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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위버 - 소설로 읽는 유쾌한 철학 오디세이
잭 보웬 지음, 박이문.하정임 옮김 / 다른 / 2009년 3월
평점 :
절판


1. 줄거리 。。。。。。。        

 

     호기심 많은 십대 소년인 이안은 어느 날부턴가 밤마다 이상한 꿈을 꾸곤 한다. 웬 노인이 등장하는 꿈이었는데, 그는 이안에게 끊임없이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고 생각하게 만든다. 잠에서 깬 이안은 부모님에게 꿈 이야기를 털어놓고는 꿈속에서 시작된 질문들에 대한 해결책을 배워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철학사를 관통하는 주요 주제들이 이야기와 질문 형식으로 풀려 나온다.

 

 

2. 감상평 。。。。。。。        

 

     철학개론서라고 불러야 할 내용들인데, 형식은 소설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식의 노골적인 교훈을 위한 이야기는 흔히 재미라는 부분을 희생시키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었다. 무시무시한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었으니까.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이야기’와 ‘문답’이라는 요소다. 책의 진행을 부드럽게 하는 요소이면서 동시에 재미까지 줄 수 있었다. 물론 책이라는 일방적인 전달 도구를 사용하고 있기에 한계는 있겠으나(예컨대 이안이나 그의 부모와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으니까) 문답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다양한 종류의 반론과 재반론 등이 반복되면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다각도로 접근하는 모습이 좋았다. 개론서답게 가능한 쉬운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철학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논의들을 한 권의 책에 꽤나 짜임새 있게 담아냈다.

 

 

     오늘날은 철학이 위기에 처한 시대다. 사람들은 생각하고, 질문하고, 묻기 보다는 ‘해 봤느냐’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경험적인 차원에서 일을 처리해나가기 시작했고, 이게 종종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뭔가 대단한 것인 양 포장되고 있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우겨대더라도 모든 ‘주의’에는 철학이 깔려 있는 법. 사실상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철학의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일단 행동부터 하는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인 고민과 질문은 힘으로 막아버린 채 다짜고짜 전 국토를 파헤치는 초유의 정책으로 시작한 정부가 온갖 비리와 불법과 편법으로 끝나가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일 테고.

 

    결국 좀 더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수밖에 없다. 물론, 그건 자기 생각(이성)만 절대적으로 의지하는 헛똑똑이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배려하고 양보하지만 상식은 지켜나가는 건전한 교양인들을 가리키는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 여기에 철학이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상당한 명약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자면, 이 책은 괜찮은 약효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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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위한 변론 - 우리가 잃어버린 종교의 참의미를 찾아서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준형 옮김, 오강남 감수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0월
평점 :
품절


1. 요약 。。。。。。。                 

 

     ‘신’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서양의 지성사 전반을 읽어가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인간들은 세상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뮈토스(신화)’와 ‘로고스’라는 두 가지 방식을 사용하는데, 종교란 논리적이고 설명적인 로고스가 아니라 좀 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뮈토스에 속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고전 시기에는 이 부분이 비교적 제대로 이해되었으나 근대로 넘어오면서 뮈토스인 종교를 로고스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이 문제(충돌)를 일으키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의 무신론자들이나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은 똑같은 함정에 빠져있다. 전자는 로고스로 뮈토스를 한정지으려 하고 있고, 후자는 뮈토스를 로고스로 이해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둘 사이의 어리석은 충돌과 싸움에서 벗어나 보다 긍정적인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종교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뮈토스가 원래 가지고 있는 중요한 속성인 초월성과 신비, 그리고 이에 대한 겸손한 침묵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2. 감상평 。。。。。。。               

 

     사실 현재 종교가 처한 상황은 그리 밝지 못하다. 도킨스나 히친스 같은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은 연일 종교를 무슨 해로운 바이러스나 되는 양 때려대고 있고, 호킹과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은 과학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는 종교에 유죄판결을 내린다. 그런 행동들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물음은 뒤로 미루고서라도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의 저자인 카렌 암스트롱은 좀 다른 방식으로 신을 위한 ‘변론’을 시도한다. 그녀는 적대자들을 향해 ‘타당한가’를 묻는 대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는가’를 역으로 질문한다. 앞서 요약한대로, 과학, 혹은 이성이라는 기반 위에서 신을 공격하는 이들은 뮈토스와 로고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로고스의 입장에서 뮈토스의 가치없음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마치 천문학자가 톨스토이의 작품이 비과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물론 여기에는 종교적 언명을 사실 그 자체로 여기려는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도 함께 수반된다.

