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회, 길을 묻다 - 제국의 가치에 저항하는 삶의 방식 그리스도교 낯선 전통
최종원 지음 / 비아토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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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롯한 대다수 개신교인들에게 수도회, 혹은 수도원은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지는 주제다. 사회를 등지고 자기들만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서 무슨 도를 닦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하나님의 뜻을 적극적으로 세상에 실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개신교 전통에서 이런 생각은 당연히 조금은 이상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기독교 역사 속 수도회 전통을 통시적으로 훑어보는 이 책에서, 수도회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오해임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수도회는 세속화의 물결에 넘어가는 “제도 교회”의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하나의 적극적인 운동이었다.


이건 최초의 수도사들이 출현한 시점과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한 시기가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들은 금욕적인 삶을 통해 자기 완성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 재림의 긴박성을 믿고 이에 따라 살기를 원했던 이들이었다.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필연적으로 이어질 세속화의 위협을 예지하고 이를 피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도회라고 불릴 만한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은둔자들로 대표되던 초기 수도적 삶은 이제 함께 모여 살면서 서로를 돌보고(또, 서로를 감시/경계하는 측면도 있었으리라) 수도원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등장한 것이 베네딕투스가 정리한 것으로 알려진 수도규칙. 기도와 노동으로 특징 지워지는 이 규칙서는 중세 기간(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많은 수도회들의 표준규칙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점이 나타났다. 애초에 세속화를 경계하면서 시작된 수도회였지만, 그렇게 모인 수도원이 각종 기부 등으로 너무 부유해져버린 것이다. 클뤼니 수도원이니 시토회니 하는 수도회들도 모두 처음에는 청빈과 경건을 강조했으나, 그 유명세가 높아지면서 결국 애초의 이상을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온 것이 탁발 수도회였다. 말 그대로 구걸을 통해, 즉 다른 사람의 호의에 의존해 생존을 유지하면서 기독교의 이상을 설파하겠다는 결심이었다. 가장 유명한 건 역시 프란체스코 수도회. 이들은 앞선 수도회들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측면이 강했던 데 반해 좀 더 적극적으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수도회적 이상을 실천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이 강력하게 주장했던 청빈을 위한 구걸은, 부유한 사람들의 기부에 의지하는 평안한 삶으로 변질되었다. 이미 프란체스코 생전부터 청빈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를 두고 엄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싸웠고, 결국 현실적인 문제를 인정한 온건파가 승리한다. 다시 한 번 초기의 이상이 희미해진 것.


이런 일은 수도회 역사에서 쉴 새 없이 반복된다. 혹자는 ‘그것 봐라’, ‘처음부터 지나치게 이상적이었다’와 같은 논조로 비난을 할 수도 있지만, 저자는 이에 대해 좀 다른 관점을 보인다. 처음부터 수도회 운동은 제도 교회의 한계로 인한 문제에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본다면, 수도원의 역할은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렇게 각 시대의 교회가 놓친 부분을 일깨웠다면 수도회 운동은 성과를 거둔 것이지, “급진성에 지속 가능성의 짐까지 지우는 것은 무리”라는 말이다. 일리가 있다.





이런 관점이라면 당연히 수도원 해체에 대해서도 조금은 다른 말을 할 것이다. 종교개혁이 마무리될 즈음 유럽 각지에서는 수도원 해체가 연달아 발생했다. 물론 당시의 여러 수도원은 지나치게 부유했고, 백성들의 고혈을 짜는 기득권층과 밀착해 있었다. 그에 대한 비판이 수도원 해체로 이어지는 것도 이해할 만한 수순이었다. 저자도 이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게 제도 교회의 대안적 공동체로서의 수도회가 사라지면서, 교회가 국가에 더욱 밀착해버리는 결과가 나왔다. 이제 제도 교회의 문제를 삶으로 반박하고 교정의 인사이트를 줄 수 있는 자리가 비게 되어버린 것이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 각국의 개신교회는 국교회로 전환되는 일이 많았다. 칼뱅의 스위스 개혁교회도, 루터의 독일 교회도, 잉글랜드의 교회나 북유럽의 여러 교회들이 다 그랬다. 그리고 교회가 국교회화가 유발한 문제는 오늘의 유럽이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이 책의 독특한 점은 수도회 운동의 오늘에 관해서도 제법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본 회퍼나 토머스 머튼 같은 인물들에게서 현대의 수도회 운동의 자취를 찾고, 라브리 공동체나 떼제 공동체에서 그 실천을 발견한다. 물론 이런 운동들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지만, 과거의 수도회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당대 제도 교회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지적하고 나름의 해결방법을 모색하는 면은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


교회의 역사를 제도 교회와 수도회 운동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살펴보는 관점이 흥미롭다. 각 시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분명한 지적과 이에 대한 수도회 운동의 반응에 주목하며 읽어보는 건, 오늘 우리의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좀 더 밝히 보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정도의 책이라면 좀 더 천천히 읽으면서 내용을 함께 나눠봐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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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록, 젊은 날의 방황과 아름다운 구원 청소년 철학창고 13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정은주 옮김 / 풀빛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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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고전 중 하나인 “고백록”의 요약본이다. 책의 기획에 따르면 청소년들을 위해 말을 쉽게 풀고, 내용을 축약해 놓은 듯하다. 시리즈의 제목은 “청소년 철학창고”인데, 기초적인 철학서 읽기를 위한 시리즈로 보인다.


