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발흥 - 사회과학자의 시선으로 탐색한 초기 기독교 성장의 요인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이현수 감수 / 좋은씨앗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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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입한 지 제법 된 책으로, 책장에서 기다리다 이제야 손에 들었다. 그런데 첫 몇 장을 읽어나가면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어, 이 책 이미 읽은 책인데?’ 그랬다. 이건 읽은 책이었다. 초반에 저자가 제시하는 초기 기독교 신자의 수와 증가율 등의 인상적인 수치가 이미 내 머릿속에 있었다. 하지만 뭐 한 번 읽은 책이라고 해서 다시 읽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으니까. 무엇보다 책이 흥미로우니까.


그래도 예전에 읽었다는 확인(?)을 하기 위해 이전에 쓴 리뷰를 찾아봤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놀라운 사실. 이 책에 관한 리뷰가 없었다. 읽은 책 전부를 리뷰로 쓰는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혹 누락됐나 싶어서 블로그가 아닌 파일 폴더를 뒤져봐도 없다. 혹 책의 제목이 바뀐 건가 싶어서 저자명으로 검색해도 없다. 이 정도면 정말 신기한 일이다. 난 이 책을 안 읽었던 걸까? 하지만 책 후반부까지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 계속 나온다. 이게 무슨 일인지...


엊그제 한 지인이 한 가지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어쩌면 다른 책에서 이 책의 내용을 많이 인용한 것을 본 걸지도 모른다고.. 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왠지 찜찜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진실은 뭐였을까...




책은 기독교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물이다. 흔히 기독교 관련 책 하면 신학적인 관점이나 신앙적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 이 두 관점은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기독교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를 한다는 점은 공통점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충분히 제대로 된 분석과 평가가 있느냐 하는 게 관건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이라고 해서 그냥 있는 자료를 쭉 가져다 모아놓는 것만으로 해석이 되는 건 아니다. 필연적으로 어떤 도구를 동원해 분석을 해야 하는데, 신앙적 관점은 “지금의 나”가 더 중요하기에 이런 분석에 애초에 별 관심이 없고, 신학적 관점을 띠고 있는 책들의 경우에도 제대로 된 분석이라기보다는 저자의 신앙을 드러내는 식의 결론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신학계가 사회와 유리된 채 연구를 지속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특히 보수성을 강조하는 보수 교단이나 교파에서는 더더욱 교회의 일에 대한 어떤 사회적인 해석이나 접근을 터부시하는 경향도 있고.


이런 상황에서 초기 기독교의 놀라운 부흥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물이 나온 건 반가운 일이다. 이 책의 저자는 신학자도 아니고, 역사학자도 아니다. 소개를 보면 원래는 언론학을 전공하고 기자로 활동하다가 UC 버클리에서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얻은 후 사회학자와 비교종교학자로 수십 년간 교수직을 맡은 사회학자다. 자신에게 가장 익숙한 도구를 가지고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바라본 것이니 내용도 충실하다. 그리고 당연히 교회사만 읽던 사람들에게는 조금 낯선 부분도 있다.




책에는 온통 신선한 관점들 투성이다. 1장은 초기 기독교회의 놀라운 성장 속도에 관한 내용인데, 1세기부터 4세기까지 저자는 기독교가 10년에 40%의 성장률을 이어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고 보면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했던 시기 로마 인구의 거의 절반이 기독교인이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흔히 생각하는 “바닷물의 염도와 비슷한 3~4%의 기독교인” 같은 개념과는 전혀 다른 그림이다.


2장에서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계급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노예와 같은 하층민들이 주류가 아니라, 오히려 중류층과 상류층에서 광범위한 개종자를 얻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기존 신앙체계의 모순점을 깨닫고 새로운 신앙으로 개종하는 부류는 어느 정도 교양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3장에서는 교회와 유대인의 관계에 대해 다룬다. 역시 여기에서 일반적인 그림은 교회가 일찌감치 유대인들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독립적인 길을 걷기 시작했다는 것인데, 이 책의 저자는 좀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기독교는 꽤 오랫동안 유대인들을 첫 개종 대상자로 여겨왔고, 실제로도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기독교인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4장과 5장은 초기 기독교의 급성장에 영향을 준 요인들을 다룬다. 4장은 만연한 역병과 그로 인해 파괴된 인적 네트워크. 결과적으로 새로운 신앙을 선택하기에 적합한 사회적 상황이 만들어졌음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또 5장은 교회 내 여성들의 위상이 꽤 높았고, 이들을 중심으로 자연스러운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유아(주로 여아나 장애아) 유기나 살해, 낙태, 유산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던 당시 교회는 이런 여성에 대한 학대적 조치들을 반대했고, 그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교회에서 위안을 얻고, 나아가 신자들의 출생율과, 비신자 남편들의 전도까지 용이해졌다는 것.


