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 - 풍요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복음대로 사는 법
윌리엄 윌리몬 지음, 이철민 옮김 / IVP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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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퍽 길다. 제목을 지은 사람이 할 말이 많았나 보다. 원래 이 책은 저자인 윌리엄 윌리몬이 한 교회에서 했던 설교문들을 모아 엮은 것이라고 한다. 사역 초창기에 이런 설교를 했다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은 여전히 통하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도 꽤나 익숙한, 전형적인 간증 레퍼토리는 한결같다. 한 때 자신은 꽤 성공적인 위치에까지 올랐지만, 어떤 이유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실제적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예수님을 만났고,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저자는 여기에서 질문을 던진다. 과연 기독교는 이렇게 비참하고, 박탈당하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만”을 위한 종교인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기 위해 우선 비참해질(문자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억지로 자신이 불쌍한 위치라는 것을 끊임없이 되뇌어야 하는가.


이런 고정관념이 갖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찾으셨다고 말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결단하시는 것에서 모든 것은 시작한다. 끊임없는 자기 비하와 감정적 회개의 요구는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만들뿐더러, 이제 회개 이후의 은혜 안에서의 삶을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앞서의 접근법이 갖는 결정적인 문제 중 하나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강한 사람”에게는 이런 방식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존의 교회는 그들을 어떻게든 “무릎을 꿇리려고”(그래야 하나님의 필요를 인정할 테니까) 애쓰기만 하는데, 그들은 정말로 딱히 부족한 게 없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또, 그저 번영의 복음만을 외쳐온 얄팍한 공동체에 대해서도 이들은 별 흥미가 없는데, 그들은 이미 충분히 번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한 사람에게는 강한 사람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건 은혜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의 소산임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자연히 감사의 자세로 이어진다.(당신은 죄인입니다로 시작하는 접근방식과 어떻게 다른지 주목하자)


물론 그들에게도 부족함이 있다. 사실 그들이 가진 것들에도 한계가 분명히 있다. 지식은 다함이 없고, 조직의 위계 정점에 올라간 사람은 자신이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모으기만 하는 사람은 정작 쓸 수가 없다. 즉, 그들의 강점이 잘못 사용되면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 관해서 기독교는 분명 해 줄 말이 있다.




사실 조금은 강해 보이는 제목에 비해,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은 조금은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책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 지적되고 있는, 현재의 복음제시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정말 우리는 누군가를 정서적으로 약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을 제시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접근이 사람을 그저 “집단”이나 어떤 “덩어리” 정도로 뭉뚱그려버린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모든 청년들에게 가진 재산을 다 팔아 나누어주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한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불러 자신을 따라오게 하셨지만, 바로 그 근처에서 그분에게 고침을 받은 어떤 사람은 그분을 따라다니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기도 했다. 요컨대 그분의 처방은 사람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 달랐지만, 우린 빨간 약 하나면 모든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금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조금은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도 좀 더 정교한 고민과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설교가 나온 지 40년이 지났지만, 과연 이 부분에서 뭔가 제시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함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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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이 입성하는 날 - 이사야가 전망하는 하늘나라
리처드 J. 마우 지음, 김동규 옮김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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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고 가벼운 책은 이사야 60장에 실려 있는 예언을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석처럼 다양한 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종합하는 식은 아니고, 정경적 관점에서(요새 이 단어는 성경에 대한 지나친 난도질을 거부하면서 좀 더 전통적인 관점으로 읽고 설명해 나가는 방식을 가리키는 듯하다), 또 통전적인 관점에서 풀어내는 책이다.


이사야 60장은 구원의 환희로 가득한 예언이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외침(개역개정판)으로 시작해서, 예루살렘의 완전한 회복을 묘사한다. 저자는 이 예언이 기본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그 예언 속 주요 메시지 네 가지를 뽑아 하나님 나라의 속성에 관해 설명한다.





첫 번째 요소는 “다시스의 배들”이다. “다시스”는 고대 근동 지역에서 멀리 있는 부유한 땅이라는 이미지로, 탐욕에 대한 경고와 연결되어 대체로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용어이다. 하지만 이사야는 회복될 이스라엘의 이미지에 이 “다시스의 배들”이 오고가는 모습을 더한다.


두 번째 요소는 “왕들”이다. 여기서 왕은 이스라엘의 왕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왕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이민족들의 침입에 시달렸던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 대해 대단히 부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해 왔다. 당연히 그들의 왕들은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터. 그런데 이사야 60장의 예루살렘에는 이 “왕들” 역시 등장한다.


