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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탄생 - 현상과 실재, 인식과 진리, 인간과 자연에 던지는 첫 질문과 첫 깨달음의 현장
콘스탄틴 J. 밤바카스 지음, 이재영 옮김 / 알마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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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흔히 서양 철학 하면 떠올리는 인물인 소크라테스 이전에는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생각들을 하며 살고 있었을까. 이 책은 바로 그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을 다루고 있다. 만물의 근원(아르케)은 물이라고 주장했던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부터, 오늘날에는 수학자로 더 잘 알려진 신비주의자이자 하나의 종교를 창시하기도 했던 피타고라스, 원소설의 주창자인 데모크리토스 등 고대 철학자들의 사상과 주장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원문들을 통해 세심하게 분석하는 책이다.




2. 감상평 。。。。。。。

 

     대학 고중세 철학 시간에 들었던 여러 인물들의 이름을 오랜만에 들으니 나름 반갑기도 했다. 당시는 예닐곱 시간에 걸쳐서 간단히 들었던 인물들의 사상을 이 방대한 책은 매우 세심하게, 그리고 애정을 담아 다룬다. 먼저 그 학문적 열의와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책이다.

 

     하지만 그런 방대한 작업과는 별개로 저자인 밤바카스는 고대의 철학자들의 사상에 대해 지나치게 현대적인 주석을 달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책 안에서 수차례 언급되어 있듯이, 고대 철학자들이 남긴 글은 매우 짧은 단편들만 존재하기에 그 전체적인 윤곽을 살피기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사상이 얼마나 훌륭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서 종종 과도한 상상력으로 시간과 공간의 빈자리를 과감하게 메우려는 시도를 하는 것 같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들의 사상의 훌륭함은, 그것이 현대의 철학과 과학이 설명하는 것들과 얼마나 맞아 들어가는 가로 결정되는 듯한, 매우 시대착오적 기준이 적용된다.(자연히 고대 철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신화적 사고는 축소되고 제거되는 일종의 윤색이 시도되고 있기도 하다.)

     또, 고대 철학자들의 위대함만을 강조하며 마치 그들이 세상을 바꾼 것처럼 묘사하는 영웅사관적 관점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어떤 생각이나 기술 등을 처음으로 창안하는 것은 치하해 마땅한 일이긴 하나, 한 사람의 주장이 곧 그 시대의 사상 전반을 지배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환상이다. 그래서 돌턴이 데모크리토스로부터 원자론을 배웠고, 아인슈타인이 헤라클레이토스로부터 상대성원리를 이끌어냈다는 말인가? 어쩌면 단지 우연히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다작(多作)을 했던 철학자들에 의해 그들의 주장이 오늘날까지 전해졌을 뿐일 수도 있지 않을까. 원래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더 크게 보이는 법이다.

     결정적으로 저자가 가지고 있는 역사관에도 문제가 있다. 저자는 마치 고대의 철학과 사고가 바로 근대의 계몽주의 시대로 이어진 것과 같다는 식의 르네상스 시대의 우쭐한 학자들이나 주장했을 것 같은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인류의 사상과 철학이 중세 천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무슨 냉동실이라도 들어갔다 나왔다는 말인가. 게다가 르네상스 시기의 학자들이 꺼낸 고대 철학은 엄밀히 말하면 중세 말, 혹은 근대 초 사람들에 의해 재해석된 고대 철학이지, 고대 철학 그 자체는 아니었다. 요컨대 사상의 연속성과 연구자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음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것. 여기에 고대 철학을 논하면서도 인간의 영성이나 정신적 영역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좀 아이러니하다.

 

     학문적으로 보자면 이런 책 한 권 정도는 꼭 나와야 할 책이다. 고대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고대 철학자들에 대한 과도한 현대적 해석은 이 책이 안고 있는 가장 큰 약점이다. 바로 그 점이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이 책의 내용을 통해 그 주장이 충분히 입증된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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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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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

 

     이야기는 복잡한 현실의 문제들 속에서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쉽지 않음을 깨우치는 질문들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곧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판단과 결정들에는 이미 특정한 도덕적/철학적 판단이 전제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글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그러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옮겨가고,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정의라는 공리주의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결정하도록 해주면 된다는 자유지상주의, 그리고 모든 일들은 그것의 본래 목적을 가장 잘 구현하는 이에게 맡기는 것이 옳다는 정의에 대한 일종의 목적론적 관점이 소개된다.