청소년들에게 철학 공부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십분 공감한다. 다만 그게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라면 적절할까 싶은 생각이 살짝 들긴 한다. “고백록”이라는 책 자체가 꽤 깊은 수준의 기독교적 사유가 담겨 있는지라 그 내용을 제대로 소화시킬 수 있을까 싶은 우려에서다.


또 어디까지나 “철학 서적”으로 이 책을 편집하고 소개하려는 번역자와 기획자들의 생각은 오히려 이 책의 본질을 조금은 왜곡시키는 느낌도 주는 듯하다. 예컨대 이 책을 풀어쓴 정은주는 “고백록을 찬찬히 읽다 보면 종교는 여럿이어도 진리는 하나라는 말을 실감할 수 있”다거나,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리를 밖에서 찾지 말고 자기 안의 영원한 빛을 찾야아 한다”는 말을 내 안의 부처를 발견하라는 불교의 주장과 들어맞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적어도 철학에서는 종교의 색을 빼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고백록”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자신의 성장기를 회고하면서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앞부분과 기독교 신학자로서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를 설명하는 후반부가 그것.


전반부는 일반적인 간증의 느낌으로 읽어나가면 된다. 젊은 시절 특히 성적 유혹에 취약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내연녀와 함께 동거생활을 시작하며 자식까지 낳았다. 물론 이런 행동은 이민족들의 위협이 증가하고 있었던 서로마 말기 당대의 많은 젊은이들 사이에 퍼져 있는 관행이었지만, 되돌아보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이 점이 늘 마음 한 쪽의 짐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는 방탕한 한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회심한 이야기가 아니다. 수사학 교사로 성공을 하고자 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어린 시절부터 단순한 말재주가 아니라 세상의 근원과 같은 철학적 진리를 탐구했고, 다양한 대안들을 검토한 끝에 결국 기독교에서 지적 해답을 얻었다.


책의 후반부는 확실히 조금 어렵다. 주로 창세기 1장에 해당하는 창조에 관한 논의들인데, 눈에 띄는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은 창조의 방식에 관한 특정한 견해를 절대적으로 옹호하지 않고 있다는 부분이다. 기본적으로 창조주와 다른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인지능력이 가진 한계를 깊이 인정하고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지 않았나 싶다. 그에 비해 오히려 어쭙잖게 아는 이들이야 말로 특정한 견해를 유일한 견해인 양 맹신하지 않나 싶고.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 읽어 볼만한 책이다. 다만 분명 현대의 글과는 다른 느낌인지라(고전이 다 그렇지 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살짝 지루하거나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앞서도 말했던 것처럼 이 글을 비종교(기독교)적 맥락에서 단순히 교양 수준으로 읽는 건 확실히 좀 아쉬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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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리 하우어워스와의 대화 - 신앙이 의미를 잃은 세상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법 비아의 말들
스탠리 하우워어스.새뮤얼 웰스 지음, 민경찬.윤혜림 옮김 / 비아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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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이 책은 저명한 신학자 스탠리 하우어워스와 나 대화를 책으로 역은 것이다. 다만 하우어워스를 단독 인터뷰이로 삼아 진행된 인터뷰가 아니라 또 한 명의 인물이 추가된다. 하우어워스가 듀크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가르칠 당시 듀크대학교 대학교회의 교목이자 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있었던(그리고 하우어워스로 논문까지 썼던) 새뮤얼 웰스가 그 주인공. 사실 이 책의 “대화”는 인터뷰어보다는 하우어워스와 웰스 사이에서 대부분 이루어진다.


아 이 둘 사이에는 또 하나의 인연도 있었는데, 바로 하우어워스가 웰스의 아들인 로리의 대부가 되어준 것이었다. 서양에서 대부는 꽤 가까운 사람에게 맡긴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 둘 사이의 친밀함이 와 닿을까? 참고로 하우어워스는 자신의 대자인 로리에게 매년 편지를 한 장씩 썼고, 이를 모아 “덕과 성품”이라는 훌륭한 책을 쓰기도 했다.