이 두 가지 요소는 완성될 그 나라의 다양성을 말해준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 나라는 특정한 민족이나 계층, 사람들을 배제함으로써 순수함을 회복하는 게 아니다. 심지어 과거 이스라엘이 적대적으로(적어도 신앙적으로는) 여겼던 것들(다시스의 배나 이방의 왕들)도 그 곳에 있을 수 있다. 물론 지금 그대로가 아니라 일종의 정화를 거친 뒤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섬기는 모습으로 말이다. 이건 세 번째 요소인 “이방 나라들의 젖”을 예루살렘의 주민들이 마시게 될 것이라는 내용과도 연결된다.


마지막 요소는 그 성을 비추는 빛이다. 그 빛은 태양이 아닌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그분이 세상의 모든 불의를 제거하실 것임을 나타낸다.





시종 편안하게 읽혔다. 확실히 내가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읽도록 훈련받아왔음을 자각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언뜻 성경 구절들만 잔뜩 늘어놓을 것 같지만, 책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상황과 어려움, 그리고 그 해결책에 관한 고민도 함께 품고 있다.


사실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안다면, 그 포괄적인 성격을 이해한다면, 그것을 단순히 내세의 문제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은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소망과 방향을 알려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사야에서 요한계시록으로 이어지는 새 예루살렘의 환상 사이에 연계점이 있으며, 그 가운데서 공통점과 신학적 발전을 읽어낸다. 성경을 파편적으로만 연구하는 게 익숙한 현대의 학자들에게서 잘 보이지 않는 관점인데, 훌륭한 솜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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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추린 기독교 교리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지음, 이후정 옮김 / 컨콜디아사(재단법인한국루터교선교부유지재단)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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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저자의 책을 대여섯 권 읽어보면, 이제 그 저자에 대한 평가가 어느 정도 확실히 잡히곤 한다. 앞으로 그 저자가 쓴 책을 계속 찾아볼지, 아니면 이제 그만 보는 게 나을지. 나에게 이 책의 저자인 후스토 곤잘레스는 믿고 봐도 좋은 교회사 관련 저자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번 읽고 말게 아니라 구입해서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봐야할 책을 내 주는 인물이다.


곤잘레스의 책의 장점이라면 역시 좋은 정리다. 교회사라는 방대한 내용에서 중요한 포인트를 콕 집어내서 전반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학술 연구자들은 좀 더 방대한 배경자료들이 필요하겠지만, 나 같은 일반 독자에게 그런 것까지는 필요 없으니까.(필립 샤프의 방대한 전집에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이유다.)


또, 이런 자료들을 그저 늘어놓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읽기 쉽게 풀어놓는 재주도 가진 작가다. 여기엔 과도한 찬탄이나 탄성이 들리지 않고, 역사가로서 가능한 객관적인(물론 세상 어디에도 완전한 객관성 따위는 없다) 서술을 담담하게 해 나간다는 점도 읽는데 부담스럽지 않게 해 주는 부분이다.





이 책은 제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기독교 교리’에 관한 내용이다. 제목이 좀 딱딱해서, 또 교리라는 것에 대한 선입관 때문에 왠지 무지 지루하고 재미없는 책처럼 보이지만, 실제는 전혀 다르다. 물론 이 책이 무슨 무협지나 SF소설처럼 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기독교에, 그리고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면 꽤 재미있게 책장을 넘길 수 있도록 쓰였다.


이 책의 특징은 연대기적 서술을 하면서도 동시에 주제별로 통시적인 관찰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열한 가지의 신학 주제들을 배치하는 데, 그 순서가 교회의 역사에서 그 주제를 다룬 순서를 따른다. 이건 어떤 신학 논의가 등장하게 된 이유와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각각의 주제들을 서술하면서는 단지 그것이 처음 나왔을 때의 논의만이 아니라 중세, 근대, 현대의 논의까지를 아울러 설명현서, 주제에 대한 좀 더 복합적인 이해를 돕는다.


기본적으로 이런 구성만으로도 어느 정도 점수를 먹고 들어가는 책이다. 이게 말은 쉽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이니까. 2천 년 기독교 신학의 전반적인 흐름에 관해 폭과 깊이를 두루 갖춘 괜찮은 교양서적이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이 2천 년이라는 역사와 전통 위에 서 있지만,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서 있는 기반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그 결과로 나오는 것이 온갖 허접하고 허술한 진술과 스스로는 기발하다고 우쭐대나 실은 이미 이단적이라고 밝혀진 얄팍한 사고들이다. 또, 현재 우리가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는 진술들이 신학 역사에서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몇몇 인물들로 소급될 수 있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그게 절대적인 진리인 양 착각하기도 하고.


