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밝고 환한 빛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아니면 어둡고 공허한 느낌이 드는가?





사실 '꿈'이라는 단어만큼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어휘도 없는 것 같다.





흔히들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의 꿈은 '비전', '희망' 등과도

 

유사한 이미지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긍정적인 의미의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너무나 기쁘고 좋은 일이 있을 때,

'꿈만 같다'는 표현을 쓴다.

그 정도로 꿈이라는 어휘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런 '꿈'은 사람에게 힘을 준다.

어쩌면, 비록 현재는 어렵고 힘들지만

 

언젠가는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꿈'이 있기에,

이 땅에 사는 수천만의 '보통, 혹은 그 이하의 사람들'이

모두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길을 택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꿈이라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마취제와 비슷해서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러한 고통을 잊어버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수 년 동안 좁은 방 안에 틀어밖혀서

 

오로지 책과만 씨름하는 고시생들을 보라.

그들이 제대로 여가생활을 즐기지도 않으면서,

오직 한 가지에만 집중하는

 

고통스럽고 힘든 나날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은,

딱 한 가지,

고시에 합격한 뒤의 자신의 모습을 계속 꿈꾸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고 그들이 모두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다.

말 그대로 '꿈으로 지탱되는 삶'인 것이다.






또 다른 예는 복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주일의 기쁨, 일분의 실망'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복권이란 사람들의 기대심리를 절묘하게 이용해서

 

영리를 얻는 고도의 심리적인 산업이다.
(순간.. 복권을 주제로 한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복권을 사는 순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복권에 당첨될 경우를 꿈꾼다.

그리고는 복권이 추첨되는 하루를 일주일 내내 기다린다.

한 주 내내 기대감을 갖고 살도록 만든다는 것,

세상의 어떤 약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꿈의 힘이다.







역사상 많은 '현명한 지도자'들은 바로 이런 점을 이용해 왔다.

오늘보다 내일이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백성들에게 갖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추종자, 혹은 피지배자들로 하여금

 

꿈을 품게 할 수 있는 지도자라면,

그에 대한 지지는 결코 철회되지 않을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도 이러한 양상은 지속적으로 반복되고 있는데,

물론 과연 통치자들이 약속한 그러한 꿈들이

 

실제로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비록 현재는 어렵고 힘들지만,

언젠가는 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

미래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사람들은 그런 것으로 하루하루의 아픔과 시름을 잊는다.

사람들에게 꿈이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꿈'이라는 어휘에는 정반대의 의미도 있다.

'일장춘몽', '꿈에 불과한 이야기' 등의 사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꿈이란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꿈은 결국 언젠가는 깨기 마련이다.

그래서 꿈에는

 

'안타까움' '잡을 수 없는 것', '환상'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하나같이 우울한 이미지들이다.






생각해보면,

꿈이 가지고 있는 좋은 이미지들조차,

이 어두운 이미지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꿈이 행복하면 행복할수록,

그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더 큰 공허함,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꿈 속에서 너무나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던 경험이 있는가?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행복할테지만,

그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당신은 너무나 불행해질 것이다.

더구나 그 사람을 실제로는 만날 수 없을 경우 이 불행은 배가 된다.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던 사람에게

그 꿈이 깨졌다고,

이제 그 꿈에서 깰 때가 되었다는 말을 듣는 것만큼

 

충격은 없을 것이다.

마치 큰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서 마취가 깰 때처럼 말이다.

정신적 마취제인 꿈이 사라져버렸을 때,

그의 영혼이 느끼게 될 아픔이란......








이처럼 꿈이라는 어휘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그 결국은 대개 꿈이 깨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가장 좋은 경우는,

꿈에서 깨지 않고 그 꿈이 실현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은 법.

그렇다면 세상에 살면서 꿈이란 것은

 

절대 가지지 않는 것이 안전할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가혹한 듯 싶기도 하고..








이렇게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선 꿈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다.

꿈을 가진 사람은 현재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고

그 사람의 하루하루에 활기를 제공한다.

앞으로 강력하게 달려갈 수 있는 힘도, 꿈에서 얻을 수 있다.

