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미나리스 - 그리스도교를 밝게 비춘 스무 개의 등불, 바울부터 로메로까지
로완 윌리엄스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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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전, 혹은 위대한 인물들에 생애를 요약한 책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다. 1세기 살았던 고대 로마시대의 그리스 출신 저술가인 플루타르코스가 쓴 영웅전은 유명하고, 그보다 한 세대 후의 작가였던 수에토니우스는 로마 제정 초기 황제들의 일화를 담은 황제전을 써냈다.


교회 안에서도 비슷한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이쪽은 성경 속 인물이라든지, 신앙적으로 모범이 되거나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그 주요 저술 대상이 되었다. 일부 초기 저작들는 외경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자주 낭독되기도 했고, 성인열전과 비슷한 식으로 여러 명의 인물들을 묶어서 담기도 했다.


이 책은 잘 알려진 성공회 신학자인 로완 윌리엄스가 쓴 일종의 성인열전, 또는 신앙인 열전이다. 가장 먼저 소개되는 건 바울이고,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나 켄테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 안셀무스, 에크하르트, 틴들처럼 교회사에서 주목받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기도 한다. 또, 19~20세기 활동했던 기독교인들도 적잖이 등장하는데, 윌버포스나 찰스 디킨스 같은 인물은 좀 유명하지만, 세르게이 불가코프나 에디트 슈타인, 에티 힐레숨 같은 인물들은 조금 낯설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이런 인물들의 일생을 요약하고, 그들의 사상과 글과 말 등을 정리하는 식의 내용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것들은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전제한 채로, 그들의 삶에서 저자인 윌리엄스가 생각하기에 특별했던 요소들을 골라서 그 부분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각각의 인물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정리되어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들을 모았다고도 볼 수 있다. 다분히 윌리엄스의 신학적 사고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더듬어 갈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책에 실린 내용 중 일부는 저자가 각각 다른 자리에서 했던 강연이나 글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켄터베리의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글은 BBC 라디오에서 했던 강연에서 가져온 것이고, 에크하르트나 크랜머에 관한 내용은 서로 다른 교회에서 했던 강연, 틴들에 관한 글은 저자가 앞서 출판했던 책 속 한 부분이다.


물론 잘 편집되어 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맥락을 잡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면, 또 그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다면 조금은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다. 개인적으로도 현대 인물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부족하다보니 살짝 어렵게 느껴지기도 했고.


흥미로운 건 이 책의 바로 앞에 읽었던 수학에 관한 책에서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시몬 베유라는 이름의 여성 철학자가 이 책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이렇게 연속으로, 그것도 전혀 다른 장르의 책에서 동일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 경험은 매우 드문데, 내친 김에 좀 더 파봐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깊은 신학적 사고와 유려한 문체, 그리고 훌륭한 번역자의 작업이 더해져서 미적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 잔뜩 담겨있다. 이런 게 전 세계 성공회의 최고 지도자였던 캔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저자의 품격이다 싶다.


다만 조금은 현학적이라는 느낌도 동시에 들기도 하는데, 이건 책에서 그려지고 있는 세상의 모습이 우리가 매일 뉴스에서 접하고 있는 그것들과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물론 뉴스라는 게 언제나 자극적인 것들만 모아서 가공하는 나쁜 버릇이 있긴 하지만, 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지금’을 보여주는 중요한 매체이니 무시할 수만은 없는 부분이다.


물론 이 책은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지시하는 책은 아니다. 교회의 과거와 가까운 어제를 살피면서 우리가 오랫동안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안내서에 가깝다. 언제나 이런 목표를 확인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그곳에 이르는 과정에 많은 돌발현상들이 일어나겠지만, 목표를 잃지 않으면 결국 도착하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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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C. 스프로울, 고난과 죽음을 말하다 - 고통 속에서 발견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소명
R. C. 스프로울 지음, 김진우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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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권에서 스프로울이라는 이름은 널리 알려진 신학자다. 개인적으로 그분의 책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국내에 번역되어 소개된 책만 해도 수십 권이나 되니까. 내가 앞서 읽어본 책은 어린이에게 기도에 관해 쉽게 설명하기 위해 쓰인 책이었다. 자칫 지루하거나 어렵게만 느껴질 수 있는 신학적 주제를 쉽게 설명하는 재능이 있는 저자다.


