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왔어 우리 딸 - 나는 이렇게 은재아빠가 되었다
서효인 지음 / 난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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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몰랐어.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좋아하는 걸 물으면 취향이 없어 우물쭈물하기 바빴지. 기껏 말한다는 게 고기? 돼지고기, 소고기? 이러고 나면 그건 그냥 농담이 되는 거야. 고기는 말고도 좋아하는 어른이 아주 많거든. 나는 이제 은재 네가 좋아. 다운증후군을 가진 친구들이 좋아. 사람들이 그러더라. 우리 아이들이 바로 천사라고. 밝게 웃어주고 유머를 즐기고 참을성이 깊다고. 네가 자라면 무엇이 될까. 천사는 직업이 아니니까 직장에서는 네 정체를 숨겨야 해!
(서효인, 『잘 왔어 우리 딸』中에서)

은재는 좋겠다. 시인 아빠 서효인과 함께라서. 대학 때는 술을 마시고 당구 치는 걸 좋아했고. 좋아하는 애인이 문학을 좋아해서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문학을 더 좋아하는 척했다. 좋아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속도를 살짝 올려서 결혼을 했다. 결혼 전에 무수히 많은 난관들을 헤치면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살게 되었다. 목포에서 올라온 엄마와 집을 보러 다니고 감자탕을 먹고. 그나마 본 집 중에서 볕이 들고 공원이 있는 집을 계약했다.

시인 아빠는 아이의 이름을 미리 지어 두었다. '사랑의 재능'이라는 뜻을 가진 은재로. 태명은 땅콩이. 조심조심 지내며 태어날 아이를 기다렸다.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 세상의 소리는 잠시 멈췄다. 울어야 할 아이는 울지 못했다. 대신 이런 말들이 들렸다. '다운 같지? 네 그런 것 같아요. 생긴 게 그렇지? 얼른 데려가. 얼른.' 구급차를 타고 큰 병원으로 갔다. 인큐베이터 안의 은재는 작았다. 아내가 있는 병원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집을 함께 보러 다녀준 엄마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택시 운전사는 요금을 깎아 주며 아내를 잘 돌보라고 했다.

『잘 왔어 우리 딸』은 시인 서효인이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난 딸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아빠가 엄마를 만나기 전으로 시작해서 은재 너를 갖게 되고 태어나서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희망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기 위해 쓰였다. 다른 아이들보다 염색체가 하나 많은 은재에게 아빠는 말한다. 괜찮아, 잘 왔어, 난 네가 좋아라고. 서효인은 스스로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다고 밝힌다. 기껏해야 고기 정도를 좋아한다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비싼 소고기보다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은 딸아이를 가장 좋아하는 아빠가 된다. 『잘 왔어 우리 딸』은 은재를 위한 마음과 아빠로서 더 잘하고 싶은 책임이 가득 담겼다. '은재'로 시작한 책은 '당신'으로 끝이 난다. 누구보다 용기가 필요하고 필요했을 '당신'에게 서효인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다독인다. '누구의 어머니 아버지가 아닌 우리 자신으로, 동시에 부모로 가족으로 살'아 가자고 이야기한다. 천사는 직업이 될 수 없다고 아빠는 은재에게 말한다. 그러니 네 정체를 잘 숨기라고도.

문학이 아닌 바깥의 영역에서 인과 관계를 따지는 건 우스운 일이 된다. 시인 서효인은 그것을 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꼬치꼬치 캐묻지 않는다. 엄마 곁이 아닌 신생아 집중 치료실에서 있어야 할 은재에게 '신생아집중치료실의 보스'라고 별명을 붙여 주면서 지금 보다 괜찮아지기를 기대한다. 태어난 아이에게 조금 늦게 도착한 축복의 말을 감사하게 여긴다.

아침이를 타고 가는 긴 귀성길에도 은재는 칭얼대지 않는다. 좁은 차 안에서 힘들었을 텐데. '사랑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아이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으로 제 몫을 다 해낸다. 잘 웃고 뒤집기를 해내며 걷고 태어날 동생을 기다리며 지구 위에서 반짝인다. 나중에 은재가 커서 『잘 왔어 우리 딸』을 읽게 된다면 이토록 가득한 사랑의 온기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음에 얼마나 황홀해할지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힌다. 좋겠다. 좋겠어. 마구 부럽다고 말해본다.