꿈을 가져보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훨씬 더 풍성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본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그 꿈에서 깨어야만 할 상황이 온다면,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꿈이라는 것의 속성에서

 

어느정도 위안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어떤 꿈이든 깨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꿈이 비현실적으로 크고 멋진 꿈이라면

깨어날 확률은 더 높아질 것이다.






또, 꿈이란 깨어나면서부터 잊혀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행복한 꿈이라도,

아침이 되는 순간 점점 잊혀지고 만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꿈에서 깨는 충격도

 

서서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꿈을 꾸는 것이 인간.

행복한 꿈에서 깨어났다고 너무 슬퍼하지는 말자.

시간이 지나면 잊혀질테니 말이다.







꿈이란 어차피 깨도록 되어있다.

그리고 차차 잊혀질 것이다.

꿈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이제 조금 용기가 생기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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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쇄살인범에 대한 관심들

     최근, 부녀자 십 수 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아니, 비단 이런 일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에 이르러 새롭게 발생한 일은 아니니, ‘최근’이라는 부사구를 붙이는 것은 과거에 대한 지나친 미화일지도 모르겠다. 좀처럼 잡히지 않고 끔직한 살인을 계속하는 연쇄살인범 - 사람들은 종종 이런 사람들에게 인간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마(魔)’ 자를 붙여 ‘연쇄살인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라는 소재는, 대중들에게 두려움과 동시에 흥미를 불러 일으켰고, 각종 소설과 영화로 새롭게 태어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나라에도 화성연쇄살인 사건을 소재로 한 ‘살인의 추억’ 같은 영화는 끊이지 않고 제작되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살인범에 관한 언론의 보도 내용에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사이코패스’라는 단어였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 그것이 사이코패스다. 언론 특유의 호들갑스러움은 ‘전문가님’을 모셔다가 해설을 들려주며,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명했고, 스스로를 ‘교양프로그램’이라고 소개하는 KBS의 한 쇼프로그램에서는 ‘사이코 패스가 매우 지능적이며 계획적인 성격을 가진 잠재적 살인범’이라고 이해할 만한 메시지를 전해주기까지 했다.

 


 

■ 감정의 부재.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스’라는 생소한 정신의학용어를 일반인들에게 인식시켜준 것은, 지난해 여름 개봉했던 영화 ‘검은 집’이 처음이었다. 동명의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작품에서 사이코패스는 울고 있는 사람과 웃고 있는 사람을 구별하지 못하는, 즉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는, 그래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이코패스가 단순히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가 아니라, 통증까지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 약간 어이없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영화의 교육적 기능은 사이코패스에 관한 이러한 이미지를 대중들에게 새겨 넣었다.

     언론의 보도든, 영화의 내용이든 사이코패스는 괴물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좀 순화시켜 표현하더라도 그들은 ‘비정상적인’, 혹은 ‘이상한’ 사람들이다. 다른 모든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단지 감정의 영역에서의 문제만으로도 말이다. 감정의 부재. 사람들은 분명히 그것을 이상한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 감정을 제거하려는 노력들

     감정이나 도덕, (판단기준으로서의) 윤리 같은 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전부 사회, 문화적인 산물로 봐야 한다는 두 부류의 극단적인 사람들이 있다. 둘 다 극단적인 유물론적 관점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유물론자들인데, 하나는 사회주의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주의자(과학적으로 설명되는 것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스스로를 호르몬의 우연한 대량분비 때문에 결혼하고, ‘밈’이라는 ‘문화적 유전자’ - 그 실체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의 숙주일 뿐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는)들이다.

