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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디모데후서 2장 20절)

며칠 전 역사적인 현직 대통령 탄핵 결정을 내린 후

지난 13일 퇴임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대행.

그 퇴임사의 말미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늘 함께 하여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대한민국과 헌법재판소를 위하여 늘 기도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기독교인인 이 전 대행이 출석하고 있는 교회가 바로 온누리교회란다.

(http://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52566)

여기서 몇 년 전 같은 교회 소속으로 총리 후보자가 되었다가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던 인물, 문창극씨가 떠오른다.

(정확히는 우리 교회 한 목사님이 지적하신 거다)

온누리교회 같은 대형교회에는

말 그대로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있다는 것.

바울의 말처럼, 큰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도 있고,

질그릇과 나무그릇도 있는 법.


흔히 대형교회 하면 온갖 문제의 진원지처럼 여겨지는 면이 있지만,

중요한 건 어떤 그릇들이 채워져있느냐지,

집의 크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 마지막 예비군 동원훈련 가서 금요일 저녁에야 돌아오겠네요.

    지긋지긋한 동원 6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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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녀가 권력은 잡은 것은

자신의 능력이나 자질, 혹은 업적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2.

그녀가 처음부터 권력의지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후 그녀는

자신이 잡은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3.

먼저 그는 인()의 장막을 치기로 합니다.

자신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바칠 수백 명의 사람들을 데리고

그녀는 자신의 주변을 지키기로 합니다.

 

4.

그녀는 모든 것을 뜯어 고치기로 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지워버리고

오직 자신의 기준에 따라 새로운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오랫동안 쌓아 올렸던 소중한 것들이 파괴되었습니다.

 

5.

당연히 그녀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녀는 반대파를 가차 없이 쳐내기 시작합니다.

약자를 지키기 위한 법조차도

그녀의 손에 들어가면 자신의 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렸습니다.

그녀는 아주 합법적으로,

가난한 이들의 것을 빼앗아 부유한 이에게 주었습니다.

 

6.

그녀를 섬기는 사람들 중에도

온전한 정신과 선한 의지를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의 위협에 잠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등장하는

한 유명한 악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이세벨이었습니다.

 

 

1)

페니키아(시돈)의 유력자의 딸이었던 그녀는

정략결혼으로 이스라엘의 왕후가 됩니다.(왕상 16:31)

 

2)

그녀는 자신에게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던

경건한 이들을 수없이 죽입니다.(왕상 18:4)

 

3)

그 수가 알려진 것만 해도 최소한 팔백오십 명의 측근들이

그녀를 지키고 있었습니다.(왕상 18:19)

 

4)

그녀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지켜왔던 신앙을 완전히 파괴하고,

자신의 신념을 강요했습니다.(왕상 16:32)

 

5)

그녀는 한 농부의 땅을 빼앗아 왕인 남편에게 선물합니다.

이 때 그녀가 이용한 것은 법이었습니다.(왕상 21:1-16)

 

6)

성경에는 그녀의 왕궁 안에도 선한 사람이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는 이 공포의 시대를 겨우 견디고 있었을 뿐입니다.(왕상 18:3-4)

 

 

 

한 사람이 나타나 그녀의 미래에 관해 예언합니다.

개들이.. 이세벨을 먹을지라

 

 

그녀의 마지막은 어땠을까요.

그녀는 현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호화로운 생활을 지속합니다.(왕하 9:30)

아마 그녀는 계속해서 후임자들의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왕하 9:22)

독설을 퍼붓는 것도 여전했습니다.(왕하 9:31)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권력의 일선에서 물러난 그녀는,

새로운 힘이 일어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언대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녀의 이름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악녀의 대명사로 남게 됩니다.(2:20)

역사는 그녀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요.

 

권력은 한 순간이고,

이 세상에서의 삶도 언젠가는 끝납니다.

하지만 그 평가는 무섭도록 솔직하게 남는다는 것.​

고대인들도 알고 있는 이 진리를

왜 배울만큼 배운 분들이 모르는 걸까요.​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렘 5: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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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회 박정희 대통령 추모예배'

 

 

 

우연히 접하게 된 사진 한 장.

