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탐욕의 대상에서 사랑의 도구로 그리스도인의 일상 중심 잡기 1
손성찬 지음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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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의 저자와는 학부 4년, 신대원 3년을 같이 다닌 친구다. 몇 년 전 개척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어느 샌가 책을 한두 권씩 내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제법 인기 있는 작가가 된 듯하다. 그 사이 한두 번 만나기도 하고 했던 것 같은데, 정작 책을 제대로 읽어 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만 이런 친분 관계가 서평에 영향은 전혀 주지 않았다. 물론 뭐 내가 정한 중립성을 지켜가며 리뷰를 써 온 것도 아니기도 하고, 이게 무슨 대단한 글도 아니니 애초에 상관 없기도 하지만.


한 해에 백 여 권 정도 책을 읽고 있지만, 그 중 설교집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작년 같은 경우 딱 한 권을 읽었는데, 유진 피터슨의 “잘 산다는 것”이라는 책이다. 그나마 그 책도 설교집이라기 보다는 교인들에게 쓴 일종의 목회서신 비슷한 것이었고. 그 전 몇 년을 검색해 봐도 설교집 리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설교집에 따로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다. 다만 설교라는 자리가 가지고 있는 시간적, 공간적 한계로 인해, 전개할 수 있는 내용의 범주와 깊이가 제한되기에, 탁월한 무엇을 얻기 쉽지 않기도 하고, 내가 그 자리에서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있지 않는 이상은 온전히 그 내용을 내 것으로 수용하는 게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쉽게 말해 제한된 시간 속에서 읽을 만한 설교집을 만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손성찬 목사가 쓴 이 설교집에 대해서는 조금 다른 평가를 내려도 될 것 같다. 물론 여전히 앞서 말한, 설교라는 자리가 안고 있는 상황적 한계 때문에 논지를 좀 더 깊게 들어가지 못하거나, 너무 날카롭지 않게 다듬었던 게 아닐까 싶은 부분이 보이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이 주제에 대해 깊은 고민과 그로부터 나온 통찰이 잔뜩 묻어난다.




이 책에 실린 여덟 편의 설교는 제목처럼 돈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처음 세 편은 일반론적인 고찰로, 돈이라는 것이 기독교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다룬다. 그것은 그 자체로 복의 상징이라거나, 반대로 무조건 멀리해야 할 악의 결과물이 아니라 중립적인 도구로서의 성격을 강조한다(물론 과연 돈이 “중립적”인가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들도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도구로서의 돈은 쉽게 목적으로 치환된다. 이른바 돈이 신(우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성경은 이에 대해 매우 경계하며, 특히 복음서에서는 이런 방향을 바꾸어 돈을 하나님을 향해 사용하는 법에 관해 일부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의 반복이지만, 그 안에서도 저자의 통찰력이 언뜻언뜻 튀어나온다.


예를 들어 저자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한 젊은이의 이야기에서, 주님이 그에게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시자 “심히 근심”했다는 구절에서, 그가 이제까지 자신이 가진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겨왔다고 자부하던 생각이 허상임이 드러났다(58)고 지적한다. 또, 같은 본문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다 팔아 나누어 주라는 명령에 관해 저자는 이를 “네가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을 버리고 비우라”는 명령으로 읽어내기도 한다(67).


책의 후반부인 4장부터는 어떻게 돈을 벌어야 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할 것인가를 다룬다. 사실 이 책의 진가는 이 부분에서 좀 더 두드러지는데, 단순히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하면 된다는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오늘날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문제 중 하나인 근로소득과 자본소득의 비대칭성, 그리고 그 대표적인 부작용인 투기의 문제까지 직접 지적한다(해본 사람은 안다. 이런 주제를 설교의 자리에서 꺼내는 것이 어마나 부담스러운 일인지).


그리스도인의 돈벌이에 관해 저자가 마무리 부분에서 하는 말이 특히 인상적이다. 이윤의 결과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보다 조금 뒤처질 수밖에 없다는 걸 기억하라는 부분이다. 이 정도면 젊은 목사 치고 꽤 용감한 발언이 아닌가.