     물론 그 사람들이 항상 감정이나 도덕, 윤리를 적대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결정적인 상황이 오면 그들은 항상 자신들의 사상이나 과학적 증명이라는 요소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이러한 경향을 모든 사람에게 퍼뜨리기 위해 ‘학교’라는 좋은 매체를 이용한다. 과거 소수의 특권층들만 다닐 수 있었던 학교라는 기관이 보통교육과 의무교육화 되면서, 그들의 학교를 중심으로 한 전략은 더욱 효과적인 것이 되었다. 사실 근대 이후의 교육이란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주도해왔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는 뭘까? 오늘날 어떤 사람이 윤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따는 문제는, 더 이상 그 사람이 얼마나 윤리적으로 사느냐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그저 대상을 얼마나 ‘이념적으로’ 혹은 ‘과학적으로’ 잘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느냐에 해당하는, 전적으로 기술적인 문제일 뿐이다. 과학과 윤리를 떼어 놓으려는 태도는 지극히 ‘가치중립적’이고 ‘객관적인’ 태도로 여겨졌고, 자연유산(自然遺産)은 ‘품질관리’로 승화된다.(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449쪽) 그들의 견해를 일관되게 끝까지 밀고 나갔을 때 얻을 수 있는 결론은 ‘인간의 도구화’, ‘인간의 기계화’, ‘인간의 물질화’라는 자기 파괴적인 내용이다. 범죄율은 점점 더 높아가고, 그 방법은 좀 더 끔찍해지고 있으며, 피해의 범위는 훨씬 더 광범위해졌다.

 






■ 감정의 제거에 대한 우려

 

     감정이 완전히 제거된 미래 사회를 우려섞인 눈으로 그린 영화로 ‘이퀼리브리엄’이 있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영화 속 도구들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리 멀지 않은 미래로, 미래 사회의 통치자는 감정이야말로 모든 분쟁과 문제의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모든 사람들에게서 감정을 제거하려고 한다. 예술과 종교는 금지되고, 모든 사람은 비슷한 디자인과 비슷한 색상의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먹으며, 표준화된 주거환경에서 생활한다. 앞서 언급했던 두 부류의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모습일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통일성(제복)과 과학지상주의자들이 꿈꾸는 첨단기술(감정을 제거하는 약물)의 절묘한 결합이다. 거기에서는 꿈을 꾸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며, 클래식 음악을 듣고, 애완용 강아지를 키운다는 것만으로도 강제구속의 사유가 된다.

     후설은 서양에서 갈릴레오로 시작된 과학주의가 ‘자연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세계는 진정한 세계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지적한다. 쉽게 말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해버린다는 것이다. 과학주의는 과학과는 구분된다. 과학이 학문적인 차원이라면 과학주의는 공산주의와 같은 신념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과학주의’는 가치중립적인 무엇이 아니다. 이미 여기에는 한 가지 판단, 즉 ‘논리적으로 설명되는 것만이 의미 있는 일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판단이 개입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쉽게 그 사실을 무시한다.

 

     문제는 학교에서 이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현대의 많은 교육이론이 이런 과학주의에 기초해 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이다. 과학으로 위장된 유물론적 과학주의가 절대적 진리인 것처럼 가르쳐지고 있고, 그 결과는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충분히 끔찍하다. 학교에서는 감성을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는 법을 (간접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느냐 와는 상관없이, 누가 더 많이 암기하고, 누가 더 문제를 잘 풀어내며, 누가 더 학자들을 잘 인용하는지에 따라 성적을 받고 상을 탈 수 있으니 말이다. 경쟁회사의 상품을 ‘적당히’ 베끼는 것은 (매출을 늘릴 수만 있다면) 장려될만한 일이고, 사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환자들에게 의료보험금을 지급하기를 거절하는 민간보험사 소속 의사들의 이야기는 이제 영화로 만들어 고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회사에서 쫓겨나고, 경쟁에서 탈락하고,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다. 이미 우리 사회의 어떤 부분은 ‘이퀼리브리엄’에서 묘사된 모습으로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 모른다. 유물론에 기초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오늘날의 학교는, 말하자면 사이코패스를 키우는 기관으로 전락해버렸다.(이건 명백히 비유적인 표현이다)

 





■ 사이코패스와 교육

     이미 반세기도 전에 이러한 우려를 표명한 저자가 있었다. 영문학자이자 소설가, 평론가로도 활동했던 C. S. 루이스이다. 그는 『인간 폐지』(홍성사 역간)에서 영국의 교육가들이 그들의 이론을 세우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증거주의에 입각한 교육으로 대문호의 작품들을 값싼 감상주의로 치부하는 현대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루이스는 말한다.

     “현대의 교육자들이 해야 할 임무는 정글의 나무를 베는 게 아니라 사막에 물을 대는 것입니다. 잘못된 감정에 대비하는 최선의 방책은 올바른 감정을 심어 주는 것입니다. 학생들의 감수성을 굶겨 죽이고 나면, 그들은 온갖 선전에 더 쉽게 희생될 뿐입니다.”

