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생각해보자.

모든 사람에게 10의 힘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기업에 직원 10명이 있다.

조직의 실패가 발생하지 않는다면, 이 기업에는 100의 힘이 있다.

이게 최대치다.

그런데 경쟁이 심해지면,

사람들이 5의 힘만 회사를 위해서 사용하고

5의 힘은 경쟁자가 된 동료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사용하게 된다.

그러면 이 조직이 최대한 쓸 수 있는 힘은 50으로 내려간다.

50의 힘을 쓰는 조직과 100의 힘을 쓰는 조직이 경쟁하면,

당연히 100의 힘을 쓰는 조직이 이긴다.


우석훈, 『민주주의는 회사 문 앞에서 멈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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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중립성의 신화 - 학문 이론과 종교적 믿음의 상관관계
로이 클라우저 지음, 홍병룡 옮김 / 아바서원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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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이 두툼한 책을 손에 들었을 때, 다 읽는 데 3주나 걸리게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중간에 서너 권의 책을 읽었지만, 그건 이 책이 워낙에 까다로운 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어서 잠시 머리를 식히는 겸 읽었던 것들이었다. 내용만 그런 게 아니라, 170*235mm라는 사이즈도 일반 책들에 비해 훨씬 크고, 미주만 100페이지인 전체 500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들고 지하철에서 책장을 넘기고 있으면 손목이 아플 정도였다.


그래도 이 책을 꾸역꾸역 읽어나갔던 건, 역시 담고 있는 내용이 흥미로워서였다. 책 제목처럼 이 책은 소위 “종교적 중립성”이라는 것이 신화에 불과하다는(여기서 신화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의미다)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일까?


신앙을 갖지 않았다고 주장하는(책에서는 이런 사람도 결국 특정한 신앙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물론, 신앙인들조차도 오늘날 신앙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지대가 있다는 데 공감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의 영역이 그런 (종교적 중립성이 작동하는) 자리다. 신앙을 가진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1+1=2”라는 수식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분자와 원자, 양자의 세계에 관한 이해에도 별 차이가 없으니까.(물론 “창조과학”이라는 독특한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우주의 역사에 대해 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견해에 정면으로 반대한다. 사실 우리가 중립적이라고 보는 그런 영역들도 알고 보면 종교적 전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사람들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믿음의 내용에 따라 이론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해석도 한다고 덧붙인다. 책 후반부에도 설명되지만 1+1=2라는 수식을 인정하더라도 그 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서로 다를 수 있다는 것.





우선 저자가 말하는 ‘종교’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 한다. 책 초반에 길게 이 내용이 설명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 부분에서 많은 반박이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흔히 종교라고 하면 무슨 종교적 의식에 참여하고 하는 것들을 떠올리는데, 우리가 (피타고라스의 그의 신자들처럼) 숫자나 양자를 그런 식으로 숭배하지는 않으니까.


먼저 저자가 말하는 신적인 것의 핵심은 그것이 인격적인 것인지, 선한지, 예배를 받는지의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무조건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는지”다. 어떤 것이 “종교적”이라는 말은 이런 “근원적 실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게 종교적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것은 증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전제로서 우리의 사고에서 작동하기 때문이고.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1+1=2라는 공식을 바라보는 관점들에도 분명 차이가 존재한다. 수-세계 이론에 따르면 이 수식은 실제 세계 속에 존재하는 어떤 것(진정한 실재)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이 “영원하고 필연적인 진리로, 세계가 파괴되어 계산될 수 있는 물체와 그것을 계산할 수 있는 인간이 사라지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진정한 실재”는 분명 종교적인 전제/믿음이다.


반면 존 스튜어트 밀은 숫자를 감각적 지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오직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보았기에, 1+1=2라는 공식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관찰할 때마다 그런 결과가 나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앞서의 라이프니츠와 달리 숫자를 계산할 사람과 계산될 수 있는 사물이 사라지면 이 공식은 무의미해진다. 밀의 주장에서는 인간의 감각이 신적인 존재로 올려진다.


버틀런트 러셀은 또 다른 설명을 한다. 밀처럼 러셀 역시 그는 1+1=2라는 수식의 배경에 영원한 무엇이 있다는 식의 설명을 거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단지 감각적 경험의 문제로 보면 여기에서 확실성이 흔들린다는 점을 포착했고, 결국 수학을 감각이 아닌 논리로 정의하려고 했다. 즉, 수학은 논리를 개진하는 방식이라는 것. 러셀에게 신적인 것은 논리적 양상이었다.




저자는 이런 식으로 우리가 접하고 있는 모든 영역들에는 각자가 신봉하고 있는 신적인 것이 전제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흥미로운 건 기독교인들조차 ‘종교적 중립지대’를 인정하면서, 자연스럽게 기독교적이지 않은 전제를 가진 주장들을 따라가곤 한다는 지적이다. 비기독교적 설명들은 대체로 ‘환원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아닌 무엇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둔다는 의미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이런 환원주의적 전제에 기초한 이론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그건 그들의 신앙을 타협, 혹은 (그 영역에서)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저자는 말한다.


책의 후반에는 사회학 이론이나 국가론에서 어떻게 비환원주의적인(성경적인) 설명이 가능한지 그 예를 들고 있다. 여기에는 도예베르트나 영역주권이론이 짙게 배어있다. 모든 것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이 두신 질서가 세계를 이해하는 기본이라는 전제 아래, 각각의 이론들을 검토해 나가는데 이 부분이 또 흥미롭다.


저자가 종교적 중립성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국가나 사회, 조직에서 특정한 종교(예를 들면 기독교)를 우대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괴롭혀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선 앞서 언급했던 영역주권이론이나 도예베르트의 이론에서 국가의 존재 이유는 특정한 종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현대의 세속국가 체제에서는 정반대의 일, 그러니까 환원주의적 이론을 중립적인 양 가장해 신앙인들에게 강요하는 일이 더 자주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또, 과학 이론에서의 성경적 기초를 강조한다는 말이, 일부 근본주의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성경에서 과학원리를 이끌어 내야 한다는 의미로 오해되서도 안 될 것이다. 저자는 이 부분에 관해 몇 페이지에 걸쳐 반박을 하면서, 그런 태도는 성경을 성경으로 제대로 보지 못하는 오해라고 말한다.




모든 학문에 종교적 신념이 전제되어 있음을 밝히는 과정, 그리고 어떻게 기독교적 관점에서 학문을 쌓아올려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몇 가지 설명들이 인상적이다. 다만 후반의 적용 부분에서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성경적인 기초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좀 더 설명해 주었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살짝 든다.


내용도 외형도 묵직해서 읽기가 쉽지만은 않겠지만, 끝까지 읽어낸다면 분명 사상적 차원에서 균형감각을 갖는데 도움이 될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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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부자는 빈자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원리는 기독교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예전에 사람들이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은

빈자도 생활필수품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그에 대응하는 원리였다.

그 원리는 교회 법률가들이 규정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의 ‘권리’였다.


- 톰 홀랜드, 『도미니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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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서 표출되는 의견들은 하찮아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거기서는 입 뚫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마디씩 한다는 데 있다.


움베르토 에코, 『미친 세상을 이해하는 척하는 방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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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치가 저지른 악의 실체를

알아보지 못한 한 가지 이유가

그들에게 고통이 낯선 것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든 고통 없이 살려고 무의식적으로 노력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있는 힘을 잃어버렸단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 『덕과 성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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