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때문에 본의 아니게 몇 개월 동안 병원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의사나 간호사 지망생을 빼고는 누가 병원 생활을 좋아할까만은,
나도 역시 그 때의 경험은 다시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어지간히 몸이 고단하기도 했거니와,
병원 생활이 길어지면서 그 곳에서 여러 사람들의 기분 나쁜 면을 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지금 쓰려고 하는 '없는 사람 취급하기'다.

 

병원 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몇 달씩 병이 지속될 경우 환자는 물론 그 주위 사람들도 서서히 지쳐가게 된다.
더구나 그 병이 언제 나을 지 기한이 없다면 이제 조건은 거의 다 갖춰진다.





상황 1.
환자는 오랜 병으로 쇠약해진 상태.
환자의 친구가 문병을 와서 환자의 다리를 잡고 말한다.
"아이고 이거.. 이래서 걸을 수나 있겠어?"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란 건 안다.
(어쩌면 그냥 자신의 무심함을 드러내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 말을 오랜 침대 생활로 다리에 힘이 없어
어쩌면 다시 걷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고 있는 환자에게,
그래서 겨우 희망을 주며 격려를 해 놓은 환자에게 할 필요가 있을까?

 

상황 2.
심혈관질환(심장에 붙은 혈관에 문제가 있는 병) 환자들은
종종 가슴 부위에 통증을 느끼기도 한다.
특히 그 부위에 수술을 받은 후나 신체의 다른 이상이 있을 때 특히나 그렇다.
그렇게 통증이 생기면 간호사를 불러 의사의 처방을 요구하고,
간호사는 처방을 받아 적절한 약물을 투입한다.
문제는 이 통증이 일정치 않다는 데 있다.
항상 같은 처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통증이 일어날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다.
의사와 환자 사이에 있는 간호사로서는 매 순간 긴장을 해야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호출을 받고 가도 금방 진정이 되기도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환자의 상태를 의사에게 전달해도 '기다려보자'는 대답이 돌아오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 환자가 통증을 호소해도
크게 여기지 않는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는 데 있다.
환자가 일정 시간 안에 연속적으로 강한 통증을 호소하지 않는 이상
환자가 호출을 했다는 사실까지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통증이 가라앉지 않는 환자로서는 분통이 터지는 일.
환자는 간호사의 머리속에서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다.


없는 사람 취급하기.
줄여서 '무시'.
이것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상대의 기분이나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하거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못 들은 척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사실 여기에 의도적인지의 여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무의식적으로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이미 그런 태도가 체득화 되어 있다는 뜻일테니까.
대신 여기에는 거의 필수적인 요소가 한 가지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사람이 그런 취급을 하는 사람에 비해 '약자'라는 것이다.
무시란 나보다 약한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강자의 태도이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무시할까?
가장 큰 이유는 손해를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귀찮아서'라는 이유도 그 때문에 내 시간과 여유를 사용하기 싫다는 말일 뿐이다.
비슷한 이유로 '나에게 이익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라는 것도 있다.
결국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버릴 수도 있다는 태도이다.

 

무시를 하는 또 한 가지의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적어도 '직접적 논란'이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공개적인 조롱이나 공격은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무시는 암묵적으로 용납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무시를 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명예나 품위를 지키면서 손해까지 보지 않을 수 있는
경제적으로 아주 효율적인 태도가 '무시'이다.





최초의 얼마간을 예외로 한다면, 인간은 항상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왔다.
무시는 그런 삶의 방식을 뒷면으로(정면으로의 반대말?) 거부하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기적인 인간들에게
그나마 어느 정도 선을 강제할 수 있는 요소가
'다른 사람의 눈', 즉 명예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인데,
무시란 그 보이지 않는 고리 마저 끊어버리는 강력한 도구다.
무시가 일반화 된 공동체는 더이상 공동체가 아니다.
당연히 (경제적, 정치적, 물리적) 힘이 센 놈만 잘살게 된다.
약육강식의 비인간적 세상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은 내 의식 속에서 그의 존재를 제거하는 것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의미지만, 인격적인 살인이다.
그것도 절대로 처벌받지 않는 살인 말이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일일히 반응을 보여줄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건 어지간히 우리를 소진시키는 일이기도 할 뿐더러,
종종 단지 우리를 귀찮게 할 목적으로 요청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 정도의 구분이나 판단마저 포기하자는 말이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을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이
그 사람에게나 우리 자신에게나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한 번쯤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너무나 쉽게 다른 사람을 의식 속에서 제거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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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정치란,