     옛 교육은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전수하는 반면, 새 교육은 ‘조건화’할 뿐이라, 어미 새가 새끼 새를 기르듯 가르치지 못하고, 가금업자가 새끼 새를 다루듯 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곱씹어 볼만한 말이다.

 

 

■ 과학주의와 교육의 적절한 관계

     ‘보통교육’은 ‘도서관’과 함께 인류의 지적 성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위대한 발명품이다. 하지만 이 교육이 결국 인간을 인간답게 키우는 데 목적을 두지 않고 있다면, 당장은 효율과 발전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에는 자기 다리를 잘라 먹으며 배고픔을 채우는 문어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다.

     최소한 ‘과학주의’가 가치중립적이고 보편타당한 무엇인 것처럼 호도하는 일은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삶에 관계된 상당부분을 정당하게 설명해주지 못하는 제한된 세계관이다. 그것은 우리가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며 느끼는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고, 꽃을 보며 따뜻해지는 마음을 해설하지 못하며,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애틋함을 분석할 수 없다.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도와주어야 할 필요성은 과학주의의 하위범주에 속하는 모든 종류의 진화론 - 생물학에 근거한 진화론이나 사회진화론 및 정치, 경제 제 분야에 적용되는 모든 진화론의 계열들 -에서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 오히려 강간당하는 여성들을 보면서 강간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이유는 그것이 무엇인가 진화론적 효용성이 있다는 사이코패스적인 주장을 종종 해 우리를 당황케 한다.(마치 자연적으로 유산이 되는 이유를 ‘품질관리’로 설명하는 것처럼)

     과학의 모든 유익을 버리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인간의 영혼과 가슴을 제거해 놓고 동료 인간을 사랑하라고 주문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과학주의는 어린이와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비열한 범죄들과 사회의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는 사회지도층들의 극단적 이기주의를 비난하고 경계할 수 있는 기관을 우리에게서 거세시켜버렸다. 과학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우리의 교육이 인간을 인간답게 길러내는 원래의 목표를 회복하는 것이 거세된 기관을 복구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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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의 행복.

같은 이름을 한 모 방송국의 연예 프로그램이 있다.

두 명의 연예인들이 나와서

일주일 동안 단 돈 만원을 가지고 생활을 한 뒤

누가 더 많은 돈을 남겼는가를 겨루는 프로그램이다.

(요즘도 계속 방송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가끔 방송을 보면서,

이 프로그램의 의도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곤 했다.

(물론 TV라는 매체의 속성상 언제나 혼자 질문하고 답하긴 했지만)

만원으로 일주일을 살아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를 보여주려는 것인지,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은 일주일을 사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비용은 100% 식사비로만 사용되니 말이다.

옷도 사지 않고, 책도 사지 않는다.

전기세도, 가스비도 내지 않는다.

그들은 보여주기 위한 매우 절제되고 연출된 일주일을

카메라와 함께 보낼 뿐이다.

사실 시청자들은 그들이 카메라 불이 꺼진 뒤

무슨 행동을 하고 있을지 전혀 알 방법도 없지 않은가.)

아니면 자신의 사생활을 알려주고 싶어서(혹은 캐내고 싶어서)

안달하는 노출증(혹은 관음증) 환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방송에 나와서 (일주일쯤은 굶더라도) 홍보를 하려는

연예인들(혹은 기획사 관계자들)을 위해 제작된 것인지.

결론은 모든 이유가 어느 정도는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추측. 

 

 

 

 


이야기가 좀 다른 곳으로 흘러가버렸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만원의 행복'이란

이 프로그램의 내용과는 전혀 상관없는데 말이다.

혹시라도 내가 단돈 만원으로 일주일을 힘들게 살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예상하고

이 글을 읽기 시작했다면,

이제부터 과연 어떤 이야기가 이어질지 기대하시라. 

 

 

지금은 그렇게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부터 대학 졸업때까지,

나는 지하철로 학교를 다녔다.

