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나무 한 그루가 있었어요."

 


쉘 실버스타인이 쓴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 소년을 사랑하는 나무가 있었습니다.
 

소년이 어렸을 때,

나무는 소년에게 놀이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소년이 나이가 들어 돈이 필요했을 때,

나무는 자신의 열매를 팔아 돈을 마련하라고 했습니다.


소년이 좀 더 나이가 들어 집이 필요할 때,

나무는 자신의 가지를 잘라 집을 짓도록 해 주었습니다.

 
소년이 이제 중년이 되었을 때,

나무는 자신의 몸통을 잘라 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년이 노인이 되어 돌아왔을 때,

나무는 기꺼이 자신의 그루터기를

소년이 앉아서 쉴 곳으로 내어 주었습니다

 


누군가를 후회없이 사랑하려면,

이 나무처럼 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나무처럼 평생을 한 사람만 기다리면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아름답긴 하겠지만,

그런건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찾으면 됩니다.

그 자신이나 그를 보는 주변 사람들에게 모두 너무 가혹한 일이니까요.

지나치게 감상에 빠진 모습은,

주님을 따라가는 우리들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또, 받지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주는 사랑을 해야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물론 사랑은 정확한 손익을 따져야만 하는 장사와는 다릅니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니, 나도 이만큼은 받아야 돼'라는 생각은

사랑을 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거죠.

하지만 성경의 사랑법에 따르면,

사랑을 하는 두 당사자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퍼주는 것은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사랑을 줄 수 있는 그 순간이 되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나무는 소년이 자신에게 왔을 때,

그 시점에서 자신이 줄 수 있는 최선의 것을 주었습니다.

나무는 뒤의 일을 계산해 가며,

잘려나가는 자신의 가지를 보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무가 다른 사람들에게 비춰질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다면,

그렇게 선뜻 자신의 몸통을 잘라 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무는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소년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을 사랑을 담아 주었을 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랑이란 감정이 싹이 틀 때 지나치게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진짜라는 확신은 어디서 얻지?'

'혹시라도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

'그렇다면 한 번에 다 줘서는 안 돼.'

 


이런 생각들은,

대개의 경우 '사랑'이란 것을 지나치게 이상화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입니다.

지고지순한 그 무엇,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하지만 사랑은 일상적인 것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랑의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친절, 배려, 때로는 그냥 미소만으로도

훌륭한 선물이 되기도 합니다.

 


사랑이 시작될 때,

한없이 두려워 하고 있다가

결국 그 사랑을 떠나보내고 후회해본 적은 없으신가요?

이별을 할 것이 두려워서 꽁꽁 싸매어 가지고만 있으면,

후회의 분량이 작아질까요?

 


실상은 그 반대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사랑한 사람은,

마음이 아프긴 하겠지만, 후회는 오히려 더 적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 주고 싶은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다 주었으니까요.

 


하지만 두려워하며 걱정만 하는 사람은,

해 주지 못한 것, 표현하지 못한 것들이

후회라는 이름으로 깊이 새겨지게 됩니다.

슬픔이 훨씬 더 오래 가게 되죠.

'그 때 내가 이렇게 했더라면..', '이건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사랑을 시작하셨거나,

사랑을 할 기회를 만나게 되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시기를 바랍니다.


 

2주 간의 사랑이든,

2개월의 사랑이든,

혹은 그 이상이든

사랑을 하는 그 순간에는 걱정이나 불안은 조금 뒤로 내려놓고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사랑을 하는 것이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더라도

가장 적게 후회하는 사랑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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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을 타고 잘 가지 않던 곳에 가야할 때가 있다.

그냥 한 번에 갈 수 있다면야 다행이지만,

두 세 번 갈아타야 할 경우라면 걷는 것도 일이다.

자칫 갈아타는 위치보다 먼 곳에 일부러 걸어갔다가

다시 고생하며 돌아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 필요한 것이 가능한 적게 걸어서 지하철을 갈아타는 위치.

(어쩌면 이건 나를 위한 글일지도..;;)

이왕이면 딱 맞는 위치에 서서 먼 길을 편하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가.