7장은 당시 동방의 중요한 도시였던 안디옥(안티오키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끊임없는 파괴가 이루어지는 상황 속에서 기독교가 어떻게 안정감을 줄 수 있었을 지를 묘사하는 장이다. 그리고 아마도 8장은 가장 논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내용인데, 바로 순교자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기존의 교회사적 관점에서는 그들의 깊은 신앙심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는데, 여기서는 순교가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꽤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만한 보상이 있었단 말이다.




한 장 한 장 따로 날을 잡아서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고 싶을 정도다.(유튜버 직업병이다) 그만큼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는 책이라는 말.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여기 제시된 내용이 완전히 입증된 것은 아니다. 사회학적 연구라는 게 그런 식으로 뭔가를 입증해 내는 게 아니다. 나름의 논리에 따라 어떤 가설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다. 또 이미 지나간 일, 그것도 2천 년이나 지난 일을 확실하게 입증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확실히 초기 기독교 시기의 다양한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해 주는 책이다. 사실 이 책의 저자나 여느 교회사가들이나 볼 수 있는 자료는 한정적일 텐데, 이렇게 서로 다른 관점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게 흥미롭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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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선택한 사람들 - 탈교회 상황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회심하고,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교회탐구포럼 시리즈 11
정재영 외 지음 / IVP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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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었던 책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과 제목 면에서 정반대인 책이다. 하지만 방법론에 있어서는 완전히 반대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앞서의 책이 최근 교회를 떠난 8명을 인터뷰해서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한 책이라면, 이 책 역시 다양한 종류의 사회학적 조사를 통해, 최근 5년 안에 새롭게 교회를 선택한 사람들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정리해 낸 책이다.


물론 그 연구 방법에 있어서, 이쪽이 좀 더 체계적이고 그 대상도 많다. 거의 500명에 달하는 교회를 선택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시행한 광범위한 설문 조사 결과(1장)와 그 중 연령과 성별로 뽑은 8명을 인터뷰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눠 본 인터뷰(2장)가 이루어졌으니까. 4장도 비슷한 설문을 담고 있는데, 이쪽은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한 신앙형태에 관한 설문인 FFT라는 조사의 내용을 담고 있다.


3장은 그렇게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회심의 요소들을 신학적으로 정리한 내용이고, 5장의 경우는 회심에 관해 출판된 다양한 책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면서 한국교회에서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살펴보는 내용이다.




한국교회탐구센터에서 나온 기획물을 몇 번째 읽어본 것 같다. 그리고 읽을 때 늘 드는 생각은 노력이 눈으로 보이는 괜찮은 기획이라는 것이다. 우선은 한국교회에서 잘 하지 못하는, 아니 하지 않는 통계적 조사를 충실히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고, 그 결과를 가지고 단지 몇몇 사람들의 감이 아니라 사회학적 결론을 내려고 있다.


이런 종류의 자료들은 그 자체로 무엇인가를 말한다기 보다는, 그 자료를 가지고 어떤 식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할 지가 중요하다. 물론 여기에 나온 조사 결과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과 아주 다른 내용이었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객관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조사의 결과를 보는 건 좀 다른 느낌이니까.


몇 가지 통계가 눈에 들어온다. 교회 출석 전 다른 종교 활동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대답한 결과가 30%를 겨우 넘길 정도였다는 것(종교 탐색 후 기독교를 선택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과 신앙을 갖게 된 주요 이유로 삶에 생긴 여러 가지 문제들을 꼽은 인원이 거의 90%에 달한다는 점이다. 또, 주요 전도자로서 가족이나 친척이 30%, 이웃이 10%, 직장동료가 8%로 “아는 사람”이 하는 거의 절반에 달했는데, 흔히 교회에서 하는 노방전도나 지하철을 오고가며 주문을 외우는 식의 전도가 효과가 그리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 두껍지도, 어렵지도 않은 내용이다. 목회를 하고 있다면 한 번쯤 참고삼아 볼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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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교수의 성경적 세계관 - 경제 역사 법·정치 문화 철학 영역별 적용
이정훈 지음 / 도서출판 PLI(피엘아이)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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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책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선은 페이지수가 700쪽 가까이 되는 데다, 내용 역시 경제와 역사, 법과 정치, 문화, 철학까지 다양하기 때문이다. 물론 철학이나 문화 쪽은 상대적으로 양도 적도 내용도 간략한 요약 정도에 불과하긴 하지만.