학생들의 등교시간과 직장인들의 출근시간이란 대개 비슷하기 마련이라서

출근 시간 지하철은 그야말로 터지기 직전의 김밥과 같은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하철을 탔다면

발을 한 두 번 밟히거나, 이리 저리 밀리는 것 쯤은 예삿일로 넘겨야 한다.

모두들 그런 경우를 당할 때면 약간 인상은 찌뿌리겠지만

크게 화를 내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것이 제일 속편하기 때문이다.

사실 내 발을 밟은 사람도, 나를 민 사람도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직접적인 책임 추구을 할 사람을 찾는 일도 만만치 않다는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만원 지하철을 탈 때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어지간히 밀리거나 흔들려도 완전히 넘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맨 가장자리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겠지만,

중간에 서 있는 사람에게는 썩 나쁘지 않은 상황이다.

원래 가운데는 변변히 잡을 고리도 없어서

객차가 심하게 흔들릴 경우 가장 크게 타격을 받는 자리다.

하지만 만원 지하철에서는 좀 다르다.

사방에 꽉 들어찬 사람들 때문에

몸에 힘 하나 넣지 않고도 쓰러지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원 버스나 지하철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이런 상황.

내가 말하려는 '만원의 행복'은 이런 상황을 두고 생각해 낸 말이다.

한문으로 쓰면,

'萬원'의 행복이 아니라

'滿員'의 행복이다.

(참고로 우리나라의 화폐 단위인 '원'은 한문으로 못 쓴단다.)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좀 재미가 없을 터.

지하철에서 내리더라도 만원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장소가 있다.

주위를 꽉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주위를 꽉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책임들, 업무들도

만원의 행복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소품들이다.

 

 

가끔씩 그런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충분히 해 나갈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하나 더, 두 개 더' 하는 식으로 조금 씩 더 맡았더니,

어느 순간, 일주일이 온통 스케쥴들로 가득 차서

꼼짝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는 경우 말이다.

 

 

그런 상황에 조금식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스케쥴들이 내 생활을 이끌어가는 현상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쓰러지지 않는

'만원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물론, 의지력이 강하지 않다면

이런 경우 대번에 몸과 영혼의 힘과 평정심을 잃어버리고 소진되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의지력만 뒷받침 된다면,

도리어 삶을 지탱시켜주는 지지대로 작용하기도 한다.

 

 

도저히 힘이 없어 쓰러질 것만 같은 순간이 닥쳤을 때,

내가 맡고 있는, 내가 책임져야 하는 많은 일들은

내가 쓰러지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일들을 처리하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

개인적인 아픔이나 슬픔에 오랫동안 빠져 있을 수 없게 되는

그래서 넘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상황.

만원의 행복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혹시라도 당신이 만원의 행복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이라면 축하한다.

당신은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 사람이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 조심할 것은

만원의 행복에 지나치게 빠지만 안 된다는 점이다.

원래 사람이란 존재는 아무리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도무지 그것에 만족을 하지 못한다.

곧 익숙해지고, 따분해하며, 지겨워한다.

('익숙해짐'이란 주제에 관해서는 내가 예전에 쓴 글을 참고하시라)

 

 

만약 만원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을 때

이런 '익숙해짐'이라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야말로 큰 일이다.

당신을 지탱해주고 있던 그 수많은 책임들과 일들이

이제는 적으로 돌변해 당신을 짓누를 지도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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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방법.

요즘따라 내가 쓰는 글의 제목이 길어진다.

생각이 많아지는 건지,

글의 내용을 모두 담을 수 있는 제목을 찾아내는 능력이 줄어드는 건지..

아무튼, 이번 글의 제목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방법'이다.




그동안 내가 몇 가지 책들을 통해

역사상 군주들은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지배해왔는가에 대해 몇 가지 지침(?)을 얻을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렇게 얻은 자료들을 토대로 간단히 정리를 해 보려고 한다.





우선,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혹은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사람들을 분열시켜야 한다.


민중, 대중이라는 사람들은 일단 모이기 시작하면

사회의 불안을 조장하게 된다.

대중의 힘이란 모이는데서부터 생기기 때문이다.




때문에 역사상 많은 지도자들은

그들이 다스리는 신민들을 분열시키고자 했다.