 

 

요즘에는 인터넷을 통해 이런 정보가 잘 나와 있다.

지하철 노선 검색 페이지를 이용하면 목적지까지 가는 최단거리와 소요비용,

그리고 몇 번째 칸의 몇 번째 문에서 타면

최소한으로 걸어서 편하게 갈아탈 수 있는지도 나온다.

 

 

하지만 모든 여행에 그렇게 먼저 인터넷을 검색하기는 어렵다.

가끔은 긴급하게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에 가야하지 않겠는가.

이럴 때 한 가지 팁이 있다.

 

 

지하철 역 바닥을 보면

선명한 노란색으로 된 타일이 줄지어 붙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타일은 올록볼록한 입체감이 있다.

이름하여 '점자 블록'이다.

시각장애인들이 지하철을 이용할 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시설물이다.

 

 




 
 

포인트는 바로 이 '점자 블록'을 따라 걷는 것이다.

점자 블록은 아까 말했던 대로,

시각장애인들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 블록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면 지하철을 타고내리는데

문제가 없도록 말이다.

 

 

그냥 걷기도 쉽지 않은 시각 장애인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거라면

당연히 가능하면 적게 걷고도 편리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상적이다.

그러므로 처음 가는 길을 갈 때는,

가능하면 점자 블록을 따라서 걷는 것이 유리하다.

 

 

물론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점자 블록이 '최단거리'를 기준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본 사람이라면,

최단 거리보다 한 칸 내지 두 칸 정도 멀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을 터.

 

 

아마도 비 장애인들이 최단거리를 이용하기 위해

서로 밀치고 뛰어다니는 것을 설계자가 본 듯 하다.

자칫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시각 장애인으로서는 위험하니까

차라리 한 두 칸 옆에서 인도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나보다.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볼 때

점자 블록을 이용하면 편하게 지하철을 갈아탈 수 있다.

아니, 그래야 한다.

 

 

혹시라도 내 관찰이 틀린 경우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나한테 직접 비난의 화살을 돌리지는 않기 바란다.

그건 우리나라의 행정을 기획하는 사람들이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부족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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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글의 내용을 전개해 나가기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이 글의 제목 때문인데, 

이 글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선물, 더 좋은 선물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글이 아니다. 

글을 계획하면서 내 마음에 든 생각은 만약 우리가 선물을 받게 되는 상황에 처할 경우, 

어떻게 하면 선물을 준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기분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 점을 기억하면서 아래의 글을 읽어주기를 바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선물을 잘 받는 방법’이란, 

선물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모두가 서로 기분 좋게 느낄 수 있는 방법을 말한다. 

때문에 선물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글을 이어 나갈 수 있을 텐데, 

이 글에서는 주로 선물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그들이 취해야 할 자세에 중심을 두고 살피려고 한다.

 

 

 

1. 선물을 받을 때 

선물을 받을 때 중요한 것은 ‘약간의 놀람’이다.

사실 선물이라는 것이 상품과는 달라서 자신이 무엇을 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언제쯤, 무엇을 선물로 받게 될지 

선물을 받는 사람으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외의 경우가 있다면 생일선물 정도?)

 

 

 

이런 이유로 선물을 주는 사람의 심리 가운데는

 

이런 의외성과 불확정성을 고려해 

 

선물을 받는 사람이 놀라게 될 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이런 기대감이 선물을 주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물을 준비하는 즐거움을 느끼도록 만드는 주된 요인 중 하나이다.

 

 

 

이 사실을 아는 선물을 받는 사람으로서는 

선물을 받는 그 순간 ‘놀라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어머 이게 뭐야.’, ‘엇! 이거 정말 나 주는 거야?’ 하는 식의 

가벼운 멘트를 사용하는 것도 유용하다. 

이 ‘놀람’은 기분좋은 놀람이기 때문에 표정에도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전반적으로 웃음이 감도는 표정이 좋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놀람의 강도가 지나치게 높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나친 놀람은 선물을 주는 사람에게 도리어 의아함을 갖도록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그런 모습이 ‘억지로’ 짓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살짝’ 놀라는 것, 요점은 이것이다. 

