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 기도의 길 - 다시 깨어나는 거룩한 상상력 사회 속의 교회, 교회 속의 사회
에스더 드발 지음, 이민희 옮김 / 비아토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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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좀 읽어 본 사람이라면 켈트라는 이름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주로 아일랜드 일대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이 외에도 켈트족이라는 고대 민족이 떠오른다면 역사덕후일 가능성이 높고, 셀틱 FC라는 축구팀을 떠올린다면 해외축구빠일 가능성이 높다. 참고로 스코틀랜드에 있는 이 축구팀에 셀틱(Celtic)이라는 명칭이 붙은 건, 아일랜드 이주민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팀이라서 그렇다. 비슷한 케이스로 NBA에 있는 보스턴 셀틱스라는 농구팀도, 아일랜드 이주민들이 그 동네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두 팀 모두 메인 색상은 녹색이다.


신학 쪽에서는 켈트 교회라는 명칭이 익숙할 수도 있겠다. 이 책에서 다루는 것이 바로 그 켈트 교회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켈트, 즉 아일랜드 지역은 유럽의 서쪽 가장자리에 있다. 지리적으로도 가장 멀고, 로마나 파리, 마드리드 같은 오래된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들로부터도 멀다.


중세 초 기독교가 전래되었으니, 그 시기도 다른 데에 비하면 꽤 늦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더해지면서 켈트 교회 특유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다른 지역과 왕래가 많지 않으니 외부의 영향을 적게 받고, 반대로 자체적인 문화가 깊게 발달했다. 물론 그 때문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비주류라는 느낌이 강하지만. 그래도 제법 잘 알려진 켈트 십자가나 클로버 모양의 상징, 그리고 녹색이라는 상징색 정도를 빼면 사실 나도 아는 게 많지 않다.




이 책은 바로 그 켈트 교회의 여러 전통들을 다룬다. 분명 내용상으로는 신학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책으로 분류하기엔 또 내용이 좀 말랑말랑하다. 책 제목에 “기도”라는 단어가 들어있는데, 저자는 켈트 교회 전통 안에서 작성된 여러 기도문과 시(기도의 성격이 강한)들을 통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신앙의 모습에 대한 스케치를 제시한다.


저자가 켈트 신앙 전통을 소개하기 위해 시나 시처럼 읽히는 기도를 선택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초기 켈트 사회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장르를 산문이 아니라 운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71). 심지어 그들은 수도원 규칙조차 시의 형태로 작성했다. 여기서부터 신학대전이라는 거대한 논문에 닻을 내리고자 했던 중세의 주류 신학과 차이가 보이기 시작한다.


책에는 켈트 교회 신앙의 다양한 양상들이 설명된다. 삶을 여행으로 보는 독특한 관점부터, 일상 속에서 삼위일체를 가까이 경험하는 방식, 시간의 흐름을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시켜 인식하는 방법,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느끼고, 세상의 악을 피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삶 등등. 다분히 소박하고 목가적인 삶의 정황 속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경험하며, 동행하는 법을 전수해 왔다.




서방의 주류 신학이 앞서 말했던 대로 이지적인 차원에 집중해왔다면, 켈트 교회의 신학의 가장 큰 특징은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점인 듯하다. 그리고 이건 대체로 서방신학 전통을 이어받은 오늘날의 개신교인들에게 그들의 신앙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지는 주된 이유일 것이다.


앞서 이 책이 신학책이라기엔 내용이 좀 말랑말랑하다고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저자가 켈트 신학을 담담하게 분석하고 서술하기 보다는 경탄의 자세로 바라보며 계속 닮고자, 그리고 닮아야 한다는 요청과 함께 길을 써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좀 과한 건 아닌가, 그들에게는 수만 명씩 모이는 복잡한 도시라는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삶이 가능했던 건 아닌가 하는 식의 반문이 가끔 떠오르는 것도 사실.