 

내가 속해 있는 큰 공동체가 어디까지 타락해가고 있는 지를 잘 보여주는 그림.

 

물론 저기 앉아 있는 사람들 전부가 비정상인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적어도 생각들은 좀 하고 살아야 할 텐데..

 

 

돌아오는 일요일이 소위 '종교개혁기념주일'인데,

 

교회가 한 개인을 신성화하고 떠받드는 것만큼 반종교개혁적인 일이 또 어디에 있을까.

 

 

잘 해봐야 죽은 사람 칭찬하기 바쁘고, 자칫 우상화로 치달을 수 있는 이런 행사가

 

과연 '예배'라고 불릴 수 있는가.

 

 

 

※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신도게요 제21장 中

 

2. 종교적 예배는 하나님 곧 성부, 성자, 성령께 드려야 하며, 그에게만 드려야 하고, 천사들이나 성도들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 예배해서는 안된다.

 

3. 기도는 합법적인 사물들을 위하여, 또는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이나 앞으로 출생할 사람들을 위해서 할 것이요, 죽은 자를 위해서나,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줄로 알려진 자들을 위해서 할 것은 아니다.

 

 

 

++++++++++++++ 추가로 알려진 상황 ++++++++++++++++

 

당일 현장 현수막에 이름이 오른 열 개의 교회들 중,

 

네 개의 교회(구미상모교회, 인천순복음교회, 동탄 전하리교회, 용인 수지 영락교회)는 명백히 불참, 혹은 반대의견을 표했음에도 주최측에서 멋대로 이름을 도용했다고 밝힘.

 

반면 서울 나들목교회, 잠실동교회, 성광침례교회, 인천 만민교회, 광은교회, 신월중앙감리교회 는 직접 주최하거나 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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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나무 2013-10-2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사진보고, 교회서 이런 행사가 진행된것을보고
참 저분들의 역사의식은 어떤것일까 의아해하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노란가방 2013-10-27 17:58   좋아요 0 | URL
네.. 전 요새 한탄스럽기 보다는 화가 나기 시작하더라구요..;;
 

1. 꿈을 잃어버린 세상

 

오늘 우리는 꿈을 잃어버린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꿈은 단지 미래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기에,

꿈의 상실은 온갖 종류의 현실도피를 낳곤 합니다.

 

하루 종일 PC방에 앉아 게임으로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도,

텔레비전 속 연예인들에게 목을 매는 사생팬들도,

한방의 인생역전을 바라며 투기에 빠져드는 것도,

심지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그 책임을 돌리며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다 꿈의 상실이라는 질병의 증상인 셈이죠.

 

꿈은 늘 이야기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잘 살펴보면 그 이야기라는 건

언제나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를 설명해 주는 기능을 합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는 무엇인지,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픔과 괴로움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어떻게 하면 정말로 기쁘고 즐거울 수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사는 데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담고 있는 큰 이야기가 바로 꿈입니다.

 

꿈을 잃어버렸다는 말은 이야기를 잃어버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속한 진짜 이야기를 잊어버린 채

잘못되고 거짓된 이야기를 자신의 것인 양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이죠.

 

 

 

 

2, 이야기의 힘

 

이야기에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습니다.

때문에 정말로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는 건

어떤 공식이 아니라 항상 이야기의 형태로 표현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 아세라 신에 대한 숭배로 돌이켰던 이유는

그 신들이 해 주는 이야기가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그 이야기에 빠져들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풍요로움과 깊은 정서적 안정감은 물론,

육체적인 쾌락과 멋진 외모까지 모두 있었습니다.

비와 태양을 다스리는 바알 신은 풍년을 약속했고,

그 제의에는 성적인 관계를 통한 즐거움을 주었으며,

조각으로 새겨 보석으로 장식한 신들의 얼굴은 아름다웠습니다.

(이에 비해 여호와 신앙에서의 신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심지어 신의 형상을 만들거나 그리는 것을 정죄했으니까요.)

