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권력 - 혼돈의 시대를 헤쳐가기 위한 정치학 수업
나다 이나다 지음, 송태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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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자신의 반이 좀처럼 단합되지 않는다는 고민을 가지고 정신과의사인 를 찾아온 학생 ‘A'와의 대화를 통해 권위란 무엇인지, 권력이란 어떤 것인지를 탐구해나가는 책. 마치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떠올리는 진행방식으로, ’는 직접 대답을 해 주는 대신 질문을 통해 ’A‘가 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일본 저자가 쓴 심리학, 철학 비스무리한 책들에는 이런 구조가 자주 보인다.

 

     처음 A는 자신의 반 동료들이 단합되지 않는 것은 권위가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내 는 권위와 권력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로 논지를 이어간다. 대충 정리하자면 권위란 내적인 불안이 동인이 되어 어떤 인물이나 대상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하는 것이고, 권력은 외적인 불안이 좀 더 큰 이유가 된다. , 힘으로 상대방을 따르도록 만드는 것.

 

     이렇게 보면 권력은 좀 더 폭력적이고, 권위는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감화력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는 권위든, 권력이든 어린 아이 시기를 지난 성숙한 인간에게는 부정적인 것이라고 여긴다.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주면 성숙한 판단을 스스로도 내릴 수 있을 텐데, 그런 것들을 다 생각하지 않고 그저 권위에 의존해서 선택하려는 우를 범한다는 것. 그리고 많은 경우 권위에 의존하다보면 문제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어버린다고 덧붙인다.

     그럼 결론은 무엇일까? 개개인이 서로 다른 생각과 취향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을 일치단결시키려는 시도 자체가 문제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단결이 아닌 조화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자발적인 판단과 결정에 의해 전체적으로앞으로 나아가는 상태. 물론 이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느리더라도 (어쩌면 불능하더라도) 이게 옳다면 그렇게 가야지.

 

 

2. 감상평 。。。。。。。

     이런 식의 대화식 구성의 특징은, 나도 모르게 책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다는 점이다. 질문을 하는 쪽에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된달까. 그의 질문은 꼭 내가 궁금한 것을 묻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대화 자체도 저자에 의해 구성된 것인 만큼, 한 발 떨어져서 보면 저자의 주장이 보이고, 이에 대한 비판적 사유도 가능해진다.

 

     책을 한 번 다 읽고 다시 읽으면서 퍼뜩 드는 생각은 저자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기초한 권위관, 권력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일체의 권위나 권력의 존재의 타당성을 부정한다.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권위와 권력을 인정하는 것은 의존적인 모습이자(78), 불안에 굴복한 결과이(85), 이는 어린 아이에게나 어울리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장은 과연 옳을까? 여기서 현재의 인류는 홀로 설 수 있는 성숙한 상태라는 자신감(혹은 교만한)이 엿보이는데, 과연 우리는 그렇게 성숙한상태일까? 그리고 그 성숙함은 무엇이, 혹은 누가 인정하는 것인가(어떤 권위에서 나오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 그대로 여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절대성을 부정하고 나면 당연히 남는 건 파편화된 개인들뿐이다. 저자는 이를 조화라는 주제로 다시 한 데 묶으려 하고, 그 방법으로는 사실을 제대로 설명해주기만 하면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예컨대 교통질서를 지키는 이유는 그것이 전적으로 합리적인 규칙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179). 여기서 저자는 합리성이 권위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무엇이라고 여기는 듯하지만, 이 또한 입증되지 않은 주장일 뿐이다. 오히려 난 인간이란 아무에게도 비난이나 처벌을 받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규칙을 깨고 악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소위 특권층들이 보이는 수준 이하의 언행을 보면,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 안에 떠오르는 악한 충동들을 보면.