이 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는 크게 열 개의 주제로 나뉘지만, 그게 순서대로 주제가 심화되고 그런 식은 아니다. 각각의 주제는 서로 독립적이지만, 그렇다고 다른 주제를 위한 대화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반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관한, 그리고 신학자와 목회자(웰스의 경우)로 살며 사역을 하는 방식에 관해, 교회와 개인적 삶 등에 관한 주제가 다뤄진다.


확실히 거장과 하는 대화에서는 많은 걸 얻을 수 있다. 직접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대화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점은 하우어워스만이 아니라 그의 대화 상대인 웰스도 마찬가지였다. 영국 성공회 사제로 지역 교회를 담당해 목회를 해 온 인물답게 목회적인 관점으로(그래서 상대적으로 하우어워스가 한 발 더 나아가 보인다) 대화에 참여하는데, 그 깊이가 결코 얕지 않다.


이렇게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대화를 짧게 설명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 일상적인 편안한 대화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탁월한 통찰을 읽는 게 꽤나 재미있다. 예를 들면 하우어워스는 종말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의 중요성에 관해 말하면서, 그것은 필연성으로 이루어진 세상, 즉 어떤 일을 하면 반드시 그에 걸맞은 보상을 얻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세상과 달리, 어떤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라는 선물로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한다.(개인적으로 종말론을 이렇게 아름답게 설명하는 이론은 본 적이 없다)



열 개로 나뉘어있는 각각의 대화들이 그리 길지는 않다. 또, 편안한 가운데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느낌이기에 읽기에 그리 어렵지도 않다. 물론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학적인 깊이가 꽤나 있어서, 관련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독자에게 좀 더 와 닿을 것 같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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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세기 기독교와 도시 문화 - 바울 공동체의 사회 문화 환경
웨인 믹스 지음, 박규태 옮김 / IVP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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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기독교 사회학자인 저자는 이 책에서 “바울계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던 1세기 도시문화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를 시도한다. 여기서 “바울계”란 바울과 그의 제자들, 그리고 그의 선교활동으로 만들어진 교회들을 두루 가리키는 표현이다. 그러면 “바울계”가 존재한다면 여기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인들도 있다는 말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렇다. 저자는 명백히 구분되는 특징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했고, 그들 중 한편에 집중한다.


분명 초기 기독교회 안에는 다양한 신앙형태를 가진 사람들이 존재했고, 이는 신약성경 안에서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들은 아직은 ‘전통’이라고까지 부르기는 힘들어도 분명 서로 다른 신앙생활 방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때로 크고 작은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인 신자 사이의 긴장이었다.


다만 특정한 관점을 설정하면, 이제 모든 본문을 이 관점에 따라 분리해 보게 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차이는 더욱 크고, 공통점은 상대적으로 적어 보이게 된다. 저자 역시 이런 분리를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때로 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보다 자신의 연구 전제에 입각한 해석을 우선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독자들이 판단해 읽어야 할 부분.





저자가 말하는 “바울계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특징은 도시를 중심으로 살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에 실려 있는 바울의 행적을 보면 특정한 영역의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진행했다는 걸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의 편지에 실려 있는 다양한 소재들은 대부분 도시에서의 삶과 관련된 것들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 책은 1세기 도시에서의 삶에 관한 다양한 요소들을 살핀다. 사회적 계급과 지위, 여성의 위치, 도시 간 이동 등등.


2장에서는 이들 “바울계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위치에 관한 연구가 소개된다. 흔히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사회의 낮은 계층에 속한, 소외되고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이었을까? 저자는 다양한 자료들을 통해 이런 통설과 달리, 당시 교회에는 복잡한 사회 계층이 섞여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3장은 당시 교회의 성격에 관해, 비슷한 다른 모임들과의 비교, 대조를 통해 설명하는 내용이고, 4장은 교회 조직의 운영과 관련해 분쟁을 중심소재로 설명한다. 5장은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의식들, 특히 세례와 성찬을 중심으로 한 의식에 관한 설명이고, 마지막 6장은 1세기 “바울계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믿고 있었는지 다각도로 살펴본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신앙서적보다는 신학서적 쪽에 가깝다. 그렇다고 학문적 엄밀성을 최대한 구현하기 위한 빽빽한 주석과 인용으로 채워진 건 아니지만, 이런 성격 때문에 책 본문 자체가 명쾌하기 보다는 늘어지는 느낌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이 책을 손에 들었다면 조금 놀랄 수도. 개인적으로는 책 자체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뭐 그래도 1세기 기독교가 확장되던 시절의 전반적인 사회상을 스케치 하려는 목적으로 책을 편다면 아주 소득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런 식의 사회학적 연구가 가지고 있는 한계, 그러니까 앞에서도 언급했던 차이의 극대화를 위한 성경본문의 선별적인 선택, 그리고 임의적인 재구성 부분은 확실히 이견의 여지가 있는 부분이라는 걸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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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 교회가 500년간 외면해온 종교개혁의 진실
로드니 스타크 지음, 손현선 옮김 / 헤르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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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인들에게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절대로 침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일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대부분의 보통의 신자들은 이 사건의 의미에 대해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할 지도 모르겠지만, 신학자들과 신학생들, 그리고 목회자들처럼 관련 내용을 학습해 온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문제는 어떤 사건의 의의를 중요하게 기리는 것과 그것이 갖는 의미를 지나치게 확대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개신교 진영에 속하는 학자들은 종교개혁이라는 사건이 유럽의 정치와 경제,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고 주장해왔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막스 베버였고.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라는 유명한 책에서, 그는 개신교가 갖고 있는 특유의 사상이 자본주의 발전에 핵심적인 공헌을 했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이 책의 저자 로드니 스타크가 비판하는 주요 논지 중 하나다.)





