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행우주 - 우리가 알고 싶은 우주에 대한 모든 것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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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다시 도전한 물리학 책. 뭐 그래봤자 대중교양서로 쓰인 책이라 아주 전문적인 내용은 아니다(그렇다고 내용이 쉽다는 뜻은 아니고). 책 제목에 “평행우주”라고 떡하니 써 있지만, 다짜고짜 이 이야기를 할 수는 없는 법, 책의 1부는 우주의 발생과 현재에 이르기까지 익숙한 우주론에 관한 설명을 담고 있다.


뉴턴의 고전역학에 기초한 과학은 초기설정값만 알면 앞으로 진행될 모든 일들을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는 기계론적 우주관(일종의 숙명론, 예정론과도 비슷하다)을 가지고 있었다. 이건 뉴턴의 이론에 (어떤 의미에서) 창의적인 파괴를 이뤄낸 아인슈타인에게서도 발견되는 태도였다. 시간과 공간마저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던 아인슈타인도 우주에 절대적인 실재와 진리가 있다는 주장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놈의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모든 게 흔들렸다. 어떤 원자의 물리적 위치와 운동값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그래서 우리는 모든 걸 확률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이 기발한 주장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기존의 주장을 완전히 폐기시키고 말았다. 물리적 최소단위인 양자의 세계에서는 이곳과 저곳에 동시에 존재하는 일도, 이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저쪽에 빛보다 빠르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 더 이상 세상은 기계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우리는 뉴턴의 고전역학이 통하는 것처럼 살고 있다. 사과는 여전히 나무에서 땅으로 떨어지고, 우리는 그걸 중력이라고 부른다. 공을 던지면 저쪽으로 날아가지 던진 반대방향으로 날아가는 걸 볼 수는 없다. 물은 한 번 쏟아지면 다시 컵으로 담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그렇게 될 확률이 다른 사건이 일어날 확률보다 무지막지하게 크기 때문일 뿐이다. 우주의 어딘 가에서는 아래로 떨어져 깨진 컵이 다시 식탁 위로 올라와 원래대로 복구되는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말(실제로 일어난다는 뜻과는 좀 다르다).





아무튼 이 양자역학을 파고들다 보니 좀 더 큰 그림도 보이기 시작했다. 우주에는 크게 네 가지 힘(중력, 전자기력, 강한 핵력, 약한 핵력)이 있는데, 이 중 나머지 세 개는 서로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지만, 그 중 가장 약한 중력은 도무지 다른 것과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를 도무지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이 네 가지 힘의 상호관계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것의 이론”이야 말로 물리학자들의 성배와 같은 목표다.


그런데 양자역학이 여기에 뭔가 실마리를 던져주는 듯하다. 다만 이 주장을 따라가려면 세상이 10차원이나 11차원쯤으로 되어 있다는 가정이 강력하게 필요하다(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건 현재로서는 검증할 수 없는 주장이지만, 일단 그렇게 가정하고 보면 꽤 많은 난제들이 풀리는 걸 보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느냐는 입장이 꽤 있는 듯하다.


그리고 이 어딘가에서 평행우주라는 개념이 나온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어떤 양자는 동시에 이곳에도, 저곳에서, 아니 아예 우주 전체에 존재할 수 있다. 사람이 그걸 관찰하는 순간 하나의 위치값을 갖게 되는 거니까. 그런데 이게 도무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그래서 사람들이 꺼낸 것이 평행우주론이다. 양자는 그것을 관찰하는 순간,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자리가 실현되는 다양한 우주로 분화된다는 설명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이 오렌지를 먹는 순간, 오렌지를 먹지 않는 또 하나의 가능성이 실현되는 우주가 이 우주와 독립적으로 생겨난다는 거다.(쉽지 않다)





사실 비슷한 내용의(그리고 두께의) 책을 앞서 두 권 정도 읽어봤기에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다. 또 책이 출판된 게 지금으로부터 벌써 20년 가까이 지났기에, 그동안 또 새롭게 발견된 사항들은 당연히 반영되지 않았다(물론 물리학계에서 최근 20년 동안 판을 바꿀 결정적인 뭔가가 등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책 제목에 평행우주라는 이야기가 떡 박혀 있으니, 이 쪽에 관해 좀 더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겠다 싶었다. 이 부분은 또 어느 정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고.