사실 저자에 대해 따로 악감정은 없다. 몇 년 전 교회에서 했던 한 특강의 강사로 와서 이 책에 실린 내용과 비슷한 강의를 하는 걸 잠시 지켜본 게 인연의 전부이니까. 대한민국의 건국과 이승만, 기독교 등이 섞인 강의였는데, 역사적 사건에 대한 평가가 지나치게 편향돼 좀 듣다 나왔다. 저자가 운영한다는 유튜브 채널 같은 것도 일부러 찾아 들어본 것도 없고, 그래도 좀 우려가 되는 건 역시 앞서의 그 강의에서 보여준 독특한 관점 때문이었다.


또, 개인적으로 이 책을 굳이 들게 된 건, 아는 후배가 한 번 어떤지 읽어봐 달라고 요청을 해서다. 읽어야 할 책들은 많지만, 또 요청이 들어오면 읽어주는 게 인지상정(?).





이 책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전체적으로 저자는 우파적 관점과 기독교적 관점을 동일시하고, 이에 근거해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뭐 사상의 자유가 있는 나라이니까, 개인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지만, 문제는 책 제목에서도 보이는 것처럼 저자는 자신의 관점을 “성경적”이라고 단정 짓고, 그 외의 관점들에 대해서는 책 내내 다양한 조롱과 무시를 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이 일종의 강의를 옮긴 것인지라 현장의 분위기에 따라 어느 정도 상호 용인되는 상황이었다는 걸 감안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언사에 좀 불편했던 어떤 사람(장로)이 와서 자제하는 게 어떠냐고 했을 때도, 상관없다고 대답했다는 걸 유쾌하게 써 놓은 수준이니까.


특히 좌파 정치세력을 적으로 상정하고 과감한 음모론과 상대에 대한 격렬한 증오감을 자주 표출한다. 이 정도의 폭력성은 자신이 완전히 옳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일종의 자기과잉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단지 책의 태도만 문제인 건 아니다. 내용에 있어서도 저자는 일관되게 정치, 경제, 사회발전에서의 기독교의 유익을 강조하고(이 점에서 참 교회들이 좋아할 만한 소리만 골라서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우파 정치세력에 대한 옹호를 덧붙인다. 이승만에 대한 옹호와 박정희, 박근혜(!)에 대한 찬사와 무고함 호소도 그 연장선상에 있고.


물론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기독교(특히 종교개혁)가 다양한 분야에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데에는 어느 정도 동의한다. 다만 그 기여가 어떤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저자는 마치 기독교가 유일한 기여자인 것처럼 설명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다지 기독교적이지 않았던 여러 중요 인물들(예컨대 애덤 스미스까지 동원해 가며 그들 역시 기독교적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식으로 과장한다. 물론 사람은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정확히 같은 논리로,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악행에도 기독교(교회)의 문화적 영향이 있었다고 말해야 할까?


특히 책 초반 경제와 관련해서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를 자주 언급하면서, 자본주의의 정신이 기독교에서 나왔다고까지 말하지만, 이건 그냥 갖다 붙이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선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에는 오랜 정치 경제 사회의 변화가 밑바탕이 되어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고, 또 하나 기독교 역사 2천 년 가운데 근대 자본주의 아래서 신앙생활을 한 게 얼마나 됐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그 이전 천 년 동안은 기독교가 왜 자본주의정신을 만들지 못했다는 말인가(비슷한 비판은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특정한 정치 경제 사조와 기독교를 일치시키는 건 기독교인이 가장 피해야 할 (비합리적인) 태도다. 기독교는 역사상 수많은 상황을 지나왔고, 수많은 기독교인들은 왕이나 독재적 군주(참주) 아래서도 신앙생활을 해왔고, 농업과 상업 등 다양한 산업들이 주가 되던 시절에도 그래왔다. 심지어 각각의 시대를 살았던 교회는 당시의 체제와 상황을 정당화하는 신학적 논리를 개발해 내기도 했고. 에효.





분명 저자는 많은 책을 읽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신이 선호하는 정치적 입장과 경제관만을 진리로 놓는 좁은 관점을 가지고 있기에, 그의 시야가 그리 넓어 보이지는 않는다. 예컨대 저자는 자본주의 각종 병폐에 대한 비판을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비판과 구분하지 못하고(실제로 공격자들 중 일부도 그런 무식함을 표할 때도 있긴 하다), 노동조합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타난 개념이라는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소명과 직업에 관해서도, 신의 소명을 확인하는 방식으로서의 사업의 번창이라는 개념이 묘하게 뒤틀리곤 한다는 점은 무시된다.