이번 책에서는 제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고난’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신학적으로 설명한다. 사실 이 두 가지 주제는 일찍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종의 난제로 여겨졌던 것들이다. 왜 선하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보존하면서 대답하고자 하는 노력이 신정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왔고.


이 책도 어떤 면에서는 신정론의 한 부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 방향이 약간 다르다. 신정론은 하나님에 관해 설명하려는 시도라면, 이 책은 고통과 죽음을 겪는 인간의 입장에서, 특별히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저자는 죽음을 ‘마지막 소명’으로 진단한다. 죽음이 소명이라는 의미는, 그 부름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즉, 죽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다. 기독교계 일각, 특히 번영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조금 놀라운 주장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치유와 회복의 하나님으로만 보려고 애쓰니까. 그러나 죽음은 사탄의 승리가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기 때문에 임하는 사건이다(히 9:27).


죽음을 이렇게 정의하면, 이제 그것을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제대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하나님은 때로 죽음과 고통을 명령하고 우리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하신다. 중요한 것은 그 고난의 골짜기를 그분과 함께 걷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고난을 통해 더욱 성장했다.


또 저자는 성경은 죽음의 원인이나 방법이 아니라 죽는 사람의 영적 상태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중요한 지적이다. 반면 오늘 우리는(심지어 그리스도인들도) 죽음 그 자체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정작 중요한 영적 상태에 충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책의 2부는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견해와 성경의 견해,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마주하게 될 사후의 상태, 천국에 관한 성경의 증언을 정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리뷰를 쓰고 있는 지금, 시리아와 튀르키예 국경 지대에서 큰 지진이 일어나 벌써 5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는 뉴스를 보고 있다. 몇 달 전에 우리나라에서도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이 압사해 죽는 사고가 있었고, 러시아의 침략으로 시작된 전쟁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쪽 모두에서 또 엄청난 죽음과 고통을 발생시키고 있다.


확실히 고통과 죽음은 어렵다. 그건 너무나 거대해서 몇 마디 말로, 아니 아무리 두꺼운 책을 써도 모두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외침과 비명은 너무나 커서 그저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무시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당장 우리 주면서도 그리 드물지 않게 이런 일들은 일어나고 있으니까.


물론 이 책이 죽음과 고통에 관한 모든 내용을 다 풀어냈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경에 나온 내용을 모두 정리한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정도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알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내용은 충분히 담아내고 있는 것 같다. 아주 깊은 신학적 사유는 아니라도 이 정도면 건전한 복음적 이해라는 소기의 목표는 얻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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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 - 역사와 정치와 구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지음, 성염 옮김 / 분도출판사 / 197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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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이란 남미를 중심으로 정립된 일종의 과감한 사회참여의 신학이다. 20세기 중반 남미는 극심한 부패에 시달리고 있었고(오늘날에도 크게 개선되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 결과 엄청난 빈부의 격차가 발생하고 사회 정의가 무너지면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과연 교회의 신앙에 적합한가를 두고 많은 도전들이 있었고,(사실 정확히 말하면 교회는 기득권층과 결탁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문제를 그냥 지나치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이 나섰고, 당연히 이들의 활동에는 강한 정치적 행동이 포함되어 있었다.


해방신학은 그렇게 처음부터 실천적인 차원이 먼저였다. 하지만 어떤 운동이 계속 유지되려면 이론적 근거가 마련되어야 하는 법, 1973년에 처음 나온 이 책(우리나라엔 1977년에 첫 번역본이 나왔다)은 당시 남미 가톨릭교회 주도의 해방신학의 창시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즈가 이 새로운 운동의 신학적 근거를 정립하기 위해 쓴 책이다.





책의 1부에서는 신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해방과 개발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정립한다. 흥미로운 건 흔히 신학에서 주요 주제로 다뤄지지 않는 ‘개발’이라는 것이 일찌감치 제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그 시절 개발 중심의 사회정책이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좀 더 확장된 개념인 ‘해방’을 신학의 주요한 주제로 제기한다.


2부에서는 성과 속에 대한 전통적인 구분과 분리가 어떻게 교회의 바른 신학적 행동에 문제를 가져왔는지를 지적하면서 이원론을 극복해야 함을 호소하고, 3부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에 대한 분석이 이어진다.