또, 저자는 교리란 우리가 절대적으로 지키고 따라야 할 무엇이 아니라, 비유하자면 야구 경기의 파울선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그 선을 넘어가면 아무 의미가 없는 무효타인 거고, 그 안에 있어야 유효한, 하지만 일단 그 라인 안에만 있으면 수없이 다양한 상황들을 얼마든지 용납해 낼 수 있는 그런 선이 교리라는 말이다. C. S. 루이스가 말했던 “난간”과도 비슷한 설명이다.


교리는 여전히 어렵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교리 자체가 가지고 있는 특성이라기보다는 그것을 다루는 신학자들의 욕심, 혹은 방식 때문일 것 같다. 곤잘레스가 자주 쓰고 있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교리는 예배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애초에 교리가 단순한 지적 토론으로 위한 것이 아니었음을 기억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또, 교리는 예배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교리가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도록 인도해주지 못한다면 그건 제대로 된 교리가 아닐 수 있다.



좀 더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리를 좀 더 편안하고 재미있게, 그러면서도 그 유익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론 시작은 익숙지 않아서 좀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첫 발을 떼지 않으면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없는 법이니, 조금은 참고 시작해 보면 어떨까. 이 작업에 이 책이 분명 도움이 되겠지만, 아쉽게도 일찌감치 절판되었다. 혹 아직 중고로 구할 수 있을 때 구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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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복음이다
톰 라이트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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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란 무엇일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단어(요새도 이 단어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가 ‘복음’이다. 그런데 그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이 책의 저자인 톰 라이트는 많은 사람들이 “그 의미가 매우 축소된 버전의 복음”만 알고 있으며, 이건 기독교에 대한 이해에도 심각한 문제를 일으킨다고 지적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복음의 내용은 이렇다. 1) 온 세상은 죄를 지어 하나님의 분노와 처벌을 받아야할 운명에 처해 있다. 2)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 분노와 처벌을 대신 받으셨다. 3) 예수를 믿으면 우리도 그 처벌로부터 면해질 수 있고, 나아가 죽음 이후 약속된 천국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이렇게 묻는다. 그게 전부인가?





성경신학(신약) 전공자인 저자는 이 문제를 복음서를 좀 더 자세히 읽는 것으로 풀고자 한다. 복음서(와 다른 신약 저작들)의 저자들이 생각한 복음은 징벌과 그 면제라는 좁은 개념이 아니라, “이 세상에 큰 영향을 주는 좋은 일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선언”이었다는 것. 여기에서 선언이란 단순히 상징적이고 공식적인 언급에 불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라는 뜻이다.


복음서가 쓰일 당시 널리 통용되었던 ‘복음’에 관한 이해가 있다. 그것은 황제와 같은 인물들이 자신이 이룬 결정적인 승리, 혹은 어떤 업적을 널리 선전할 때 사용하던 용어였다. 이제 그 조치로 인해 장차 더 좋은 일이 확정적으로 일어날 것이고, 당연히 현재 그 사건을 마주하는 사람들의 삶을 바꿀 것이다. 저자는 기독교의 복음 또한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오늘날 많은 교회가 초대 교회의 이 ‘선포’를 매우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나 ‘천국에 가기 위한 방법’으로, 그리고 좋은 소식이 아니라 충고 정도로 바꾸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면 복음이 갖는 애초의 역동성과 기쁨이 사라지고 대신 지루하고 부담스러운 규칙들이 양산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





복음이 단순한 교훈이나 충고가 아니라 기쁜 소식의 선포라는 지적은 인상적이다. 또, 어떻게 이런 변질이 나타났는지 역사적인 과정을 추적해 본 것도 의미가 있었다. 확실히 초기 기독교 시대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과 오늘날의 사람들 사이에는 반응에 명백한 차이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개념에 문제가 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는 지적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바른 지식은 바른 믿음의 중요한 요건 중 하나다.


다만 그 “소식”이 우리의 오늘과 내일에 어떤 실제적인 효과와 변화를 일으키는지에 관한 설명이 좀 부족한 건 아쉬운 부분이다. 물론 이 책은 제목에도 나와 있듯 복음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가 행동을 권고하는 조언이 아니라 선포라고 강조한다면, 그것이 가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변화의 내용도 아울러 제시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복음의 의미에 관해서 좋은 설명을 담고 있는 책. 한 번쯤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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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 조력자살 한국인과 동행한 4박5일
신아연 지음 / 책과나무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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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하는 고난주간, 우연히 이 책을 손에 들게 되었다. 책은 제목처럼, 안락사가 법으로 허용되어 있는 스위스에 다녀온 작가가 그 경험과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은 에세이다.


