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적'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꺼려지는 수식어이다.

'저 사람은 비판적이야'라는 말에는 분명히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비판적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종종 그런 사람을 미워하기도 한다.
(그 사람의 비판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라는 책에 보면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트로이성을 점령할 수 없었던 그리스 군은
거대한 목마를 만들어 그 안에 병사들을 숨겨 놓는다.
하지만 트로이 성의 사람들은 그 목마에 숨겨진 함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것을 전리품으로 성 안으로 들여오고자 했다.
그 때 그것을 막았던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크산드라라는 이름의 공주였다.

 

그녀는 목마를 성안으로 가져오면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부정적인 예언은 무시했고,
결국 성은 정복을 당하고 말았다.

 

누군가 말했던 대로,
인류는 크산드라 이래로 늘 부정적인 견해를 표하는 사람을 멀리해왔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비판적인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살 다 보면 그런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할 때가 있다.)

 

비판이 사라진다면 세상에 도무지 '발전'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비판이란 지금 당하고 있는 불편이나 눈 앞에 벌어지는 잘못을
잘못되었다고,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니 말이다.
비판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을 망하게 할 트로이의 목마를 끌어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판과 유사하지만 그 부정적인 개념을 제거한,
'좋은 의미의 비판'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소위 '비판'과 '비평'의 구분이 그 결과물이다.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르지 않은 부분을 지적해 드러내고 그 책임을 묻는 일'이라는 뉘앙스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비평은 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비판은 주관적인 가치관으로 약점을 공격하는 행위라고.
그럴까?

 

이 정의에서 '잘못'과 '약점'은 사실은 같은 말이다.
또, '지적'과 '공격'이라는 말도 같은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도 둘 사이의 차이점은
그 지적(혹은 공격)의 목적이나 전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지적되는 차이는 '목적'에서 발견된다.
상대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하는 지적과 공격은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상대를 좋아하지 않아도, 아니 싫어하더라도 비평은 가능하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은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꼭 선의나 악의를 갖지 않더라도 우리는 비평이나 비판을 할 수 있다.
좋아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말라는 투의 지적이라면 적절하지 못하다.

 

두 번째 기준인 '전제' 역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비판이든 비평이든
어차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평가하는 것이다.
누가 자신의 기준을 절대로 틀리지 않는 완전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또 한 가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분법은 '대안'의 여부다.
그게 싫으면 다른 대안을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정당한 비판인데도 불구하고
'대안도 없이 무책임하게 비난만 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는데에 무슨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틀린 것을 지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아마도 이런 식의 구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데 중점을 두는 듯하다.
그러나 비판, 또는 비평이라는게 필연적으로
상대를 공격(또는 지적)을 하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건 희망사항에 가깝다.

 

비판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건전한 비판과 토론 자체를 막아서
결국 모두가 함께 그 피해를 받기 마련이다.

 




 

적절한 비판과 적절치 않은 비판의 차이는 다른 데 있다.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말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다.
상대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있는 것이다.
비방/비난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에 대한 반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방식에서 상대는 늘 '악'이다.
늘 상대를 '수구꼴통'이나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정치인들에게서 그 예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당한 비판이나 비평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열린 자세로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옳지 않으면 어떤 부분이 옳지 않은지,
옳다면 자신의 이야기 중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를 대답으로 보일 것이다.
발전적 제안은 이런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처음부터 대안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건전한 비판이란
'상대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를 가진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비평이나 또 다른 어떤 단어로 부르던 말리진 않겠다.
다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기억해 주기를 원하는 것은,
부디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지적을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보게 되면 처음부터 '비판적인 사람'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지 말고
차분히 말을 들어주었으면 한다.
그 사람이 비판을 하고 있는지, 비난을 하고 있는지,
그냥 내가 듣기에 기분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말이다.

 

최소한 이 두 가지 규칙만을 잘 지킨다면
싸움은 훨씬 줄어들고, 문제는 좀 더 쉽게 해결될 것이다.
사실 다툼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은 비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완고한 독선적인 정신상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다.
여기에는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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앓다.

 '앓다'라는 말에는 뭔가 특별한 감정이 느껴진다.

ㄹ과 ㅎ이라는 아름다운 조합으로 이루어진 받침과

앓을 때 덮는 부드러운 이불의 따뜻함.

그리고 긴 잠.

 

 

이번에 앓고 나면

모든 것이 꿈인 것처럼 깨어날 수 있기를.

머리는 어지럽고, 목은 간지럽고, 몸은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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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8-12-03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몸살을 앓으셨나봐요..저도 이제 몸 추스리고 긴잠에서 해방된듯 하네요.
앓는다는것 참 힘들고 고달프더라구요.
맛있는것 많이 드시고 푹 주무시고 얼른 힘이 팍~! 팍~! 나시길~!