 

사실 오늘의 이야기들도 비슷합니다.

사람들은 성공에 대한 신화(참 의미심장한 용어죠?)에 열광하고

그들이 자랑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건강하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는지에 대해

그들의 선지자들로부터 신탁을 전해 받고 있습니다.

 

그렇게 한 번 이런 거짓 이야기에 매혹된 사람은

쉽게 그 이야기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오직 그 이야기의 주인공을 중심으로 세상을 해석하기에

그들의 꿈에는 진짜를 볼 수 없도록 만드는 벽과 장애물들이

켜켜이 쌓여지게 됩니다.

 

 

 

 

3. 거짓 이야기의 위험성

 

문제는 그 이야기가 근본적으로 거짓이라는 데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약속해준 것을 성취시킬 능력이 없었습니다.

사실 실상은 정 반대였습니다.

그 거짓된 이야기에서 약속한 것을 이뤄야하는 것은

언제나 이야기에 빠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많은 재물과 소유를 내어 놓아야 했고,

순결과 도덕, 윤리 관념들을 그 제단에 바쳐야 했습니다.

심지어 인신제사 또한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의 이야기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바알과 아세라, 몰렉 같은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없지만,

대신 그 자리를 수많은 연예인들과 정치인들, 권력자들,

혹은 그저 도구일 뿐인 돈이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종종 연예인들을 idol이라고 부르는 건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이들 역시 고대의 우상(idol)들과 별반 차이가 없이,

자신들이 중심이 된 이야기를 가르치고 계시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숭배자들도 역시 옛날과 마찬가지로

바치고, 섬기고, 복종합니다.

 

거짓된 이야기를 좇아가다 보면 결국 길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로 앞서 언급했던 것과 같은 상황들이 일어납니다.

인생의 이유를 찾지 못한 사람들은 포기하거나 엉뚱한 것을 붙잡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왜 거짓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고 빠져들까요?

우선 그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예쁘고 잘 생긴 배우와 연예인들,

뭔가 해 낼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정치인들,

그리고 정말로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것 같은 돈.

이런 것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들은 얼마나 멋진 미래를 보여줍니까.

 

또 거짓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상상력을 빼앗습니다.

오직 그 이야기들이 던져주는 것만을 먹어야 살 수 있고,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정해놓은 법칙은 절대로 깰 수 없으며,

이런 세상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헛수고라고,

얼른 꿈에서 깨는 것이 어른스러운 거라고 말입니다.

거짓 이야기가 마치 자신을 진짜 이야기로 위장하는 우스운 일이

날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4. 교회와 진짜 이야기

 

개인적으로 교회에 희망을 걸고 있는 이유는

그 공동체가 진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요즈음은 진짜 이야기를 잃어버리고

거짓 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교회들이 자주 보입니다.

 

사실 교회의 진정한 힘은 진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한 교리들의 목록이 아니라

이 세상의 진짜 모습에 관한, 말 그대로 ‘이야기들’로 구성된 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두꺼운 규정집만 받아들였다면 그건 참 못해먹을 짓일 것입니다.

그분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기뻐했는데

오늘날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자주 인상을 쓰는 이유도

바로 이런 차이 때문은 아닐까도 싶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세상이 그려주는 가짜 이야기에

진짜 이야기를 덧붙이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합니다.

그들이 겪는 문제와 달성하려는 목표는

세상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내가 아는 좁고 거짓된 이야기에 더 큰 이야기를 넣으려고 하니

좀처럼 변하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는 게 당연합니다.

 

해결책은 정 반대의 과정입니다.

더 큰 진짜 이야기 속에 나의 이야기를 집어넣는 것,

좀 더 정확히는,

처음부터 있었던 우리의 진짜 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가진 자가 가난 자들을 억압하는 것은 세상의 진짜 법칙이 아니며

내 가족과 친구들만을 챙기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남의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말은 세상 사는 지혜가 아니고,

권력을 손에 쥐는 것 자체가 복일 수 없고,

남들을 부리는 자리에 오르는 게 성공이 아니라는 것,

‘큰 규모’와 ‘번영’이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들이

실제로 인정되는 그것 세상을 말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세상에 대한 이런 진짜 인식은

거짓된 세상의 이야기를 깨뜨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진실만이 거짓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물질로 치환시키려는,

심지어 인간과 생명마저도 그냥 물건으로 보고 사용하려는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무자비한 문화를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으며,

우리의 용기와 의지를 되찾아 줄 수 있습니다.