이 외에도 언급하지 않은 인상적인 구절들이 적지 않다. 사실 돈에 관한 성경 본문이라는 것이 은근 해석하기가 난해한 것들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저자는 용기 있게 그런 구절들 앞에 서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낸다. 이 주제에 관해서 교회 안에 온갖 얼치기 진단과 처방들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이 정도만 해 줘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쉬운 부분은 여덟 번째 장에서 시도했던, 희년을 고리로 해서 좀 더 큰 사회 경제 체제에 대한 비판적 시도가 그리 인상적이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뭐 한 편의 설교에서 다루기엔 조금 큰 이야기였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쉽고 짧은 문장에, 논리 전개에도 뭉개짐이 없다. 또, 책에서 중심에 두고 있는 돈이라는 주제에 대해 피해가는 바 없이 담백하게 직면하는 부분도 좋다. 썩 괜찮은 설교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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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위한 음악 - 교회음악의 역사, 고대 이스라엘에서 현대 가스펠까지
요한 힌리히 클라우센 지음, 홍은정 옮김 / 좋은씨앗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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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의 역사에 관한 책은 오랜만이다. 아마 학부 시절에 한 권 본 것 같으니 시간이 꽤 지났다(사실 그 책은 교회음악사만 담겨 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 책은 구약 시대의 종교음악부터 시작해 현대(20세기 초중반)의 가스펠 음악까지, 말 그대로 찬송이라고 불릴만한 음악의 역사를 전반적으로 훑어가는 책이다.


그리고 앞서 교회음악이라는 단어로 시작했지만(실제로 책의 대부분은 여기에 할애되어 있지만), 방금 언급했던 것처럼 저자는 이를 단순히 교회 안에서 연주되고 불리는 음악만이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했던 찬양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이 부분은 성경에 언급된 악기나 곡조에 관한 기록 등을 언급하는 정도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 시기의 찬양에 관한 언급을 간단히 한 뒤, 본격적으로 교회음악이라고 할 수 있는 그레고리오 성가에 관한 내용이 따라온다. 흔히 이 성가들은 대교황이라고 불리는 인물들 중 하나인 그레고리우스 1세 때 교황청이 주도해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저자는 당시 교황들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없었으며 오히려 이 노래들은 (당시 서부와 중부 유럽을 지배하고 있던) 프랑크족의 것이었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좀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아일랜드 출신의 수도사들이 이 작업에 큰 공헌을 했다고.





그 다음은 종교개혁 시기 개혁자들의 음악이었다. 개혁자들의 성격에 따라 교회 음악에 대한 입장도 달랐는데, 어지간한 건 그대로 남겨두었던 루터와 모든 걸 다 새로 만들기를 원했던 츠빙글리, 그리고 그 둘 사이의 칼뱅은 교회음악에 대해서도 꼭 그처럼 차이를 보였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를 거치며 청중은 그저 듣기만 했던 교회음악이 청중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함께 부르는 식으로 발전한 것은 큰 변화였다.


한편 그레고리안 성가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단선율의 음 위에 성경 속 가사를 얹은 것이었다. 쉽게 말해 하나의 음이 이어지는 노래였다는 것이다. 노래라기보다는 시처럼 들리기도 하는 독특한 형식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좀 더 많은 음이 함께 어우러지는 다선율 음악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저자는 이런 변화의 대표자로 팔레스트리나라는 작곡가를 꼽는다. 참고로 이 장부터는 주요 작곡가들(바흐, 헨델, 모차르트, 멘델스존)을 중심으로 서술된다. 바흐와 헨델에서 가장 화려하게 빛났던 교회음악은 점차 교회 밖으로 나와 세속화의 길을 걷는다.