두렵고 당황했던 마음을 딛고 고기와 커피보다 좋은 마법사 은재를 만나며 시인은 그렇게 아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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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세, 미혼출산
가키야 미우 지음, 권경하 옮김 / 늘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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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마흔이 되는 유코에게 걱정거리가 생겼다. 여행사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그녀. 얼마 전에 캄보디아 출장에서 부하 직원인 미즈노와 분위기에 취해 얼떨결에 하룻밤을 보내고 말았다. 가키야 미우의 소설 『40세, 미혼출산』은 유코가 임신임을 확인하는 일로 시작한다. 먼저 든 생각은 자신의 나이. 이십대는 사내에서 유부남과 연애를 했다. 그 일로 결혼 시기를 놓쳐 버렸다. 일과 결혼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먼 나라의 일처럼 느껴진 유코였다. 결심을 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아이를 낳겠다고. 결혼은 그 후의 문제다. 유코는 임신을 한 상태로 아버지의 7주기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아직은 폐쇄적인 결혼관을 가진 친척들을 만난다. 마흔이 다 되어 가는데 결혼을 하지 않는 유코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말하는 친척들. 여자 나이 마흔이면 결혼도 출산도 무리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동창들. 유코의 결심은 흔들린다.

회사 내에서도 은근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화장실에 누가 있는 줄 모르고 언니에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렸던 것이다. 부하 직원인 미즈노는 자신의 아이냐고 물어본다. 미즈노가 어떻게 나올지 뻔히 알아 유코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부르고 일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40세, 미혼출산』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결코 가볍지 않은 소재를 이끌어 가는 서사의 힘이 놀랍다.

유코는 아이를 낳아도 끝까지 회사에 남아 일하고 싶다. 육아 휴직을 쓰고 보육원에 보내고 단축 근무를 하고 싶다. 일본 사회가 가지는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시선이 『40세, 미혼출산』에는 그대로 드러나 있다. 노골적으로 퇴직을 강요하는 부장. 호주제를 중심으로 여성에게 불리한 법적 제도. 소설에서 유코의 어머니는 딸의 임신 사실을 알고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유코의 남자 동창들을 찾아간 것이었다. 그들에게 법적인 아버지가 되어 달라고 한다. 서글픈 현실을 딛고 유코는 어떤 미래로 나아갈 것인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겠구나. 여성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에서는 더더욱. 유코는 흔들리기도 하고 실수도 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소설은 유코 혼자 나아가게 두지 않는다. 좌충우돌이지만 유코 주변의 사람들은 유코의 결심을 지지하고 도움을 준다. 차별과 배제를 극복하는 청량한 용기를 유코의 이야기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를 사람에게서 치유받으면서 『40세, 미혼출산』은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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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밖의 모든 말들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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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4월 15일 이후 기분이 몹시 좋아졌다. 나의 기분의 형태란 중간이 없는 그야말로 극과 극의 상태를 오랫동안 자랑해 왔다. 좋고 싫음이 분명해서 금방 좋았다가 금방 싫었다가. 평정심이 뭐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정의 기복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을 존경한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까. 수요일에서 목요일로 넘어가는 그 시간 이후로 기분은 내내 좋음과 맑음과 환희의 감정을 유지하고 있다. 잠을 덜 잤는데도 피곤하지 않고(커피를 많이 마셔서 그런가) 소소하게 행복한 일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쉬는 날인 오늘은 일어나자마자 삼겹살을 구워 먹었다).

이렇게 된 건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꼬박꼬박 뉴스를 보지도 않았고 보더라도 연예면을 기웃거리는 정도였다. 정치와 사회에 관심이 1도 없었는데. 사람은 변화하기보다는 가보지 않은 길에 발을 들여놓고 개미지옥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로 살아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세상이 바뀔 것이란 기대는 없다. 내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닌데. 관심을 보인다고 해서 없던 게 있게 되고 보기 싫은 게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저 왜 아파해야 하고 눈물 흘리는 이에게 위로를 보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알게 되어서 다행한 일이다.