 

 

 

5. 다시 꿈을 꾸는 교회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진짜 이야기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개인(목사나 ‘성공한’ 성도 같은)을 신격화하거나,

권력에 순응하고 세상의 질서에 무조건 순종하게 길들이거나,

세상이 만들어 놓은 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케 하는 일들은

교회 역사에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일들이지만,

그 때마다 교회의 영향력은 줄어들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말씀은 바로 이 진짜 세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당연히 가짜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더 큰 세상에 대한 그분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었고

그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교회는 이 진짜 이야기 안에 있을 때 가장 빛날 수 있습니다.

그 큰 이야기 안으로 들어갈 때야

그분이 약속하신 ‘꿈’을 다시 꾸게 될 것입니다.(욜 2:28)

세상에 끌려가거나, 세상을 약간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에 대한 비전을 회복하는,

진정한 부흥 역시 오직 그 큰 이야기의 맥락 안에서

우리의 삶을 되찾을 때에만 가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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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복음’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던 중

‘복음화율’을 나타낸 지도를 발견했습니다.

전국을 시군구 단위로 나눠놓은 백지도 위에,

각 단위 면적의 인구 수 대비 기독교 신자 수를 백분율로 환산해

그 수치가 높을수록 푸른색을, 낮을수록 붉은색에 가깝게 칠해 놓은 모습이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은 한 번쯤 볼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그림을 발견한 곳은 기독교 웹 페이지가 아니라

불교와 관련된 인터넷 카페였습니다.

아마도 누군가 저처럼 인터넷 서핑 중 찾은 사진을 올린 듯한데,

그 글의 아래에는 ‘어느 지역은 붉은 색으로 덮힌 걸 보니 훈훈하다’느니,

‘짙은 푸른색으로 가득한 지역은 답답하다’느니 하는 댓글들이 잔뜩 붙어 있었죠.

 

 

물론 이 글은 특정한 한 가지 일을 바탕으로

불교신자들을 싸잡아 비난하려는 목적으로 쓰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회 안에도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처럼

다른 종교 신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일 뿐이니까요.

생각해보면 이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입니다.

종교만이 아니라 기업이나 정당, 공무원들,

혹은 바로 우리의 가정 안에서도 충분히 발견될 수 있는 유형의 사람들입니다.

 

 

문득 왜 그 사람들이 지도를 보고 그렇게 비웃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멋대로 구부러진 나무처럼

태생적으로 삐뚤어진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혹시 그런 게 아니라면,

지도 자체에도 어떤 문제의 소지가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먼저, 이 지도는 비그리스도인들이 보기에 상당히 기분 나쁠 수 있는 소지가 있습니다.

지도 자체가 철저하게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제작되어 있는데다,

뚜렷한 색깔 구분으로 인해 마치 기독교 신자 비율이 낮은 지역은

덜 개발된, 혹은 낙후된 지역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도를 제작한 분들의 선의는 그런게 아니었다고 믿지만,

이런 식의 표시법은 필연적으로 좋고 나쁨의 가치판단이 들어가게 되고,

그럴 경우 푸른색 쪽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불쾌감을 표시할 수도 있습니다.

철저하게 기독교인들의 숫자에만 의미를 부여하고,

이외의 사람들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처리된다는 점도

비슷한 지적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작한 지도를 모두가 볼 수 있는 인터넷 공간에 게시할 것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기분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지혜를

좀 더 발휘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그게 전도에도 좀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두 번째로는 지도에 담은 수의 정확도에 관한 부분입니다.

많이 개선되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교회의 신자 수 통계에는 여전히 거품이 끼어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보고된 숫자들을 다 합치면 인구의 절반 이상이 기독교인이 될 정도니까요.

