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개의 경우,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어느 누가 우스운 꼴, 추한 꼴의 자신을 보여주고 싶겠는가.

단지 외모 뿐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그 사람의 성격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그 사람의 재산이 될 수도 있다.

아무튼 어떤 경우이든 간에,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당연히 자신의 추한 모습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사람은 없다.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살핀다.

사람들이 하루종일 거울을 보는 횟수를 살펴보라.

그러면, 인간들이 얼마나 다른사람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관심이 많은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지하철 역에는 큰 전신 거울이 있다.

언젠가 무심코 거울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는데, 

속으로 한 참을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적어도 80% 이상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거울에 자신의 얼굴이나 옷 차림을 비춰보았던 것이다. ^^








사실, 거울을 보는 행위 자체가 

자신에게 직접적인 유익을 주는 것은 별로 없다.

어떤 사람이 단지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서 멋진 외향을 꾸미겠는가.





그리스 신화에는 나르시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너무나도 아름다웠던 남자인데,

어느날 자신의 모습이 물에 비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세상에 이렇게 멋있는 사람이 살고 있는가 하고 말이다.

그 후로는 식음을 전폐하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하루종일 바라보다가,

마침내는 좀 더 그 모습을 가까이 보려고 하다가 물에 빠져서 죽었다고 한다.

자아도취를 의미하는 '나르시즘'이라는 단어는 바로 이 일화에서 나온 것이다.








혹시라도 이 나르시스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예외가 되겠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이유는

다른 이들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을 가꾸기 위해서라고 해도

크게 사실과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추해지는 것일까?

그토록 다른 사람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에 신경을 쓰는 존재가

왜 추한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일까?

경험상, 그리고 역사상의 수많은 인물들에 관해 살펴보건대,

분명히 인간이 추해질 때가 있다.








왜?

내가 보기에 그 이유는 간단하다.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졌을 때,

인간은 추해지게 된다.

(이 말은 시각장애인들을 비하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리라 믿는다.)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추한 모습으로 일그러지고 있는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 자신의 모습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눈이 가려진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일깨워주는

다른 사람의 경고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정도는 점점 심해진다.






그렇다면 인간의 눈을 가리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부분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다양한 요인들을 들고 나올 수 있다.







사랑을 받고자 하는 한 사람을 생각해 보자.

상대방도 그 사람을 사랑한다면 큰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방이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때,

혹은 더 많은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게 되었을 때,

그 정도가 심해져감에 따라 그 사람의 눈도 서서히 가려져 간다.

그 때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심히 딱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스토커가 되어서 상대방을 괴롭히기까지 한다.








이와는 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떤 사람을 너무도 미워할 경우,

그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생각이 앞선 나머지 눈이 멀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 제 3자가 보기에는 너무도 뻔하게 얽어매려는 시도임을 알아챌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모를 수가 있다.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눈이 가려져버리기 때문이다.

그 밖에 자신의 명예나 지위, 위엄을 유지하기 위한 열심도 눈을 가릴 수 있으며,

돈이나 보상받고자 하는 욕심들도 우리의 귀를 막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은 대개 막무가내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으며,

자신을 제지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적이라고 단정시켜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렇게 적으로 선포된 존재는, 복수의 표적이 되어버린다.








추해짐이 단지 그 사람 하나만의 문제라면

그냥 그렇게 넘어가면 된다.

하지만 대개는 그렇게 쉬운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함께 하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단지 그 사람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어떤 자동차 운전자가 눈을 가린채로 운전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

비단 그 사람 자신 뿐만 아니라

같은 도로에서 함께 운전하고 있는 다른 운전자들에게도

심각한 위협이 되는 것이다.

무엇인가 때문에 눈이 가리워진 사람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게 눈이 먼 사람들은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고,

공동체 전체에 악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다분하다.








만약 당신이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조심해서 운전할 수 밖에 없다고 조언해 주고 싶을 뿐이다.