아무튼 그렇게 기분이 내내 좋은 상태로 김금희의 산문집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었다. 새벽 1시에 잠이 들었는데 기분이 날아갈 것 같은 요즘은 4시가 넘어서 자고 있다. 고요한 새벽의 공기를 흡입하며 책을 읽어 나갔다. 역시나 김금희의 산문은 김금희의 소설처럼 다정이 넘치고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긴 문장으로 숨을 참아가며 읽어야 해서, 좋았다. 당연하지. 소설과 산문을 쓰는 모든 주체는 김금희니까. 나는 김금희에게서만은 아무런 비판도 꼬여 있는 감정도 없는 상태로 당신이 쓰는 모든 글을 좋아해 주겠어라는 마음으로 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니까. 그런 마음가짐은 문학에서 멀어진 오랫동안 찾아볼 수 없는 태도였다.

올해 초 김금희는 이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에도 잠깐 나오지만 그는 문학을 앓는 내내 이상문학상을 염원했고 소원했다. 언젠가는 수상자 목록에 자신이 들어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언니가 사온 그 책들을 읽곤 했었다. 그런 상을 거부한다고 상에 따라오는 불공정한 계약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내었다. 아, 내가 소설가 하나는 잘 보는구나. 「조중균의 세계」를 읽고 단박에 좋아해서 나오는 책을 모조리 읽고 리뷰를 쓴 노력이 헛되지 않았구나. 나 스스로를 칭찬했다.

에스엔에스 활동을 거의 하지 않는 나로서는 그 일 이후에 소설가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계정이라도 파서 응원의 말을 해야 하나 했지만, 게으름이 이겼다. 그저 소란과 수군거림에서 멀어져 있기를 빌어보는 수밖에.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작가가 되어 십일 년 동안 쓴 산문을 모은 책이다. 산문은 약간의 허구가 곁들여 있긴 하지만 개인적이고 사소한 취향을 엿볼 수 있어 나는 선호한다. 대학생 때 방학의 풍경으로 글은 시작한다.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중간에 먹었던 김밥의 기억(김밥의 추억으로 쓰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배를 채운다는 목적밖에는 없는 그 식사의 풍경은 추억이 될 수 없고 감정이 섞이지 않는 단어인 기억으로 대체한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오래된 티셔츠를 입고 귤을 까먹는 방학의 나날. 급기야 벌레가 꼬인 귤을 변기에 그대로 버려 가족들이 경악했던 사건을 담담히 들려준다. 부당한 걸 부당하다고 말하기까지 오랜 망설임과 고민이 『사랑 밖의 모든 말들』에 담겨 있다. 영화를 보고 소설과 시를 읽고 지금의 여기와 다르지 않게 행동하는데도 여행을 떠난다. 김금희는 어떻게 소설가 김금희가 될 수 있었는지를 천천히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의 글을 통해 들려준다. 혼자 있으면 안 된다는 지인의 말을 듣고 머리도 감지 않고 약속 장소에 나가고 조카 준이의 덤덤한 위로를 받으며 힘에 버거운 시간을 통과한다.

돈 벌러 나가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인터넷 세상을 기웃거리다 보면 새벽이 된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는 새벽이면 나는 어떠한 글도 모조리 쓸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나도 강성은의 『 Lo-fi 』 좋아하는데 반가워하며. 제발트는 제발 읽어야지 했다가도 포기하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꼭 읽어야지 다짐도 해가며. 그렇게 새벽의 시간을 보내고 흥분된 기분을 꼭꼭 눌러가며 잠의 세계로 의무적으로 들어갔다. 책 뒤쪽에는 부록으로 '사랑 밖의 모든 색인'이 있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에 쓰인 단어를 빈도수로 추출해 가장 적게 쓰인 단어부터 진한 색 순으로 묶어 놓았다. 춤으로 시작해 사랑으로 끝나는 색인. 점점 옅어지는 글자를 보고 있다보면 요즘에 내가 사용하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춤과 사랑 사이. 사랑과 춤 사이에 적힌 김금희의 언어들과 비교해보면 나의 색인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소설과 시를 쓰지 않은지는 오래이고 그나마 쓴다는 글은 글보다는 곤란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한 답답한 말뿐이니까.