     저자가 생각하기에 각각의 관점은 일면 타당한 점도 있으나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지나치게 도식적인 주장들이다. 그러한 관점들은 가치중립적인 어떤 상태를 가정하지만, 실제로는 어떤 삶이 ‘좋은 삶’이냐에 대한 가치 판단 없이 정의를 규정하려는 시도는 따라서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자는 사회의 여러 분쟁 지점에 이런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내려놓으라는 억지를 포기하고(337), 오히려 권리와 정의의 문제에 ‘좋은 삶’에 대한 논의를 적극적으로 개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349) 이를 위해 저자는 인간에 대한 서사적 이해(310)를 들고 나온다. 자신을 한 개인으서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설명이 그것.

     정의에 대한 좀 더 인간적이며 합당한 관점을 담고 있는 책. 



2. 감상평 。。。。。。。

 

     잔뜩 기대를 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약간의 실망을 했다. 그리고 곧 이 책이 대학교 강의를 옮겨 놓은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다시 심기일전 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의 결론부에 이르렀을 무렵, 나도 이 책에 열광하는 독자들 중 하나가 되었다. 책의 전반부는 정의에 관한 오랜 논쟁들을 소개하는 내용이라 약간의 지루함이 있었지만, 책의 후반부는 이전의 설명들과 분석들이 왜 필요했는가를 설명해 준다.

 

     정의란 무엇을 위해 찾고, 묻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인간들이 좀 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가 아닐까? 물론 세상에는 정의의 목적에 대한 이런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들도 많다. 쾌락의 최대화가 정의의 목표라고 말하기도 하고,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문제는 바로 그런 주장들로 인해 역설적으로 인간이 소외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

     이 책의 가장 탁월한 측면은 정의에 관한 논의에서 다시 한 번 ‘인간성’이라는 가치를 회복시키고 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쾌락의 증가나 자유의 보장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인간이 잘 살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전의 주장들에는 인간을 객관화 시켜놓고 자신들의 주장을 펼쳤고, 결국 그렇게 만들어진 결론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충분히 설명하지도, 불합리를 보완하지도(도리어 불합리를 불합리라고 인정하지 않으려는 어이없는 상황도 쉽게 볼 수 있다) 못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인간답게, 혹은 잘 사는 것이냐는 삶의 목적에 대해 말하는 도덕적, 종교적 전제를 애초부터 배제하고 시작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 인간에게서 그런 영역들을 다 제거해야만 제대로 중립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생각도 단지 유물론이라는 하나의 사조에 근거한 ‘치우친 사고’에서 시작된 것인데 말이다.

     저자가(그리고 저자와 함께 연구하고 있는 매킨타이어가) 주장하고 있는 인간에 대한 ‘서사적 이해’가 합리적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에 ‘어떤 것이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더해지면 정의에 대한 보다 인간적이며 실제적인 논의에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완전한 결론이라기보다는 과정에 대한 제안의 영역일 뿐이지만, 적어도 관성에 의해 모순들에 눈을 감고 계속 달려가는 것보다는 처음으로 되돌아가 균형을 잡고 재출발해야 한다는 주장은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진리의 한 조각을 담고 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좋은 차를 사고, 더 좋은 옷을 입고, 더 번쩍이는 건물을 세우고,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해서 세상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외형적 성장과 발전/진보를 제대로 구분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정의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야 하리라. 이 책이 좋은 안내서의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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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0-09-28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베스트셀러에는 눈길도 안주는 편인데, 이 책은 조금 호기심이 생기네요.
주변 사람들이 죄다 읽고는 있는데, 아직 다 읽은 사람을 못 봤어요.
다 읽은 사람 있으면 좀 빌려 읽으려고 했더니....
아무래도 저랑은 인연이 안 닿을 듯 싶어요.

노란가방 2010-09-28 23:14   좋아요 0 | URL
끝까지 다 봐야 진가가 드러나는 책이거든요.
9, 10장이 샌델 교수가 하려는 말이죠.(처음엔 약간 지루하기도..;;)
지역 도서관을 이용해 보세요. ^^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버트란드 러셀 지음 / 사회평론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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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된다면

현재 세계가 앓고 있는 질환의 대부분이 치유될 것이다.