눈을 가리고 운전하는 사람을 앞에서 막아선다거나,

이리 저리로 운전하라고 옆에서 명령하는 것은

더 큰 사고를 유발할 뿐이다.

가장 최선의 방법은 그 사람의 눈을 가린 것을 제거하는 것이지만,

그리 쉽지 않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일단 차가 멈추기라도 해야 눈을 가린 것에 손을 대지 않겠는가.





차선의 방법으로, 방어운전을 하는 수밖에 없다.

일단은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면서, 피해가는 것이 좋다.

물론 그 사람이 지나치게 이탈된 코스로 달려간다면,

경적을 울려서 한 번쯤 제지하는 것도 괜찮다.

하지만 당장 손을 뻗쳐서 운전대를 잡고 세우려고는 지 말기 바란다.

어쩌면 당신을 사고를 유발하려고 하는 적대자의 손으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또 한 가지,

당신 자신이 그렇게 눈이 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당신마저 눈이 먼다면,

이젠 정말 큰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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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사진은 아닙니다..;;


 

 배구 경기 중계를 보다가ㅡ

'비디오 판정'이라는 게 나왔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비디오 판정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퍽이나 들어보이는게 아닌가.

사실 비디오 판정이란 게

심판이 눈으로 정확히 보지 못한 것을

영상을 이용해 정확히 판단하려고 만든 것.

그렇다면 얼마나 영상을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느냐가 관건일 것이다.

 

 

 

그러면 비디오 전문가나,

적어도 눈이 좋은 젊은이들에게 맡기는 게 맞지 않을까?

물론 오랜 배구계 생활을 통해 '노련함'이 쌓일수도 있다고 하지만,

어차피 그 '노련함'으로 판결이 어려운 사안을 커버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면

아예 더욱 철저하게 하는 게 낫다.

 

 

 

선수들이 항의를 하니까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노려보던

비디오 판정관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당연히(?) 영상과는 반대로 항의하는 선수들에게 불리한 판정이 나왔다.

 

 

 

뻔히 보이는 것조차 제대로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건ㅡ

비디오 판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쁘던지,

그것도 아니면

일에서까지 자기 기분을 앞세울 정도로 고집만 부리는

자기통제가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일 터.

 

 

 

연장자 대우도 좋고,

경력자 예우도 좋은데,

꼭 이런 식으로 한 자리씩 안겨주는 게 능사일까?

그 노련함과 완숙함, 경력과 공로를

좀 더 멋지게 사용할 수는 없는 걸까.

 

 

 

어디 스포츠계 뿐일까.

우리 사회 전반에는 여전히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장(長)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물론 나이가 많다는 건 충분히 공경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되지만,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한 자리씩 가져가는 건

조직을 경직시키고,

원칙과 질서를 무너뜨리기도 하며,

종종 정말 일하려고 하는 사람의 의욕을 꺾을 뿐이다.

 

 

 

논공행상 식의 자리 나눠주기가 아니라

연장자 예우 격의 처분이 아니라

정말 일할 줄 아는 사람이,

그리고 그 조직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될 사람이,

조금 더 바란다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일 하는 자리에 앉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참 멋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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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미치게 하는 방법이라..

제목이 좀 선정적(?)이다.

저으기 걱정을 했지만,

몇 사람에게 물어본 결과 괜찮다는 이야기가 많아서,

용기를 얻어 글을 쓰기로 해 본다. ^^;






남극탐험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큰 위협이 되는 것들이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블리자드(귀에 익숙한 사람들도 있을 듯. ㅋ)라고 하는 것으로,

맹렬한 눈보라를 말한다.

눈보라니 만큼 당연히 차가운 바람.

속도도 상당히 빨라서 초속 14m를 가볍게 돌파한다.

일단 블리자드가 심해지기 시작하면, 앞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탐험을 중지하고 서둘러 텐트를 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나마 텐트 안에서 편히 쉴 수도 없다.

자칫 잘못하면 텐트가 순식간에 눈으로 덮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눈 자체의 무게도 엄청나다.