 

     언뜻 꽤나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보이지만, 서양 지성사 전반을 검토하는 지난한 작업 끝에 저자가 지켜낸 그 ‘종교’는 ‘예술’과 딱히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신의 초월성을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전제 때문에 결국 인간이 신과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모든 다리는 끊어져버렸고, 결국 그렇게 신과 어떤 관계도 맺을 수 없는 상태에서 남은 것은 막연한 감동(혹은 감정적/지성적 충동) 말고는 또 무엇이 있을까 싶다.

 

 

     물론 신앙은 단지 특정한 언명에 대한 동의/부동의가 아니라, ‘헌신과 실제 삶의 문제’라는 저자의 진단은 곱씹어 볼만한 부분이다.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신앙이 그를 어떤 방식으로든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정통적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에 대한 전인적 헌신(행동이나 자세까지 포함하는)이 그것에 대한 인지적 헌신(믿음?)과 따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다.

 

     또, 서양 지성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종교적 인물들의 주장들을 살피면서, ‘어느 시대나 종교적 삶은 각양각색이고 모순적’(233)이라고 해석하는 데도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저자가 살펴본 주요 인물들은 백년에 한 번 꼴로 새로운 논설을 펼칠 수 있는 인텔리 계층이고 대다수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일반인들의 생각이 어땠는가를 바로 보여준다고 할 수는 없다. 또, 무엇인가 기록에 남는 것은 언제나 이전과는 다른 것을 주장할 때이다. 즉, 차이가 과대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정리를 하는 데는 유용할지 모르나, 실제가 어떠했는가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그토록 종교를 뮈토스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저자가 가지고 있는 성경관(JEDP 문서설)은 로고스의 방식으로 성경을 산산조각 내는 지극히 근대적 방식이 아닌가.

 

 

     ‘신’과 그에 대한 반응이라는 중심 테마로 서양 지성사 전반을 요약해냈다는 점에서 만큼은 그 공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책이다. 오늘날 종교가 자칫 잃어버린 것 같은 신의 초월성에 대한 인식의 환기는, 신의 뜻을 자신이 완전히 알고 있다는 교만에 대한 경고로 받을 수 있겠다. 그러나 결론적인 논지에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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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1-10-12 13: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blueyonder 2011-10-1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가지, 제가 가지고 있는 의문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종교를 뮈토스로 봐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을, '지식(또는 교리)에 대한 시인'으로만 받아들이는 요즈음의 '믿음'이 고대의 뮈토스처럼 의식(또는 제의와 실천)을 통한 삶에 대한 태도 변화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곳에서는 사용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근현대의 과학이 그런 것이구요, 그래서 이성(과학)이 말할 수 있는 곳은 종교가 있는 장소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창세기는 그런 관점으로 보면 상징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다고 봅니다. 사실 창세기에서 많은 무신론자들이 걸려 넘어집니다. 교회에서는 성경이 문자적으로 모두 맞다고 하는데 과학에서는 다른 말을 하니까요. JEDP 문서설도 이성을 사용해서 합리적으로 성경을 분석해본 시도라고 보구요, 물론 100% 맞다고 얘기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나름대로 타당한, 성경을 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시한다고 생각합니다.

노란가방 2011-10-12 15:15   좋아요 0 | URL
신앙이라는 영역에 삶의 태도라는 중요한 지향점이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유익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이 책의 저자는 둘을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부분에 동의할 수 없는 거죠.

시간이 지날 수록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란 게, 또 삶이란 게 그리 쉽게 합리라는 영역과 신앙이라는 영역으로 나뉠 수 없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것이 역사적 기록인지 상징인지 하는 것도 마찬가지구요. 그런 식의 경계라는 건 서로를 겸손하게 만들기보다는 서로를 대립하게 만들더군요. 우리나라의 군사분계선처럼요.

