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라 (재정가 특별판) -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백지윤 옮김 / IVP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묵직한 책이다. 제목인 ‘알라’도 꽤 많은 사람들에게 가볍지 않게 다가올 텐데, 부제인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은 같은가’는 이 의심과 불안을 좀 더 강화시킬지도 모르겠다. 책을 좀 더 읽어 나가다보면, 더 이상 피할 자리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정말로 저자인 미로슬라프는 두 종교의 신이 같은 존재일 가능성을, 매우 진지하게, 그리고 우호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여기에서 저자가 왜 이 작업을 시작했는지를 알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이 책에서 저자가 천착하고 있는 주제는 ‘구원’이 아니라, ‘화해’, 또는 ‘평화’이다. 그러니까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영원한 복된 상태를 누릴 것인가가 아니라, 오랫동안 서로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 온 두 종교가 서로 싸우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실 애초의 목적이 이런 것이었다면, 굳이 이 책의 작업, 그러니까 두 종교의 신이 같은 존재임을 역설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다. 두 종교의 신자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경전에는 무엇보다 ‘이웃사랑’이 중요한 덕목으로 ‘명령’되고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신앙인들이 그들의 경전을 충분히 존중하지도, 따르지도 않는다는 점이지, 두 신앙이 본질적으로 서로를 적대하는가가 아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보자. 그러면 저자는 어떤 식으로 이 두 종교의 신이 같은 존재임을 설득하려 할까. 유일신 종교라고는 하지만, 삼위일체라는 개념은 두 종교의 신관에서 결정적인 차이로 보인다. 실제로 이슬람교의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우상숭배로 평가되기까지 하니까.
저자는 몇 가지로 이를 완화시키려 하는데,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기독교인들 역시 ‘무슬림들이 비판하는 식의 삼위일체 이해’를 문제로 여긴다”는 부분이다. 무슬림들이 삼위일체를 불편해 하는 이유는 그것이 ‘신이 세 분’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통적인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은 한 분’이라고 믿지, ‘세 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삼위일체란 한 분 하나님의 독특한 존재양식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그림일 뿐이다.
물론 이 주장을 무슬림들이 받아들인다면 중요한 포인트에서 상당한 정도의 의견일치를 이룰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좀 더 단순한 해결책(기독교의 설명은 틀렸고, 자신들은 옳다)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양측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이 비슷하다는 부분도 주요한 논거로 제시된다. 신은 오직 한 분이시고, 창조주이시며,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존재이다. 그분은 선하고, 자비로우시며,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사랑을 요구하신다. 이렇게 비슷한 존재는 서로 같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사실 이 문제는 단순한 유비의 차원은 아니고, 제시된 신의 속성 자체가 지니고 있는 특성의 논리적 귀결이기도 하다. ‘오직 한 분인 신’을 믿는 두 사람은 결국 같은 신을 믿는 게 아닌가. 같은 논리가 ‘만들어지지 않고, 오히려 만드신 분’을 믿을 때도 적용된다.
그러나 여기에도 저자의 결론보다 좀 더 쉬운 해설이 존재한다. 양측이 같은 신을 섬기지만 한 쪽이 왜곡된 형태로 섬기고 있다는 결론이다. 사실 이건 마르틴 루터를 비롯해 여러 기독교 신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 해법이기도 한데, 그 방향을 바꿔도 마찬가지로 통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결론을 내버리면 결국 서로 간의 반복은 좀 더 심해질 뿐. 이건 평화라는 애초의 저자의 의도에 맞지 않는다.
때문에 저자는 이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을 은근하게 제시한다. 같은 신을 양측 모두 어느 정도 왜곡된(혹은 제한된) 형태로 섬기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사실 이 부분은 직접 표현된 건 아니지만, 신에 대해 우리가 모든 걸 알 수 없다는 불가해성, 혹은 신앙의 신비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암시적으로 제안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이해하는 하나님 이해가 ‘완벽’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 없으니까. 좀 더 열린 마음으로 ‘한 분 하나님’을 믿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해 볼 필요가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다만 신앙이라는 게 그렇게 논의를 위한 ‘중단’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제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무시한 채, 몇몇 신학자들의 대화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게 한계.
결국 저자의 논의는 ‘사랑의 요구’라는 윤리적 차원과 공공선에 대한 호소로 넘어가는데, 사실 평화를 위한 논의라면 이런 차원도 나쁘지는 않다. 그렇게 사랑과 자비를 강조하는 신을 섬긴다면서 상대를 파괴하려고 하는 일에 나서는 건 무엇보다 자기 신앙을 부인하는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책의 결론부로서는 조금 약한 느낌도 들고.
저자가 언급하지 않았던 부분을 좀 더 말해보자. 저자는 삼위일체 문제를 신의 불가해성, 신비라는 측면으로 어느 정도 조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이슬람교의 가르침에는 그런 식의 조화 가능성 자체를 무산시키는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삼위의 이위인 성자, 예수를 단순한 선지자들 중 한 명(물론 꽤 존경심을 담아서)으로 설명한다. 애초에 예수의 신성에 대한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는 건데, 이 문제는 예수의 인성과 신성을 정교하게 분리해 사고하는 고대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걸까?
또, 물론 의도적으로 저자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지 않았지만, 과연 신앙을 다루면서 이 부분을 빼놓을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개인적으로는 이 문제를 빼버린다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양 종교의 신자들 대부분이 저자가 제안하는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려 들지 않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담긴 저자의 의도가 충분히 설득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고 본다. 그러나 이건 목적 달성을 위한 방법에 관한 것이지, 그 목적 자체는 충분히 공감하고, 응원하고 싶다.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같은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료로서 우애를 쌓을 수도, 협력할 수도 있다. 다만 우리 사이에 높이 쌓인 혐오와 불신의 벽을 허무는 데는 문자보다는 영의 능력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