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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와 교회 -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교회에 대한 가톨릭·동방 정교회·개신교적 이해를 찾아서
미로슬라브 볼프 지음, 황은영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2년 7월
평점 :
간만에 머리 아픈 책을 읽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읽어냈다’. 물론 볼프의 책이 쉽게 읽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제까지 읽었던 책들에 비해서도 이번 책은 월등히 난해했다. 도대체 한 문장을 몇 번씩이나 읽어갔는지 모르겠다. 하도 이해가 되지 않아 번역자가 누군지 일부러 찾아봤다. 알라딘 기준으로 다른 책을 번역한 이력이 나오지 않는 걸 보면, 이번이 처음이었을까? 결국 중반 이후부터는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기 보다는 전반적인 맥락을 잡고 넘어가는 데 치중했다.
사실 이런 번역상(애초의 문장이 난해했을 수도 있다)의 악조건을 넘어가면 책의 전체적인 구조는 단순하다. 책의 1부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의 대표적인 조직신학자 두 명(교황직을 맡기도 했던 라칭거 추기경과 지지울라스 총대주교)의 교회론을 검토하고, 2부에서는 그 두 전통적 교회의 입장과 함께 ‘자유교회’라는 개신교 중에서도 좀 더 덜 조직적인 입장을 함께 제시하면서 볼프 자신의 교회론을 제시한다.
볼프 자신은 이 세 개의 입장 중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대신, 경우에 따라 각각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인용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한다. 그의 교회론의 핵심은 그 자신이 말하는 것처럼 마태복음 18장 20절에 기초하는데, “두세 사람이 내(예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는 구절이다. 이를 기초로 볼프는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약속은 믿음을 지닌 개인이 아니라 회중에게 약속되었으며, 이 회중을 통해서 개인에게 그 약속의 효력이 전달된다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그는 신앙에 있어서 개인주의에 치우친 자유교회의 주장과는 거리를 둔다.
사실 전통적인 교회론은 삼위일체로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이 점에서 의견을 일치를 이룬다. 하나님은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삼위로 영원한 내적 교제를 이루시는 분이고, 이런 그분의 존재 방식은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교회의 존재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요 17:21)
하지만 그 실제적인 존재 방식에서 이 두 오래된 신앙 전통은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로마가톨릭교회는 삼위의 통일성에 집중하면서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적 한몸됨을 강조한다면, 동방정교회는 삼위의 삼중성을 강조하면서 각 교회의 독립적인 연대 정도의 구조를 지지한다. 이 점에서 동방정교회의 입장은 자유교회와 유사성을 지닌다.
그런데 또 성직자라는 직임에 관해서 두 교회 전통은 꽤나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데, 둘 모두 그리스도인 개인이 교회에 속하는 과정에서 성직자의 위치를 매우 중요하게 본다. 주교야말로 교회를 역사적 전통과 이어주는 고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듯이, 이런 견해는 점차 군주적 구조로 변해갈 위험이 있었다(마치 교황제도가 그랬듯이).
볼프는 참된 삼위일체적 구조를 지닌 교회는, 군주제적 구조를 띨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삼위 하나님이 교통하듯이, 교회의 구조 역시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뮐렌이라는 신학자의 의견을 인용하면서 심지어 교황제도 집단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상호의존적이며, 서로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교회가 사정없이 비판받는 시대다.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외국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교회의 이미지는 낡고, 고루하고, 촌스럽다. “아직도 교회에 다니느냐”는 말이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교회의 존재 이유를, 쉽게 말하면 “왜 교회에 나가야 하는지”를 분명히 말하지 못하기도 한다. 교회론의 위기다.
볼프의 이 책은 (난해한 문장이 발목을 잡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자는 자기 혼자서 믿음으로 나아온 것이 아니다. 교회는 그에게 신앙의 내용을 전달해주었고, 그 길로 이끌었다. 하나님이 주신 신앙은 그로 하여금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속에 자리 잡게 만든다. 그는 교회적으로 규정된 존재다.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교회지만, 그 실제 존재 방식에서 잘못될 여지는 언제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군주제로 대표되는 교회의 위계조직의 경직화다. 애초에 모든 그리스도인들(교황이든, 주교든, 총회장이든)이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 속으로 부름을 받았다면, 그들 중 한 명이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우월한 신앙적 계층을 형성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물론 실제 운영에 있어서 조직이 만들어지고, 명령관계가 형성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각 지역에 존재하는 개별교회만 해도 의사결정과 사역을 위한 구조가 존재한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통해 형성된 그런 모습은 다양성의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구조들이 ‘교회의 법’으로 만들어지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무엇이 되는 순간 타락은 시작된다. 그건 영원한 교통 중에 계시는 삼위 하나님의 모습을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을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올리는) 일신교적 모습이니까.
오늘의 교회는 반론과 이의제기에 얼마나 열려있을까. 질문이 꺼려지고,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무례하거나 믿음 없음을 보여주는 것인 양 억누르는 게 교회의 모습이라면, 그건 볼프의 말처럼 그가 무슨 고백을 한다고 해도 교회라고 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내 판단이 아니라 교회의 판단, 정확히는 공동체의 판단, 좀 더 정확히는 공동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님의 판단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사람들을, 정확히는 그런 리더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아직 교회에 희망이 있지 않을까. 만약 교회가 그 본질에 따라 삼위 하나님처럼 서로 진정한 교제를 이루고, 그렇게 살아내기 위해 애쓴다면 또 얼마나 큰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