계속 눈을 치워내지 않으면 텐트가 무너지는 것도 잠시.






두 번째로 위험한 것은 크랙, 혹은 크레바스이다.

이것은 본래 같은 현상인데,

크랙보다 크레바스가 훨씬 규모가 큰 것을 가리킨다.

크랙은, 한 마디로 얼음의 균열이다.

약 30m 정도 까지의 균열을 크랙이라고 부르고,

그 이상의 것을 크레바스라고 하는데,

그런 크랙, 혹은 크레바스만 있다면 돌아가면 되지만,

대개는 그 위에 살짝 눈이 덮혀있다는 것이 문제다.

탐험을 하던 사람이 그 위를 걸어서 넘어가려고 하면

심각한 위험에 빠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극지방에서는 물에 젖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영하 10도, 20도는 가볍게 넘어버리는 극지방이니만큼,

물에 젖는 다는 것은 몸이 얼어서 생명에 지장까지도 줄 수 있는 심각한 사태이다.

혹시라도 물에 젖게 되면, 바로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만 한다.






세 번째로 위험한 것은 화이트아웃(Whiteout)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

남극은 온통 흰 색으로만 가득차 있기 때문에,

어느 순간 그림자나 물체간의 대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거리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바로 이 현상이 화이트아웃이다.








일단 이 화이트아웃이 발생하게 되면,

전후좌우, 상하가 온통 구별이 되지 않는다.

단지 중력에 의해 내 발이 붙어 있는 곳이 아래일 가능성이 높고,

내 눈이 바라보고 있는 쪽이 앞 쪽일 것이라는 짐작만 가능할 뿐이다.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감각 중 하나인 시각을 믿을 수 없게 되고,

내가 보는 것이 올바로 보는 것인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 현상은 사람 뿐만 아니라 새들도 겪는 것으로,

화이트아웃이 발생할 경우에는 많은 새들이 얼음벽에 부딛혀 부상을 입기도 한다.





전후좌우를 구별할 수 없는 상태,

내가 보는 것조차 신뢰할 수 없는 상태,

바로 여기서 사람은 서서히 미쳐가게 된다.

전문가들이 아니라면 이런 화이트아웃을 직접 겪을 경우

매우 심한 공황상태에 빠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전문가들도 아니면서 남극탐험을 나설 각오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정신에 문제가 있을지도.. ㅡㅡ;)






수형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형벌은

소위 '먹방'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차피 똑같이 감옥인데 그것이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고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죄를 저질렀다고 가둬두는 곳이 교도소라면,

그 안에서 또 잘못을 저질렀다고 가두는 곳이 먹방이다.

감옥 속의 감옥, 그 곳이 바로 먹방인 것이다.






왜 먹방이라는 곳이 그토록 무서울까.

이미 감옥에 갇혀서 살고 있는 사람에게,

자리 하나를 옮긴다고 해서 뭐가 그렇게 심각한 위협이 될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선 먹방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를 알아야 한다.






먹방은 우선 외부와의 일체의 연결이 단절되는 곳이다.

다른 재소자들이 있는 곳과도 완전히 분리가 되어서,

다른 사람의 목소리 조차 듣기 어려운 곳이 바로 먹방이다.

보통 감옥 내에서 '사고'를 치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곳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것도, 면회를 하는 것도 금지되어 있다.

밖과 연결시켜주는 것은 고작 가로, 세로가 25 X 20 cm 정도 되는 작은 식구통(식사를 넣어주는 통) 밖에 없다.

그 곳에서 하루종일을 몸조차 쭉 펼수 없는 채로 보내는 것이다.






몸이 불편한 것은 둘째다.

가장 무서운 것은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자신의 것 이외의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보이는 것은 온통 깜깜한 어두움 뿐이다.

교도소가 자유에 대한 형벌이라면, 먹방은 감각에 대한 형벌이다.






자신의 감각기관이 별 쓸모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은 서서히 감각기관을 사용하기를 포기해버린다.