4부는 전통적인 신학적 용어로 해방신학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구원론, 종말론, 역사신학 등의 분과에서 해방신학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내용상으로는 이 부분이 가장 길다.





교회의 사회 참여는 어느 정도, 어느 강도로 가능할까. 오늘날 대부분의 세속국가에서는 정교분리를 기본적인 원칙으로 삼고 있지만, 이 말이 교회가 사회의 다양한 논의와 문제 해결과정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규정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교회가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는 듯하다.


물론 그 이유를 전혀 추측할 수 없는 건 아니다. 복잡한 사회문제는 필연적으로 어느 한 쪽이 무조건 옳고 다른 쪽은 틀리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이 과정에서 어느 편에 서느냐는 (좁은 의미의) 정치적인 문제로 비워질 가능성이 높다. 이는 교회를 정쟁의 한 가운데로 끌고 들어가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 결과 교회는 매우 누그러진, 그래서 누구에게도 별 도전이 되지 않는 좋은 이야기만 하는, 그래서 아무도 귀 기울일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기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과연 교회는 충돌이나 비난이 두려워서, 정쟁에 끌려들어가기 싫어서 이 문제를 지금처럼 둬도 괜찮을까?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가톨릭에서 시작된, 그리고 지나치게 “좌파적인” 이 신학에 대해 심한 경계를 보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수십, 수백 억짜리 건물을 화려하게 꾸며놓은 강당을 채우는 게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인지는 곱씹어 볼 일이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의 가장 기초적인 필요를 모른 체 하지 않으셨다. 당시 성전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꾸미려고 했던 인물은 헤롯이었고, 대제사장들이었는데, 이들은 모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흥미로운 부분이다. 자신의 성전을 세우려는 이들은 하나님의 성전이신 그분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전반적인 신학적 전개에는 크게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다만 만인구원론을 주장하는 부분은 견해를 달리 하는데, 이 주장이 저자가 세워가고 있는 해방신학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벽돌인지는 조금 의심스럽다.


물론 저자가 이 책을 쓴 197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과 오늘 우리의 상황에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가 기득권과 한 패가 되어 있다는 비판이 존재하는 우리의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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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 무슨 소용이냐고 묻는 이들에게 - 지혜, 안녕, 경이의 탐구와 신학의 쓸모에 관하여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이은진 옮김 / 포이에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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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신학’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비판적 시각이 있다. 하나는 원래 기독교는 단순하고 순수한 신앙이었는데 신학이 이를 괜히 복잡하고 어렵게만 만들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신학 작업이 정작 하는 일이란 실제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그들만의 학문이나 토론주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이 중 두 번째 비판은 중세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스콜라 철학/신학(당시에는 철학과 신학이 크게 구분되지 않았다)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바늘 끝 위에 천사가 몇 명이나 올라갈 수 있을 지를 두고 벌어진 의미 없는 논쟁이 그 대표적인데(사실 이 논쟁은 겉보기와 달리 중요한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긴 하지만), 확실히 신학계 일부에서 벌어지는 다툼은 더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이기도 하니, 여전히 이 비판은 유효한 면이 있다고도 하겠다.


그러나 이 비판은 신학 자체가 쓸모없음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신학이 잘못된 방식으로 그 작업을 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봐야 한다. 보다 근본적인 신학 자체에 대한 비판은 첫 번째 쪽일 텐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이 책의 저자인 맥그라스는 신학이 (신앙생활에, 또는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 무슨 소용이냐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책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좀 더 큰 그림을, 후반부는 좀 더 구체적인 이유들을 제시하는 데 사용된다.





저자는 신학을, 성경 본문에 관한 연구와 해석들이 모여 만들어진 오래된 기독교 전통으로 본다. 신학에는 교회가 보존해 온 풍성하고 귀중한 유산이 담겨 있다. 그걸 무시하는 사람은 바로 이 유산을 버리고 새 집을 지으려는 사람과 같다. 신학은 과거와 오늘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고, 복음이 변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울타리이기도 하다.