그렇다고 해서 책의 모든 부분에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건 아니다. 특히 신좌파운동에 관한 간략한 분석과 우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내 견해와도) 일치되는 부분이 있다. 우린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히 살피기 전에 우리 편이 한 말이니까 따라야 한다는 식의 집단주의에 쉽게 빠져들곤 하니까.


또, 우파적 가치를 숭배하고 있다고 하지만, 전광훈 일파 같은 광신 집단과는 분명 거리를 두는 것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앞서의 과격한 언사들은 일종의 정치 게임을 하기 위한 도구로서 사용했던 건가 싶기도 한데, 글쎄 지금 자신은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으니까.


일부 위험해 보이는 구절들도 있지만, 그래도 적어도 합리적으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의지는 보인다. 이 정도만 돼도 적어도 대화의 상대로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우리 편의 잘못을 좀 더 냉정하게 인정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 예컨대 저자는 이승만의 독재적 면모에 대해서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고려를 아주 관대하게 부여하면서도, 자신이 적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 반의 절반도 비슷한 고려를 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야심차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철학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을 제시하겠다고 시작했을지 모르겠다. 다만 여기에 실려 있는 게 “유일한” 기독교적 관점, 혹은 성경적 견해라고 볼 이유는 없다. 기독교 우파적 관점 정도가 적절한 명칭이 아닐까 싶다. 분명 괜찮은 관점과 정리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게 저자 자신의 강력한 우파적 관점과 결합되면서 분리가 쉽지 않다. 투뿔 쇠고기라 아무리 좋아도 모래가 잔뜩 묻어있으면 그대로 섭취할 순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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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 탈교회인 8인 인터뷰집
이혜성 인터뷰어 / 북오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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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 책은 좀 무겁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았고, 내용은 더더욱 그랬다. 이 책은 한때 교회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지금은 교회를 떠나 있는 여덟 명의 인터뷰이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었다. 인터뷰어이자 편집자는 최소한의 질문으로 인터뷰이들의 의견이 충분히 제시되도록 애쓰고 있다.



여덟 명의 인터뷰이들이 교회를 떠난 이유는 대체로 비슷했다. 대개 교회가 보여주는 “덕스럽지 못한 모습들”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그렇게 하나둘 쌓인 짐들은 결국 그들을 교회 밖으로 밀어냈다.


물론 개별적으로 들어가면 상황은 다들 조금씩 달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맨 처음 배치되어 있는, 한 때 서울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까지 했으나 지금은 무신론자가 되었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다. 간단히 요약하면 다양한 신학적 난제들에 대해 교회가 올바른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이 교회와 성경에 관한 신뢰를 갖지 못하게 만들었고, 그런 상태로 계속 담임목사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사임을 했던 것 같다. 이후 그런 회의감이 점점 심해졌고, 결국 신앙을 완고하게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


사실 다른 사례들에 비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과정이었지만, 동시에 적어도 자신의 지적 사고에 솔직하긴 했다는 느낌을 주는 사례였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 다른 목적으로 계속 목회직을 맡고 있는 목사들도 많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외에도 한 여성 사역자는 교회 내 강압적인 분위기와 여성 교역자가 갖는 한계에 지쳐서, 또 다른 이는 교회 내 분쟁에 치여서, 또는 사회적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교회에 실망해서 교회를 떠나왔다.





비판적으로 보면 이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바라는 이상을 모두 교회에 투영해서, 그 이상적인 모델에 이르지 못하면 다 교회가 문제인 것처럼 보고 있다. 다시 지역교회로 돌아갈 생각이 있느냐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이들은 자신의 이상이 온전히 실현되는 공동체라면 모르겠다고 대답하는데, 사실 이건 문제를 해결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다. 또, 몇몇은 지나치게 “큰”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결정을 설명하는데,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건 발을 딛고 사는 여기지 않던가.