 

 

1. 요약 。。。。。。。

     스스로를 대단히 철두철미한 합리주의자라고 생각했던 러셀이 쓴 여러 글들과 연설문들을 모아 놓은 문집이다. 다분히 도발적인 이 책의 제목은 그가 쓴 한 글의 제목(Why I am not a christian)을 옮긴 것이다. 그는 이 글에서 그에게 가장 익숙한 종교였던 기독교를 믿을 수 없는 이유를 열거하며 나아가 종교는 공포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지극히 익숙한 주장으로 나아간다. 이후의 글들에서는 이 주장을 기반으로 종교는 인류의 지적인 면이나 도덕적인 면, 사회적인 면에 있어서 해악만을 끼쳤다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

 

2. 감상평 。。。。。。。

     이 과할 정도의 자신만만함이 느껴지는 글들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아마도 러셀은 자신이 확고한 진리 위에 서 있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눈부신 과학 발전은 그로 하여금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래야만 정확하고 바른 것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으리라.
 


     종교에 관한 저자의 생각은 앞서 간단하게 언급했던 것처럼, 종교란 공포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더 이상 이전 시대의 공포의 대상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 이 시대에는 종교의 존재를 지지할 만한 어떤 근거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종교를 계속 유지하면 할수록 인류 사회에 피해만 주므로 마땅히 제거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최근 유사한 책들을 쓰고 있는 크리스토퍼 히친스나, 리처드 도킨스 같은 사람들의 주장의 오리지널이라고나 할까. 이들 아류작들은 사실 주제면에 있어서 거의 발전을 하지 못한 것 같을 정도다.

     아무튼 종교에 관한 이런 생각은 이 책에 실린 종교에 관한 러셀의 의견의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물론 때와 장소가 다른 곳에서 쓰였기 때문이겠지만, 이 책에 실린 대부분의 그들에서 특별한 논리의 발전 없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종교의 근원에 관한 저자의 이 연속적인 생각은 논리적일지는 모르나 충분히 합리적이지는 않다. 예컨대 종교의 근원이 공포심이라는 언명은 여전히 저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과학적 증거’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 생각은 ‘모든 것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되어야만 진리이다’라는 그 자체로 또다시 어떤 증명이 필요한(하지만 증명하기 좀처럼 쉽지 않은) 명제에서 나온 결론일 뿐이다.(이런 면은 코플스턴과의 대화에서 지적을 받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런 약점은 러셀 혼자 말하는 글들이 아닌 ‘대화’의 정황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종교는 거짓이며 신은 없다고 강력히 무신론을 표방하던 저자는 코플스턴과의 대화 국면에 나오면 불가지론으로 한 발 후퇴하고 만다. 물론, 증명할 수 없으니 없는 것으로 생각해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다시 원래의 궤적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엿보이지만, 사실 그건 엄밀히 말해 합리적인 설명보다는 러셀 자신의 논리적 관성에 가깝다.
 


     러셀 자신은 종교의 무가치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그가 살고 있었던 당시 종교적 영향력이 강했는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이 부분도 좀 과장이 섞여 있는 것 같지만), 그 이후 세계는 점점 더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 사실이라는 데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물론 이런 현상이 사람들이 러셀의 주장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그러기엔 러셀의 글이 좀처럼 쉽게 읽히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종교에 대한 관심이 줄었기 때문에 세상이 좀 더 행복한 곳으로 나아가고 있는가?