사회학자인 저자는 종교개혁과 관련된 몇 가지 주장들을 비판적으로 재검토한다. 그리고 그 내용은 종교개혁을 신화화하고 있었던 개신교인들에게는 자못 충격적인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가장 먼저 지적하는 건 종교개혁으로 신앙의 부흥이 일어난 적이 없다는 것. 여기에서는 종교개혁 당시 개신교로 넘어온 많은 지역들은, 실은 그 지역의 통치자들의 정치적인 결단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일반 신자들의 경우 신앙심이 특별히 강해진 적이 없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가톨릭교회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지역의 경우 개신교를 선택하면서 교회가 가지고 있던 힘과 재산을 차압할 수 있었던 유인책이 있었다는 말이다(반대로 이미 자국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이 강했던 나라들―대표적으로 프랑스나 스페인 같은―은 굳이 개신교로 넘어갈 필요가 없었다는).


반면 당시 일반 대중들은 가톨릭에도 개신교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건 당시 교회를 방문한 사람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서 입증되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당시 민중들의 불경건함, 비어 있는 예배당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들에 관해 남긴다. 물론 이것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는가, 과장의 여지는 없었는지는 좀 더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2장에선 종교개혁의 결과로 탄생한 다양한 국교회들이 오히려 개신교의 부흥과 발전에 걸림돌이 되었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루터교와 성공회는 처음부터 국교회의 성격이 확고했는데, 이는 비국교도에 대한 핍박뿐만 아니라, 독점적 위치에 있으면서 변화와 발전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도록 만들었다는 것. 또, 오늘날의 세속화된 세상에서 여전히 국가 공무원이나 국가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는 국교회는 오히려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무신론자가 교회 관련 부처의 수장이 되거나, 심지어 세속철학에 근거해 수정된 교리를 국가차원에서 결정하는 식의)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3장에서는 민족주의의 탄생에, 4장에서는 자본주의의 발명에, 5장과 6장에서는 과학혁명과 개인주의의 출현에 종교개혁이 끼쳤다고 주장되는 과장된 내용에 대한 반박이 실려 있다. 자본주의나 과학혁명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면, 수세기에 걸쳐 조금씩 발전해 온 결과물이다. 당연히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변화는 시작되어 왔다는 것.


마지막 7장과 8장은 교회의 성장과 관련된 주제다. 흔히 세속화는 교회와 신앙의 적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유럽의 많은 교회들이 비어가고, 기독교가 곧 소멸할 거라는 예상이 많이 떠돌고 있지만, 실제 사회학적 통계에 따르면 오히려 종교인구, 그 중에서도 기독교인구는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는 것.


또, 개신교와 가톨릭의 분열이 오히려 서로를 경쟁시켜 더 열정적으로 신자를 확보하도록 만들었다는 주장도 흥미롭다. 반면 국교회가 지배적 종교인 나라들에서는 종교적 열정이 떨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듣는 유럽의 비어있는 교회, 술집과 클럽으로 변하는 교회가 다 그런 것들이라는 설명.





전반적으로 책에서 담고 있는 다양한 주장들이 눈에 많이 들어온다. 특히 종교개혁이라는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신성시 되어서 제대로 된(비판적인) 고찰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기도 하고, 또 교회의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사회학적 연구 없는 일방적인 주장을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덧씌워 찬양하는 방식은 분명 주의해야 할 부분이니까.


다만 여기에 실린 주장을 대부분 인정한다고 해도 종교개혁의 의의가 손상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종교개혁 자체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종교개혁에 덧씌워진 부가적인 효과 주장에 대한 비판이니까. 예컨대 종교개혁이 자본주의 형성에 핵심적인 영향을 끼친 게 아니라는 사실이 종교개혁 자체의 타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이런 오해들을 바탕으로 개신교회 우월성을 주장하는 논리를 폈다면 조금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꽤 재미있게 읽었다. 애초에 도서관에서 빌려 본 책이지만, 방금 전에 주문을 해버렸다. 차근차근 살펴보면서 소개해 주는 영상을 만들어 볼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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