책의 마지막 장은 가스펠 음악에 할애되어 있다. 저자는 몇 번이고 “아프로아메리칸”이라는 학술적 용어로 부르는, 그러니까 흑인들의 음악에서 시작된 가스펠은 노예로 끌려온 그들의 역사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특유의 소울과 브루스 리듬, 독특한 창법 등이 더해지면서 곧 가스펠은 교회음악은 물론 세속 음악계에서도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어떤 것의 역사를 공부하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고작해야 수십 년을 사는 인간이 절대로 다 경험할 수 없는 수백, 수천 년의 역사를 훑어가는 건 마치 우리의 한계를 극복하는 문을 살짝 열고 한 발을 내딛는 느낌을 준다. 내가 역사를 읽을 때마다 설레는 이유다.


이 책은 교회음악에 관한 오랜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좀 전문적인 음악 이론과 관련된 내용이 나와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런 책을 읽어갈 땐 그런 부분은 과감히 쓱 훑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사실 이 책의 중심은 그런 세부적인 음악 변화보다는 그런 변화들이 어떤 사회적 양상의 변화와 연결되어있는지를 살피는 것에 있으니 말이다.


다른 모든 제도나 문화, 양식들처럼, 교회도 시대적 상황에 맞춰 다양한 옷을 입어왔다. 교회 음악도 마찬가지다. 각각의 시대에 살던 사람들은, 단지 이전 시대의 음악을 반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 자기 시대에 맞는 음악을 새롭게 만들어 냈다. 어떤 이들은 새로운 음악이 경건하지 못하다고 경계하기도 하지만, 그런 식의 반항은 역사의 큰 파도 앞에서 곧 묻혀버린다(하지만 여전히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주제가 주제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자의 신학적 입장도 묻어나올 수밖에 없다. 독일에서 태어나 신학을 공부하고 한때 루터교 목사로도 일했던 저자는,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계몽주의의 세례를 축복으로 여겼던 초기 자유주의자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으로 보인다. 물론 이 부분이 전체 역사를 훑어가는 데 큰 지장을 주지는 않지만, 기계적인 중립을 지키거나 모두를 어느 정도 시니컬하게 평론하는 태도가 최선인 것은 아니니까.


교회음악에 관해서 이만큼 정리된 책도 없는 듯하다. 관련 정보를 위해서 한 번 읽어볼 만한 수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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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우리 가족뿐입니다
김민철 지음 / 죠이북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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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봐도 어떤 내용일지 짐작이 가는 책이다. 이천의 한 상가 건물 지하에 위치한 교회, 그리고 부임한 지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아내와 자녀들만 함께 예배하고 있는 상황(물론 중간에 함께 예배했던 분들이 계시긴 했다)이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현실이다. 목회자로서 참 낙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책 전반에 걸쳐서 이런 상황을 어떻게 저자가 느끼고, 감당하고, 극복하고 있는지 꾹꾹 눌러쓴 흔적이 보인다. 오래된 상가 지하의 교회가 그렇듯, 여름엔 습하고, 겨울엔 추운 상황, 가끔은 배관에 문제가 생겨 예배실 한 가운데로 물이 흥건하고, 아마도 냄새도 심할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저자는 예전을 따라 예배를 꿋꿋이 진행해 나간다. 일견 그게 무슨 고집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애초의 교회의 사이즈라는 것이 어디 정해져 있는 게 아닌 이상, 매주 가족과 함께 예배한다는 것이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저자 역시 다양한 시도를 해 본 것 같다. 교역자가 바뀌었으니 현수막도 걸어보고,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광고하기도 하고, 쓰레기봉투를 나누어주거나 하는 식으로 나름 해볼 수 있는 것들을 해 봤지만, (책에 따르면) 저자가 오기 전 교회의 이미지가 워낙에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었다는 문장이 자주 보인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랬을까 궁금해지는 부분. (교회성장학과 관련해 반면사례로서도 좀 조사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다른 선택을 하지 않고 계속 현재 자리에서 현재의 상황을 유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게 아닌 상황에서 보통 이런 경우라는 다른 교회 부교역자로 들어가거나(나이 때문에 제한될 수도 있긴 하다), 현재 있는 곳을 정리하고 다른 곳에서 새로운 목회지를 찾아볼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어떤 게 맞고 틀리고의 문제는 아니다)