물리학계 일각에서 우주를 이해하는 데 있어 ‘의식’의 중요성을 주장한다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양자역학에서는 관찰자가 대상을 볼 때 비로소 그 정확한 위치값이 확정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우주의 다양한 요소들이 실제로 그 자리에 있으려면 누군가 그것을 의식해야만 하지 않느냐는 취지다. 물론 이 주장이 저자를 포함한 자연주의자들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꽤 신선한 내용이지 않은가. 왠지 오래 전 라이프니츠의 신적 조화 같은 것도 떠오르고.


주류 물리학자들에 의하면 이 우주는 언젠가 끝장이 나고 말 운명이다(사실 이건 성경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 대책으로 다른 우주로의 이주 같은 개념도 나오는가 보다. 다만 이런 주장은 아직은 그냥 아이디어쯤에 불과하고 아주 진지한 건 아니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운 건, 우주에 별다른 섭리나 인간의 존재 자체의 필연성 따위도 전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저자의 태도다. 그건 과연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일까.


확실히 어려운 면이 있다. 그래도 한 번 기분전환을 했으니, 이제 다시 인문학의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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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04-21 0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 나랑 똑 닮은 도플갱어는 평행우주에서 우리세계로 떨어진 또다른 내가 아닐까 싶네요
 
예술을 소유하는 새로운 방법 - NFT로 만나는 예술과 콘텐츠의 미래
박제정 지음 / 리마인드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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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도서관의 블라인드 이벤트로 골라온 책이다. 책을 포장지에 싸서 표지를 볼 수 없게 하고, 간단한 소개글 한 문장만 보고 대출을 하는 이벤트였는데, 나름 흥미로운 시도였다. 영화 블라인드 시사회와 비슷한 느낌이랄까. 참고로 이 책에는 “디지털 예술 혁명 소유를 넘어 가치의 공유로”라는 묵직한 단어들이 잔뜩 나열된 소개글이 달려 있었다.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듯, 이 책은 최근 유행 중인 미술품의 NFT화(化)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NFT란 Non-Fungible Token의 줄임말이라고 하는데, 풀이하면 대체불가능한 토큰이라는 뜻이다. 토큰하면 우리 세대는 어린 시절 잠시 본 적도 있을 텐데, 버스 탈 때 가운데 구멍이 뚫린 금속재질의 동전 비슷한 것을 기리 킨다. 일일이 몇백 몇 십원 하는 식으로 돈을 내기 번거로우니 사전에 그 금액에 해당하는 토큰을 구입해 한 개씩 내는 식이다. 토큰이란 화폐 대용으로 사용하는 무엇을 가리킨다.


이 기술은 또 다른 최신 기술인 블록체인을 바탕으로 한다. 기본적으로 이 개념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온라인상에서 어떤 데이터를 나타내고 사용하려면 그것을 저장하는 공간이 필요하다. 소위 서버를 구축해야 한다는 말인데, 기존에는 그 데이터를 관리하는 주체가 직접 서버공간을 만들어서 저장하고 관리를 해야만 했다면, 블록체인은 이 작업을 그 데이터에 연결된 모든 사람에게 분산시켜 저장하고 관리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이게 뭐가 좋은가 하면 기존 방식에서는 소위 해킹의 위협이라는 게 늘 존재한다. 그리고 한 번 뚫리면 그 안의 데이터가 유출되어 개인정보라든지 중요한 데이터값의 임의적 수정이라든지 하는 피해가 생긴다. 하지만 블록체인에서는 애초에 이 해킹이 불가능에 가까운데, 어떤 데이터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그 네트워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데이터를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체불가능한 토큰” 같은 개념도 만들어질 수 있는 것.