더불어 외부의 자극(자극이라는 것이 없으니..)에도 반응을 할 수 없게 된다.

그와는 반대급부로 한없이 내부로 파고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지간히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얼마가지 못해 매우 무력한 상태로 변해버린다.

심리상태는 매우 불안정하게 변하고,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이는 일도 있다.

결국 자신을 그 곳에 집어 넣은 사람들의 지시에 고분고분히 따르게 된다.
(물론, 예외도 있다..)






요컨대,

인간의 감각을 무력화 될 때,

인간은 한없이 약해진다.

정신력도 서서히 소진되어 버리고,

말 그대로 서서히 미쳐간다.






정신병원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하얀 집'이다.

영화나 책 등에서 드러나는 정신병원의 이미지는,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가 되어 있는 방이다.

실제로도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왜 흰 색으로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환자의 정서를 안정시키기 위한 색깔이라는 설명이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온통 흰 색으로 도배를 한 곳에 사람이 있으면, 정신이 안정될까?

마치 앞에서 설명한 화이트아웃을 접하는 기분은 아닐까?

그것도 잠시만 참으면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는 곳이다.

환자의 감각 중 시각은 이미 그 기능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다.






그 것 뿐인가.

환자는 억압복을 입는다.

억압복은 소매가 아주 긴 옷으로, 그 긴 소매를 몸 뒤로 돌려서 단단히 고정시키는 곳이다.

억압복을 입는 순간 환자는 두 팔을 사용할 수 없게 되고,

그것은 두 손으로 느낄 수 있는,

촉각을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부는 혀를 깨물어 자해를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작은 공이 붙어 있는 마스크를 씌우기까지 한다.

구속복을 입는 것 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정신병원에서는 환자의 안정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체의 소음을 없앤다.

청각의 상실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것은 중증환자들에게 사용되는 방법이다. 모든 정신질환자들이 위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며, 반드시 감금상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자칫 정신병원 자 체에 대한 오해를 할 소지가 있어서 밝힌다. 정신질환은 뇌에 발생된 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으며, 이것은 위나 근육 등에 생긴 병과 마찬가지로 취급 되어야 한다. 따라서 약물치료와 함께 특정한 심리적 치료를 병행하면서 치료작업을 하는 것이 보통이다.)




정신병원이 얼마나 큰 효과를 가질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모든 감각을 자극하지 않으려고만 한다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더 높다.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는 것 만으로도,

인간은 미쳐버릴 수 있다.






인간이 아무런 자극을 받지 않는 상태가 오래 지속된다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하얀 방 안에 아무런 소리도 없이 혼자 있다고 생각해보라.

또는 쥐죽은 듯 적막하고 깜깜한 빈 강의실에 혼자 남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공포 영화에서 가장 무섭고 긴장되는 순간은,

귀신이나 살인마가 스크린에 비췰 때가 아니라

그들이 나타나기 직전의 적막함이 스크린을 가득 채울 때이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심각한 정신적 혼란에 빠진다.






그렇다면,

그 반대진술도 가능하다.

인간이 미치지 않으려면, 외부의 자극을 받아야 한다는 말 말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의 오감을 통한 자극들은,

때로 우리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한다.

가시에 찔리고, 시끄러운 소음에 인상을 찌뿌리고,

짜고 쓴 맛, 신 맛을 보기도 하고, 온갖 벌레에 물리기도 한다.

정신적인 자극들도 때로 인간들을 힘들게 만든다.

갑자기 생긴 수많은 일들, 그로 인한 스트레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소중한 대상의 상실 등은

인간을 자살로까지 모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나 평안, 안식을 갈구한다.

힘든일 하나 없는 그런 삶,

자신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 하나 없는 삶,

내가 원하는대로 모두 술술 풀려가는 그런 삶을 원하는 것이다.






과연 그런 평안이 우리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우리의 삶은 행복해질까?