국민이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에 따라 국가 운영에 관한 의견을 내고,

이 의견을 모아 국가의 운영방향을 결정하는 정치체제이다.

참 멋진 정치 형태 중 하나이다.

이런 정의대로의 체제라면 난 적극적으로 지지한다.
 




 

이 멋진 정치형태가 올바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적절한 제도적 장치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마도 그 '장치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선거'일 것이다.

다시 말해, 국민이 투표를 '잘' 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그 국가가 민주정치를 행하고 있느냐를 판단할 수 있는 주요 기준이다.
 

 

무엇이 투표를 '잘' 하는 것이냐에 관한 논의는 거의 정리가 되어 있다.

대한민국헌법 제 41조 1항에는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라는 투표의 4대 원칙이 등장한다.

'보통선거'란 누구나 학력, 성별, 재산 정도 등의 구별 없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다는 원칙이고,

'평등선거'란 1인 1표의 투표원칙이다.

'직접선거'란 그 국민들이 다른 누구를 통해서가 아니라

직접 투표소에 가서 기표를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마지막으로 '비밀선거'는 투표의 전과정이 본인 이외의

누구에게도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규정한다.
 

 

이 원칙들을 천천히 살펴보면

처음에 말한 것처럼 국민들이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에 따라

투표의 전 과정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한 것들임을 알 수 있다.

역시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국민 개개인의 '주체성'이다.

 





 
하지만 이런 도구들이 잘 갖춰졌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자동적으로 잘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튼튼하고 잘 만들어진 자동차가 있어도

그것을 운전하는 사람이 제대로 운전법을 모르면

차가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라는 좋은 자동차도

그것에 직접 올라 타 운전하는 사람들이
 
정확한 운전법을 모르면 결코 국가는 정상적으로 가지 않는다.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떤 상태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이제 도구적인 장치들은 잘 만들어졌다.

이승만 부패정부나,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시절에는

이 원칙들이 흔들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분명히 다르다.

하지만 그것을 운전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여전히 충분히 적응이 되지 못한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우리나라 정치 영역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정치를 '전문가 집단'에게 맡겨버리고

자신들과는 별개의 영역으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 소위 '전문가 집단'에는 정치인들, 언론인들이 대표적이다.

사실 그 전문가 집단의 의식 수준은 보통 사람들보다 특별히 뛰어나지 않은 데도,

아니 종종 보통 사람들보다 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음에도

사람들은 이런 무책임한 태도를 쉽게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전문가들'의 수준이 떨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증거는

'상식 이하의 도덕적, 윤리적 의식 상태'이다.

술을 마시고 술주정을 하는 것 까지는 뭐라 하기 어렵겠지만,

그렇게 자기 제어가 풀려버렸을 때

그 사람의 의식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모 정당의 어떤 국회의원들이 하는 꼴을 보면,

지정된 열차 좌석을 마음대로 바꾸라고 열차를 발로 차고,

음식점 여종업원의 신체 부위를 주무르기도 한다.

60대 경비원의 머리를 맥주병으로 내려치는 등의 행패는

지긋지긋하게 반복되는 일들이다.

 


그들의 특권의식은 정당을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함께 술 먹고 놀러 다니려고 소방헬기를 불러 탔다는 얘기는 가히 압권이다.

그들이 과연 일반인들보다 뛰어난가?

 


상습적인 '말 바꾸기'도 중요한 수준 낮음의 증거이다.

