 대폭 수용해서 꽤 준수하게 만들어졌다는 것.


     그런데 책에도 나오지만우리의 실제 생활 속에서는 그렇게 헌법이라는 게 크게 와 닿지 않는다가끔 헌법소원 같은 얘기들이 나올 때나 언급되지일반적으로는 규범적이라기보다는 이상적이고일종의 목표 정도로만 여겨지는 게 사실이다그런데 정말 헌법에는 좋은 내용들이 많았다문제는 그게 국민들의 실제 삶에 제대로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책 가운데 그런 내용이 있다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사용자들은 노동자들에게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다수억에서 수 십 억 원의 돈이 노동자들 개인에게 있을 리 없고(사장들은 다들 자기들 같은 줄 아는가 보지만이 압박감은 종종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만든다그런데 회사에 엄청난 손해를 끼친 사용자에게 그런 징벌적 배상금을 물렸다거나소비자가 기업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 그 금액이 높았다거나 하는 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문제는 헌법에 노동권은 보장되어 있어도사용주의 횡령권은 보장되어 있지 않은데도법원이 엉터리 법리를 동원해 사실상 헌법을 사문화시키고 있다는 것.


     결국 헌법을 제대로 실현하려면 그에 맞는 조금 더 정교한 법률들이 필요하다고 저자도 말한다그러려면 국회가 열심히 일을 해야 하는데우리나라에는 그런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사람이 300명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게 정설인지라... 국민 개개이니 헌법에 정통해서자신의 권리를 충분히 주장할 수 있게 되는 일을 바라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지만당장 먹고 살기에도 바쁜 사람들에게 법 공부까지 하라는 사회에 정상은 아닐 테니까.


     결국 책을 다 읽고 나면뭔지 모를 허탈감허무함이 들 뿐이다헌법에 규정된 충분한 정도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현실은 들춰보았지만지금 할 수 있는 마땅한 일이 떠오르지는 않는다물론 그렇다고 한없이 덮어둘 수만도 없는 일이지만...

 


     초반에 실린 글들은 조금 현학적으로 느껴졌다법의 언어보다는 문학의 언어 느낌이 많이 든다후반부에 가면 이 부분은 조금 나아지긴 한다다양한 주제들을 담고 있다 보니 일부 내용에서는 조금 다른 생각들을 하게 된다.


     예컨대 지나가듯 서문에서 언급되는 낙태문제와 관련해 저자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보장하는 것이 인권보장의 당연한 결과처럼 설명하지만그건 태아를 생명으로 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또 다른 도전을 마주할 수 있다자기결정권과 생명권 중 어떤 부분이 더 무겁게 다뤄져야 할까물론 이에 대해 반대하는 헌재의 소수의견에 사용된 행동에 대한 책임 운운하는 논리에는 나도 동의하기 어렵긴 하다.


     소수자 우대정책과 관련된 논란 중 일부에서는피해를 받는 사람과 정책으로 인해 수레를 받을 사람 사이의 불일치라는 작지 않은 문제가 잇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비판이 차별받았던 집단의 개별 구성원 모두가 우대를 받아야 정책이 정당화된다는 관점에 기초했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히 반박될 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하지만 이 반박은 별로 논리적이지 않은데비판자들은 피해를 받은 사람에게 보상을 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정의의 원리를 상기시키는 것이고저자의 반박은 이런 원리의 훼손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엄청나게 새로운 인사이트를 준다고 말하기는 조금 어려웠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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