어쩌면, 우리를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그 수많은 일들은,

우리를 미치지 않도록 만드는 고마운 이유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의 어려움에 대해 너무 비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직도 당신의 사고력이 정상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찢기고, 긁히고, 찔리면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은

당신의 촉감이 아직은 정상이라는 반증이다.

시끄러운 소리가 귀를 막게 만든다면,

아직 당신의 귀가 붙어있고, 제대로 기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리타분한 말 같지만,

당신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

우선 이 글을 지금까지 읽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시각과 사고력은 어느정도 기능을 다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당신이 꿈꾸는 절대 평화로운 유토피아는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끊임없이 사람들과 부딛히고, 각종 위험이 우리를 위협한다.

바로 그런 곳이 이 세상이다.

또, 만약 그러한 외부적인 자극이 전혀 없다면

당신은 정말 미쳐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현재 당신을 괴롭히는 모든 종류의 어려움들에 대해 감사하라.

하나님께서 당신이 미쳐버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자극하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말한다면,

좀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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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실에 가 본 경험이 있는가?

만약 그런 경험이 없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다.

사방에서 전해져 오는 슬픔이라는 강렬한 자극을 온 몸으로 느끼는,

그런 끔찍한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응급실에서 가장 중요한 미덕은 순종과 인내이다.

이리로 가라고 하면 이리로 가야하고,

차가운 금속성의 침대에 시트 한 장 없이 누우라고 해도 누워야 한다.

굵고 뾰족한 금속 바늘은 그 자리에서 대여섯 번씩 팔에 찔러 넣어도,

환자가 할 수 있는 저항이란 고작 몸을 움찔하는 것 뿐이다.

그 이상의 반항은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순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환자들은 자신이 무슨 큰 죄를 지어서 그렇게 된 것인 양,

재판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자신의 형량이 달려 있는 것처럼,

자칫 실수로 그의 비위라도 거스리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 처럼,

의사의 말에 집중한다.

 

 

뿐만 아니다.

응급실에서는 인내 또한 중요한 미덕이다.

몇 번씩 찔러댄 결과로 얻어낸 피 검사를 하는데도 족히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는 이유는,

결과가 나와도 그것을 곧바로 알려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는 언제나 나보다 더 급한 환자들이 많은 법이다.

당연히 결과를 바로 알려주지 않는다고 불만을 품으면 안된다.

그 것 뿐만이 아니라도 응급실에서는 기다려야 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뭔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도,

의사가 지금 바쁘게 무엇인가를 하고 있지는 않은 지 잘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짜증스런 목소리로 무성의한 대답을 듣기 일쑤다.

가끔씩이라도 찾아와주는 의사, 간호사들에게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어지간히 중한 상태여서 당장 수술을 해야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서너시간을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

 

 

절대적 순종과 한 없는 인내라..

응급실에서 교회를 개척하면 금방이라도 부흥할 것 같다는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친다.

이렇게 훌륭한 자질을 지닌 성도들이 또 어디 있겠는가.

고대 이집트나 바벨로니아의 사제들이 의술까지도 담당했던 이유가 짐작이 된다.

 

 


벌써 12시가 훨씬 넘어 이제 1시가 다 되어간다.

늦어도 9시 이전에는 여기 도착했으니 벌써 4시간 째이다.

그러고보니 저녁도 건너 뛰어버렸다.

배가 고픈건 둘째치고, 무엇보다도 무료한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조금 전부터는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교회에 가려고 가져왔던 성경책 사이에 꽂아있던 작은 종이 쪼가리 하나에

정신없이 글을 쓰고 있는 중이다.

 

 


방금 깨달은 사실 두 가지.

아무도 내가 무엇인가를 정신없이 적고 있다는데 신경을 쓰지 않는다.

(뭐.. 사실 응급실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지만..)

 

 

그리고 두 번째는, 아버지가 누워계신 이동식 간이 침대의 난간 옆에,

검붉게 말라비틀어진 핏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

우리가 오기 전, 누군가 흘린 피이리라..

 

 
 

이전에도 아버지 때문에 응급실을 찾은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받은 인상은 하나같이 나쁜 것들이었다.