그 중 한 가지 방법이 '피지배자들을 다르게 대접하기'였다.

만약 A라는 사람이 100명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면,

그 중 10명은 나머지 사람보다 더 높은자리에 올려두어야 한다.

또 그 중 1명 정도는 그 10명 보다 높은 자리를 주는 것도 괜찮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하위 90명의 사람들도

경우에 따라서 상위 10명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며,

상위의 9명의 사람들 중 한 명이

최상위 1명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능성만 존재하면 된다.

그 가능성이 얼마나 높은지의 여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실 어차피 그 100명 모두 지배를 받는 위치에 있지만,

그런식으로 지배당하는 사람들 사이에

계층적 차이를 조장해 두는 것은 안전핀 구실을 한다.




우선, 피지배층에서 지배자에 대한 반감이 고조될 때,

한결같이 단합해서 지배자에게 반기를 들 가능성이 낮아진다.

아무래도 가진 것이 더 많은 중간지배층은

최하위의 계층보다는 체제에 덜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자칫 자신이 가진 것 마저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도 더 높은 계층에 올라갈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감은,

그들로 하여금 하위계층의 불온한 움직임을

충직하게 보고하려는 마음을 품게 만들 수도 있다.




로마가 바로 그러했다.

역사상 많은 고대국가들이 노예제를 유지했지만,

로마만큼 노예반란이 적은 나라도 없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그 이유를 위의 두 가지로 설명한다.

노예라고 하더라도 몇 가지 계층이 있어서

중간, 혹은 상위의 노예들은

최하위 노예들의 불만에 동조하지 않는 경우가 흔했고,

경우에 따라 자유민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또 공직을 통해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있었기 때문에

노예반란이 적었다는 설명이다.

사실 그런 가능성이란

채 한줌도 안되는 소수에게만 열려있었긴 하지만 말이다.




피지배자들을 분열시키는 두 번째 방법은,

피지배층 서로간의 신뢰를 깨뜨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서로 고발을 하도록 만드는 것' 보다 좋은 것은 없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어쩌면 나의 말과 행동을

다른 사람에게 퍼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더이상 그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고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게 된다.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중지되면,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은 더해진다.




신뢰라는 것은 도미노 게임과 비슷해서,

한 번 깨지고 나면


연달아 다른 모든 부분에서도 신뢰를 하지 못하게 된다.

서로 고발을 하는 것은 이 신뢰 깨뜨리기라는 도미노 게임의

첫 번째 블럭을 넘어뜨리는 것과 같다.

지배자로서는, 고발자에게 주는 몇 푼 안되는 돈이나 지위 정도는,

자신의 지위를 위협당하는 위기상태에 처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고발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




고대 중국의 시황제는 이런 방법을 잘 이용했던 사람이었다.

엄격한 법가의 사상을 신봉했던 그는,

백성들이 서로 고발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에 대한 위협세력이 성장하는 것을 막았다.




피지배층을 분열시키는 세 번째 방법은 '여론조작'이다.

이 것은 피지배층의 판단에 혼란을 주는 역할을 함으로써,

지배를 용이하게 만든다.

이를 위해 고래로부터 가장 자주 사용되는 방법은

'가상의 강대한 적'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대부분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는데,

바로 이런 심리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외부의 적대세력만큼 내부를 단결시키는 것은 없다.




평소에는 외국의 유명메이커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젊은이들이,

단지 자국보다 실력이 좋은 축구팀과

자국의 팀이 경기를 한다는 이유만으로

평소 같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값싼 티셔츠 한 장을 입고

거리에 뛰어나오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하물며 자신이 사는 국가에 외국이 침략을 해서

자신의 삶에 큰 위기가 닥칠 때는 어떻겠는가.

그것이 사실이든, 거짓이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단지 국민들에게 외부의 막강한 적이 위협을 가하고 있다는

두려움을 갖도록 조장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강대한 제국 페르시아가 침략을 해 온다는 소식을 듣자

대동단결하여 페르시아군을 물리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각 폴리스들이 평소에 보여주었던

반목과 질시, 적대감을 생각한다면 실로 놀라운 일이다.

외부의 강대한 적은 이렇게 내부의 불만세력을 잠재우는 역할을 한다.