자기들의 세의 유불리에 따라 오늘은 여기에 붙었다, 내일은 저기에 붙었다 하는 모습은

이제 특별한 뉴스거리도 안 될 정도로 흔한 일들이다.

어떻게 한 사람이 같은 대상을 향해

그렇게 열렬한 비난과 찬양의 말을 동시에 할 수 있는지,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주체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지 않는다.

이제 그들은 사고와 판단을 '언론들'에게 맡겨버린다.

언론의 속성상 결코 '중립적이며 객관적'이지 않은데도

사람들은 언론에 실린 이야기들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요즘엔 소위 '언론 권력'이라는 말도 등장한다.

각 언론사들은 자기의 유불리에 따라 논조를 조작해

'이것이 여론이다'라는 식으로 선전한다.

때로는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을 감싸주고,

작은 잘못을 나라를 뒤흔들만한 문제로 확대하기도 한다.

 


물론 언론사들이 각자의 논조를 갖는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그 것들을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무엇으로 생각한다는 데 있다.

이제 사람들은 언론이 머릿속에 넣어주는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것으로 착각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민주주의의 가장 강력한 적은 '민주적 의식의 부재'이다.

절차적 부실은 의식만 있다면 언제든지 갖출 수 있지만,

의식의 부재는 절차의 갖추어짐을 무효화시키기 때문이다.

민주적 의식이 없는 대다수의 지지로 만들어진 정부나 의회는

민주정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군중정치'의 산물일 뿐이다.

 


이 글은 모든 우리나라 사람들을 멍청한 군중으로 묘사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분명히 어떤 분들은 나같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정치적인 의식을 갖고 있으며,

다행히 그런 사람들은 적지 않아 보인다.

다만, 여전히 많은 일반 시민들의 민주적 의식이 좀 더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리를 저지른 정치인들이 여전히 자신의 지역구에서 지지를 받고 있고,

수많은 인명을 살상한 독재자의 이름이 구국의 영웅으로 떠받들여지고 있고,

각 당의 대변인이라는 작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독설을 쏟아내기 바쁜 것을 보면

이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얼마 없지 않을까.

 


얼마 전 이탈리아의 한 지방의회 의원이

의회 회의 시간이 촉박해 앰블런스를 타고 혼잡한 도로를 빠져나가 회의장에 도착했다가

그 사실이 밝혀져 의원직을 사퇴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참 신선하지 않은가?

정상적인 것이 이렇게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은

여전히 우리나라의 민주정치 수준이 낮음을 증명하는 것일 터.

상식이 기적이 되는 곳이 여기에 또 있다. 

 





상황이 이 정도니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는 철인(哲人)정치라고 했다는 플라톤의 주장도 이해가 간다.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사람들에게 정치를 전담하도록 하자는 말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적어도 뉴스에서

정치인들의 망언이나 패싸움은 보지 않을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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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는 꺼려지는 수식어이다.

'저 사람은 비판적이야'라는 말에는 분명히 부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비판적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을 부담스러워하고,
종종 그런 사람을 미워하기도 한다.
(그 사람의 비판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경우에는
이런 경향이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드'라는 책에 보면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리 공격을 해도 트로이성을 점령할 수 없었던 그리스 군은
거대한 목마를 만들어 그 안에 병사들을 숨겨 놓는다.
하지만 트로이 성의 사람들은 그 목마에 숨겨진 함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것을 전리품으로 성 안으로 들여오고자 했다.
그 때 그것을 막았던 사람이 한 명 있었으니,
크산드라라는 이름의 공주였다.

 

그녀는 목마를 성안으로 가져오면 불행이 닥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부정적인 예언은 무시했고,
결국 성은 정복을 당하고 말았다.

 

누군가 말했던 대로,
인류는 크산드라 이래로 늘 부정적인 견해를 표하는 사람을 멀리해왔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비판적인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살 다 보면 그런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나 같은 사람도 필요할 때가 있다.)