 

 

     저자는 권위와 권위의식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생각을 이어나간다. 책에서 권위가 가지는 문제점으로 꼽는 것들은 대개 권위주의가 낳는 부작용들로 보인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좋은 것들도 그것이 하나의 주의(sim)'으로 절대화되는 순간 급격히 성격이 변해버린다. 대개의 경우 특정한 공간과 시간, 영역에서 제한적으로 긍정적 의의와 기능을 가지는 법인데, 그것을 범위를 벗어나 모든 영역에서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순간 삐걱거림이 시작되는 것이다.(예컨대 평등의 평등주의화가 그렇다)

 

     책이 쓰였던 6~70년대 일본의 정치상황에서는 권위주의 정부의 부작용과 그에 대항하는 강한 극좌투쟁들도 있었으니, 이 책에 실린 것과 같은 권위주의에 대한 강경한 경계심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다. 이 부분은 여전히 권위주의적 잔재가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도 충분히 새겨 읽을 만한 부분이다.

 

     다만 인간은 좋게 설명해준다고 해서 다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정의나 선, 아름다운 같은 것들은 그저 합의나 조화, 합리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짜 권위를 가진 존재가 존재한다면, 그 존재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하는 것이야 말로 합리적인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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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 혐오에서 연대로
오세라비 지음 / 좁쌀한알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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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미니즘이라는 일종의 사회운동이 시작된 지는 수십 년 이상이 되었다지만,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귀에 이 명칭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건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인 듯하다. 처음 간략히 그 이름과 개념을 들었을 때는 자연스럽게 동조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성들이 느끼는 상대적인 박탈감은 분명히 존재하는 듯했고, 단순히 성별을 이유로 차별을 하는 건 불공평한 일이라는 건 잠깐만 생각해봐도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 언론에 등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사고와 행동들을 보면서 의아한 생각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단지 충분한 논리적 사고가 부족한 것을 넘어(예컨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화장을 하지 않는 것이 여성해방의 대단한 증거인 양 생각하며 강요하는 것이나 소위 미러링이라는 행태의 옹호 같은), 상당수의 주장들이 증오와 혐오 같은 파괴적 감정에 매어있는 듯했기 때문이다.(단순히 허세나 허언증에 근거한 거짓말 같은 건 그냥 넘어가자)

     물론 어떤페미니스트들이 이상한 짓을 한다고 해서 모든 페미니스트가 욕을 먹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즘의 역사나 현실에 대한 전반적 이해가 떨어지는 상황에서 페미니즘은 ~~’라는 식의 사고는 가능한 하지 않으려 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부분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 페미니즘의 역사와 우리나라 페미니즘의 발전 양상, 다양한 페미니즘 내의 조류 가운데 최근 물의를 일으키는 이들은 어디쯤에 서 있는지, 그리고 어떤 식으로 발전적 극복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제안까지 실려 있다.

 

 

     저자가 꼽고 있는 현재의 극단주의적 페미니즘(분리주의 페미니즘, 레즈비언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그것이 (남성 일반에 대한) 혐오 위에 세워져 있다는 점이다. 소위 미러링이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남성을 조롱하거나 괴롭히는 행위를 당당히 표현하고, 이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것’, ‘그렇게 해야 마땅한 것정도로 변호하는 일련의 행위는 분명 비논리적이다. 어떤 남성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이 때 부당한 대우는 꼭 자신이 받지 않은 것이라 해도 상관이 없다) 모든 남성을 공격한다는 논리는, 내가 새똥을 머리에 맞았으니 지구상의 모든 새들을 다 죽여야 한다는 황당한 생각과 비슷하다. 우선은 주장의 방향이 잘못되었고, 최소한의 비례성이나 대칭성조차 갖추지 못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극단주의적 페미니즘에서는 모든 여성의 피해자와, 그리고 모든 남성의 (잠재적) 가해자화, 문화적 검열, 남녀의 분리 같은 다양한 문제들이 보인다. 저자는 그 이유를 우리나라의 페미니즘이 1970년대 미국의 극단주의적(그리고 백인 여성 중심적) 페미니즘을 그대로 수입한 후 별다른 발전 없이 교조주의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분명 서로 상황이 다르고,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50년 전 이해(대표적으로 이미 사실상 희미해진 가부장제 철폐 구호다)에 머물고 있다는 것

 