최근에는 예술품도 이런 NFT로 만드는 시도가 있다. 저자는 이런 시도가 가져올 수많은 장점들을 이 작은 책에 가득 채운다. 일단 NFT화된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 굳이 무거운 분위기의 미술관 같은 데를 갈 필요가 없으니 개인의 인적 정보를 노출해야 하는 불편함이 없고, 예술가들은 각종 수수료(판매, 경매 과정의)를 떼지 않고 직접 작품을 판매할 수 있으며, 구매자도 작품을 보관하기 위한 환경(온도와 습도 관리 등등)을 애써 구축할 필요 없이 언제나 온라인에만 접속하면 볼 수 있어서(?) 편하다. 여기에 그 토큰을 구입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커뮤니티가 작가들과 자유롭게 소통할 수도 있고, 자신이 구입한 작품의 작가를 홍보하는 서포터즈가 될 수도 있다는 내용도 보인다.


아무튼 여러 면에서 좋다는 말인데, 책을 읽으면서 정작 중요한 내용이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술작품을 NFT로 구입(소유)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인 걸까? 물론 책 후반에는 이와 관련된 기술적인 내용이 약간 실려 있지만, 정작 실제적인 묘사가 부족하다. 그건 어떤 작품의 이미지를 다운로드 받아서 모니터로 볼 수 있다는 것일까? 다운로드 쪽은 좀 다르지만, 모니터를 통해(각종 증강현실 기기 등을 포함해) 볼 수 있다는 것은 맞는 내용인 듯하다. 과연 그게 실제로 그 작품 앞에 서는 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경험일까?


텔레비전 화면이 아무리 발달하고 기술이 좋아진다고 해서 직접 경기장에 가서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것과 같은 경험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AI가 어느 정도나 발전할지는 모르지만, 그 냄새와 바람과 옆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강한 아드레날린의 분출, 처음 본 사람들과 같은 것을 바라보며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게 되는 경험 같은 것들이 온전히 온라인으로, 디지털 기기로 재생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영양소가 포함된 알약을 삼키는 것으로 우호적인 교제와 함께 이루어지는 식탁을 대체할 수 없는 것처럼,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도 단순히 모니터를 바라보는 것과는 좀 다른 요소가 필요한 건 아닐까?


토큰 구매자들의 커뮤니티는 현재의 연예인 팬클럽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칫 그 안에서 작가에 대한 과도한 영향력 행사를 하려는 시도나 악플러들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고, 또 저자가 NFT의 장점으로 꼽는 것 중 하나인, 복잡한 공부가 없이도 좀 더 손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은 폐쇄적인 커뮤니티 안 “똑똑이”들로 인해 또 다른 꼰대문화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 현상에 관해 가장 우려 되는 부분은, 역시나 미술품의 NFT화와 그 거래라는 마당에서 벌어질 투기적 위험이다. 저자도 책에서 언급하고 있듯, 현재 이 바닥은 미술품의 감상과 공유보다는 돈을 벌 수 있는 마당이 열렸다는 식의 투기적 심리가 좀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이건 블록체인이라는 새로운 기술을 코인투기판으로 바꿔버린 앞서의 예를 봐도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저자가 예상하는 “예술을 소유하는 새로운 방법”은 “예술품으로 한탕 크게 버는 새로운 투기법”으로 전락할 지도 모르겠다. 저자도 이를 우려했던 듯, 새로운 좋은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덧붙이지만 여전히 우려가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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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을 듣는 법 - 듣는 형식과 표현하는 언어를 알면 감동이 더욱 커진다 음악의 즐거움 1
오카다 아케오 지음, 홍주영 옮김 / 끌레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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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모르는 게 있을 때 요새는 쉽게 구글링을 하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좀 더 진지하게 알고 싶을 땐 책을 찾아 읽는 편이다. 특히나 이번처럼 내가 전혀 모르는 문외의 영역인 경우 더더욱 괜찮은 책을 통해 기초를 닦아야겠단 생각이다. 도서관에서 가서 이 책을 골라 온 이유다. 제목부터가 (수영 할 줄도 모르면서 백과사전을 읽으며 수영에 관해 지식을 쌓은) 딱 나에게 맞아 보였다. “음악을 듣는 법”이라. 이 책을 읽으면 나도 클래식 음악을 좀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져왔다.