응급실에서 근무하는 레지던트들이 한결같이 불친절했기 때문이다.

물론, 레지던트들이 제대로 잠도, 식사도 대충해결하기 일쑤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다.

더구나 매일 같이 보는 사람들이라고는 온통 병들고 상처입은 사람들 뿐이니,

짜증이 날 만도 하다.

하지만 그래도 아프다는 사람을 놔두고 저희들끼리 웃고 떠드는 건 너무하지 않은가.

 

 


하지만 지금 앉아 있는 응급실에서 만난 의사는 친절했다.

한 이틀은 면도도 못한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전에 보았던 사람들과는 달리 전혀 고압적인 자세도 아니었고,

시종일관 웃는 인상이었다.

환자나 보호자에게 짜증스럽거나 무성의한 목소리로 말하는 법이 없다.

응급실 의사들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바꿔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벌써 2시다. 

글 쓰는 속도가 점점 늦어진다.

 

 

새벽 3시.

한 시간 정도 깜빡 졸았나보다.

여전히 응급실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아버지는 여전히 주무신다.

좀 나아지셨는지...

 

 
 

좀 전에는 채 두 살도 안 돼 보이는 아기 하나가 들어왔다.

뭘 하는지 아이는 계속 울어대고,

간호사 5명이 달려들어 아기에게 무엇인가를 한다.

마음이 너무 아프다.

저렇게 어린 아기가 왜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는지..

 

 


잠시 든 생각 하나.

오늘날 응급실에서는 수시로 피를 뺀다.

환자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서란다.

자기들이 고치기 어려운 병만 만나면 피가 더러워서 그렇다는 이유를 대며,

무조건 피를 빼다가 종종 사람을 죽이곤 했던,

중세 유럽의 의사들이 떠오르는 이유는 뭔지..

 

 

 
온 몸이 결려온다.

너무 오래 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나 보다.

허리가 너무 아프다.

 

 


새벽 4시.

또 아버지에게 굵은 바늘을 꽂고 피를 뺀다.

XXXX,

내 살에 바늘을 찌르는 것 같다.

피를 빼지 않고는 환자의 상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의학의 수준은 낮은 건가..

 

 


응급실이 잠시 조용해 진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던 앰브런스도 지금은 좀 잦아들었다.

다시 피곤이 몰려온다.

하지만 몸 한 번 편히 펴고 잘 수 있는 공간이 내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앉은 채 눈이라도 쉬게 해 줄 수 밖에..

 

 

6시다.

집으로 가는 택시 안.

의사는 좀 더 정밀한 검사를 해 보라고 하는데...

........

 

 


휴.... 모르겠다.
 

 

 

지금은 오후 8시 14분.

6시에 집에 들어와서 잠시 눈을 붙였다.

오늘은 토요일.

내일 예배 준비하려면 교회가서 할 일이 많다.

 

 


좀 전에야 집에 돌아왔다.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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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이란 건

참 신기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물리학자들의 말에 따르면,

단순히 공기의 흐름이 막히거나 굴절되거나 하면서 발생하는

일종의 소음의 연속인데 말이죠.

(물리학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학문인지를 말해주는 듯.. ㅡㅡ;)

 

 

 

악이 단순한 소음의 연속이 아니라는 것은,

그것을 접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얼마나 크고 대단한가를 지켜보면 알 수가 있죠.

때로는 기뻐서 자신도 모르게 몸이 들썩이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단조로운 선율의 음 서 너개만 눌렀을 뿐인데도

눈물이 떨어지기도 하니까요.

음악은 우리의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게 할 수도 있고,

그 반대로 흩어지게도 할 수 있죠.

 

 

 

악이란 결국,

우리의 정신적인 영역,

즉 우리의 영혼의 영역에서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악은 어렸을 때부터 제가 제일 싫어했던 과목이었습니다.

음... 성적이 안 나와서요..

다른 과목은 다 '수'인데, 음악과 체육은 '우'더라구요..