 

 

 

2. 받은 직후 

사람에 따라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선물은 받은 즉시 그 내용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정확한 감사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때 하는 감사는 뭉뚱그린 감사 보다는 선물을 직접적으로 지시하는 감사가 좋다. 

선물과 관련된 질문을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주의할 점은,

가격을 묻는 질문 같은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 

선물의 유래나 용도, 선택한 이유와 같은 질문이 적절하다.

요컨대 선물에 대한 ‘관심’을 보여 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선물의 내용을 바로 확인하는 것도, 

선물을 직접 지시하는 감사도, 질문도, 

모두 선물에 대해 관심이 있다는 ‘몸짓 언어’인 것이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이런 ‘관심’을 표현할 때, 

선물을 주는 사람은 ‘아, 이 사람이 내 선물을 정말로 좋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는 선물을 한 목적이 올바로 성취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선물을 준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큰 만족을 얻게 된다.

 

 

 

3. 받은 이후

선물을 받은 뒤 가장 좋은 관리법은 무엇일까? 

선물을 소중히, 망가지지 않게 간직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잘 생각해보면 선물을 그 용도에 맞게 잘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관리법이다. 

선물이 어떤 종류이던, 

 

그 선물을 통해 만든 생산물을 역으로 선물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이다. 

 

 

예를 들면 전자레인지를 선물로 받았다면, 그것을 이용해 만든 음식을 선물하면 좋다. 

옷이라면 직접 입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책이라면 책을 모두 읽고(사실 모두 읽지 않더라도)

내용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다시 말하면,

받은 선물을 잘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되는 것이다. 

이정도로 하고 있다면 당신은 매우 잘 선물을 받는 축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자세는 인간관계에 있어서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부차적인 결과지만,

그리고 어쩌면 서두와 어긋나는 이야기지만, 

이렇게 선물을 잘 받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더 많은 선물, 더 좋은 선물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 

선물을 하는 쪽에도 매우 큰 기쁨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방법들은 비단 선물을 주고받을 때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사람이란 대개 내가 하는 말에 진지한 경탄과 관심을 보이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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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케이블 TV의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흥미로운 다큐멘터리 한 편을 보게 되었다.

제목은 '동물들의 장수 방법'과 비슷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수 십 분을 봤는데도 제목 조차 기억을 못하다니..

텔레비전과 같은 매스 미디어가

인간의 감성은 자극할런지 모르지만,

지성적인 면을 함양하는데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는 증거일까.

 

 

아무튼,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오래사는 동물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 동물들은 어째서 오래 사는가,

그것을 인간에게 적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오래 사는 동물들에게서

인간이 오래사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것이

그 프로그램의 주제다.

 
 

 
만물의 영장이니, 진화의 최후 단계니 하면서

마음 내키는대로 자연을 파괴하고

하루에도 수 종의 생명체를 멸종시키는 인간이

이제는 오래 살아보겠다고 동물에게서 배우겠단다.

그 전에 이제까지 동물들에게 행한 죄들을

공개적으로 겸허하게 고백하는 의식이라도

먼저 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프로그램의 내용은 한 가지 내용으로 모아졌다.

바로 '느리게 사는 것'이다.

느리게 사는 동물들의 수명이 길다는 것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다윈이 갈라파고스 섬에서 발견한 거북이 한 마리가

아직까지도 살아서 돌아다니고 있다는 부분이었다.

무려 170살이 넘게.

 

  

만약 사람이 그 거북이처럼 천천히 산다면

거북이처럼 오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얼마나 산뜻한(?) 주장인가.

과연 인간의 지성이란 시간이 갈 수록 발전하는가 하는 질문을

진지하게 해 보게 만드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과연 그런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마 그 자신도 거북이처럼 느리게 기어다니지는 않을 것 같은데 말이다.

자기 수하에 있는 부하직원들이 그렇게 느릿느릿 일을 한다면,

아마 가장 먼저 화를 내지 않을까.