하지만 기독교 전통 안의 풍성한 다양성을 인식하는 것은 분명 중요한 일이다. 지나치게 지적인 영역만 강조하는 건 신앙의 다른 부분을 파괴하기도 한다. 믿음은 머리로만 갖는 게 아니니까. 특히 일상의 삶과 믿음을 강력하게 결합시키는 켈트 교회의 신앙은, 삶과 신앙이 유리되기 일쑤인 오늘날 수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분명 좋은 자극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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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와 포용 IVP 모던 클래식스 11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박세혁 옮김, 강영안 해설 / IVP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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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처음으로 완독한 책이다. 사실 작년 말부터 읽기 시작했지만, 이런 저런 일들도 있었고, 책 자체도 쉽게 읽히지 않는 편이라 시간이 꽤 걸렸다.


책을 읽는 동안에도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2년 전 시작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테러로 시작된 분쟁 역시 끝나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에는 우리나라 제1당 대표를 살해하려가 목 부위에 큰 상처를 입히고 끝난 사건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사방이 분쟁과 다툼으로 가득 찬 세상을 살고 있다. 물론 이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 아마도 인류의 역사 내내 경험했던 상황이긴 하다. 대충 역사를 써놓은 대부분의 페이지가 전쟁사를 기술하는 것으로 채워져 있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인류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걸까? 그리고 여기에 기독교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할까?




책의 첫 세 장은 배제와 포용이라는 핵심적인 내용에 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거리두기와 소속되기”라는 제목의 첫 장에서는 우리는 결코 우리가 소속된 어떤 정체성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동시에 이 정체성은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인정해야만 온전히 가질 수 있는 것임을 지적한다.


이런 전제를 인정한다면 누군가를 완전히 배제하려고 시도하는 건 곧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린다. 볼프는 누군가를 우리의 생각 속에서 완전히 제거하려는 시도의 문제점을 다양한 관점에서 지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실제적으로 피해를 입은 상황에서 가해자를 용서하고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일이 과연 쉬울 리가 없다. 저자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바라보도록 유도한다. 조금 복잡한 설명을 더하지만, 결국 진정한 포용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신앙으로 가능하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1부 마지막 장은 성 정체성과 관련된 주제를 다룬다.(사실 앞선 세 개의 장과 성격은 살짝 다르지만, 그렇다고 2부에 넣기에는 또 애매한 주제다) 정확히는 남녀 간의 극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신학적 고찰을 시도하는 부분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남녀의 역할이나 지위를 성경에서 찾아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신이 속한 문화, 나아가 성경의 저자들이 속한 문화에 짙게 배어있는 관습을 따온 것에 불과하다는 게 볼프의 생각이다. 그는 대신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관계에서 남녀 간의 관계에 관한 바람직한 모델의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한다.


2부에서는 좀 더 거시적인 주제를 다룬다. “억압과 정의”, “기만과 진실”, “폭력과 평화”라는 제목만 봐도 대략 내용이 짐작된다. 오늘날 다양한 적대감과 갈등을 일으키는 관점들의 편향성을 지적하면서, 이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기독교적 기여가 가능할지를 살펴본다. 전반적인 논지는 책의 첫 세 장에서 펼쳤던 그대로다.




과연 우리는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을까? 국제질서에서의 근본적인 평화를 위해 국제연합이 창설된 지도 80년이 다 되어가지만, 그 동안에도 단 한 순간 전 세계에 평화가 있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전 세계가 두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서로를 물어뜯었던 냉전이 끝난 지도 고작 30년 밖에 안 지났고, 20여 년 전 일어났던 9.11 테러의 기억은 여전히 전 세계에 생생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실은 저자 역시도 이런 문제가 (기독교인들의 바른 신학과 실천을 통해서라도) 온전히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다. 다만 우리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극심한 갈등을 조금 늦추고 누그러뜨리기 위해 한 번 더 생각해 보자는 노력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게 현재로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소망인가 싶기도 하고.


사실 어떤 이들에게 더 크게 다가오는 건 이런 분쟁의 현장에 교회가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있다는 현실일 것이다. 저자는 피치 못해 가해자들에 저항해 폭력을 가해야만 하는 상황을 마주하더라도, 그걸 신학적으로 지지하려는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제지한다. 이 또한 복잡한 심경이 담긴 문장이 아니었나 싶다.


여전히 시끄럽고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아가면서, 새해에는 조금은 더 나아졌으면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물론 연말엔 이 기대를 했다는 것 자체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 살짝 두렵긴 하지만. 우리는 원수를 포용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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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형성사
옥성득 지음 / 새물결플러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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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국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한국의 기독교인이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여러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배우는 교회의 역사는 대부분 외국 땅에서 일어난 일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가 가진 역사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게 많지 않다.