물론 그런 심미안은 한 번에 생기는 게 아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당장에 뭔가를 알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우선 책 자체가 시대별로 음악사를 훑어가면서 각각의 특징을 적어두는 식의 백과사전식 접근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일이란 무엇인지, 음악에 관해 말하는 건 또 무엇인지 하는 식으로 조금은 철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수많은 고전 시대 음악가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헤겔과 아도르노 같은 철학자들도 여기에 거들고 나선다. 아, 책 제목은 왠지 나 같은 사람에게도 친절해 보였으나, 저자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나 보다. 물론 가끔은 역사적 접근과 시대상황 같은 요소들을 언급해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최소한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애호가나 관련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좀 더 잘 어울릴 듯한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음악을 듣는 중 음악과 ‘공명’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소위 말해 감동이라든지, 뭔가 찌릿 하고 와 닿는 일들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뭔가 분명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걸 적절한 표현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만큼 답답한 것도 없다. 어떤 이들은 그냥 음악은 느끼면 된다고 나무랄 지도 모르지만, 사실 저자에 따르면 그런 식의 태도 또한 음악에 대한 하나의 사조/경향일 뿐이다.


저자는 음악을 하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하는 것’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에 참여하는 걸 말하고, ‘듣는 것’은 말 그대로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을 감사하는 걸 말한다. 그리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들은 음악에 관해 나름의 설명이나 해설, 감상을 하는 일을 말한다.


시대에 따라 이 일들은 서서히 분리되어 왔다. 18세기까지의 많은 곡들은 사람들이 직접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꼭 잘 사는 집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었고, 가족끼리 함께 연주하는 시간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브람스 이후의 오케스트라 음악은 너무 비대해져서 더 이상 아마추어들이 간단하게 연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일과 듣는 일이 분리된 것이다.


그렇게 음악이 전문가들의 일이 되어버리면서 보통의 애호가들은 이제 직접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길이 적어져버렸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종의 틈새 산업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주는 중재자, 즉 비평가들이 등장했다. 다시 한 번 음악에서 말하는 것이 떨어져 나온 이유다. 흥미로운 설명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특히 세 번째 요소인 ‘말하는 일’을 보통의 애호가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의 구조에 관해 간략한 설명을 하고, 음악에 대한 서로 다른 몇 가지 접근 방식을 제안해 주고, 마지막 장에서는 직접 뭔가 악기를 연습해 보고 말해볼 것을 권유도 한다.




확실히 음악은 우리 삶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다만 내 어린 시절이 그랬듯,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에서나 어린 시절부터 악기 연주를 배우고 관련 문화를 향유하고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난점(일찌감치 아버지 사업이 망한 우리 집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일단 어린 시절 그런 취향을 갖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도 음악에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이제라도 관심을 갖고 도전해 볼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다만 간만에 다시 좀 찾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뭘 몰라도 저자의 말처럼 어느 순간 나와 공명하는 지점을 발견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식을 찾아내고, 그러면서 조금씩 빠져들게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다만 이 일에는 이 책 말고 좀 다른 책의 도움이 또 필요할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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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떻게 과학의 팔을 비트는가 - 기후 낙관론에 맞선 세계적인 환경과학자의 폭로
루이스 지스카 지음, 김보은 옮김 / 한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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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꽤 인상적이다. 정치가 과학의 팔을 비튼다라... 대략 이 책에 정치권력에 의해 과학적 사안들이 어떻게 왜곡되는지가 잔뜩 소개될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제목이지만, 실은 책 내용의 대부분은 이산화탄소가 농업계에 미칠 영향에 관한 과학적 실험과 그에 근거한 전망들이다. 정치 비판보다는 과학 이야기, 그 중에서도 식물학, 농학에 가까운 책이다. 물론 책 후반에 약간 제목에 실린 종류의 비판이 실려 있기도 하다. 그 부분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말했듯이 이 책은 이산화탄소에 관한 내용이다. 어느 정도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산화탄소는 대표적인 온실가스 중 하나다. 물론 이보다 더 큰 효과를 내는 물질들도 있지만, 그 양에 있어서 이쪽이 압도적이다. 우리가 배출하는 탄소의 대부분이 이산화탄소의 형태니까.