     단지 일부의 문제인 줄 알았던 것들이 그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확실히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다. 애초에 건강하지 못한 세계관 위에 세워진 구호와 행동들은 태생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기 어렵다. 여성들만을 위한 세계나 여성우월주의, 여성이 하면 모든 게 만사형통이라는 관점은 엉터리 판타지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이런 상황에까지 오게 된 걸까? 저자는 우리나라 페미니즘을 이끌고 있는 이들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그 해답을 찾아간다. 우선 다양한 여성할당제도를 통해 권력에 손쉽게 진출하려는 명망가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예컨대 한국여성단체연합의 대표가 되면 여야 정당의 비례대표를 통해 거의 당연하다시피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권력을 쥐어주는 현재의 구조를 그다지 바꿀 이유가 없다. ,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글과 강연을 통해 수익을 얻는 직업 페미니스트도 있다. 이들 역시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갈등을 마다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정작 지지와 도움이 필요한 대다수 여성들의 상황의 개선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남성을 적으로 돌리고 증오와 혐오를 통해 자기들끼리 킥킥대는 행동이 도움이 필요한 어린 미혼모의 지원이나 가난한 여성 노인문제, 여성 노동자들의 처우개선(특히 이 부분은 애초에 페미니즘 운동의 목적이기도 했다)에 어떤 도움을 제공해왔는가?

 

     저자는 여성우월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중심으로 한 휴머니즘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남성과 여성은 적이 아니라 함께 인간적인 대우를 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관계다. 하나의 성이 다른 성을 지배하는 식이 아니라, 함께 연대하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극히 당연하고 타당한 주장이 반가워지는 현실은 분명 뭔가 문제가 있지 않을까.

 

 

      문장들은 쉽게 읽힌다. 가능하면 어려운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고, 쉽게, 문제가 되는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려고 하는 노력이 보인다. 다만 비슷한 내용이 몇 번씩 반복되는 경향이 있고, 문제가 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조금은 추상적이고 구호에 그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일단 책이 문제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문제를 정확히 설명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니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할 부분이다.

 

페미니즘 사상에 깊이 물든 젊은 여성들 대다수가 대학 교육 혜택을 받으며 과거 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급진 페미니즘이 성장할 자양분이 부족한 셈이다. 하지만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성향은 상대적 박탈감을 제어하지 못한다.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이들은 급진적 페미니즘에 쉽게 빠져들었다. - P6

우리 사회가 진일보하려면 메갈리아식 극혐은 지탄받아야 한다. 일베가 비난받듯 메갈리아도 비난받아야 한다. 메갈리아가 일베의 혐오에 미러링으로 되돌려줬다 해서 좌파 진영이 메갈리안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 더 나아가 부추김은 전적으로 옳지 못하다. 혐오를 넘어 연대로 나아가야 한다. - P21

상층부 엘리트 지식인들이 남성 혐오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한 데 대한 피해 계층은 이른바 수많은 이름 없는 흙수저 남성들이다. 또한, 급진적 페미니즘 전성시대의 피해 계층은 주로 흙수저 여성들이다.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사회적 약자층으로 남성 혐오가 심하면 심할수록 먼저 희생양이 된다. 급진적 페미니즘이 성 권력에 주목하면 할수록 보통 여성들의 삶과는 동떨어지게 된다. - P60

대다수 여성들의 삶을 위한 제도 개선과는 거리가 먼 여성단체 상층부 인사들의 의회 입성 관문으로 전락한 것이 여성 할당제다. 여성이 정치권의 소수이고 사회적 약자라는 명분을 내세워 여성 할당제를 악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것이 남성 역차별을 일으키지는 않는지 진지하게 돌아봐야 할 문제다. - P171