한국 초기 기독교사에 관해서 읽을 만한 책을 쓰고 있는 옥성득 UCLA 교수가 낸 이 책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아마 대개는 우연히 설교를 통해 한 장면만을 들었을―초기 기독교 시기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초기 한국 교계에서 어떤 신명(神名)을 사용할지를 두고 벌어진 오랜 논쟁의 역사를 기술하는 1장의 내용부터 흥미로웠다. “천주”, “상제”, “신”, “하ᄂᆞ님” 같은 용어들이 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서로 대립하다가 결국 “하ᄂᆞ님(후에 맞춤법 개정으로 ‘하나님’으로 변경)”으로 정착되는데, 여기에는 한국인들의 종교심에 대한 독특한 선교사들의 이해가 배경에 깔려 있었다.


조선말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졌던 정감록이라는 예언서 속 한 구절이 기독교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는 내용을 담은 2장도 꽤나 흥미로웠다. “궁궁을을(弓弓乙乙)”이라는 일종의 파자 암호가 부적화되었을 때 십자가의 모양으로 그려진다는 점, “십승지지”라는 피난처의 십(十)이 꼭 십자가와 비슷하다는 점은 십자가에 대한 특별함 감정을 불러왔다는 것.


한국의 기독교는 단지 서양의 종교가 일방적으로 이식된 것이 아니었다. 3장과 4장은 유교와 도교 등 당시 널리 퍼져있었던 한국종교의 요소가 기독교 안으로 수용, 흡수되어 축귀와 추도회로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5장은 20세기 초반 세워졌던 예배당의 모습에 수용된 한국적 요소들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외에도 6장에는 초기 한국 교계에 영향을 미쳤던 다양한 한글 문서들에 관한 광범위한 정리가, 7장은 조선 땅에 널리 퍼진 부흥운동에 관한 약사가 실려 있다.





도입부에 언급했지만, 우리는 ‘한국의 기독교인’이지만, ‘한국’의 기독교에 대해 그다지 알지 못한다. 여기에 무슨 거창한 이론을 갖다 대지 않더라도, 분명 이건 뭔가 아쉬움이 남는 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의 초기 기독교에 관한 다양한 내용을 소개해 주는 이런 책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에 저자는 다양한 문헌 자료를 정리해 보여줌으로써, 주제에 좀 더 깊이 있게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점이 또한 이 저자의 책을 읽는 주요 목적이기도 하다. 당장 초기 한국 기독교의 신명에 관한 다양한 논의에 관한 부분만 보면,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정도로 다양한 선교사들과 초기 신문과 저작물들 속 언급을 충분히 보여줌으로써, 당시의 분위기를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만한 책이 얼마나 있을까 싶을 정도.


역사의식, 역사감각의 부재는 오늘 내가 보는 것만이 전부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기독교의 역사는 2천 년이고, 전 세계에 걸쳐 있지만 우리는 그 1/10일, 1/100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로도 충분히 신앙생활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그런 상태로는 중요한 것을 놓칠 수밖에 없다. 조금 어렵게 느껴지더라도(그리고 900페이지 가까이 되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지더라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 우리가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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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몸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 교회에서 구현해야 하는 장애 정의(Disability Justice)
에이미 케니 지음, 권명지 옮김 / 이레서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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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며 처음으로 접한 용어가 있다. 에이블리즘(Ableism)이라는 말이다. 장애를 뜻하는 Disabled의 반대말인 에이블(비장애)에 ism을 붙였으니, 비장애인주의 정도로 번역해야 할 텐데, 의미를 좀 더 풀면 비장애인들이 표준이 되어 자연스럽게 장애인들을 배제(차별)하면서도 아무런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정말 이런 게 있을까 싶지만, 세상이 어떤 곳인가. 누군가를 불편하게 여기고 혐오하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변태적 욕구자가 아니라도, 인간은 그동안 해 오던 것과 다른 존재, 다른 방식을 좀처럼 용납하지 않는 보수적 성격을 기본적으로 장착하고 있는 존재다. 사실 일상 가운데서 우리는 장애를 비하하는 수많은 언행들을 하고 있고, 나아가 그들이 겪는 불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유로(특히 ‘경제적인 이유로’) 이슈화 자체를 덮어버리곤 한다.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이런 조금은 민감하고 잘 드러나지 않았던 부분을 수면 위로 드러내기 위해 쓰였다. 어린 시절부터 한 쪽 다리에 장애를 안고 살아오면서 직접 다양한 문제들을 겪은 저자가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에 좀 더 실감나게 다가오기도 한다.