찾아주셔서 고맙습니다. ^^

blueyonder 2011-10-12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감사합니다. 결국 저자의 주장을 따라가다 보면 종교 다원주의에 다다르게 됩니다. 이런 결론을 아마 기독교에서는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겠지요. 이것이 아마 종교학 저술이 기독교에서는 인기 없는 이유이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종교학 책을 보면서 느끼는 점이 그렇다면 과연 '진리'란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이 종교의 진리가 맞다면 저 종교의 진리는 틀리다는 얘기인데, 종교학 하시는 분들은 뭐가 맞다 틀리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이 책을 보면서 이러한 의문이 '조금은' 해소되었습니다.

노란가방 2011-10-13 09:23   좋아요 0 | URL
책 속의 한 구절을 인용해본다면, 진리에 헌신하기 전엔 그 진리는 보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종교다원론자들이나 비교종교학자들의 책들을 읽다보면 마치 먹어보지도 않은 음식을 품평하는 느낌이랄까... 뭐 그런 인상을 받곤 합니다.(어떤 분들을 비하하려는 게 아니라 제 주관적 느낌이랍니다.)

개인적으로 종교다원주의라는 건 해결책이 아니라 일종의 포기선언이 아닌가 하는 견해입니다. 종종 그러면서도 대단히 교만한 입장이죠. 종교다원주의조차도 종교에 관한 하나의 견해일진대 그게 절대적인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좀 안맞으실 수도 있지만 시간이 나신다면 낸시 피어시가 쓴 『완전한 진리』라는 책도 한 번 읽어보시면 좋을 듯 합니다.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도요. 제가 가진 관점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준 책들입니다.

blueyonder 2011-10-14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각자의 종교에서 헌신해서 '진리'와 '구원'에 다가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단, 종교 다원주의가 하는 말은 내 종교의 진리만 절대적이라고 할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닐까 합니다. '상대적 진리'라는 말이 형용모순이긴 하지만 내 종교의 진리를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결국 종교간에 싸움 밖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모든 종교에는 그 종교가 발생한 곳의 문화적 흔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화가 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종교적 진리도 상대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겠지요. 그런 면에서 저는 성경의 모든 글자가 계시에 의한 것이고 한 자도 틀린 것이 없다는 주장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노란가방 2011-10-13 19:34   좋아요 0 | URL
모두를 인정해야 해결되는 건 아닐 수도 있지요. 모든 중년 여성을 어머니라고 해야 가정의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요. 내 어머니는 한 분이고, 내 아내, 내 여자친구도 하나인 거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어머니를 제외한, 혹은 아내나 여자친구를 제외한 다른 여성들을 적대적으로 대할 필요는 없겠지요.

2011-10-13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가방 2011-10-13 19:42   좋아요 0 | URL
그러셨군요. 이렇게 웹상으로라도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어려운 말씀이실 수도 있는데 감사드립니다.

좀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교회에서도 이런저런 불만족함을 가진 분들이 주로 저에게 말씀해주시더군요. 다른 목사님들에게는 못하시겠다면서.. ^^;;

그 책들이 도움이 되셨으면 하네요.
 
과학적 경험의 다양성 -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 사이언스 클래식 16
칼 세이건 지음, 박중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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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천체물리학자인 저자가 자신이 이해하는 과학과 종교의 공존에 관해 1985년 글래스고 대학교에서 열린 기퍼드 강연의 강사로 나와 했던 강연을 책으로 엮었다. 광대한 우주 이야기로 시작한 저자는 그에 반해 인류와 인류가 살고 있는 지구가 얼마나 작은가에 관해 지적하면서, 우주가 마치 인류 중심으로 쓰이고 있다고 말하는 종교에 관해 가볍게 빈정거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어서 세계를 탐구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서의 과학의 우월함을 한껏 추켜올린 다음 종교란 그저 인류의 오랜 경험이 제각각의 모양으로 정형화된 신념 체계일 뿐이라고 단정 짓는다. 당연히 그런 ‘종교’에는 여러 인습적인(그래서 이제는 버려야 하는) 요소들이 잔뜩 들어 있어 버려야 할 것들이 많다고 말하지만, 예의 바른 저자는 청중들의 기분을 맞춰주려는 건지, 그래도 다 버릴 필요까지는 없고 ‘어떤 부분’은 남겨 두어도 괜찮다는 입장을 취한다. 마지막 강연은 그 ‘어떤 부분’에 관한 내용인데, 인류가 자기 파괴적 행동 - 이를테면 핵전쟁 같은 -을 하지 않도록 자제시키는 데 종교가 일정부분 역할을 감당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생각하는 것 같다. 