사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신학 발전의 역사이기도 했으니 저자의 이 말은 크게 틀리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시하는 바로 그 신학(정통 신학)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했는지를 생각해 보면(뭐든 뒤집어엎는 걸 좋아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는 그 시절 이단들에게만 피해자 서사를 입히기를 즐겨하지만, 실제 역사와는 좀 다르다), 오늘날의 상황이 살짝 민망할 정도다.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에서 바로 튀어나온 게 아니라, 2천 년을 버텨온(여기에는 바른 신학이 그 뼈대가 되었다) 동안의 신앙 공동체의 유산을 받아 일어난 후계자들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그냥 내가 선언하기에 따라 결정되는 게 아니라 내가 어떤 유산과 역사를 이어 받았는지로 결정되는 법이다.


저자는 또한 신학이 온통 흩어지고 조각나 있는 세상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가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신학은 성경을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창을 제공하기도 하고, 이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지도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린 후, 책의 2부에서는 지혜와 안녕, 경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바탕으로, 신학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어떤 유익을 주는지를 아름답게 서술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중에서도 세 번째 주제인 ‘경이’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신학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와 우리가 공부해 가는 그분이 얼마나 크신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더 멀리까지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끈다. 인생의 목표를 제시해주는 것이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그러므로 모두가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대신, 한 발 더 나아가 이미 우리 모두가 신학자라고 선언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신학의 필요성, 신앙생활에서의 신학의 가치 등을 두루 고려해 보면, 이미 우리는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어떤 식으로든 신학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의미다.


신앙생활을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신학과 만나야 한다. 신학의 도움을 받아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나아가 적용을 한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신학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이뿐이 아닌데, 우선 실천적 차원에서는 교회에서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제대로 신학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나 자리가 부족하다.(개별 교회가 그런 교육을 할 수 있는 역량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 또, 학문적 차원에서는 너무나 분산되어 있는 현대 신학계에서 도대체 무엇을 어디서부터 공부해야 하는지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다.


또, 신학이 교리와 동일시되는 오해도 조심해야 할 부분이지 않나 싶다. 물론 어떤 교리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결사적으로 지켜야 하지만, 또 다른 교리들 중에는 견해의 차이, 또는 현재 상황에서는 추측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는 것들도 있으니까.


이런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우리는 여전히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 이미 좋은 개론서나 입문서들이 많이 나와 있으니 그것부터 시작해 볼 일이다. 부디 그 안에서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더 깊은 신앙생활로 나아가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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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것 - 예수님의 길을 걷는 지혜로운 삶
유진 피터슨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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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유진 피터슨의 미출간 원고들을 모아 새로운 책이 나왔다. 그의 명성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예상되는 행보였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 속 영적 흔적을 탁월하게 발굴하고 그걸 명료한 문장으로 보여주었던 영적 탐정이자 문장가였던 유진 피터슨이기에, 그의 글을 읽는 건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자극을 준다.


이 책에 실린 글의 대부분은 그가 매주 자신이 사역하던 교회 공동체를 위해 썼던 목회서신에서 뽑았다고 한다(몇몇 글은 목사안수식 설교라든지 하는 다른 자리를 위한 글이었다). 때문에 전반적으로 교인들의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매주 그의 설교와 그가 보낸 편지를 받는 기분은 어떤 것이었을까.



크게 다섯 개의 주제―시작, 단순함, 기도와 찬양, 자비, 영광―로 구성해 피터슨의 글을 비슷한 주제별로 모아두었다. 애초에 한 권의 책으로 만들 생각이 아니었기에 일부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문장과 주제들이(오랜 시간 매주 한 편씩 쓴 것이라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보인다. 또, 독자는 일정했지만 그 상황은 다양했을 텐데 그 정확한 배경이 대개 적혀있지 않아서 추정해야만 하는 어려움도 있다. 차라리 발췌한 원래 글의 날짜라도 적어줬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피터슨의 다른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특징이지만, 이 책에 실린 글에서 매우 자주 반복되고 있는 주제라면, 역시 ‘일상’의 중요성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만나주시는 곳은 무슨 특별한 시공간이 아니라 바로 이곳, 여기이다. 일상의 평범해 보이는 일들은 실은 영원과 만나는 특별한 문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특별히 눈을 뜬 사람들에게 보이긴 하지만.



자신의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애정을 담아 꼭꼭 눌러쓴 피터슨의 자취가 짙게 느껴지는 글들이다. 신앙생활 속 평범하면서 특별한 진리를 날카롭게 찾아내는 솜씨에는 늘 감탄하게 되고, 그걸 멋진 표현으로 풀어낼 수 있는 능력도 부럽기만 하다. 새해를 맞아 신앙생활을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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