책 가운데에도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내적 소명은 내가 이 일로 부름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리키고, 외적 소명이란 그 일에 실제로 뛰어들었을 때에 어느 정도 열매가 보일 때를 말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저자의 (적어도 이천에서의) 목회사역은 외적 소명 부분을 검토해 봐야 할 것 같은데, 저자는 이를 좀 다르게 읽어낸다. 적어도 아직까지 이 사역을 하면서 생계가 이어지고 있으니 좀 더 해도 된다는 사인이 아닐까 하는. 뭐 나 역시 비슷한 생각으로 살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나와는 다르게 저자는 가족도 있으니...


사실 어떤 감동이나 그런 것 보다는 염려가 더 많이 드는 독서였다. 왠지 모를 동질감, 그리고 이왕이면 이런 분이 좀 더 잘 됐으면 좋겠다는 격려와 안쓰러움이 복합적인 그런 감정이랄까. N잡까지 하면서도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계속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다고 본다. 앞서도 말했지만, 교회의 표준 사이즈라는 게 어디 정해져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교회도 하나 존재하는 게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비록 현재 교인은 없지만, 저자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를 불러서 강사로 세워주시는 선배 목회자들, 그에게 기꺼이 일을 맡겨주신 출판사 사장님, 특히 교회에 물이 샌다는 말을 듣고 함께 와서 수리에 동참해 준 지역의 동료 목회자와 성공회 신부의 이야기는 인상적이었다. 이런저런 인연으로 저자를 만나 함께 성경을 공부하고, 깊은 대화를 했던 여러 사람들도 아마 저자의 사역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에세이에 가까운 책이지만, 그 가운데 날카로운 교계의 현실에 대한 비판도 보인다. 저자가 처음 고흥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교회를 개척하려고 했을 때, 감리교 교단의 지방 조직 내 알력다툼을 원만히 끝낸답시고 양쪽 파벌에서 지지하는 개척인가를 모두 허락하지 않기로 했던 사건이라든지, 재정적으로 여유가 없는 교회들에서 은퇴를 해야 할 목사의 전별금을 후임 목회자가 부담하는 조건으로 목사를 청빙한다던지 하는 것들은 한국 교회 내 고질적인 악습이다.


그리고 저자와도 밀접하게 관계있는 소위 목회자의 이중직 문제다. 저자가 속한 감리교단에서는 2016년 이중직을 금지하되 미자립교회에 한해서는 허락한다는 결론을 냈다고 한다. 애초에 미자립교회의 목사자들을 먹여 살릴 것도 아니면서, 일까지 하면 안 된다고 금지한다는 발상 자체가 어이가 없긴 하지만, 저자는 이런 결정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은 지적을 한다.


이런 결의는 교단에서 목회자를 책임지지 않겠다는 의미로 느껴진다는 것. 차라리 이중직을 금지하고, 목회자들에게 최저생계비(전부가 아니면 일부라도)를 지급한다던가, 또는 생계에 곤란을 겪는 목회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좀 더 적극적인 행정을 하는 대신, 그저 이중직을 풀어 줄 테니 알아서 먹고 살라는 식으로만 느껴졌나 보다(물론 꼭 그런 취지로 개정된 건 아니겠지만).


각 교단에서 운영하는 직영 신학교에서는 한 해에도 수천 명의 졸업생들을 배출하고 있지만(물론 그 가운데는 제대로 된 교육을 안 한 곳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사역의 진로에 대해서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는다. 모두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라는 식이다. 가톨릭처럼 그들의 거취를 중앙의 행정에서 조절하는 식이 아니라도, 근본적으로 목회자 수요와 교계 현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상황인데, 관련 논의가 등장한 지 20년은 훨씬 넘은 것 같은데도 여전히 대안은 없어 보인다. 어어 하다가 0.7 이하로 내려가 버린 출생률처럼, 아마 이 문제도 결국 파국으로 끝나버리진 않을까.