여자 대학생들은 페미니즘이라는 보호막이 자신들을 안전하게 해주리라는 착각을 한다. 여성단체가 압력을 넣어 갖가지 여성 전용 제도를 만들어주면 여기에 환호한다. 페미니즘이란 이렇듯 여성들을 사회적 약자, 신체적 약자라는 틀 속에 가두어버린다. -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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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없다 - 문제는 불평등이 아니라 빈곤이다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안규남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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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언젠가부터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중요한 사회문제처럼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그 평등의 당위성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이 책의 저자인 해리 G. 프랭크퍼트는 경제적 평등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저자도 지적하듯, 평등을 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현실적 조건과 부합하고 자신의 이해관계와 필요를 가장 적절하게 실현해줄 수 있는 것보다는 타인들이 가진 것에 기초해 자신의 요구를 계산하는 데 더 애를 쓰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에게 실제로 무엇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은 무엇을 갖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동안(우리의 시선이 온전히 다른 사람에게만 맞춰져 있는 동안), 정작 자신의 진정한 꿈이나 목표가 사라지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92-93). 결국 이런 차원에서 경제적 평등의 도덕적 중요성을 과장하는 것은 (자기) 소외를 초래한다(22).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완전한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소수의 상류층이 국가 전체의 부에서 자신이 잘사는 데 필요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몫을 가져간다는 점에서, 매우 부유한 사람들은 일종의 경제적 과식이라는 죄를 짓고 있다고 말한다(15). 물론 경제적 불평등은 가능한 극복되어야 할 문제다. 하지만 그 이유는 경제적 평등이 (일종의 정언명령처럼)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여러 종류의 불의한 불평등을(예컨대 미국의 선거제도는 돈이 많은 이들에게 유리한 체제를 만들어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일으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저자는 입법, 사업, 행정적 감시를 통해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통제해야 한다고까지 말한다(8).

 

      다만 문제의 본질은 경제적 불평등이 아니라 어떤 이들이 겪고 있는 불충분함에 있다. 우리는 왜 극빈층의 삶을 보며 마음이 괴로워질까? 그들이 생존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자원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상대적 양의 차이가 아니라 절대적 질의 결여다. 가난한 사람들이 나보다 경제적 자원을 적게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너무 적게 갖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48-49).

 

      기계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것은 종종 역효과를 가져온다. 예건대 생존하는 데 5단위의 자원이 필요한 사람이 열 명이 있는데 자원의 총합은 40이라면, 모두가 평등하게 4단위씩을 분배받아 다 함께 죽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까?(물론 나머지 사람들을 위해 누가 희생해야 하는가 하는 건 또 다른 질문이다)

 

      이사야 벌린은 평등에는 아무런 이유도 필요 없고 불평등에만 이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자는 평등에도 이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각 사람의 사정이 저마다 다른 상황에서 차등적 분배는 존중(그 한 사람에게 맞는대우이기 때문에)의 표현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평등주의에 도덕적 당위를 부여함으로써 오히려 사회적, 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복잡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생존에) 충분한경제적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인데 말이다.

 

 

2. 감상평 。。。。。。。

     흔히 자유와 함께 핵심적인 가치로서 평등을 꼽곤 한다. 우리는 평등이라는 가치에 일종의 도덕적 당위를 부여하려고도 한다. 물론 정서적으로는 그렇게 볼만한 여지가 있다. 깨끗한 식수가 없어 더러운 웅덩이의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아프리카의 병약한 어린이의 모습을 보면 누구나 비슷한 마음이 들지 않던가.

 

      하지만 이 책은 그 정서의 영역을 좀 더 세심하게 분석한다. 우리가 그런 마음을 품게 되는 것은 그들이 평등하지 못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충분한 수준의 경제적 자원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적은 경제적 자원을 갖는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수준의 분노나 죄책감을 갖게 되지는 않는다. 관건은 충분성이라는 부분이다.

 

     물론 평등의 추구가 일부 이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평등 자체를 절대적으로 달성해야 할 무엇으로 여기고 집착할 경우 부작용이 적지 않다.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사실 평등주의는 달성하기가 불가능한 목표이기도 하다. 자원을 평등하게 분배하는데 어떤 기준을 사용할 것인지, 이를 위해 필요한 행정적 소요는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이며, 나아가 이와 관련된 정치적 다툼까지...