그런데 또 한 편으로 이산화탄소는 식물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자원이기도 하다. 식물의 성장률을 높이는 요인에는 높은 온도와 적절한 양분, 그리고 충분한 이산화탄소가 포함된다. 쉽게 말해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면 식물이 더 빨리 자란다는 뜻이다.


식물이 빨리 자라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산화탄소의 증가가 꼭 나쁜 일만은 아닐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고. 실제로 미국 보수 정치계에서는 이런 식의 주장을 하면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중단시키려고 애쓰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그 뒤에는 화석연료로 돈을 버는 기업들의 막대한 로비가 있고.


책에서 저자는 이산화탄소가 식물의 성장을 빠르게 한다는 요인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디테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 빠른 성장을 하는 식물들 중에는 우리가 애써 기르는 곡물류만이 아니라 잡초도 포함되어 있기에(그리고 이것들이 더 빨리 자라기에, 그 방해를 받아) 전체적인 곡물생산량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고 말한다. 제초제를 쓰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높은 이산화탄소 수치는 농약에 대한 잡초의 저항력을 높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빨리 자란 식물이 생산하는 열매에는 몇몇 영양소들이 부족하자는 증거도 있고, 나아가 식물과 연관된 생태계의 좀 더 넓은 범위(곤충의 식생이라든지,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들이라든지)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문제를 단편적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말이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과학의 영역에 정치가 부적절하게 개입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우선 저자 자신부터가 25년 가까이 미국 농무부 소속의 과학자로 다양한 연구를 해 왔던 인물이다. 몇 번이나 언급되는 수치인데 1달러를 (연구비로) 투입해 10달러를 벌어들이는 나름 유익한 작업들을 해왔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연구가 보수 정치인들에게 후원금을 제공하는 기업들의 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예컨대 트럼프는 후원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기후위기 관련 예산을 대폭 줄였고, 국제적 노력에서도 탈퇴를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과학적 연구를 하는 기관들을 억압하기도 했고. 결국 약 50%의 연구자들이 사직을 했다고 하는데, 저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트럼프가 벌여놓은 난장판이 단지 미국에만 영향을 끼친다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미국이 가진 그 큰 국제적 영향력을 고려해 보면, 그건 거의 전 세계에 (악)영향을 끼친다. 책에는 그게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반(反)환경 기업들의 로비만을 언급하는데, 생각해 보면 결국 그런 광고와 헛소리에 넘어가 공화당에 표를 준 무식한 미국 농부들과 블루칼라 노동자들 탓도 있지 않을까.(물론 미국 민주당이 선이라는 뜻은 아니다.)