저자의 선택에 완전히 공감이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저자의 “도전”에 박수를 보내고는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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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눈으로 본 예수 - 주님을 사랑한 첫 여성 제자들 이야기
레베카 맥클러플린 지음, 김은홍 옮김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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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여성도 장로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을 업로드 한 적이 있다. 꽤 보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댓글이 몇 개 기억에 남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나더러 “성경을 바꾸려는 사탄의 하수인”이라며, 성경에 분명 장로는 “남편”이어야 한다고 써 있으니 여성은 장로도, 목사도(이 말은 하지도 않았지만, 논리적인 귀결이기는 했다) 될 수 없다고 홀로 선언하는 댓글이었다(지금은 삭제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자체는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문화적 배경 아래 쓰이고, 특히 우리의 경우 (상징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번역의 번역 과정을 거친 후에야 성경을 손에 들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자구 하나에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는 건 조금은 우스운 일이다. 그건 성경을 귀중하게 보는 태도가 아니라 우상시 하는 모습일 뿐이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보다 수천 년 전 성경이 쓰였던 당대의 문화에 집착하는 복고주의일 뿐이다(물론 이 둘을 가리는 게 때로 어렵기도 하다).


무식함이야 죄는 아니지만, 무례함은 분명 회개해야 할 악이다. 나는 그 댓글에서 자기 의에 충만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비난했던 복음서 속 어떤 이가 떠올랐다. 교회의 직분이란 성별이나 인종이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맡는 게 옳다. 내가 알기론 그게 바울 서신 속 핵심 주장이다.





이런 성경 속 문화적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여성에 대한 시선, 처우, 지위에 관한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여전히 보수적인 기독교계에서는 여성에 대한 교회 내 지위나 역할에 차등을 두고 있다. 더더욱 황당한 건 자신들의 그런 태도가 마치 성경에 의해 지지되는 것인 양 고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기독교가 전성기를 맞았던 중세 이래로 교회 내 여성의 지위는 결코 높지 않았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틀렸느냐,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었느냐는 반문은 강력하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또한 판단착오와 오해로 많은 실수를 하듯, 그들 또한 자신들이 속했던 문화적 상황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오해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동등하다는 갈 3:28의 진리가 적어도 교회 안 삶 속에 실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최근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또 하나의 우려도 공감이 되긴 한다. 소위 여성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신학 전체를 여성의 입장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대한 두려움과 반발이다. 극단주의적 페미니즘의 발흥으로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 폐해를 목격한 사람들이 이쪽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인적으론 이쪽 역시, 남성 중심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시대적 한계에 파묻힌 시도라고 본다. 하지만 일단 여성이라는 말만 나와도 색안경을 끼게 만든 것도 사실이고.





자, 서론이 좀 길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여전히 교회의 직분이나 의사결정구조, 지위 등에서 소외되고 있는 교회 내 여성들에 대한 위로, 나아가 복음서 속 여성들의 중요한 역할에 대한 재발견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예수를 동성애자나 흑인으로,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지 않고서, 오로지 복음서 내 기록에 근거해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그러니 보수적 기독교인들도 안심하시라).


저자에 따르면 복음서에서 여성들의 증언을 뺀다면 우리는 손에 들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예수의 탄생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마리아의 증언 때문이었고, 그분이 자신을 처음으로 생수의 근원으로 소개하셨던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은(그래서 그 대화의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준 증인이었던) 사마리아 여인 한 명 뿐이었다.


사실 이미 복음서에도 열두 사도 뿐 아니라 여러 여성 제자들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유명한 여성 제자였고, 그분과 함께 여행을 다니지는 않았더라도 곳곳에 그분을 따르는 여성제자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분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것도,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도 모두 여성제자들/증인들이었다.