 

 

 

2. 감상평 。。。。。。。               

 

     사실 자연신학이라는 것 자체가 과학에 대한 종교의 굴복, 혹은 예속을 전제하는 시도다. 세상을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통로로서의 과학이라는 견해를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통해 세상(종교)을 재구성하겠다는 시도는, 잘 해야 과학의 호의에 기생하는 비자립적 종교를 만들어낼 뿐이다. 그런 자리에 칼 세이건 같은 강연자를 초청했으니 칼 자신은 꽤나 반색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그가 이 강연(책)에서 전개하고 있는 모든 논리는 바로 그 자연신학의 표준에 가깝다.

 

     여느 물리학자들처럼 칼 세이건도 역시 가장 작은 세계부터 광대한 우주 전체까지를 단일한 논리로 설명해 낼 수 있는 ‘대통합이론’의 신봉자이다. ‘신의 존재에 관한 한 과학자의 견해’라는 부제로 살짝 장난을 치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그에게 있어서 신이란 그저 우주의 물리법칙의 총합이라는 견해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과학적으로 입증할 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 언뜻 만약 신이 우주와 그 안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와 같은 일신론 종교의 말이 옳다면, 그 신이 굳이 자신이 만든 세계의 질서에 의해 측정되고, 혹은 제한되어야 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이런 부분은 잘 인식되지 않는 것 같다.

 

 

     책 속에는 소위 유신 논증이라고 불리는 다양한 시도들에 대해 저자가 하나씩 그 논리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깨뜨리는 부분이 등장하는데, 사실 인간이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오랜 시간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저자 역시 비슷한 과학주의 논증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십억 년의 시간이 흐르면 그저 당연하게 오늘날과 같은 다양한 생물과 인간, 문명들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하고 넘어간다거나, 막연히 현재의 과학으로 입증되지 못한 부분들도 언젠가는 완전히 설명될 것이 당연하다는 식이다.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설명되는 것만 의미를 갖는다는 생각은 이미 그 자체로 일종의 판단인데, 저자는 이것을 판단이 아닌 일종의 공리처럼 여기는 것 같다.

 

     물론 저자가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이비 종교나, 외계인 괴담과 같은 것들을 모두 긍정적으로 봐야 한다는 건 아니다.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서 우리는 늘 회의(懷疑)하고, 타당한지 과학적인 도구를 사용해 검증할 필요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과학은 우리 삶의 의미를 제시해주지 못한다는 것 또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정말로 인류가 그저 우주의 한 부속품에 불과하다면, 굳이 인류의 존속을 위해 애써야 할 이유는 또 뭔가. 이런 마당에 책 뒤편에 ‘종교가 과학 앞에서 부끄러워 할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어쭙잖은 제목을 붙인 옮긴이 후기가 좀 생뚱맞다.

 

 

     재미있는 부분은 이 책을 엮은 앤 드루얀이나 이 책의 추천자들 중 상당수가 칼 세이건을 상당히 ‘종교적인 인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이 책이 말하는 그것(물리법칙의 총합)이라기보다는, 비난하는 그것(일종의 ‘신비’가 더해지고 존경이나 경의가 필요한)으로서 이다. 상당히 아이러니한 부분인데, 오늘날 ‘종교’라는 단어가 가진 색깔이 얼마나 옅어졌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공교롭게도 그를 그렇게 칭송하는 이들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인데, 이건 마치 남이 와서 ‘너희는 지금까지 가족이 뭔지 제대로 모르고 있어. 사실 가족이란 건 이런 것인데, 이 사람도 너희 가족이야’라고 말하면서 모르는 아저씨를 삼촌이라고 부르라고 하는 식이다. 왜 어떤 사람이 우리 가족인지를 남에게 물어봐야 하는 걸까?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건 일본인들이 인정을 하고 말고는 상관없는 일인 것처럼, 어떤 사람이 종교인, 혹은 종교적인지는 종교에 속한 이들이 인정해야 하는 게 아닐까.