(엇.. 멀리서 돌 날아오는 소리가 들립니다. ㅡㅡ;)

 

 



악이라는 것이 사실,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 아니겠습니까.

그 것을 실제로 생산하기 위해서는 오랜 기간동안 반복적인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오늘날엔 단지 생산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향유하기 위해서도

오랜 시간 동안의 학습이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는 것도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아무튼, 이런 복잡한 이야기는 약간 미루도록 하구요..

(이 글은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니까요)

 

 

 

악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바뀌게 된 것은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였습니다.

필그림이라는 합창단에 들어가게 되었거든요.

노래를 한다는 것, 음악을 생산한다는 것, 그리고 음악을 듣는 것..

이 모든 걸 거기서 배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이제 고급음악을 충분히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건 아니죠.

하지만 음악을 감상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걸음마 정도는 뗀 것 같습니다.







서 말한 것처럼,

음악이란 것은 우리의 영혼을 만져주는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힘을 이용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젠가

프랑스의 소설가 베르나르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죠.

글을 쓸 때마다 음악을 듣는다고.

평화와 따뜻함을 서술할 때는 그런 음악을 듣고,

위기와 격정을 써 내려갈 때는 또 그런 음악을 듣고..

그걸 읽고 참 괜찮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당장 저도 그 방법을 사용해봤죠.

효과가 전혀 없지는 않더라구요.

 

 

 
즘은 무엇인가를 긁적일 때마다 항상 음악을 듣습니다.

이렇게 개인적인 잡문들을 쓸 때나,

레포트를 쓸 때도 듣죠. ^^

 

 

 

가 주로 듣는 음악은 영화음악입니다.

(요즘에는 가사가 들어있는 노래를 좀 듣기도 합니다만..)

영화음악은 상상력을 자극하거든요.

남의 것을 베끼는 글이 아닌 이상,

무엇인가를 쓰면서 상상력만큼 중요한 건 없는 듯 싶습니다.

특별한 가사가 나오지 않더라도,

영화음악을 듣고 있으면 머릿속에 뭔가가 그려지는 느낌이 들어요.

 

 

 

화음악이라고 해서 아무거나 다 좋다는 식은 아니구요..

일단 '선곡과정'을 거친 후에야

제 감상 리스트에 오를 수가 있습니다.

같은 영화에 실린 음악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곡은 선택이 될 수도 있고, 또 다른 곡은 제외될 수도 있죠.

평가기준은.....

뭐, 제 느낌이죠. ^^; 

 

 


만히 제 감상 리스트에 오른 곡들을 듣고 있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은,

피아노 연주곡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곡도 있긴 하지만,

절반 이상이 피아노 연주곡이더라구요.

 

 

 
마도 피아노 연주라는 것에 제 영혼이 매력을 느끼나 봅니다. ^^

(그래서 피아노 연주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나... ㅡㅡ;;)

정작 저 자신은 피아노라는 걸 치지 못하지만,

피아노 건반이 내는 소리 자체,

그리고 그것들이 이어지면서 만들어내는 선율..

참 매력적인 악기인 것 같아요.

사람의 영혼을 저 밑바닥부터 떨리게 만들 수 있는..

(그렇다고 다른 악기들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니 이해하세요. 어디까지나 저 개인의 생각입니다.^^;)

 

 

 
무튼,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내내 음악을 듣고 있으니까요.

참고로 지금 듣고 있는 음악은 영화 '아는여자'에 나왔던 음악들입니다.

영화 자체는 그다지 슬프지 않은데 음악 자체는 안 그러네요. 



 

 

시나,

아직도 제가 쓰는 이 방법을 써보지 못하신 분이 있다면,

강력하게 추천해 드립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만 할 때,

그것이 글이 되었든, 계획이 되었든, 그밖에 무엇이던간에

음악이 여러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꺼에요.

뭐... 개인적인 편차야 존재할 수도 있고... 에... 또...

궁시렁궁시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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