프로그램의 내용에 따르면

그건 부하직원들의 수명을 깎아내는 강요인데도 불구하고..

 

  

물론,

오래 살고 싶다는 인간의 가장 오래된 소망 중 하나를

비웃으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목표에 지나치게 집착을 하다보니,

그 내용이나, 과정에는

충분한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는 모습을 보니

괜히 비꼬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그런다.

그냥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수명에 만족하고 살면 안 될까.

얼마나 더 오래 사느냐보다, 얼마나 더 가치있게 사느냐에

더 많이 집중하면 안 될까.

 

  

어떻게 해야 오래 살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의사들이 시키는 대로 좋은 음식을 먹고, 적절한 운동을 하면

'건강하게'는 살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나 자신이 일년 중 상당 시간을 어딘가 고장난 상태로 보내고 있으니,

과연 오래 살 수 있을지 그다지 자신 없다.

사실 오래 사는 것이 어디 내 뜻대로 되는 일일까.

 

  

다른 사람보다 오래 사는 법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다른 사람보다 많이 사는 법에 대해서는

나도 한 마디를 하고 싶다.

'오래'가 아니라 '많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다른 사람보다 많이 사는 법.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살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관심'이다.

사실 우리는 바쁘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서

너무나 많은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지나쳐버린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가에 어떤 꽃이 어떤 모양으로 피었는지,

매일 드나드는 건물의 숨겨진 공간이 어떻게 생겼는지,

매일 만나는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이런 것들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다.

너무 '바쁘니까.'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을 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고 지나친 것을 들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느끼지 못하고 지나친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래서 하루 24시간 중

다른 사람은 5개 밖에 보거나 듣었는데,

나는 10개, 15개를 보고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작가 한 사람이 없다는 건 참 불행한 일이다.

또, 즐겨 찾아가는 나만의 장소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 중 하나이다.

언젠가는 삶에 대한 이런 작은 관심들이

쓰러져버릴 것 같은 어려움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익숙한 지지대 같은 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보다 많이 사는데 도움을 주는 것들이다.

 

 

언제나 너무 바쁘게만 살던 내가

이런 '관심'의 중요성을 깨달은 건

대학교 4학년 때가 되어서였다.

그제서야 학교 가는 길 돌담에 핀 개나리의 모양이 어떻게 생겼는지,

빗방울이 공기를 가르며 내는 소리가 어떤 건지,

잔디밭에 앉아서 햇살을 즐기는 것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를 깨달았다.

대상을 '즐기는 법'을 그제서야 알았다.

뭐가 그리 바쁘게 살았는지.

 

  

관심이 있어야 즐길 수 있다.

내가 하는 일, 내 앞에 있는 사람, 나와 접촉하는 모든 것들에

진지한 관심을 갖기 시작할 때,

비로소 그것들을 진정으로 즐길 수 있다.

그렇게 하나 둘 즐기는 것을 몸에 익히다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5월인데....

비가 제법 많이 쏟아진다.

바쁘게 하던 일을 한 10분 쯤 쉬면서,

비를 즐기기에 딱 좋은 날.

비 오는 날이란 거..

생각만큼 우울하거나 그렇지만은 않다.

꼭 비가 내리는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다.

빗소리가 사라지지 않을 정도의 음량으로

좋은 음악을 듣거나,

빗소리를 들으며 재미있는 책을 읽는 것도

비를 즐기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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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한문으로 쓰면 '誤解'라고 쓴다.

그릇될 '오'에, 풀 '해'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오해란 '잘못 풀어냈다'는 뜻이다.







무엇을 잘못 풀어낸 것일까?

아마도 오해를 하게 된 대상이 지닌

본래의 사실이나 의미, 의도를 잘못 풀어낸 것이 아닐까 싶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많은 오해를 하게 된다.

어떤 질병에 대해 오해를 해서

병에 걸린 사람들을 두 배, 세 배 힘들게 만들기도 하고,

특정한 사건의 전후관계에 대한 오해를 해서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기도 한다.