외부의 위협이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는 시점에서,

내부의 개혁을 외치는 사람들은 백안시 당하기 십상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일단 살아남는 것이

모두의 지상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은 이런 점을 잘 이용해 내부의 불만을 무마하곤 했다.




피지배자들을 분열시키는 네 번째 방법은 

통치자의 이익이 피지배자들의 이익과 일치한다고 선전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는 일은 모두 국민을 위하는 일이며,

모두를 위한 일이라고 홍보하는 것을 게을리 하면 안된다.



 
광고 하나쯤이야 무슨 큰 효과가 있느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람이란 사실 그런 부분에 매우 약하다.

처음에는 무심코 듣고 보는 광고라고 하더라도,

계속 듣다보면 결국 광고가 하는 이야기를 믿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통치자는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피지배자들을 위한 일이라고 해야한다.

과거 히틀러의 게르만 민족 우월주의나,

김일성 김정일 식의 공산주의는

모두 적어도 겉으로는 자민족,

인민 모두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홍보해왔다.

뿐만 아니다.

현대의 많은 국가들에도 정부의 일을 홍보하는 기구를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군에서도 이를 이용한다.




물론 소수의 깨어있는 사람들은

그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깨닫고 반항하겠지만,

그런 경우에는 또 각각 방법이 있다.

바로 다음에 살펴볼 것이

통치에 반기를 드는 사람을 다루는 방법이다.




가장 고전적인 수법으로는

통치자의 통치행위에 불만을 품은 세력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리는 것
이다.

고래로부터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방법이다.

어느 나라나 자국과 전쟁을 치루는 상대국은 '악'으로 규정한다.

훈족을 비롯한 여러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곤경에 빠진

유럽인들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유목민족의 모습을 그려보라.

생고기를 먹으며, 말과 몸이 하나로 붙어있고,

닥치는대로 죽이고 불태우는 것밖에 모르는 야만인의 모습이다.

과연 그러한가.




이런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해방 후 한창 반공교육이 이루어졌을 때

북한 사람들을 그리라고 하면

온통 빨간색에 머리에는 뿔이 난 괴물을 그렸다는 일화를

누구나 알 것이다.




통치자는 자신의 적대자들을 이런식으로 공격해왔다.

특히 도덕성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적대자의 도덕적 결함을 밝히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무기가 된다.




두 번째는 첫 번째와 연관되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바로 거짓 증인과 증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상대방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을

더 효과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거짓 증거가 필수적이다.

거짓증거를 만들었을 경우에는 일단 되도록 크게 퍼뜨려야 한다.

나중에 그 증거가 거짓으로 드러나더라도

그다지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국민들이란 그런 것들은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깜짝홍보성 시혜를 내려준다면 더욱 쉽게 무마를 시킬수 있다.

하지만 한 번 상처를 입은 상대방의 세력은 훨씬 약해지고 만다.




재미있는 것은,

거짓말의 크기가 크면 클 수록


그것이 들통날 가능성은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큰 거짓말을 해야한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영웅으로 대접받았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거짓말을 잘하기 위해서는 이중적 기준이 필수이다.

상대의 잘못은 크게 부풀리고,

자신의 잘못은 덮어버리는 것이다.

상대의 잘못은 뼛 속 깊이 스며든 악 때문이고,

자신의 잘못은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의 실수라고 강조하라.

국민들은 결국 큰 목소리를 따르게 된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여론조작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이다.




통치자가 가장 멀리해야할 사람들은

'분배'를 강조하는 사람들이다.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특히 더 조심해야 한다.




정의가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통치자의 권위까지도 나눌 것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는 통치자의 권위도

결국 백성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권력을 그 주인인 백성에게 돌려주는 것이

정의에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통치자에게 이것보다 큰 위협은 없다.

때문에 통치자를 비롯한 기득권자들은

정의, 특히 분배의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위험인물로 인식한다.

그리고 내가 위에서 서술한 많은 방법을 사용해

이런 사람들을 제거하려고 한다.

이런 분배론자들은 국가나 공동체의 기틀을 흔드는

이적행위자로 몰아붙이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방법이 크게 힘을 얻어왔으며,

실제로 자주 사용되곤 했다.