 

 

     평등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라 일종의 도구적 가치라고 하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만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느 정도까지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산을 허물어 구덩이를 메운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다. 애초에 만족도와 추구하는 삶의 목표가 다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똑같이만들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이런 평등주의에 대한 몰입이 경제적인 영역을 넘어 다양한 사회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이론이 경제와 각종 문화, 역사의 영역에까지 절대적인 원리인 양 통용되는 것처럼(이건 마치 암석을 연구한 결과를 가지고 고양이의 습성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수준의 교육을 하는 건 타당하지도, 현명하지도 않은 생각이다(단일작물재배는 하나의 병충해에 의해 전멸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또 기여한 공로와 관계없는 평등한 보상은 감정적으로도 적절치 못하다(친일파와 독립운동가에게는 다른 보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자원을 임의로 분배할 수 있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있지도 않고, 그러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물론 모두가 누리고 남을 만큼 충분한 자원이 존재해서 똑같이 나누더라도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 기계적 평등의 강요는 오히려 더 시급한 문제를 가릴 수 있다는 데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과도한 이상주의는 현실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만들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주제를 존중과 연결시키는 지점도 흥미롭다. 경제적 정의는 개개인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추구되어야 하는 가치여야 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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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9-05-13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평등은 절대적 가치가 아니다‘라는 말에 공감이 갑니다. 한 번 읽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책입니다.

노란가방 2019-05-13 13:14   좋아요 0 | URL
네. 생각하면서 읽어볼 만한 책인 듯 합니다.
 
지정학 - 지금 세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파스칼 보니파스 지음, 최린 옮김 / 가디언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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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1부에서는 지정학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을 다양한 학자들의 주장과 그 개념에 대한 역사적 변천에 관해 다룬다. 나치즘에서 적극적으로 지정학을 이용했기에 한동안 이 용어 자체가 터부시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그 인식이 바뀌고 있다. 지정학적 관점으로 문제를 본다는 것은 상황을 한두 개의 당사 국가들 사이의 갈등이나 협력으로가 아니라 좀 더 넓은 시야로, 역사, 지리학, 사회학, , 경제, 정치학 등의 다양한 분야의 렌즈를 통해 종합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부에서는 테러리즘, 핵무기, 지구 온난화 같은 이 시대의 문제를 지정학적으로 읽어내고 설명하고, 3부에서는 좀 더 제한된 범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들(크림반도를 두고 벌어지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갈등이란, 중국과 대만, 한반도, 티베트 등)에 관한 설명이다. 4부와 5부는 일종의 미래예측인데, 4부는 현재까지의 지정학적 분석에 기초해 현재의 패권 국가들의 힘이 장래에도 유지될 수 있을지를 주로 다루고, 5부는 좀 더 일반적인 차원에서의 예측들을 담고 있다.

 

 

2. 감상평 。。。。。。。

     일단 띠지에 붙어 있는 책에 관한 설명만 보면 남북미 정상회담, 일본의 초계기 도발과 같은 민감한 상황에 대한 뛰어난 식견(탁월한 지정학적 분석?) 같은 내용이 실려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우선 지정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설명도 다양한 학자들의 주장이 늘어져 있을 뿐 두 번을 반복해 읽어도 명쾌하게 정리되는 느낌이 없다. ‘그래서 지정학이 정확히 뭔데?’ 같은 물음이 사라지지 않는...

     자연히 세계의 크고 작은 문제들을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정확히 어떤 게 지정학적 분석인지 모르겠다. (설마 이미 내가 지정학적 분석에 너무 익숙해져서 새로운 게 보이지 않았던 걸까?) 물론 일부 내용들, 예를 들면 크림반도를 두고 벌어지는 충돌이나 카슈미르에 얽힌 복잡한 역사 같은 항목에서는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많은 경우 익히 다른 신문기사나 책들을 통해 접했던 수준을 넘어서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우선 다양한 내용을 담으려다보니 각각의 항목에 할애할 수 있는 분량이 대여섯 페이지 정도로 짧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싶다.(정작 일본 초계기 문제는 언급도 되지 않고...) 딱 대중교양서적의 한계처럼도 보인다. 다양한 정보를 간략하게 간추려 놓았다는 데서 의의를 찾는. 뭐 요새처럼 다양한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에서 굳이 책 한 권에 모든 내용을 자세히 써 넣을 필요도 없고. 그래도 최근의 국제정세를 전반적으로 살피는 데는 나름 쏠쏠한 재미도 있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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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트 제국의 몰락 - 엘리트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집대성한 엘리트 신화의 탄생과 종말
미하엘 하르트만 지음, 이덕임 옮김 / 북라이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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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책은 소위 엘리트들의 특권의식을 드러내는 것으로 시작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상류층에서 시작한 그들은 보통 사람들과 다른 윤리관을 갖고 있다. 조세 회피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가며 막대한 금액을 탈세하고도 그게 무슨 잘못이냐는 투의 대응(나아가 세금 제도에 대한 공격으로도 이어진다)을 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저자는 정부와 기업 고위층 간의 회전문인사, 고급사립학교(엘리트 학교)를 통한 배타적인 사회적 출발선 획득, 인재선발에 있어서의 같은 배경을 지닌 이들의 선발 등을 통해 엘리트를 위한 구조가 형성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구조를 강화하기 위해 정부의 각종 정책들(특히 세금 정책)을 입맛에 맞게 조정함으로써 이런 구조는 더욱 공고화된다.