에이즈나 한센병과 같은 질병에 대한 오해가

전자의 예가 될 것이고,

실미도라는 영화로 인해 졸지에 범죄자들로 몰린

- 하지만 사실은 국가 권력에 의해 강제 납치된 -

젊은이들이 후자의 예가 될 것이다.






사람에 대한 오해도 매우 자주 일어난다.

아니, 사람들이 가장 자주 하는 오해의 종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사람에 대한 오해'는,

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정상적으로 진행되던 관계라고 하더라도,

한 순간의 오해로 말미암아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의처증, 의붓증으로 불리는 배우자에 대한 의심은

오해가 때로는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깨닫게 만드는 예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은 오해라는 것을 할까?

오해의 원인을 안다면,

그것이 가져오는 해악을 조금이라도 감소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기에,

오해란......

자신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물어보지도 않고

완전하고 정확하게 알 수 있다는,

그런 오만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해란, 실제는 그렇지 않은데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왜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다고 믿어버리는 것일까?

그건 충분하고 정확한 정보를 구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전에 그런 정보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정확한 정보, 불완전한 정보를 가지고 판단을 내리면서,

자신의 판단이 정확할 것으로 강하게 믿어버리는 태도.

그것이 오해이다.

이 얼마나 오만한 태도인가.







물론 어떤 오해는 얻을 수 있는 모든 자료를 가지고 내렸을 수도 있다.

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이란 대개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오해는 오만함의 범주에서 예외로 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오해는 그런 오만함에 다름이 아니다.






그런 오만함으로 시작했기에

오해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고압적인 태도로 나오기 쉽다.

그의 해명(대개는 변명으로 받아들인다)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상대에게 받아들일것을 요구한다.





오해에 빠진 대부분의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은,

시간이 갈 수록 오해에 대한 신념이 점점 굳어져간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단지 '느낌'의 영역에 속해있었던 것에 불과했다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사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만이 옳은 것이 되어버린다.





왜 그렇게 될까?

사람의 말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말은 사실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일단 한 사람이 어떤 말을 해 버리고 나면,

그 말로 인해 그 사람의 생각, 행동까지 달라지게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이 한 말에 그 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맞춰가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이다.

일종의 자기암시라고나 할까.






그걸 자기암시라고 부르던, 말의 힘이라고 부르던 간에,

그렇기 때문에 한 번 오해에 빠진 사람들은

스스로 그 오해에서 빠져나오기가 매우 힘들다.

때문에 오해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한 번 빠져버리고 나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오해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간단한 얘기지만

오해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충분한 커뮤니케이션이다.

서로간의 충분한 의사소통이야말로 오해를 피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사실 새로운 것도 없는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현실세계에서는

이 방법을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이 적은 것도 사실이다.

상대에 대한 선입관이 방해를 하고,

때로는 자존심이 이 방법을 취하는 것을 반대하기도 한다.

역시 '각각 자기를 남보다 낫게 여기기' 때문이다.







대화를 하는 대개의 사람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기 보다는,

그 얘기에 내가 어떻게 대답을 해줄까를

더 공들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이건 내가 생각해 낸 말이 아니라 『인간성에 관한 풍자 511』이라는 책에 나온 말이다.)

당연히 상대방의 이야기를 정확히 듣지 못하고,

충분한 의사소통 따위는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자기 중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선입관도, 

자신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도 갖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한 번 해 보는 건 어떨까.

그냥 잘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는 나의 조언에서 해답을 찾기 보다는,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갖고 잘 들어주는 내 모습에서 용기를 얻고

돌아가서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꺼라고 믿어보는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들어보자.





결국 오해란,

내가 얼마나 상대방의 입장에 서고자 노력했느냐에 따라

빠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나'를 내려놓고, '너'가 되어 보는 것.

그리고 '나'의 입장에서 내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상대의 입장에서 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상대의 생각까지도 내가 대신 판단하려는 오만함을 놓을 때,

오해의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지 않을까.

그런거라면.... 나도 아직 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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