 

 

     자연신학이나 자유주의신학에 속한 사람들은 꽤나 호의적으로 볼 수 있겠다. 또, 자신들이 허용해주어야 종교가 살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적당한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과학주의자들도 좋아라 할지 모르겠다. 참, 오해하지 말자. 나는 저자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적어도 이 책에 나온 저자의 모습은 도킨스나 히친스와는 달리 상당히 신사적이다. 반대하더라도 예의는 지키는 게 맞는데, 요샌 이걸 이해 못 하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저자의 주장이 완벽한 것인가 묻고 있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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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yonder 2011-09-16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의 '신을 위한 변론'도 한 번 읽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도킨스나 종교 근본주의의 시각이 아닌 또 다른 합리적인 종교에 대한 시각을 보실 수 있습니다.

노란가방 2011-09-16 11:55   좋아요 0 | URL
네. 계획 중인 제주도 여행을 다녀온 뒤 꼭 읽어보겠습니다. ^^
아.. 찾아보니 오강남 교수님이 감수를 하셨네요?
제가 그분의 범신론을 딱히 좋아라 하지 않긴 합니다만..ㅎㅎ

2011-09-16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란가방 2011-09-16 12:26   좋아요 0 | URL
아 예... 그런 걸 알아내셨군요!! ^^;;
평점은 책이 제대로 만들어졌는지에 관한 거니까요.
동의를 하고, 하지 않고는 감상으로 남기면 되는거구요.
(물론 감상도 어느 정도 들어가긴 합니다만..ㅋ)
미니홈피에는 평점 7/10점을 줬는데 알라딘에선 표기방식이 달라 좀 깎였네요.
 
신은 뇌 속에 갇히지 않는다 - 21세기를 대표하는 신경과학자의 대담한 신 존재 증명
마리오 뷰리가드 & 데니스 오리어리 지음, 김영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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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요약 。。。。。。。                 

 

     책을 통해 저자들은 인간을 일종의 기계로만 보는 유물론적 견해만을 고수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타당성을 획득하기 어려우며, 오히려 ‘비유물론적 견해’가 현상을 좀 더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존의 유물론적 견해는 종교나 영성을 일종의 망상이나 착각 등으로 치부하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이 책에 나오는 ‘신 헬멧’과 같은) 뇌의 특정한 부분을 자극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신적/영적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신’이 뇌의 일부분이라는 어떤 증거도 실험적으로 입증된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물론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바꾸려 하지 않는데(심지어 언젠가는 유물론적으로 입증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반증을 무시하기까지 한다) 이는 유물론에 대한 헌신 때문이지 과학적인 자세는 아니다.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들은 종교적, 영적, 신비적 경험을 하는 것이 악의적인 비방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에게 실제적으로도 유익하다고 주장한다. 플라시보 효과나 노시보 효과의 실험적으로 의미 있는 존재는 뇌가 정신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역, 즉 정신이 뇌를 비롯한 물리적 신체에 영향을 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제적인 예다. 나아가 카르멜 수녀원의 수녀들의 관상기도를 연구한 결과는 그들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현상들이 단순한 조작이나 허풍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2. 감상평 。。。。。。。                

 

     인간에 관한 고전적인 이해는 정신(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합리주의가 지배적인 이념이 되고, 여기에 과학적 도구로 측정하고 설명 가능한 것만이 사실이고 진실이라는 완고한 과학주의가 더해지면서 이런 종래의 개념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쉽게 말해 인간이라는 존재에서 정신이나 영혼과 같은 비물질적인 부분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말 그대로 인간을 일종의 기계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종교는 부정되었고, 엄정한 실험과 관찰이 가능한 과학만이 최종적인 승리자로 남은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문제가 생겼으니 그 과학이라는 것을 진행할 수 있는 주체인 이성의 자리까지 함께 사라져버린 것이다. 또, 그것이 가진 강력한 결정론적 사고는 자유의지의 부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유물론적 세계관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설명하고 있는 자신이 사라져버리는 자기모순적 세계관임이 밝혀진 것이다. 자기가 올라가고 있는 사다리를 폭파시켜버리는 만화영화 속의 멍청한 주인공처럼 하고 있는 셈인데, 그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최근에는 인간을 유전자를 증식시키기 위한 덩어리로 생각하는 강력한 환원주의적 주장까지도 서슴없이 해대고 있다. 언젠간 자신들의 주장이 합리적인 증거로 증명될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아래.