 

비판이 사라진다면 세상에 도무지 '발전'이라는 것은 없을 것이다.
비판이란 지금 당하고 있는 불편이나 눈 앞에 벌어지는 잘못을
잘못되었다고,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니 말이다.
비판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자신을 망하게 할 트로이의 목마를 끌어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판과 유사하지만 그 부정적인 개념을 제거한,
'좋은 의미의 비판'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소위 '비판'과 '비평'의 구분이 그 결과물이다.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르지 않은 부분을 지적해 드러내고 그 책임을 묻는 일'이라는 뉘앙스이다.

 

그렇다면 차이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비평은 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비판은 주관적인 가치관으로 약점을 공격하는 행위라고.
그럴까?

 

이 정의에서 '잘못'과 '약점'은 사실은 같은 말이다.
또, '지적'과 '공격'이라는 말도 같은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도 둘 사이의 차이점은
그 지적(혹은 공격)의 목적이나 전제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지적되는 차이는 '목적'에서 발견된다.
상대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하는 지적과 공격은 좋지만,
그렇지 않다면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상대를 좋아하지 않아도, 아니 싫어하더라도 비평은 가능하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많은 사람은 특별히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꼭 선의나 악의를 갖지 않더라도 우리는 비평이나 비판을 할 수 있다.
좋아하지 않으면 말을 하지 말라는 투의 지적이라면 적절하지 못하다.

 

두 번째 기준인 '전제' 역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비판이든 비평이든
어차피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기준을 가지고 상대를 평가하는 것이다.
누가 자신의 기준을 절대로 틀리지 않는 완전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또 한 가지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분법은 '대안'의 여부다.
그게 싫으면 다른 대안을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종종 정당한 비판인데도 불구하고
'대안도 없이 무책임하게 비난만 한다'는 핀잔을 듣기도 한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는데에 무슨 대안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틀린 것을 지적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아마도 이런 식의 구분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라'는 데 중점을 두는 듯하다.
그러나 비판, 또는 비평이라는게 필연적으로
상대를 공격(또는 지적)을 하는 행위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건 희망사항에 가깝다.

 

비판에 대한 이러한 오해는 건전한 비판과 토론 자체를 막아서
결국 모두가 함께 그 피해를 받기 마련이다.

 




 

적절한 비판과 적절치 않은 비판의 차이는 다른 데 있다.
둘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는 말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있다.
상대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있는 것이다.
비방/비난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말에 대한 반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의 대화방식에서 상대는 늘 '악'이다.
늘 상대를 '수구꼴통'이나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정치인들에게서 그 예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당한 비판이나 비평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 열린 자세로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옳지 않으면 어떤 부분이 옳지 않은지,
옳다면 자신의 이야기 중 어느 부분이 틀렸는지를 대답으로 보일 것이다.
발전적 제안은 이런 과정 중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처음부터 대안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건전한 비판이란
'상대의 말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를 가진 상태에서 가능한 것이다.

 

그것을 비평이나 또 다른 어떤 단어로 부르던 말리진 않겠다.
다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기억해 주기를 원하는 것은,
부디 다른 사람에게 귀를 기울이면서 지적을 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보게 되면 처음부터 '비판적인 사람'이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새기지 말고
차분히 말을 들어주었으면 한다.
그 사람이 비판을 하고 있는지, 비난을 하고 있는지,
그냥 내가 듣기에 기분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지 말이다.

 

최소한 이 두 가지 규칙만을 잘 지킨다면
싸움은 훨씬 줄어들고, 문제는 좀 더 쉽게 해결될 것이다.
사실 다툼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은 비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완고한 독선적인 정신상태'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다.
여기에는 말을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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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순간도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그, 혹은 그녀가 아니면 절대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영혼과 영혼이 서로를 알아본다는 그런 사랑.
멋지지 않은가, 그런 사랑을 한다는 건.

 

요즘 텔레비전 드라마, 영화, 소설들을 보면,
온통 사랑에 관한 이야기들로만 가득하다.
아, 여기에 대중가요도 물론 추가해야 겠다.
요즘 나오는 가요들의 주제는 극단적으로 말해 딱 두 개밖에 없다.
사랑하게 되어서 기쁘다는 내용 아니면,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아서 슬프다는 내용.
그 빈곤한 상상력의 가련함이란....