     러셀은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이 세계가 앓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p. 13) 그런 생각이 일반화 된 오늘날의 법정은 실제 어떤 일이 있었느냐 하는 진실보다, 남아 있는 증거가 어떤 사실을 구성해주느냐 하는 법리적 사실이 좀 더 중요한 세상이 되었다. 그 결과 실제로 아무리 악한 일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어려움에 빠뜨린 사람이라도, 그리고 그에 대한 증언이 아무리 많더라도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대가를 치루지 않고 도리어 더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산업 기술이 만인에게 넉넉한 물질을 제공할 것’이라는 주장(p. 70)은 러셀이 사망한 지 40년이 지나 엄청난 기술의 발전을 이룬 지금도 굶어 죽는 사람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되는 현실을 적절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의 일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으며, ‘산업 기술’을 가지고 있는 국가들은 저개발국가들의 인적, 물적 자원들을 착취해야만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저자가 찬양해 마지않는 ‘사랑에 의해 고무되고 지식에 의해 인도되는 삶’(p. 84)이란 참 좋은 것이다. 하지만 무엇으로 사람들을 그리로 인도할 것인가? 저자는 ‘건전한 성격에 활력 있는 사람이라면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자연스런 충동’(p. 55)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선을 행하고자 하는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충동’이 아니라는 것을 최근 10년 새 급증하고 있는 범죄율을 통해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어떤 것이 ‘자연스러운’ 행동이려면, 그것은 ‘일반적인’ 행동이어야 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선택하는 방식’일 것이므로, 점차 확대되어야 할 것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까. ‘죄란, 교육을 좌지우지하는 자들이 싫어하는 것’이라는 생각(p. 201)이 일반화 될 때, 사람들은 점점 더 건전하게 생활하려고 할까, 아니면 사회적 합의나 규칙들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나아갈까.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믿는 바를 얼마든지 진술할 수 있다. 특정 부류나 집단을 비판할 수도 있고, 미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대화를 하자고 말하고 싶다면 특정 신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어떤 행위에 대해, 쉽게 ‘경멸감’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p. 41) 그다지 좋은 대화방식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생전에 참여했던 핵 철폐 운동이나 평화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사회참여 등의 이력이 평가절하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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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인간 - 고통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
손봉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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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最大 多數의 最大 快樂’보다는

‘最小 數의 最少 苦痛’이 윤리적 당위성의 근거가 되어야 하고,

이런 목적론적 윤리는 의무주의 이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고 더 현실적이라 할 수 있다.

사람으로 하여금 행동하게 하는 데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쾌락의 추구보다는 고통의 기피일 것이기 때문이다.

 


 

1. 줄거리 。。。。。。。

 

     ‘고통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이다. 철학책이긴 하지만 일반적인 주제들 - 소위 거대담론들(세계의 기원이나 구조 등) -이 아니라 한 가지 주제에 집중을 하며 내용이 진행된다는 점에서 이 책의 독특한 점이 발견된다.

     저자는 고통이라는 경험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위치를 차지하는 지를 언급하고, 고통이 지니는 원초성과 긴박성에 근거해 하나의 윤리관이 나올 수 있음을 지적하고, ‘최소 수의 최소 고통’이라는 목적론적 윤리를 제시한다.

     나아가 저자는 고통이 갖는 의미를 찾아나가고자 하는데, 제 종교들 - 불교와 기독교, 과학주의 -의 견해를 살피면서 여전히 고통의 본질은 인간에게 불가해한 영역으로 남아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고통은 인간 사회의 발전에 어느 정도 기여를 하는 부분이 있음을 주장한다. 예컨대 아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라면 누구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창안하거나 발전시키고자(고통을 줄이고 편하고 즐거운 삶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작업으로서) 하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결론부에서 논의는 반 발자국 쯤 더 나가는데, 아마도 저자는 고통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에 대한 말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고통은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나름대로 그 안에는 어떤 ‘의미’도 존재하기에, 고통을 당할 때는 그것이 가져다주는 ‘선한 무엇’을 얻고자 노력해야 한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고통을 주체적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말로 내용을 맺는다. 하지만 이 주장이 니체의 ‘초인(超人)’의 개념과 정확히 어떻게 같은 지는 분명치 않아 보인다.


 

 

 

2. 감상평 。。。。。。。 

 

     저자에 따르면 고통은 단순히 쾌락의 반대가 아니다. 쾌락은 시간이 지나면 그 것을 느끼는 정도가 떨어지지만 고통은 그렇지 않으며, 약간의 쾌락이 증가할 때보다는 약간의 고통이 증가할 때 더 긴박한 상황이 되는 것이 그 예이다. 평소에 깊이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이었기에 특히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다.