 

 

     이 책의 가장 큰 공헌은 그런 유물론적 세계관이 가진 논리적, 그리고 증거적 허점을 잘 요약해, 그런 주장들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것인지, 실재를 설명하기 적절치 못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증거에 의해 믿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 종교적이고 영적인, 그리고 신비적인 경험들이 단순히 뇌의 특정한 반응에 의해서 발생되는 것이 아님을 학술적으로 증명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는 점도 높이 살만 하다.

 

    하지만 책은 신이 존재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연히 특정한 종교의 우월성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도 아니다. 책에서 카르멜 수녀원의 수녀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하는 것을 용납해주었기 때문일 뿐이다. 오히려 저자들은 다양한 종류의 신비적인 경험들을 동일선상에 두고 내용을 진행하려는 듯한 느낌이다. 때문에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길을 가다보면 자칫 C.S. 루이스가 말했던 신비주의자의 항해에 따라나섰다가 난파당하는 경우를 맞닥뜨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학계가 유물론적 믿음을 가지고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을 만나 곤란해 하고 있음을 제대로 지적해내고 있다는 점만큼은 상당한 의의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판적으로 읽는다면, 분명 읽을만 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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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심층을 보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11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1. 요약 。。。。。。。                 

 

     비교종교학자인 저자가 모든 종교와 철학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면서, 각 종교에 담긴 공통적이면서 중요한 유산들을 짚어보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스, 로마의 주요 철학자들부터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와 불교 등의 중요한 사상가들, 그리고 인도와 중국의 사상가들의 삶과 가르침을 되돌아본다. 

 

 

 

2. 감상평 。。。。。。。                

 

 

     표층종교와 심층종교라는 프레임으로 종교를 분석하고, 그래서 자신의 범신론적 기준에 맞지 않으면 죄다 ‘미성숙한 표층종교’로 분류해버리는 저자의 방식은 대단히 독단적이고 전제적이다. 수천 년을 이어온 각각의 종교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작은 것’이나 ‘비본질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바람직한 종교상’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만 따다 그것이야말로 본질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식이다. 마치 중국이 동북공정을 하며 발해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기 위해 분명한 개별적 특징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모습과도 유사하다.

 

     사실상 저자가 주장하고 있는 ‘바람직한 종교’란 범신론과 뉴에이지적 명상법의 뒤섞임인 듯한데, 여기에 신비주의적 전통까지 가미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현대인들이 대단히 매력적으로 여기는 이 범신론은, 겉으로는 모든 종교를 포용하고, 종교와 사상의 평화를 이루려는 대단히 민주적이고 평화주의적 관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를 위해 각 종교들로부터 특정한(혹은 특정하게 보이는) 교리들만을 취사선택해 만든, 어찌 보면 대단히 획일적이고 무색무취의 종교, 다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생각을 하면서 한 곳을 향해 걸어가는 거대한 군중들을 위한 종교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겠는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가장 오랫동안 믿어오던 범신론은 이렇게 현대의 자유주의신학의 바람을 타고 다시 찬란하게 부활하고 있다. 이들은 역사상 일신론이 극단적인 분열이나 적대감을 초래해왔다고 주장하는 듯하지만,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인들의 절반 이상이 이미 마음속으로는 기독교로 위장된 이 ‘내재적 범신론’을 따르고 있다는 연구도 나와 있는 걸 보면, 문제는 일신론이냐 범신론이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시대와 문화, 사회적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모든 종교를 현대의 관점에 놓고 같은 선상에서 보고 있는 비역사적 연구방식은 딱히 학문적인 것 같지도 않고, 인류 역사상 유구히 주장되어 온 범신론적 종교에서 딱히 새로운 매력을 느끼지도 못하겠다. 물론 현대의 종교인들에게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 문제가 범신론이나 유물론과 같은 다른 사상과 철학을 선택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기대다.

 

     동서양의 사상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한 권의 책에 모아두었다는 게 이 책의 유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나마 너무 단편적으로 실려 있고 거의 대부분 주관적인 변형을 가하고 있기에 딱히 잘 된 요약이라고 부르지도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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