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어떻게 삶이 되는가 - 아름다운 삶을 위한 철학의 기술
빌헬름 슈미트 지음, 장영태 옮김 / 책세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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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요약 。。。。。。。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삶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철학적 사고를 통해 삶을 좀 더 잘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는 데에 목표가 있다는 것. 사실 근대와 현대의 철학자들이 관심대상을 완전히 물질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으로 국한시키기 이전의 철학은 원래 그런 것을 다뤘었다.

 

철학이 삶을 다스리는 기술에 대한 자체의 전통적 연관을 다시 발견해낸다면 삶에 대한 성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에 대한 이런 새로운 이해가 삶의 기술 철학의 관심사이다.

 

      처음 세 개의 장은 이런 삶의 철학이 무엇이고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설명하고, 나머지 장들에서는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습관, 쾌락, 고통, 죽음, 시간 사용, 불안과 우울, 생태적 관점 등등)을 바라보는 좀 다른 관점들을 하나하나 제시한다.

 

 

2. 감상평 。。。。。。。

     저자가 제시하는 삶의 철학의 특징은 다르게 보기이다. 예를 들어 죽음은 삶의 한계를 지어줌으로써 더욱 알찬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추긴다. 가장 고유한 경험인 고통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면 자기 자신과의 관계 또한 단절되어 버릴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저자는 우리 삶을 두렵게 만들고 걱정시키는 여러 문제들을 오히려 삶의 도구로 바꾸어버리는 적극적이고 긍정적 관점을 보여준다.

     이쯤 되면 철학사를 배울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소크라테스니, 플라톤이니 하는 고대철학자들이 떠오른다. 세상을 논하고, 삶을 논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거대하기도 하면서, 웅장한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근대로 넘어오면서 철학자들의 이야기는 급속도로 작아져버린다. 영웅들의 시대는 가버리고 이제는 그냥 골목을 주름잡는 이들만 남아버렸달까. 우주와 삶에 관한 성찰은 사라져버리고 이제는 단어와 개념에 집착하는 (조금은 편집증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현대철학자들의 이야기는 별 매력이 없었다.

 

     자신도 시대적으로만 보면 현대에 속한 철학자이면서, 고대의 철학의 되살리는 저자는 좀 흥미로운 캐릭터다. 책을 읽으면서는 여러 군데 공감이 가는 부분이 보였고. ‘철학적 영혼의 치유사라는 타이틀도 책을 다 읽고 나면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다.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용기를 북돋고,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사람.

     다만 이 과정이 철저하게 개인의 사고만을 통해서 가능한 건지, 그 근거는 무엇인지 좀 의심스럽다. 저자는 (전통적으로 이런 주제를 오랫동안 다뤄 온) 어떤 종교적 권위도, 그렇다고 (현대 철학자들이 그러하듯) 과학적 근거를 의지하지 않는다. 오직 사유만으로 이 모든 걸 쌓아 올린다는 말인 걸까? 그걸로 충분한 걸까?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을 그렇게 믿어도 되는 걸까?

 

     물론 이 책에 실린 삶의 철학이라는 것이 하나의 도그마가 될 필요는 없다. 이 책의 가치는 삶의 매뉴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해 좀 더 깊고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데 있는 거니까. 그런 목적이라면 조금은 어렵지만 충분히 읽어 볼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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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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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저자는 삶이 끝난 이후에도 삶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사후의 삶이라는 것이 모순적 개념이라고 지적한다. 죽음이란 삶이 끝난 상태인데, 어떻게 또 이 가능 하느냐는 논리다. 이어 몇 개의 장에 걸쳐서 인간의 본질에 관한 두 주장오직 육체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일원론과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원론에 관한 논의를 하는데, 여기에서 저자의 논지는 분명하다. 영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없으므로, (자신에게는) 일원론을 따르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생각된다는 것.

 

     인간의 본질에 관한 논의에 이어 본격적으로 죽음이라는 주제에 관해 살피는 장들로 넘어간다. 저자는 여기에서도 앞서와 같은 사고실험들을 끊임없이 계속하는데, 예컨대 죽음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놓고서는, 우리의 삶이 지속적으로 즐겁고 행복한 상태라면 그것이 중단된다는 의미에서 죽음은 나쁜 것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죽임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식의 결론을 제시하는 식이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삶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며 그렇게 지속되는 기간 동안 행복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가 아는 한 어떤 일도, 100, 1000년 계속되어도 즐거운 것은 상상할 수 없으므로 영원히 사는 것을 소망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저자가 말하는 삶의 가치는 행복’(혹은 쾌락)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런 전제는 자연스럽게 삶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는 것을 누군가 허락할 것인가(다양한 유형의 자살에 관한 논의) 하는 질문에, 만약 어떤 사람의 삶이 고통스럽고 괴롭기만 하다면, 그 생명을 어느 순간 중단시키는 것도 본질적으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는 식으로까지 이어진다.