     그렇게 특권층을 위한 구조가 강화될수록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진다. 엘리트층을 감싸고 있는 벽은 더욱 단단해지고, 또한 그들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일반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행을 남발하는 것도 다 그런 특권의 벽 안에 갇혀 지내기 때문이다.

     저자는 문제의 해결을 정치에서 찾는다. 미국의 샌더스나 영국의 코빈 같은 정치인들을 예로 들면서, 좀 더 선명한 대중을 위한 정치 비전을 제시하고, 아래로부터의 지지를 끌어 모을 때 근본적인 개혁이 가능하다는 것.

 

 

2. 감상평 。。。。。。。

     몇 년 전에 서울대 로스쿨에 다니는 학생들과 작은 모임을 한 적이 있다. 모임의 목적인 공부만이 아니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나눌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주제가 리걸 마인드라는 것이었다. 이게 공식적으로는 법률적 사고 같은 법조인에게 필요한 요소지만, 이게 또 이면으로는 법조계에 몸을 담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하는 논리라는 뜻도 있다.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받는 사건에 대한 판결이 전혀 상식적이지 않은 것 같을 때, 등장하는 표현이다. 많은 경우 그 사람들이 뭔가 대가를 위해서 그런 판단을 내렸다기보다는, 리걸 마인드에 따르면 그게 전혀 이상한 게 아니라는 식.

 

 

     책은 이런 그들만의 리그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강화되고 있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한다. 토마 피케티가 미국의 예를 자세하게 분석했던 것처럼, 이 책의 저자는 독일의 예를 분석하는데 그 결과는 굉장히 유사하다. 최상층에 해당하는 이들이 전체 부의 증가 중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격차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그만큼 중요하고 많은 일들을 해 내느냐 또 그건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분석이다.

     예컨대 엄청난 돈을 연봉으로 받아가는 기업의 최상층부에 대한 비판이 일어날 때, 그들 덕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갖고 경제효과를 유발시키는 줄 아느냐는 반론이 나오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고용을 창출하기 위해서 기업을 경영하는 게 아니다. 최대한 돈을 뽑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인원을 고용하고 있는 것일 뿐.

 

 

     최근 유럽 이곳저곳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우파 대중영합주의가 엘리트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반감에 기초해 있다는 분석은 흥미롭다. 단순한 좌파 우파식의 구분만으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일반적으로 부유층에 대한 옹호는 우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니까) 부분인데, 확실히 유럽 연구자다보니 이 부분을 좀 더 실제적으로 보고 있구나 싶었다.

     어쩌면 이런 분석의 틀이 우리나라의 우파 대중영합주의(소위 태극기 부대 같은)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도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이쪽이 공격하는 건 엘리트가 아니라 자신보다 약한 이들이고, 오히려 핏줄로 이어지는 수령에게 대대로 충성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쪽이니 썩 잘 들어맞지는 않을 것 같다.

 

     ​사실 현실에 대한 비판이나 분석은 이미 많은 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부분이다.(경제학적 분석 쪽은 피케티 쪽이 좀 더 충실하고, 철학적 분석의 깊이와 통찰은 샌델 쪽이 더 마음에 든다) 관건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하는 부분일 텐데, 저자는 선명한 좌파적 정책들을 도입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다만 좀 강성으로 보이는 코빈이나 원내 지지기반이 거의 없는 무소속 정치인 샌더스가 기대했던 성과를 거둘 수 있을까는 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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