 

그야말로 사랑의 홍수 시대이다.

 
 
내가 쓴 글들을 꾸준히 읽은 사람들이라면,
이제 슬슬 눈치를 채고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다.
사랑은 좋은 것이 아니냐고,
왜 거기에 시비를 걸 준비를 하느냐고 말이다.

 

만약 정말로 여기까지 생각을 한 사람이 있다면,
당신을 내 매니아로 임명한다. ㅎㅎ


 
사랑, 물론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신문과 방송, 모든 매체들에서 사랑을 떠들어대는 
오늘날의 사람들은 과연 행복한가?

 
 

불행히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사랑의 홍수 시대에도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사랑을 찾고자 하지만,
결국은 실패의 쓴잔을 들이키곤 한다.
왜 그럴까? 무엇이 문제일까?
 

 
지나치게 긴 글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여기서 여러 종류의 사랑들 가운데
남녀 사이의 사랑만을 주제로 삼겠다.
하지만 다른 관계의 사랑(부모와 자녀, 친구, 이웃 등의)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들의 그러한 시도는 십중팔구 실패하기 마련이다.
완전한 사랑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심지어 공상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완전한 사랑, 아니 적어도 그에 상당한 사랑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실패를 하는 걸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완전한 사랑을 첫사랑의 대상에게서 찾고,
또 다른 사람은 헤어진 연인에게서 찾는다.
심지어 드라마, 영화 속의 주인공의 모습에서
자신의 완전한 사랑의 대상을 찾기도 한다.

 

지나간 과거의 연인에게서 찾으려는 사람은,
그와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데서 오는 슬픔과 자기연민에 빠져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 혹은 그녀야 말로 자신의 완전한 사랑이기에,
더 이상 다른 사람과는 사랑할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영화나 드라마, 자신의 상상 속에서 완전한 사랑을 찾는 사람은
상상 속의 그 사람과 끊임없이 비교를 한다.
그리고 ‘당연히’ 그 상상과 일치하지 않으면,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고 상대와의 관계를 끊어 버린다.

 

완전한 사랑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기’를 제대로 선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남녀 사이에 있어서의 완전한 사랑이란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특별하고도 거룩한 관계 속에 들어갔을 때에야 가능하다.
‘둘이 한 몸이 되는 것’.
성경이 결혼을 이르는 말이다.
완전한 사랑에 대해 이보다 더 멋진 표현이 또 있을까.
원래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인격체가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 하나의 인격체로 태어나는 것이다.
말 그대로 완전한 사랑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완전한 사랑을 찾아야, 결혼을 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 결혼의 유일한 조건으로 ‘사랑’을 꼽는 위험한 생각도 판을 친다.

과연 사랑만이 결혼의 유일한 조건이 될 수 있을까.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뀌는 그 감정의 지배에 따라
결혼이라는 신성한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옳을까.
사랑만이 삶의 유일한 이유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세속적인 드라마와 소설이 우리에게 주입하는 위험한 사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의 '조건'을 생각하는 것은 결코 나쁘지 않다.

문제는 어떤 조건을 택하느냐 하는 것이다.

나와 깊은 사귐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인지,

그의 삶의 질서가 제대로 잡혀 있는지,

이런 조건들은 우리가 충분히 고려해야 할 ‘조건’들이다.
두 사람이 하나의 인격체를 이루는데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완전한 사랑'이란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속적인 대중매채에서 떠드는,
운명적이며 완전한 사랑을 언젠간 만나게 될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지 않는 한,
완전한 사랑은 결코 당신 곁에 오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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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더 이상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그냥 느끼기를 원할 뿐이다.

생각하는 것은 옳고, 느끼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감성적인 면이 좀 더 강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이성적인 면이 강할 수 있다.

사실 모든 사람은 이 두 가지 면을 함께 가지고 있으니까.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지성과 감성.