 

 

2. 감상평 。。。。。。。

 

     우선 책 뒷표지에 실린 홍보문구를 집고 넘어가자. “왜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학생이 끝까지 들으려던 강의인가?”라는 도발적인 문구인데, 사실 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그래, 그 정도로 깊은 감동과 교훈, 가치를 지닌 강의란 말인가? 그런데 책 속에 간략히 소개된 이야기에 따르면, 그 학생이 정말로 꼭 이 강의를 들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 학생은 졸업 전에 학위를 취득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고, 그 과정에서 이 강좌를 수강했다는 것이 팩트.

 

     꼭 이 강의여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책 속에는 딱히 설명되어 있지 않았고, 그렇다면 어쩌면 이 강의가 학점을 잘 줬거나, 과제가 적거나, 병원치료와 시간이 맞았거나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좀 싱거운 사실.

 

     ​물론 이 강의의 내용이 그 학생에게 위로를 주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은 그저 기계일 뿐이고, 영혼은 없으며(정확히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물리적인 증거가 없으며), 따라서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즐거움이며, 즐거움이 다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용납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강의를 듣고 그 학생이 어떤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쩌면 삶을 정리하는 데 일정부분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고.

 

 

     사실 저자의 철학적 논리 전개 방식이 썩 인상적이거나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책 초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이원론적 입장에 대한 공격에서 저자가 사용하는 것은 플라톤의 저작 속에 나오는 영혼의 불멸 사상인데, 사실 영혼의 존재를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이 플라톤 식의 이유를 들어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이런 전략은 방향을 잘못 잡은 게 아닌가 싶다.

 

     특히 저자는 영혼의 존재에 관해서 아직까지 그걸 인정해야만 하는 증거가 없다는 식의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물론 여기에서 증거는 물리적인 증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약 영혼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기본 개념상 물리적인 육체와는 다른 질적 양상을 지닌 무엇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물리적이지 않은 무엇을 물리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해야만 한다는 요구가 과연 적절한 걸까?

 

     ​나아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는 저자의 또 다른 유력한 주장인, ‘영혼을 가정하지 않더라도 인간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는 논리 역시 충분히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저자 자신도 인정하는, ‘의식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기 때문. 이 부분은 얼마 전 읽었던 C. S. 루이스의 위험한 생각에서도 다루고 있는 문제와도 비슷하다. 어떻게 우연하고 자연발생적으로 존재하게 된 인간의 육체가 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나아가 논리이성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 역시 아직은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67)고 말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입장(오직 육체만 존재한다)은 철회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언젠가 그 원리가 자연주의에 입각한 방식으로 밝혀질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

 

     ​영원히 살아가고픈 인생을 여러분은 과연 상상할 수 있겠는가?(339)라고 물으며 영생에 대한 소망을 비웃는 부분 역시 딱히 논리적으로 일관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몇 페이지 앞에서(271)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하고 있기 때문.

 

 

     ​철저하게 논리를 기반으로 죽음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려는 시도가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어쨌든 우리가 죽음에 관해 물리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할 수 있는 건 죽어 있는 육체일 뿐이니까. 매미의 사체를 해부한다고 해서 매미에 대해 더 잘 알게 되는 건 아니고, 꽃잎을 샅샅이 조각낸다고 해서 꽃에 대해 모든 걸 아는 게 아니라는 소설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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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구원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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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저자는 현대인들이 모든 것을 매끄럽게만듦으로써 아름다움이 가지고 있는 본래적 야성을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진단한다. 매끄러움은 모든 불편한 것들을 제거해, 누구에도 상처를 입히지 않게(정확히는 못하게’) 된 상태이다. 철학적으로는 모든 부정성이 제거된 상태. 저자는 사회 곳곳에서 이런 매끄러움의 문화를 발견한다. ‘좋아요가 진리의 기준이 되어버린 SNS 세계, 디지털화된 각종 매체들, 향락적 소비주의, 상업화된 미용산업 등.

 

     ​당연히 저자가 말하는 아름다움의 회복’, ‘아름다움의 구원은 잃어버린 야성, 부정성, 거부와 장애물, 상처의 가능성을 감당하면서 관조적 거리를 유지할 때 가능하다. 이런 은폐와 관조는 단순히 순간적으로 즐기고 소비되어버리는 매끄러움의 문화와는 달리 즐거움을 최대화시킬 수 있고 나아가 사랑하게 만들 수 있다(49).

