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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연변이들
로빈 브랜디 지음, 이수영 옮김 / 생각과느낌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그게 왜 바람직하지 않아? 걔들은 착한 일을 했어.”
“맞아. 하지만 좋은 생존 전략은 아니라는 거야. 걔들은 이기적일 필요가 있어.”
1. 줄거리 。。。。。。。
이제 고등학교에 들어간 미나는 자신이 쓴 편지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 교회 친구들(정확히 곤경에 처한 것은 그들의 부모들이지만)의 따돌림으로 하루하루가 힘겹기만 하다. 그 속 좁고, 이기주의적이며, 무례한 친구들은 미나가 큰 죄라도 지은 양 노골적으로 괴롭히지만, 미나는 무대응으로 일관한다.
그런 미나의 삶에 작은 활력소를 주는 것은 셰퍼드 선생님이 가르치는 생물 시간과 그 시간 짝이 된 케이시라는 남자 아이. 교회 친구들로부터 버림을 받은 미나는, 이제 창조론을 주장하는 교회 친구들을 마음껏 비웃는 완고한 진화론자 친구들을 새로 사귀면서 조금씩 고립감에서 벗어난다.
2. 감상평 。。。。。。。
이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스토리 라인이 얽혀있다. 표면적으로는(이 책의 뒷‘표지’와 소개하는 글의 주요 내용이기도 하다) 진화론과 창조론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 한 소녀의 이야기가 있고, 부차적으로는 주인공이 쓴 편지로 인해 곤경에 처하게 된 교회 사람들 및 그들의 자녀들과 주인공 사이의 갈등이 있다. 엄밀히 말해 이 두 가지 갈등은 직접적인 논리적 연결고리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작가는 이 두 이야기를 하나로 엮어서 교묘하게 한 가지 주장을 편다. ‘학교에서 친구를 괴롭히는 교회 친구들이 주장하는 창조론은 틀렸다’ 같은.
당연히 이 소설은 ‘다윈과 기독교의 끝나지 않는 논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진화론은 과학이며(이 소설에서는 ‘과학’이라는 말과 ‘사실’이라는 말이 동의어로 사용되는데, 이런 용법은 매우 독단적이다), 창조론(혹은 지적설계론)은 ‘철학’(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철학’이라는 용어는 사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논설쯤으로 여겨진다)일 뿐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p. 154-155) 그나마 소설 속에서는 이런 주장을 블라인드 뒤에서 말하고 있는데, 책 뒤에 붙은 해설에서는 노골적으로 사족을 붙여 놓아서 오히려 본문을 쓴 작가의 수고를 무위로 돌리고 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도 이 책의 ‘위대한 예’를 따라서 사족을 좀 붙이자면, 저자는 진화와 변이 사이의 구별을 정확히 하고 있지 않은데, 진화론을 믿지 않고서는 독감 바이러스의 변종이 나타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정 짓는 부분이 그 예이다.(p. 95) 바이러스의 변종이 등장하는 것은 같은 종류의 생물이 가진 형질의 변이이지, 바이러스가 말이 되거나 소가 되는 진화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대대로 칼을 잘 만드는 장인 가문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칼을 만드는 데 최적화 된 어떤 동물로 변할 거라는 생각은 좀처럼 믿기 어렵다. 진화의 가장 좋은 예로 등장하는 화석(cf. p. 331) 역시, 한 지층에서 발견되는 화석과 다른 지층에서 발견되는 화석이 다르다는 것은 앞선 지층에서 발생된 생물이 뒤에 발견된 생물로 변화되었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그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동물들이 살았던 증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요컨대 이 문제는 사실(이건 있었던 일 자체를 말하는 표현이다)에 관한 해석의 문제 혹은 세계관의 문제지, ‘사실’과 말도 안 되는 거짓말’(p. 154) 사이의 힘겨루기가 아니다. 사실 과학만이 진실이라는 명제는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유구하게 흘러온, 족히 3, 400년은 이어져 온 개념이다. 하지만 이 주장의 후계자들은 후설이 지적한 것처럼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오류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비교적 근래에 등장한 과학철학에서는 과학 자체가 지니고 있는 패러다임의 문제를 비교적 솔직하게 받아들인다. 증거에 의해 믿는, 증거로만 지탱되는 과학적 사실이란 하나의 허구적 개념이며, 현대의 복잡하고 좁은 과학계에서는 상호 교차 점검이라는 학문적 개념이 실제로 수행되기가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다.(철학이란 게 늘 그렇게 쓸 데 없는 거짓말을 정당화시키는 일만하는 건 아니다) 쉽게 말해 어떤 과학자가 말한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동료 과학자들에 의해 엄밀하게 증명될만한 시간이나 기술적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다.(이와 관련해서는 『진실을 배반한 과학자들』이라는 책을 읽어보라. 쿤의 유명한 책 『과학혁명의 구조』도 좋고.)
작가는 셰퍼드 선생을 진화론을 믿으면서도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는 ‘쿨 한 사람’으로 묘사하지만, 반대로 진화론자들 혹은 과학적 의견을 때려잡을 사탄 일당으로 여기지 않는 기독교인들도 있다. 소설 속 미나의 친구들이나 출석하는 교회의 목사의 행태는 물론 비난 받아야 마땅한 일이겠지만, 그런 식으로 한다면 난 마땅히 중형을 받아야 할 악질적인 무신론자나 유물론자의 예를 수없이 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무신론자나 유물론자라는 이유만으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건전한 상식이겠지만(그리고 이건 기독교라는 조건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미나라는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라는 측면에서는 그래도 볼만한 소설이다. 작가는 고등학교 1학년 소녀의 미묘한 심리변화를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으며(언젠가 고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다시 봤을 때 느꼈던 낯 뜨거움과 유사한 느낌으로 책장을 넘겼다), 주인공은 조금씩 회의하면서(물론 내가 보기엔 충분히 회의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자라가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