소설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의 '나쁨'에 대한 지겨운 고백을 듣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울어야 할 일과 절대 울고 싶지 않은 일, 되돌려주고 싶은 모욕과 부끄러움, 한순간 광포한 것으로 변해버리는 환멸과 후회들이 차창 밖처럼 연속된다. 나는 누구나 아주 나빠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고 믿고 나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한계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떤 소설은 어느 나쁘지 않은 오후에 누군가의 문상을 가듯 읽어 주었으면. 우리는 언젠가 이 세계에서 지워져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이들이 되겠지만 아직 우리는 내가 나빴습니까, 하고 더 물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그러므로 문상을 가는 우리의 얼굴이란 다 젖었다가도 마르고 어두워졌다가도 다시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김금희, 『사랑 밖의 모든 말들』中에서)

내가 왜 그토록 소설에 매달렸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인 건 아니고 안다, 확실히 아는 건 아니고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나는 내내 '나쁨' 상태에 있었다. 나의 안위와 기분과 소유에만 열이 올라 있었다. 이른바 우리와 연대, 사회, 책임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았다. 잘못된 일에는 눈을 돌렸고 회피함으로써 책무를 다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모두 간절했던 그 시간 2014년 4월 16일을 살았고 아픈 엄마와 병원에 있으면서 텔레비전에서 봤던 광화문 광장의 촛불을 잊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다.

소설에는 나의 잘못이 있었다. 나의 나약함과 비겁함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사랑이 아닌 말들 속에 살았던 나의 부끄러운 과거가 있었다. 이제 사랑 바깥의 말들로 살아가려 한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에 들어 있는 사랑이 아니면 쓸 수 없었던 한 사람의 과거 때문에라도. 나는 힘이 없어도 힘이 있는 척 욕을 할 수 있다면 나지막이 욕을 뱉으며 명확한 '나쁨'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아이들이 다시 학교로 가고 어울려서 씽씽이를 탈 수 있기를 바라며. 무엇을 바꾼다는 추상의 말보다 오늘의 나를 기분 좋게 만들 수 있는 아이스크림과 빵, 마스크를 사러 가자 같은 구체의 말을 주고받으며. 사랑과 춤 사이를 채워 넣을 수 있는 힘이 있는 말을 많이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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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헤어지는 하루
서유미 지음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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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할 때는 시간이 느리게 간다. 열심히 하는 척해 보는데 오 분이나 십 분 밖에 지나지 않았다. 대신 주말은 시간이 뭉텅이로 쓸려 나간다. 늦게 일어나서 밥 먹고 영화 한 편 보고 나면 바깥은 어둠. 대충 씻고 누워 핸드폰 좀 하다가 잠이 든다. 이틀 중 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버렸다. 요즘에는 꿈을 많이 꾸는데 대개 기억에 나진 않는다. 그래도 간밤에 꿈 하나는 기억에 남는다. 꿈에서 나는 열아홉이었다. 생각한다. 아직 열아홉 밖에는 안 되었구나. 깜짝 놀라 일어났다. 현실의 나는…….

서유미의 소설집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에는 하루하루가 힘겨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서른이 넘어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세 올려줄 걱정을 하는 자매. 성매매 알선을 하며 살아가는 청년. 모처럼 휴가를 맞이했지만 이상한 불안에 시달리는 부부. 설악산으로 결혼기념일 여행을 떠났다가 남편을 잃어버린 여자. 이혼 후 사우나를 전전하며 사는 남자. 아이를 키워 놓고 황혼 이혼을 해서 홀가분하게 노후를 시작하려는 중년 여성.

이십 대 초반부터 중년의 삶까지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는 아우른다. 책을 읽는 독자의 나이대는 다양할 것이다. 소설집에 들어 있는 어느 소설을 읽더라도 지금의 자신의 삶을 대입해서 읽으면 된다. 읽으며 내 삶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생각에 잠겨 보는 시간을 가져 볼 수 있다. 보증금 천만 원을 올려주든가. 월세 십만 원을 올려주든가. 이런 문제가 있고.

어렸을 때 잠깐 알았던 엄마의 애인이 과거의 나를 기억하며 남겨준 사진과 약간의 돈을 받아 구질구질한 삶을 청산할 것인가의 문제. 어렵게 낸 휴가 날을 맞이해서 외식을 할 것인가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것인가의 문제. 각각의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하루를 그린다. 누군가의 하루를 엿보면서 위안과 불안을 공유하면서 오늘을 버텨 나간다. 10주년 결혼 기념을 기념하는 여행지에서 남편은 말도 없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를 추측하는 하루는 고단한다.