책이 거의 끝날 때 즈음에 재미있는 인터뷰가 하나 실려 있다. 한 농부와의 인터뷰였는데, 날씨가 극단적으로 변했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농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파종하기 알맞은 날이 줄었고, 폭풍과 홍수가 늘고 있다고. 다시 진행자가 전에 못 보던 잡초나 곤충, 식물병을 본 적이 있냐고 묻자 농부는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새로운 시설에 돈을 써야 하느냐는 질문에 농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진행자가 묻는다. 기후변화가 사실인 것 같냐고. 그러자 농부는 대답한다. “그럴리가요. 그건 앨 고어나 하는 말이죠.” 이런 수준의 유권자들이 있는 나라에서 제대로 된 환경정책이 나오긴 바라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이게 어디 미국에만 해당될까. 수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자기는 보수정당(그게 한나라당이었는지 새누리당이였는지 기억이 정확치는 않다. 하지만 뭐 그리 차이가 있겠는가. 그 자리에 자민당이나 나치당이 들어가도 별 위화감이 없는 인터뷰였는데)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꼭 찍을 거라고 했던 한 시장 상인의 인터뷰가 한동안 유명한 짤이 된 적이 있었다. 물론 진짜로 나라를 팔아먹으면 애초에 투표할 권한 따위도 없겠지만, 이런 수준의 무식한 시민들이 서식하는 환경에서 좋은 정치가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거의 일상적으로 정치인들을 깐다. 마치 정치인이 온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선거철 종종 목격할 수 있듯, 결국 그들은 시민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의 선택이 그들의 태도를 만든다. 그들의 오만함은 우리가 그들에게 굽실거렸기 때문이고, 그들의 당당함은 우리가 그들의 잘못에 눈을 감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범인은 바로 우리다.




과학을 다루다보니 어느 정도 전문적인 내용들, 그래프와 표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내용은 조금 미뤄두더라도 책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게 쓰였다. 하지만 바로 그런 과학적 실험 데이터가 이 책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부분이니, 너무 금방 넘기지 말고 잠시 머리에 담아두는 게 좋다. 사실 그래야 이 책에서 지적하는 기후위기부정론자들의 이산화탄소 드립을 이길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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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베르메르 베이식 아트 2.0
노르베르트 슈나이더 지음, 정재곤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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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나 예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눈에 들어오는 몇몇 화가들이 있긴 하다. 그 중 한 명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요하네스 베르메르다. 요하네스는 라틴어식 이름으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던 그는 아마 얀이라고 불렸을 게다.


사실 그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그림보다는 종교개혁이라는 특정한 시대와 연관해 그의 그림을 보여주는 책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그가 활동하던 17세기 유럽은 종교개혁과 그에 이어진 전쟁으로 시끄러웠고, 네덜란드 역시 가톨릭의 본산이었던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전쟁과 종교개혁(특히 칼뱅주의)가 연결되면서 이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네덜란드는 칼뱅주의에 기초한 정치적·사회적인 개혁에 나섰다. 대표적인 칼뱅주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카이퍼는 정치인으로 나서 반혁명당을 이끌고 수상에 오르기도 했으니 말이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가 베르메르의 작품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처음 봤던 그림은 유명한 “우유를 따르는 하녀”였는데, 여기엔 소명의식이 배어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베르메르의 작품들을 큼직한 도판과 함께 몇 가지 주제로 엮어 소개하는 내용이다. 일단 책의 판형 자체가 커서 그림도 크게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는데, 설명도 의외로 많고 자세하다. 마치 미술관에 가서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것처럼, 작품 속 다양한 도상들의 의미, 당대에 그런 사물이나 인물의 배치와 동작이 어떤 상징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들으며 그림을 보다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른다.


사실 한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챕터별로, 주제별로 명쾌하게 나눈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도 미술사 교수인 저자는 이 작업을 성실하게 해 냈는데, 덕분에 당대의 상황에 대해 조금은 입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저자가 그려내는 모습은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네덜란드의 상황이었다.


국가적으로는 엄격한 칼뱅주의식 개혁이 추진되었고, 따라서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금욕적이고 부지런한 삶을 칭송했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모습은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것들을 향한 열망도 있었다는 거. 특히 그의 그림에는 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 은근 또 다양하게 드러나는 점도 재미있다.


잠시 미술관에 다녀온 느낌을 준다. 가끔은 이렇게 머리를 식히는 느낌으로 하는 독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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