저자는 다양한 부분에서 불평을 터뜨린다. 대개의 경우 장애라는 상황은 의학적으로 치료나 극적인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건 현실이고 그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거다.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꽤 무례한 방식으로 쑥 들어와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바로 기독교인들이다. 이건 저자 자신이 기독교인이기에 주변에 그런 사람들을 자주 만나는 상황이기도 하고, 미국이라는 사회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기도 할 게다.


아무튼 그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영적 능력, 혹은 기도로, 혹은 장애인 본인의 믿음의 수준에 따라 장애가 극복되거나 치료될 수 있다는 주장을 끝없이 하는 것 같다. 그런 말들이 장애인들의 속을 어떻게 파헤치는지 의식하지 못한 채로. 또, 온갖 종류의 민간요법들을 가지고 와서 마비된 다리를 치료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달려드는 부류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장애인들을 하나같이 거짓말쟁이나 사기꾼으로 대우하면서 그들이 무슨 특혜를 부당하게 받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기도 한다. 그렇게 괴롭히지 않아도 이미 그들은 충분히 불편하고 괴로운데 말이다.


이 책의 제목이 이런 사람들을 향한 저자 나름의 대답인 것 같다. “나는 내 몸에 대해서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이 말은 그녀가 기도의 능력을 믿지 않는다거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몸에 대해서 수용하고, 그걸 바꿔야 할 무슨 문제 상황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5장부터 시작되는 책의 두 번째 파트에서 저자는 장애라는 주제에 대한 신학적 접근을 시도한다. 성경에 나오는 다양한 장애 표현들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피는 5장은 흥미롭다. 하나님은 장애인들이 전혀 불편함이 없이 함께 어울리는 나라를 기대하셨다.


그리고 약간의 불편했던 6장이 이어진다. 여기서는 장애를 부정적인 은유로 사용하는 언어습관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사실 여기에는 영어 표현의 특성이 많이 개입되어 있는데, 장애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들(deaf, crippling, blinding, paralyzing, lame 같은)은 2차적인 의미로 뭔가 모자란 존재들을 가리키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애인 본인들에게는 그 단어가 2차적인 문맥이라고 하더라도 자신의 장애에 대한 비하처럼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지 않을까. 이걸 그저 민감하다고 무시해도 될까.


사실 우리나라에서도 장애인을 빗댄 비하표현들이 결코 적지 않으니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성경에 나오는 표현들까지도 그러니까 바꿔달라는 저자의 요청이 어느 정도까지 수용되어야 할 것인가 하는 부분이다. 결국 이 부분은 성경의 재번역 문제, 그리고 여기에 개입될 특정한 신학적 지향(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이 부분에 관해 몇 개 장을 할애한다)의 선택 같은 좀 더 복잡한 문제와도 결부될 테니까.


하지만 교회 안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좀 바꾸는 정도는 좀 더 쉽게 시작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경우들은 단지 우리가 그동안 해 왔던 것을 바꾸라는 요구에 대한 불쾌함 수준 그 이상이 아니니 말이다. 십자가 앞에서 단지 우리의 고집도 내려놓지 못한다면 그는 과연 무엇을 믿는 걸까.




책을 읽으면서 생각이 많아진다. 이 정도의 자극을 해 주는 책이라면 내 기준으로는 좋은 책에 들어간다. 물론 책의 모든 내용이 100% 동의가 되지는 않는다. 특히 장애를 기준으로 세워가는 신학 부분은 저자의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만들어 지지는 않는 법이다.