딸아이가 아이를 낳는다는 소식을 듣고 치매에 걸린 엄마를 양로원으로 모시고 가는 하루는 착잡하다. 이런 하루들은 실제의 하루가 아닌 꿈속의 하루가 아닐까. 앞뒤가 맞지 않는 사건이 연속으로 일어나는 서유미의 소설 속 하루는 꿈의 일처럼 아득하다. 오히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는데도 소설 속 인물이 사는 하루는 꿈결 같다. 할인된 케이크를 사서 밤중에 집을 보러 다니는 하루. 택배가 사라지고 핸드폰 액정에 금이 가는 하루.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를 읽다 보면 나만이 불안을 느끼고 괜찮은 척했던 건 아니었구나 안도감이 밀려온다. 무의미한 하루를 사는 듯해도 의미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가득한 하루였다. 비록 그들의 하루가 기분 좋은 내일로 도달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더라도. 책을 덮고 펼쳐진 나의 하루를 살아내면 된다. 각자의 희망과 기쁨을 찾아서. 모두가 헤어지는 하루는 아무와도 헤어지지 않는 하루이다. 열아홉의 하루는 꿈속의 일이었지만 꿈 바깥의 나에게는 그보다 여유가 있는 하루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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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멀었다는 말 - 권여선 소설집
권여선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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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백지은도 그렇지만 나 역시 권여선의 소설집 『아직 멀었다는 말』에서 「손톱」이 제일 기억에 남았고 사무쳤다. 좋았고 슬펐고 암담했다. 여덟 편의 소설 중에서 네 편을 미리 읽었다. 「모르는 영역」과 「손톱」, 「희박한 마음」, 「전갱이의 맛」. 「손톱」을 다시 읽었을 때 처음 읽으며 느꼈던 마음이 다시 떠올랐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어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소희의 불투명한 내일에 대한 소설 바깥의 나의 마음. 소희는 분명 소설 안의 사람인데 왜 이렇게 감정 이입이 쉽게 될까.

그 아이, 소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손톱」에서 소희가 받는 월급 170만 원. 언니가 훔쳐 달아난 소희의 저금과 대출금. 매운 짬뽕을 포기하고 걸어가며 생각하는 돈의 무게. 권여선은 묘한 아픔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옛다 아픔을 선물하는 것이다. 촬영 나온 딸과 만나 하룻밤을 동행하는 아버지. 여자 혼자 살고 있다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지켜가는 사람. 초단기 계약을 하며 누구 눈치를 볼 것도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기간제 선생님.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하는 짓은 양아치, 그걸 부인하는 모자. 살아 있는 어머니의 죽음을 미리 걱정하는 남매. 쓸쓸한 노후를 예감하는 중년. 말을 잃어버린 뒤에야 자신의 언어를 찾고 싶었던 남자. 『아직 멀었다는 말』에서 만날 수 있는 인물 아니 사람의 모습에서 나는 힘을 얻는다. 그들이 겪는 일상의 시련과 고난 때문에 힘이 빠져야 하는데도 말이다.

권여선은 소설의 세계로 완벽하게 안착했다. 현실과 소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허황되고 과장된 이야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성을 확보한다. 대출금을 갚아야 하고 고가의 다이어트 약을 먹어야 하는 세계. 두 달 계약인데 계약 연장을 암시함으로써 불안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세계. 권여선은 소설에 일상의 슬픔을 은근히 깔아 놓고 시작한다.

권여선의 은근한 슬픔은 거대한 슬픔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소설 바깥의 나는 지치고 불안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무엇과 어떤 것으로 힘을 내야 하나. 이런 생각으로 골몰한 채 살아가고 있을 때 『아직 멀었다는 말』이 다가온다. 여덟 편의 슬픔. 여덟 편의 고독. 이런 이기적인 마음이 있다. 누군가의 힘듦을 보고 힘을 얻는 역설. 치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은 소설이다.

권여선은 세밀하고 꼼꼼한 소설적 눈으로 인간상을 그린다.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물들을 보며 아직 여기의 나는 괜찮다, 같잖은 희망을 얻어낸다. 소설을 읽는 이유는 이거면 된 거 아닐까. 여기가 바닥이 아니다, 나는 깊은 터널을 걸어가는 것일 뿐이다. 빠져나갈 수 있다는 위로를 스스로 얻어내는 것. 걱정이 많은 게 걱정인 요즘의 당신에게.

『아직 멀었다는 말』은 슬픔의 힘으로 걸어가라고 말한다. 그건 권여선의 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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