 

일본 소설가 다나카 요시키가 말했던,

‘강철로 된 신경과 거미줄로 된 신경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아름다움’은

특별난 사람만이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 말하려는 것은 제대로 느끼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은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방식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생각하기 대신 느끼는 대로 하고 싶어하지만,

그나마 제대로 느끼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진심으로 느끼지를 못하고 있다.

진심으로 슬퍼하지도 못하고,

진심으로 기뻐하지도 않는다.

적당히 슬퍼하고, 적당히 기뻐할 뿐이다.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미워한다.

정도의 차원에만 ‘적당히’라는 형용사가 붙는 것은 아니다.

시간의 차원에서도 ‘적당히’는 적용된다.

 

쉽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대충 느낀다.’

 

 

오늘날 사람들이 이렇게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된 데에는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역할이 가장 크다.

텔레비전을 보는 사람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라.

적당히 눕거나 기대서,

손에는 리모컨을 들고 쉴 새 없이 이 채널, 저 채널을 돌려댄다.

적당히 돌리다가 딱 느낌이 들면

잠시 채널을 고정한다.

말 그대로 순간적인 느낌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이내 흥미를 잃고 또 다른 채널을 찾아 나선다.

 

 








이러는 동안 감정은 점차 단편적으로 변해간다.

감정을 느끼는 주기는 극단적으로 짧아지고,

그 깊이 또한 얕아진다.

만약 어떤 드라마에서 조금 긴 호흡으로 장면을 묘사하며

감정을 길게 늘어뜨린다면

사람들은 금새 지루하다느니, 늘어진다느니하며

비난을 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쉬지 않는 변화와 자극을 원하지,

진지하고 깊은 감동을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이런 경향은

또 다시 그런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양산하는 원인이 된다.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특성이 원래 그렇다.

방송과 관련된 모든 것은 돈으로 환산되기 때문에,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시청자의 주의를 끌만한

자극적이며 감정적 기복이 심한 영상들을 내보내기 바쁘다.

 

 

인터넷이라는 놀라운 도구는

이러한 경향을 거의 폭발적으로 가속 시켰다.

인터넷은 그 특성상 즉각적이며, 익명성이 강하다.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즉시 표현할 수 있으며,

이럴 경우 대개는 익명성이 보장되기에

직접 마주 대하고는 감히 하지 못할 심한 말을 쏟아낸다.

더이상 사람들은 참을 줄 모르게 되었고,

점차 자신의 순간적인 감정을

즉각적으로 표출하도록 훈련된다.

 

 

현대 물질문명의 발달은

인간의 삶을 더욱 편하게 만들어 주었을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감성을 점차 무디게 만들고 있다.

 

 

콘서트홀에 직접 가서 느끼게 되는 감동은



결코 텔레비전으로는 재생할 수 없는 것이다.

악기를 통해 전해지는

공기의 미세한 진동을 피부로 느끼는 일은,

다른 것으로는 대체할 수 없다.

그 감동과 떨림이란...

이삼십초 마다 자극적인 영상들이 요동치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나오는

디지털화 된 소리를 통해서는 진정한 감동을 느끼기 어렵다.

 

 

사람들이 이런 대중매체에 지나치게 노출된 결과,

그들은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같은 감정들을

도무지 깊게 느끼지 못한다.

기뻐 좋아하다가도 언젠가 싶다 다시 슬퍼하고,

미워하는가 싶다가도 금방 잊어버린다.

상갓집에 가서도 떠들고 놀며 즐기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보다가도

금방 연예인들의 실없는 농담 몇 마디에 기꺼워한다.

 

 

 

 

 

엄밀히 말해 이런 것들은 ‘느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키는 대로 하려는,

극도의 자기 위주의 사고에 사로잡힌 행동일 뿐이다.

이런 사람들을 부르는 적절한 표현은

'감성적인 사람'이 아니라

'충동적인 사람'이다.

 

 

진정한 감정과 감동은 결코 이성과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은 감정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고,

감정은 이성을 더욱 윤택하게 해 준다.

 

 

당신은 어떤가.

혹시 스스로를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실은 충동적인 사람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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