다만, 그들에게 교회에 대한 이런 기대를 품게 한 것 또한 교회라는 걸 생각해 보면, 분명 교회도 비판을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 있다.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이상주의는 사람들에게 더 큰 실망을 안겨줄 수밖에 없으니까. 교회가 먼저 자신이 직접 실천하지도 못하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남발했다는 말이다. 말만이 아니라 진리에 입각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어야 했는데, 솔직히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또, 책은 개별적인 인터뷰이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어서 산발적인 교회 비판에 머문다. 아무래도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경험의 양과 질은 한계가 있을 테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결과적으로 근본적인 해결법보다는 개인적인 대책(여기에선 교회를 떠나는 것)이 유일한 대안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물론 교회에 속한 개개인이 전체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기를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교회는 바로 그들이 아니던가. 누군가 나타나서 완벽한 해결책을 던져주기를 바라는 영웅주의적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만두는 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일까.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함이 가시지 않았다. 인터뷰이들의 이야기에 공감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반대로 절박해 보이는 그들의 호소에 교회가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너무 공감되어서다. 대형교회들은 수평이동의 착시현상에 빠져 문제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고, 각 교단의 수뇌부는 대체로 무능하고 위기의식이 없기에 무슨 대책을 세울 것 같지도 않다.


이 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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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 왜 복음이 필요한가? - 풍요의 시대를 사는 이들이 복음대로 사는 법
윌리엄 윌리몬 지음, 이철민 옮김 / IVP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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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퍽 길다. 제목을 지은 사람이 할 말이 많았나 보다. 원래 이 책은 저자인 윌리엄 윌리몬이 한 교회에서 했던 설교문들을 모아 엮은 것이라고 한다. 사역 초창기에 이런 설교를 했다니,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옛말은 여전히 통하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도 꽤나 익숙한, 전형적인 간증 레퍼토리는 한결같다. 한 때 자신은 꽤 성공적인 위치에까지 올랐지만, 어떤 이유로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실제적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예수님을 만났고, 모든 것이 회복되었다.


저자는 여기에서 질문을 던진다. 과연 기독교는 이렇게 비참하고, 박탈당하고, 약하고, 소외된 사람들“만”을 위한 종교인가. 기독교 신앙을 가지기 위해 우선 비참해질(문자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억지로 자신이 불쌍한 위치라는 것을 끊임없이 되뇌어야 하는가.


이런 고정관념이 갖는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찾으셨다고 말한다. 그 연장선상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한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인가를 결단하시는 것에서 모든 것은 시작한다. 끊임없는 자기 비하와 감정적 회개의 요구는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잊어버리게 만들뿐더러, 이제 회개 이후의 은혜 안에서의 삶을 상대적으로 덜 강조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의 주제와 관련해서 앞서의 접근법이 갖는 결정적인 문제 중 하나는,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 강한 사람”에게는 이런 방식이 잘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존의 교회는 그들을 어떻게든 “무릎을 꿇리려고”(그래야 하나님의 필요를 인정할 테니까) 애쓰기만 하는데, 그들은 정말로 딱히 부족한 게 없기 때문에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또, 그저 번영의 복음만을 외쳐온 얄팍한 공동체에 대해서도 이들은 별 흥미가 없는데, 그들은 이미 충분히 번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강한 사람에게는 강한 사람의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건 은혜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 은혜의 소산임을 알려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건 자연히 감사의 자세로 이어진다.(당신은 죄인입니다로 시작하는 접근방식과 어떻게 다른지 주목하자)


물론 그들에게도 부족함이 있다. 사실 그들이 가진 것들에도 한계가 분명히 있다. 지식은 다함이 없고, 조직의 위계 정점에 올라간 사람은 자신이 생각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모으기만 하는 사람은 정작 쓸 수가 없다. 즉, 그들의 강점이 잘못 사용되면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 점에 관해서 기독교는 분명 해 줄 말이 있다.




사실 조금은 강해 보이는 제목에 비해,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대안은 조금은 평범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책에서 여러 차례 반복해 지적되고 있는, 현재의 복음제시 방식에 문제가 있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정말 우리는 누군가를 정서적으로 약한 상태로 몰아넣는 것이 기독교의 복음을 제시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문제는 이런 접근이 사람을 그저 “집단”이나 어떤 “덩어리” 정도로 뭉뚱그려버린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모든 청년들에게 가진 재산을 다 팔아 나누어주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한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불러 자신을 따라오게 하셨지만, 바로 그 근처에서 그분에게 고침을 받은 어떤 사람은 그분을 따라다니는 것을 허락받지 못하기도 했다. 요컨대 그분의 처방은 사람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다 달랐지만, 우린 빨간 약 하나면 모든 병이 나을 수 있다는 식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금 다른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조금은 다른 고민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한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도 좀 더 정교한 고민과 해답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 실린 설교가 나온 지 40년이 지났지만, 과연 이 부분에서 뭔가 제시된 것 같지는 않다는 게 함정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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