     ‘최소 수의 최소 고통’이 윤리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생각해 볼만 했다. 형벌이 단지 ‘행복을 줄이는’ 방식이 아니라 ‘고통을 늘리는’ 방식이 된다면 그것이 갖는 효과가 더욱 커질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해, 예전처럼 ‘채찍질’이 부활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저자의 주장엔 자연스레 공감을 하게 된다. 갈수록 끔찍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강력범죄들을 보면서, 좀 더 강한 범죄방지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부분에 있어서 저자의 의견에 공감을 하지만, 고통을 줄이기 위한 인위적 방법들에 대한 ‘약간의 경계’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마취제나 진통제 등의 약품까지도 경계하는 것은 좀 지나치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꽤 흥미로운 깊은 내용들이 담겨 있는 책이다.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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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신화 범우사상신서 10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림 옮김 / 범우사 / 199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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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프의 말없는 온갖 기쁨은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은 자기의 고통을 주시할 때

모든 우상을 침묵케 한다.

 

1. 줄거리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책이었다. 알베르 카뮈라는 인물을 단지 좀 어려운 소설가정도로 생각했던 내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그를 부르는 게 더 올바른 표현인 것 같다.



    저자는 삶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 책을 시작한다. 과연 이 세상에서의 삶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이 세상은 살아갈 만큼 만족스러운 곳인가. 인간들의 삶은 행복한가. 저자가 보는 세상은 이런 질문들에 부정적인 대답만을 준다. 삶은 의미 없는, 매우 부조리한 것으로서,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런 부조리한 삶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삶에 과연 인간으로서 살아간다는 의미가 있을까.

    저자는 그러한 상황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한다. 첫 번째는 자살이다. 이는 부조리한 삶으로부터 완전히 도피하는 방법이다. 사실 의미없는 삶을 더 이상 살지 않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하자가 없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하듯이 그런 논리를 극단으로까지 이끌고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도피일 뿐 해결책은 될 수 없다.

    두 번째의 방법은 종교와 같이, 현세가 아닌 내세에 대한 희망, 혹은 미래에는 부조리한 지금의 삶을 조리있게 설명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꿈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역시 회피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부조리의 상태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세 번째는 현실의 부조리함과 어려움을 정면으로 받아내면서 그 안에서 행복의 요소를 찾아내라는 것이다. 그럴 때에 진정으로 현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신들에 의해 저주를 받아 평생 동안 무거운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했던(꼭대기로 올라간 바위는 다시 굴러 내려오고, 그러면 다시 밀어 올려야만 하는 작업이 영원히 계속되는 형벌이다) 시지프가 신들의 그러한 저주(부조리한 삶)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것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 감상평


    카뮈의 세계관에서 현실 자체는 부조리한 것이다. 비단 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세상에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진화론(혹은 자연주의)에 기반한 유물론적(그리고 이성중심적) 세계관의 결론도 동일할 것이다. 모든 것이 물질일 뿐인데, 거기에 도덕이, 윤리가, 삶의 숭고한 목표가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기껏해야 '유전자를 전수하기 위한 것'이라는 전혀 내키지도, 감흥이 일지도 않는 비인간적 '목적(그것을 목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만 남을 뿐.

     나는 그 전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이 세상이 질서정연하게 창조되었다고 하는 전제를 받아들인다. 비록 타락으로 인해 많은 부분이 망가지고 왜곡되어 부분적으로는 부조리한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원리적으로 이 세상은 질서와 논리성을 가지고 있는 세계이며, 최종적으로 그것은 다시 회복될 것이다.

    현실에 대한 인식이 다른 만큼, 그에 대한 해결책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카뮈 식의 실존철학적 해결방법은 인간 내부에서 구원의 방법을 찾아낸다. 현실에서 초연한 채 자기 내부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내고 그것에 따라 살면 족하다는 식이다. 물론 그것도 한 가지 방법이기는 하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단지 현실로부터의 자기 내면으로 도피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카뮈가 말하는 종교적 방식은 도피적 성격을 갖고 있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카뮈 자신의 방법이야말로 도피다. 부언하면, 기독교의 구원은 단순히 현실도피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진짜 사실을 확인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희망적인 미래상이다.



    오랜만에 머리를 좀 싸매게 만드는 책을 읽게 되었다. 비록 그 내용의 전개방식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읽어 볼 수 있는 책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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