조광조가 그러했고, 율곡이 그러했다.

근대사에 들어서서 얼마나 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반민족행위자라는 오명을 쓰고 죽어갔는가.




때문에 통치자나 기득권자들은

'정의'라는 개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의 통치에 별로 큰 이익이 되지도 않을 뿐더러,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통치자는 이런 사람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많은 방법을 사용해왔다.

특별히, '천박하고 근시안적인 지식인들'

주위에 두는 것은 유효한 효과를 나타낸다.

어느 국가이고, 체제에 무조건적인 맹종을 보이는

값싼 지식인들은 널려있기 마련이다.

통치자들은 이런 사람들을 적당히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값싼 지식인들의 장기는,

반대를 위한 반대, 무조건적인 반대, 우기기 등이다.

이들이 말하는 궤변을 듣고 있노라면 식자들은 한숨만 나오지만,

대다수의 백성들은 이들의 궤변을 진리로 듣는 경우가 많다.




이상의 생각들은

내가 그동안 읽어온 몇 권 안되는 책을 통해 얻은 내용들이다.

과연 그럴듯 하지 않은가?

인류가 남긴 수많은 역사서들의 극히 일부만 살펴보더라도,

내가 위에서 간략하게 언급했던 내용의 실례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각종 고대의 정치학과 관련된 책들도

결국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국민들을 지배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일화는 비단 정치, 군주와 관련된 책 뿐만 아니라

문화나 정신적인 영역에도 비슷하게 적용이 되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와 현대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심지어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참고한 자료 중에는

수 천 년 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쿠르드족의 신화와 관련된 책에서 나온 것도 있다.



 



규모가 크고 작음의 차이가 있고,

보다 노골적인지, 덜 노골적인지의 다름만 있을 뿐,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시도는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아주 먼 곳에서 바로 우리 주변에서도

그 실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이상하게도,

이런 식의 남을 지배하고, 억압하고, 통제하고, 길들이는 방법을 다룬 책은 많지만,

남을 섬기고, 봉사하고, 남을 위해 희생을하는 방법을 다룬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







역시 인간이란,

다른 사람을 억압하고 자신의 편안함을 누리는데에는

많은 관심을 보이지만,

남을 섬기는데는 그다지 많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증거가 아닐까.




괜히 씁쓸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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랫만에 버스를 탔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버스는 시내버스가 아니라

좀 더 멀리까지 가는 고속버스죠.

 


속버스 한 번 탄 것이 무슨 큰 일이냐고

생각하실 분도 계실지 모르지만

평소의 저를 아시는 분이라면 큰 일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처럼 나가기를 싫어하는 녀석이

밖에, 그것도 고속버스를 타고 몇 시간이나 갈 생각을 하다니 하고 말입니다.

 

 
런 생각들을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지금까지 나는 한 번도 내 의사에 따라,

이런 식의 여행을 위해 스스로 차에 올라본 적이 없구나 하는.

 


실 그랬습니다. 언제나 타의에 의한 것이었죠.

학교에서 가야하는 수학여행, 졸업여행, MT

교회에서 가는 수련회들

그리고 가족이 모두 함께 움직여서 따라가는 시골여행.

 


렇게 적지 않은 나이인데도,

한 번도 저 스스로의 의사로 집을 떠나 여행이란 걸 가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뭐가 그리 바빴을까요, 아님 역시 성격탓일까요.

 


무 나 중심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대로 있고

그 대신 내 주변의 것들이

'알아서' 나에게 맞춰주기를 기대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가만히 있고 모든 것이 나에게 '오는' 것만 생각했지,

내가 '가는' 것은 거의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삶이란 건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는 과정인데 말입니다.

 


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의 의사에 따라 여행을 한다는 것도

꽤 흥미있는 일 같다는 생각에 이르게 됩니다.


 

냥 사진기 하나 들고 혼자 버스에 올라서

아무데나 가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은 경험이 될 것 같네요.

 

 

람이란게,

역시 몸을 좀 움직여 주어야

힘도 나고, 생각들도 떠오르는 것 같습니다.

짧은 여행이었지만

새로운 것들, 다른 것들을 접하는 경험들이

무뎌진 여러 감각들을 자극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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