예컨대 저자는 장애인들에게 나와 천국에서는 그들의 장애가 없어질 거라는 식의 위로를 하는 것이 현재 자신의 몸에 대한 부정으로 느껴진다고 강하게 반발한다(1장). 비슷한 맥락으로 찬양 가사 중에 일어서라거나 달리라거나 하는 표현들이 불편하게 느껴진다고도 말한다(6장). 그러면서 성경에서는 장애가 천국의 복됨을 설명하는 한 가지 요소라고 선언한다(5장). 자, 그러면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라고 말하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사 35:6)은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물론 이 책은 신학책이 아니고, 특별히 교회 내(그리고 일부 사회 안의) 장애에 대한 편견과 오해, 그리고 차별적 조치들을 환기하고, 문제를 풀어가자는 내용이 중심이다. 그리고 이 부분이라면 우리가 충분히 곱씹어 들어야 할 내용이다. 무엇보다 장애인들이 교회에서도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우리(기독교인들)는 뭔가 중요한 건 놓치고 있다는 뜻이다.


특별히 교회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이 부분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우리는 불가능한 일을 요구받고 있는 게 아니라, 주님이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계셨던 사람들을 돌아볼 것을 요구받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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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신학 - 하나님의 사업을 꿈꾸는 이들을 위한 성경적 지침
폴 스티븐스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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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크리스천 창업가들과 교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그 스타트업 대표들과 함께 독서모임도 시작했는데, 그 모임에서 읽을 책을 찾던 중에 전부터 눈여겨보던 폴 스티븐슨이라는 저자를 선택했다. 사실 잘은 알지 못했었고, 어느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말 한 구절을 적어둔 게 있었는데, 그걸 기회로 이 책을 만나게 됐다.


일터 신학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크게 보면 일과 직업의 영역에서 어떻게 신앙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에 관한 내용이지만, 좀 더 좁게 들어가면 사업가들에게 주는 조언으로 채워져 있다. 그야말로 이번 모임에 딱 맞는 책이었던 것.





책은 크게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인 1부에는 “의미”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비즈니스라는 영역에 담긴 기독교적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 저자는 여전히 교계에 남아있는 성속 이원론적 관점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사업이야말로 가난한 자에게 다음 끼니를 제공할뿐더러 새로운 부를 창출하게 함으로써 가난을 극복하게 돕는 최상의 장기 전략”이라고 말한다(25).


저자는 사업은 더 거룩한 어떤 일을 지원하기 위핸 도구적 가치만 지니는 것이 아니라, 사업 그 자체가(일을 만들고, 고객을 상대하고,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등의 그 모든 제반 업무가) 하나의 거룩한 일, 나아가 소명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저자는 모든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는 오래된 기독교 전통에 맞닿아 있다.


후반부에는 “동기”라는 제목이 붙어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이제 사업이라는 영역을 기독교적으로 해 낼 수 있는지, 여기에 필요한 영적 조언들이 담겨 있는 부분으로 느껴졌다. 때문에 신학적인(또 성경적인) 접근이 자주 보인다.


저자는 사업이라는 영역이 워낙 바쁘게 돌아가기에 정기적으로 잠시 뒤로 물러나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또, 진실함과 창조성, 거룩함을 드러내는 사업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제안한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어느 정도 익숙한 사람이라면, 책에서 하는 말이 그리 어렵지 않게 다가올 것 같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온 세상을 하나님의 창조물로 보고, 타락으로 인해 훼손된 원래의 창조 목적을 회복하는 것을 주요 과업으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특정한 종류의 신성한 일만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을 새삼 다시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었고.


물론 최근에는 목사와 선교사가 하는 일이 가장 거룩하고, 교회의 제단에서 하는 일만이 신성하고 하는 식의 극단적인 이원론을 고수하는 신자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그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바른 신학에서 나왔다기보다는, 오히려 거룩의 영역을 지워버리는 세속주의자들이 득세하면서 나타난 결과인 경우가 좀 더 흔하다. 결과는 비슷해 보이지만 둘은 전혀 다른 매커니즘이다.


맨 처음 말했던 모임에서 함께 교제할 기회를 누리면서, “사업의 영역에서 신앙으로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있구나, 그것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팔팔한(?) 분들이” 하는 놀라움이 컸다. 그들이 신앙과 일터를 통합하는 관점에 얼마나 갈급해 있는지도 와 닿았고. 이 책은 바로 그런 독자들에게 꽤나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좋은 신학적 바탕 위에 비즈니스라는 영역을 훌륭히 녹여냈다.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일터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일해 왔다는 경험도 여기에 한 몫을 했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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