물론 조사의 정확성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부분을 십분 이해합니다.

한 달에 한두 번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을 통계에 넣어야 하는지,

혹은 몇 달간 보이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지도 쉽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딱 한 번, 혹은 두 번만 출석했던 이들을 어떻게 계산해야 할지는 무척 애매합니다.

신자 자신도 두 군데 이상의 교회에 등록되어 있기도 하니까

문제는 점점 복잡해집니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 곧 기독교인인가 하는 질문은

훨씬 더 풀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전 완벽한 그리스도인들만을 세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만,

이런저런 요소들을 고려해 가능한 정확한 수치만을 조사한다면

지도의 파란 부분은 대부분 줄어들지는 않을까 싶습니다.

(아, 기준을 낮추면 다시 파랗게 물들까요?)

그런데 숫자가 줄어들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건지

이런 문제는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앞서 언급한 모든 것들을 다 좋게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과연 이 지도가 어떤 의미가 있기는 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점입니다.

앞서 말했듯 이 지도는 신자통계를 인구수에 단순대입해 만든 자료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지도의 붉은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좀 더 좋아진 것입니까?

어떤 부분에서 그런 걸까요?

그 지역에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그곳에는 가난이 없고, 범죄가 줄어들고,

거짓과 속임수보다는 정직하게 일하는 이들이 성공하고,

자신의 것을 자발적으로 이웃들과 나누는 참된 공동체들이 확산되고 있습니까?

그런게 아니라면 그 색깔과 수치들은 도대체 뭘 가리키고 있는 겁니까?

이 지역은 교회가 충분하니 교회 개척은 다른 지역에 하라는 신호힙니까?

아니면 이 지역은 수고했다, 저 지역은 분발해야 한다는 식의

모호한 격려와 축하의 재료일 뿐인건가요?

 

 

 

 

18세기 잉글랜드의 존 웨슬리가 중심이 되어 일어났던

대각성운동에서는 실제로 그런 모습들이 나타났습니다.

알콜과 도박에 중독된 이들이 놓여지고 범죄율이 의미있는 수치로 감소되었고

사회 전반에 건전한 에너지들이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비기독교인이 쓴 논문들도 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찾아보십시오.)

그런데 그 지도의 푸른 부분은 어떻습니까?

 

 

신자비율만 따지면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은 꽤나 푸른 빛이 강할 것입니다.

국회조찬기도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숫자를 보면 말이죠.

하지만 과연 그 넓은 공간이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으로 채워지고 있습니까?

아니 청와대로 기독교 장로를 보내놓았는데도

뭐 그리 비리와 부패가 넘쳐납니까?

 

 

그 지도가 어떤 사람들에게 비웃음의 대상이 된 것은,

어쩌면 그 지도 자체 때문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도 그 지도의 붉은 색이 나타내는 진짜 의미,

즉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자신의 피를 모두 흘리고 죽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신 그분을 닯은, 그리고 닯으려 하는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우리 그리스도인의 문제겠죠.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님이 보시는 진짜 복음화율 지도의 모습은 그 지도와 비슷할 수도 잇지만

전혀 다른 모양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 지도는 정말 중요한 정보는 아무 것도 담고 있지 못한

쓸모 없는 그림일 수도 있겠죠.

 

 

비슷한 맥락에서 저는 ‘성시화(聖市化)’라는 표현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복음이 갖고 있는 참 의미

- 부당하게 억압받는 이들이 놓여나고,

가난한 이들이 마음껏 웃을 수 있게 되며,

슬픔과 고통이 어떤 사람들의 삶을 특징짓는 일이 사라지는 -

가 어떤 도시에 실제로 주된 분위기가 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교인명부에 오른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뜻할 때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지도에 관한 불평만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저 역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기대하는 한 사람으로써,

그 나라 확장의 한 형태로서의 신자 수 증가를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의 증가가 모든 것이 아닌 부분이라는 점을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야 우리는 정말 제대로 된 복음화율을 나타낸 지도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종이 위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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