 

 

 

 

2. 감상평 。。。。。。。

 

     매끄러움이라는 주제로 현대사회의 각종 현상들을 해석해 내는 기술이 하도 현란해서 멍하니 쳐다보게 된다. 철학책을 이렇게 매력적으로 쓸 수도 있구나 싶은.

 

     ​모든 것이 그렇게 매끄러워지고, 편해지고, 깨끗해지면 사람들이 더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세균을 죽인다고 광고하면서 결국 사람을 죽여 버린 화학약품, 지저분해 보이는(?) 잡풀들을 제거하고 콘크리트를 발라 깨끗하게 만든 하천변 산책로는 발전의 증거가 아니라 병적인 집착이었다.

 

     포르노그래피의 문제는 왜곡된 성 의식만이 아니라,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버린 채 바로 목적을 달성시키는 그 묘사 방식 자체에도 있다. 그 안에는 아무런 깊이도 없고, 그저 즉각적인 욕망의 만족만 남는다. 마치 지름신을 영접하고 쇼핑센터에서 정신없이 카드를 긁는 심리다. 현실 속 과도한 지름신 영접은 지갑과 통장을 파산시키지만, 상상 속 과도한 소비는 정신을 황폐화 시킨다. 저자는 사회 전반에 깔려 있는 매끄러움의 문화를 이런 포르노그래피에 대응시키는데, 탁월한 지적이다.

 

 

     현실에 대한 분석은 탁월하지만, 대안의 제시는 상대적으로 약하다. 칸트와 헤겔의 미학을 설명하는 부분은 좀 어렵다. 결론이 좀 더 탄탄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저자가 철학 학위만이 아니라 사회학 학위까지 따야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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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이름 짓기 - 기독교 세계관 라이브러리 003
제임스 사이어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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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책은 집에 돌아와 아빠에게 질문하는 한 아이의 물음으로 시작한다. 학교에서 둥근 지구본을 보고 그것이 지구의 모형이라고 배웠는데 그 지구는 무엇이 받치고 있느냐는 것. 아빠는 낙타가 바치고 있다고 대답한다. 아이는 이해가 되는 듯하지만, 이내 다시 와서 묻는다. 그 낙타는 무엇이 받치고 있죠? 캥거루. 캥거루는 무엇이 받치고 있죠? 거대한 코끼리야. 그러면 코끼리는요? 그 밑에는 계속 코끼리야!

 

     이 이야기는 세계관의 속성을 재미있게 보여준다. 모든 세계 이해의 근본이 되는 것, 가장 기초적인, 모든 이론을 떠받치고 있는 그것. 결국 그 아래 있는 무한한 코끼리들의 이름을 뭐라고 부르는가에 따라 어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이 드러나게 된다. 유물론자들은 물질이라고 대답할 것이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언어라고 이름붙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기독교적 유신론자들은 그 코끼리의 이름을 하나님이라고 부를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은 여기에서 나온 것.

 

 

     저자는 세계관에 관한 여러 철학자들의 정의를 살펴본 뒤(2), 이 논의에서 가장 근본에 깔려 있는 것은 인식론이 아니라 존재론임을 보여준다.(3) 이어서 세계관이 갖는 독특한 특징들에 관한 논의가 이어지고(4-5), 그것이 단지 각자의 세계 이해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공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 차원도 있음을 지적한다(6). 책의 결말부인 7장에서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공들여 재 정의한 세계관의 개념이 실려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세계관이란 이야기의 형태로 혹은 실재의 근본적 구성에 대해 우리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일관적이든 비일관적이든) 보유하고 있는 일련의 전제(부분적으로 옳거나 완전히 잘못된)로 표현되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몸담을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는 하나의 결단이요 근본적인 마음의 지향이다.(173)

 

    8장은 일종의 부록처럼 보인다. 저자는 세계관 논의가 오늘날 학문적인 영역에서 어떻게 다뤄지고 있는지 그 현상을 보여준다.

 

 

2. 감상평 。。。。。。。

 

     오랫동안 기독교 세계관을 연구하고 많은 책들을 써 온 제임스 사이어가 이번에는 세계관 자체의 정의에 관해 탐구하는 책을 썼다. 저자는 여러 철학자들의 세계관 개념들을 살피면서 세계관을 재정의 하는 작업을 시작하는데, 덕분에 책의 내용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세계관의 정의를 담고 있는 저자의 이전 저작인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정도를 생각했다면 살짝 당황할지도..