스위스에 가게 된 동기가 독특하다. 오래 전부터 작가의 글을 읽고 알고 있었던 한 독자가 갑자기 연락을 해왔고, 기대수명이 얼마 남지 않으 상태로 큰 고통을 겪고 있던 그는 안락사 신청이 받아들여졌으며 작가가 자신의 그 마지막 여행에 동행해 주었으면 한다는 의사를 표해왔다. 그는 일찍이 호주로 이민을 간 한국인으로, 이 여행에는 아내와 다른 지인들도 초대해 놓은 상황이었다.


처음 만나는 상대와 함께 안락사를 위한 스위스 여행에 동행이라니... 책 초반에는 이 초대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서도 계속해서 고민에 빠지는 작가의 모습이 실려 있다. 사실 누구라고 해도 이런 초대에 응하고 싶을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특별히 자신을 지명해 초대했다는 점과 작가로서의 모험심, 즉 이 여행을 통해 뭔가 글을 남길 수 있겠다는(그건 “그”의 요청이기도 했다) 생각이 어울려서 따라나섰던 것 같다.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무겁다. 한없이 늘어지는 준비 과정과, 막상 스위스에 도착해서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길들, 그 와중에 지인들을 무심히 배려하는 “그”의 모습. 마침내 당일 일이 진행되고, 돌아온 후에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 마음과 지난 일을 복기하며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까지 모든 작업이 느릿하게 진행된다.


온라인서점인 알라딘에 이 책에 관한 100자평이 좀 우습다. 하나같이 1점이라는 괴상한 점수를 부여하고 있는데, 물론 이 책이 명작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1점이 부여될 정도의 형편없는 글은 아니다.


주된 이유는 작가의 기독교 신앙을 지나치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스위스로 갈 때까지만 해도 종교를 갖지 않았던 작가가, 귀국 몇 개월 후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되었고, 이 책을 쓸 때 자신의 신앙을 바탕으로 그날을 해석(자살은 옳지 않다)했던 것이 화근이었나 보다. 물론 이런 식의 비난은 별 가치도, 의미도 없는 공감과잉의 결과일 뿐이다.


애초에 돌아가신 분의 삶과 품성에 대해서 작가는 어떤 비난도 하지 않고, 자살이라는 선택 자체가 가지는 종교적 의미에 대해 설명하려 했을 뿐이다. 물론 작가가 선택한 해석이 기독교 전체의 유일한 해석은 아니고, 또 굳이 그 이야기를 여기에 덧붙임으로써 “그”의 죽음에 어떤 평가를 내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게 최선이었나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글쓰기 방식으로 썩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지만, 한 사람의 기독교인으로서 스스로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죽음에 대해 뭐라도 덧붙여야 할(그래서 다른 사람은 가능하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의무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정도 말은 충분히 할 수 있지 않을까? 그걸 못하게 막으려고 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과도한 PC주의나, 죽음에 대해서는 무조건 특정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일방적인 사고에 빠져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돌아가신 분이 굳이 작가를 초청했고, 그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써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면, 그 방향까지는 뭐라고 쓰던 별 상관은 하지 않았을 것 같긴 하다.





개인적으로는 이 괴로운 여행을 결정하고, 그 모든 과정을 지인들과 함께 나누려고 했던 “그”의 생각과 심정에 더 큰 관심이 갔다. 자신이 죽을 날짜를 정하고, 그걸 알면서도 그 길을 향해 나서는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마치 이번 주 떠올릴 수밖에 없었던 그분이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걸어가면서 들었던 생각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물론 두 죽음의 의미나 효력이 비슷하다는 건 아니다.)


기독교인들조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하나님 아들의 결연하고 당당한 행보 정도로만 여길 때가 있다. 하지만 겟세마네에서의 처절한 기도에서도 알 수 있듯, 그분도 여느 사람들처럼 두려움과 불안, 초조함을 느끼셨을 것이다. 죽음은 누구라도 함부로 가볍게 대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오히려 그분이 맞이하신 죽음을 좀 더 생생하게 상상할 때, 우리가 일으킨 죄의 결과의 파괴력에 대해서도 더 실감나게 인식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하지만 역시 책의 전체적인 구성은 꽤 아쉽다. 안락사(조력사)의 신학적 문제를 지적하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자리이긴 했으니까. 하지만 꽤 담담한 시선으로 조력 자살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 심리상태를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읽을 만한 내용이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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