노란가방 2008-12-03 21:2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근데 이제 막 시작이랍니다. ^^
 



지금 이순간도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그, 혹은 그녀가 아니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영혼과 영혼이 서로를 알아본다는 그런 사랑.
멋지지 않은가, 그런 사랑을 한다는 건.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소설들을 보면,
온통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로만 가득하다.
아, 여기에 대중가요도 물론 추가해야 겠다.
요즘 나오는 가요들의 주제는 극단적으로 말해 딱 두 개밖에 없다.
사랑하게 되어서 기쁘다는 내용 아니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프다는 내용.
그 빈곤한 상상력의 가련함이란....

 

그야말로 사랑의 홍수 시대이다.

 
 
내가 쓴 글들을 꾸준히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제 슬슬 눈치를 채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사랑은 좋은 것이 아니냐고,
왜 거기에 시비를 걸 준비를 하느냐고 말이다.

 

만약 정말로 여기까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면,
당신을 내 매니아로 임명한다. ㅎㅎ


 
사랑, 물론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과 방송, 모든 매체들에서 사랑을 떠들어대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연 행복한가?

 
 

불행히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랑의 홍수 시대에도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찾고자 하지만,
결국은 실패의 쓴잔을 들이키곤 한다.
왜 그럴까? 무엇이 문제일까?
 

 
지나치게 긴 글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여기서 여러 종류의 사랑들 가운데
남녀 사이의 사랑만을 주제로 삼겠다.
하지만 다른 관계의 사랑(부모와 자녀, 친구, 이웃 등의)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시도는 십중팔구 실패하기 마련이다.
완전한 사랑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심지어 공상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완전한 사랑, 아니 적어도 그에 상당한 사랑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실패를 하는 걸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첫사랑의 대상에게서 찾고,
또 다른 사람은 헤어진 연인에게서 찾는다.
심지어 드라마, 영화 속의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신의 완전한 사랑의 대상을 찾기도 한다.

 

지나간 과거의 연인에게서 찾으려는 사람은,
그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데서 오는 슬픔과 자기연민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 혹은 그녀야 말로 자신의 완전한 사랑이기에,
더 이상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영화나 드라마, 자신의 상상 속에서 완전한 사랑을 찾는 사람은
상상 속의 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를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상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고 상대와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

 

완전한 사랑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기’를 제대로 선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녀 사이에 있어서의 완전한 사랑이란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특별하고도 거룩한 관계 속에 들어갔을 때에야 가능하다.
‘둘이 한 몸이 되는 것’.
성경이 결혼을 이르는 말이다.
완전한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이 또 있을까.
원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격체가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 하나의 인격체로 태어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완전한 사랑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완전한 사랑을 찾아야, 결혼을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 결혼의 유일한 조건으로 ‘사랑’을 꼽는 위험한 생각도 판을 친다.

과연 사랑만이 결혼의 유일한 조건이 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그 감정의 지배에 따라
결혼이라는 신성한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옳을까.
사랑만이 삶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세속적인 드라마와 소설이 우리에게 주입하는 위험한 사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의 '조건'을 생각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어떤 조건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와 깊은 사귐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인지,

그의 삶의 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는지,

이런 조건들은 우리가 충분히 고려해야 할 ‘조건’들이다.
두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를 이루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완전한 사랑'이란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속적인 대중매채에서 떠드는,
운명적이며 완전한 사랑을 언젠간 만나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않는 한,
완전한 사랑은 결코 당신 곁에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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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병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차 안에서 잠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10m 앞 쯤 세워져있던 레토나가 맹렬히 후진을 하더니... 쾅!!
 
덕분에 차 전면 오른쪽이 완전히 박살.
 
차는 공업사에 입고시켜놓고
 
오늘은 제 차보다 잘 나가는 렌트카를 몰고 다녔죠. ㅎ
 
 
근데.. 살짝 아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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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빵맨 2008-12-04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다치시진 않으셨나 모르겠네요. '아픔'이라는 말이 마음이 아픈건지 몸이 아픈건지 모르겠지만, 얼른 나으시길 바래요.

노란가방 2008-12-04 22:09   좋아요 0 | URL
온몸이 뻐근하고, 쑤시고 그러네요.
사고 당시엔 별로 증상이 없었는데.. ^^;;
 

 

다자이 오사무라는 일본 작가의 단편소설집과

 신경숙 작가의 미출간 신작 '엄마를 부탁해'(곧 출판 예정)


재밌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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