책 제목처럼 이미 복음서는 ‘여인들의 눈으로 본’ 증언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오직 여성들이 더 우월하다는 극단적 주장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자(저자는 그런 뉘앙스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되고 억압되고 있는 상황에서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책은 복음서 속 여성이 등장하는 본문들을 골라, 그 행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풀어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논리적 전개에 큰 무리가 없고, 결론도 그리 과격하거나 하지 않다(책 제목이 ‘여성의 관점으로 본’이 아닌 것에 주목하자). 하지만 복음서 안에 이렇게 여성들의 증언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가 하는 작은 놀라움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목에 ‘여인들의 눈으로 본’이라는 수식어구가 붙어있지만, 책은 기본적으로 복음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꼭 여성이라는 주제가 아니라도 복음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도 충분히 선택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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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원 교수의 예배 꿀팁 궁금해 시리즈 3
안덕원 지음 / 홍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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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양은 홍성사답지 않게(?) 작고 아담하게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는 홍성사는 C. S. 루이스로 만나기 시작한 출판사였던지라, 한 권 한 권 양장본으로 내던 기억이 강하게 박혀 있어서다.(물론 요새는 루이스 책도 다 무선제본으로 표지를 갈아 다시 내고 있긴 하지만, 루이스 책 정도는, 음, 양장본으로 좀 튼튼하게...) 파스텔 컬러에 제목만 굵은 검은색 글씨로 큼지막하게 박아넣은 것이 요새 감성이긴 하다.


다만 일단 책장을 펴면 좀 놀라게 되는데, 글씨가 너무 작다. 그리고 너무 많다. 판형을 유지하면서 너무 두껍지 않게 내용을 담으려다 보니 그렇게 된건가 싶은데, 이 정도면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은 책을 펴기가 힘들 것 같긴 하다. 물론 애초에 내용 자체가 좀 더 젊은 세대를 겨냥한 것 같긴 하지만.




책은 예배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을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해 두었다. 모두 마흔 개의 질문이 담겨 있는데, 1부는 예배라는 큰 그림을 그려주는 내용이고, 2부는 예배의 각 순서에 관한 질문, 3부는 교회력과 절기, 4부는 성례(성찬, 세례), 마지막 5부는 예배의 좀 다른 모습을 모색해 보는(특히 온라인 예배를 중심으로) 내용이 담겨 있다.


전반적으로 틀 자체는 짜임새가 있다 싶은데, 내용을 서술하는 방식이 좀 딱딱하다. 첫 몇 개 장만 봐도 아, 교수님이 딱 교수님처럼 썼구나 싶은 생각이 물씬 든다. 뭐 억지 유머를 넣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이렇게 딱딱하면 애초에 목적했던 젊은 세대가 쉽게 접할 수 있을까 싶긴 하다. 예배학 전공자가 강의하는 느낌이다. 그것도 넣고 싶은 많은 내용을 줄이려다 보니 연결이 좀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자주 보인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관련 주제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균형 있게 정리해 두고 있어서, 참고서로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양한 교파의 입장을 두루 살피면서, 교파나 교단의 입장을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역사적 교회의 전통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 꽤 잘 와 닿는다. 오로지 지금 나의 신앙생활만이 전부인 양 착각하는 근시안적인 신앙행태에서 벗어나려면 역시 역사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책이다 보니 최근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온라인 예배(심지어 온라인 성찬도?) 같은 주제에 대한 고민도 보여 반갑다. 종합하자면 일종의 대안적 예배 형태로 인정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지만 좀 더 바람직하게는 함께 모이는 게 좋겠다 정도인데, 나도 이 입장에 동의한다. 다만 팬데믹 상황에서도 반드시 모여서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예배를 해야만 믿음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꼰대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라에서 아직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것 같다.


제목처럼 예배와 관련된 다양한 팁을 알아본다는 정도로 읽으면 될 것 같다(아주 전문적인 내용까지는 소개되지 않기도 하다). 저자도 자주 말하고 있지만, 예배와 관련해도 다양한 신학 전통이 있기에, 어느 한 쪽이 틀렸다고만 말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서로 다른 전통에 대해 이해하려는 자세로, 각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면 얼마든지 여러 모습의 예배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물론 우선은 자신이 속한 예배 전통의 본질을 충분히 되살려 보는 게 먼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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