 

     책은 필연적으로 저자가 가지고 있는 세계관(기독교적 세계관)을 따라가지만, 그렇다고 책의 내용이 기독교 세계관을 설명하는 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이래의 많은 책들이 이런 구성을 따르고 있다.) 그보다는 철학적 논의를 따르고 있다는 게 맞아 보이는데, 이를 테면 저자가 초반에서 중요하게 제시하는 명제는, 세계관을 연구할 때는 인간이 무엇을 아느냐(인식론)’에서 시작할 것이 아니라 무엇이 진정한 실재냐(존재론)’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전의 책(‘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에서 충분히 다루지 못했던 지점, 그래서 종종 오해 - 세계관에 관한 논의가 너무 지적인 측면만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제기 -를 받기도 했던 부분을 보완한다. 이번 책에서 저자는 세계관에 대응되는 성경적 용어로서 마음이라는 영역을 제시한다.

 

     성경에서 마음이란, 사람의 지적 측면만이 아니라 정서와 욕구, 의지, 영성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인간 자아의 핵심적 영역을 가리킨다. 만약 세계관이 결국 마음의 문제라면, 그것은 단지 우리가 이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만 머물지 않고, 이 안에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된다. 세계관 논의가 지나치게 지성 위주로 진행되는 현실 속에서 이 점은 꽤 중요한 지적이다.(이 부분을 읽고서 비로소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의 몇 구절을 떠올리며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책의 내용이 쉽지는 않아서 아무에게나 추천하기는 주저되지만, 책의 전체적인 논의를 정리해주고 있는 7장 정도는 확실히 읽어둘 가치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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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 - '제국'에 맞서는 보편주의 윤리를 찾아서 What's Up 1
알랭 바디우 지음, 현성환 옮김 / 새물결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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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약 。。。。。。。    

 

     저자는 신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바울 텍스트를 철저하게 비종교적인 문맥에서 읽어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스스로를 기독교적이지 않다고 자부하는 저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높게 평가하는 부분은, 그가 당시 로마 제국으로 대변되는 전체주의적 사상과 문화(여기에 유대주의도 포함된다)에 대항해 일종의 특수성(책에서 이는 주체라는 용어로 표현된다)을 강조함으로써 저항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책 전체에 걸쳐서 바울이 선언했다고 생각하는 주체성에 대한 강조가 이어지는데, 이에 대한 평가는 아래에서 하도록 하겠다.

 

 

2. 감상평 。。。。。。。  

 

     '제국의 권력에 맞서 싸우는 투사 바울'이라는 책 뒷표지의 홍보문구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제국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의 정치적, 군사적 세력으로서의 제국이라기보다는 거의 철학적인 차원에서의 제국즉 비유적인 표현으로서의 제국이다. 따라서 바울이 했다고 설명되는 투쟁도 철저하게 철학적인 차원에서의 투쟁일 뿐이지, 딱히 실제적인 무엇을 했다고 하기 애매하다. 저자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주체성을 회복하는 게 투쟁의 내용이라는 것.

 

 

     문제는 이 과정에서 바울 텍스트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의 편지들은 철저하게 현실 위에 기반하고 있다. 각각의 편지들은 특수한 상황과 사례들 위에 올려져 있으며, 그 사례라는 것은 철학적 논쟁이 아니라 교인들 사이의 분열과 다툼, 새롭게 만들어진 공동체 안에서의 권위 문제, 그들의 신앙을 떠받혀 주는 교리에 관한 조언들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런 실제적인 차원을 모두 지워버리고 모든 것을 철학적인 사유로 전환시킨다.

 

     요컨대 바울은 시장의 언어로 편지를 썼지만, 저자는 그걸 철학자들의 언어로 개작시키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바울의 분명한 지시들마저 모호한 주체성에 대한 강조로 변질되고 있고, 이는 주체성에 대한 강박관념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바울의 메시지를 현대적으로 읽어내려는 시도 자체는 뭐라 하기 어렵지만, 그의 이름과 용어만 빌린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건 좀 부당해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바울은 사상가이자 시인, 투사(13)이다. 물론 바울에게 그런 면이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쓴 편지들의 또 하나의, 아니 가장 중요한 축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도가니 속 불순물’(12), 또는 우화’(16)로 여기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질문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바울의 종교적인 언설들을 비유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시도까지도 보여주는데, - 요컨대 바울이 그토록 강조하는 예수의 부활을 단지 가능성의 선언으로 해석해 버리기도 한다(170). 그러나 이건 명백히 바울의 생각과는 다르다 이쯤 되면 지금 저자가 말하는 바울은 그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사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바울의 좀 더 실제적인 정치사상이나 개혁가로서의 면모를 읽어보고 싶다면, 이 책보다 브라이언 왈쉬가 쓴 제국과 천국이란 책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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