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
이사구 지음 / 황금가지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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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니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비슷한 말로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다 같은 말이 있겠다. 너에게 기회를 줄게. 그러니 한 번 변해봐. 개과천선의 실사판을 보여줘. 어디 보자 하지만 돌아오는 건 혹시나가 역시나 같은. 멀리 갈 것도 없이 내가 그렇다는 거다. 게으름뱅이에서 부지런한 나로 변신해 보겠어, 결심하고 또 결심. 작심삼일은 개뿔. 하루 정도 다르게 살아보고 안 되겠네 누워 있는 꼴이라니. 


인과 관계나 계기도 없이 사람이 변한다? 지랄맞은 성격 대신 온화한 표정으로 세상만사에 달관한 자세로 착해졌다? 드라마 《악귀》와 이사구의 연작 소설집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의 세계관에 입각하면 그이는 귀신이 들린 거다. 것도 지독한 악귀에 빙의 된 것이다.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하면 어른들은 말하지. 왜 저러지? 죽을 때가 된 건가?


맞다. 맞아. 죽은 귀신이 들러붙었는데 그게 살아 있는 건가. 죽은 자나 다름없다. 그러니 조심하자. 어제까지만 해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인간이 하루아침에 돌변해서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말을 걸어온다면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를 교본 삼아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 하나. 직장에서 사내연애가 빈번한 이유는 죄다 미친 인간인데 그중에 한 명이 나에게 정상적으로 대해준다? 그러면 바로 사빠 되는 거지.(사랑에 빠지는 거.)


그저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을 뿐인데. 몇 번을 물어봐도 화를 내지 않았을 뿐인데. 인류애가 충전된다.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는 직장인의 슬픔을 오컬트적인 요소로 풀어낸다. IT 기업의 디자이너 김하용이 주인공이다. 벽에서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미치기 일보 직전의 하용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유튜브에서 부적 쓰는 법을 검색한다. 디자이너의 재능을 부적 그리기에 낭비하는 하용에게 판타스틱 어드벤처 호러 무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직장 상사가 이상하다'로 시작하는 표제작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는 슬프고 웃기고 짠하고 기괴하다. 소설 한 편에 이토록 다채로운 인간의 감정을 욱여 놓다니.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네 그려. 첫 문장을 읽고 어찌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뻔한 문장인데. 이상하지 않은 직장 상사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하용의 직장 상사는 이상해졌다. 디자인팀 팀장인데 디자인을 못하는 한 팀장이 요즘 착해지고 순하게 행동한다. 


어렸을 때 읽은 전래동화에는 도깨비, 여인으로 둔갑한 구렁이, 억울하게 죽은 처녀 귀신들이 등장했다.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했다가 정체를 드러내는 귀신들. 주로 산이나 빈 집, 어두운 밤길에 등장해 인간을 놀래켰다. 바쁘다 바쁜 현대 사회에는 직장에 출몰한다. 귀신들이. 것도 진짜 인간의 모습을 하고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귀신인지 아닌지 모를 감쪽같은 모습으로 일도 하고 점심도 먹고 월급도 받아 간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그만큼 직장이란 곳이 힘들고 무서운 장소가 되었다. 귀신들과 일을 하고 있다니. 그러면 이해가 된다. 저 이의 미친 짓거리가. 귀신도 보통 귀신이 아닌 악귀가 들려서 저러니 퇴마 의식을 해야겠지.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에 등장하는 또 다른 주인공 무당언니에게 의뢰를 해야 한다. 웃긴 이야기 하나 할까. 귀신을 본다는 사람이 있다. 부엌 싱크대에서 자기를 보고 욕을 하고 자고 있으면 옆에 와서 또 욕을 한단다, 귀신이. 


어디까지 진지하게 받아줘야 할지. 대꾸는 해야겠고 참으로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이게 다 일을 해서 그래. 내가 때려치우고 개인 사업자든 뭐든 해야겠는데 흑흑. 잠깐 눈물 좀 닦고. 미친 소리를 들어도 진짜 미친 게 아닐까 의심되는 인간들과 지내야 하는 게 내가 배운 게 이것뿐이라. 『직장 상사 악령 퇴치부』를 쓰기까지 소설가 이사구의 직장 생활이 어떠했을지 안 봐도 소설. 하용과 명일(무당언니의 본명)의 악귀 퇴마기는 이사구의 직장 생활이 계속되는 한 시리즈물로 이어질 것 같은 속상하지만 기쁜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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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말할 용기 - 목숨 걸지도 때려치우지도 않고, 일과 나 사이에 바로 서기
황선우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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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워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는 게 중요하다. 좋아하고 아끼는 감정은 이제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대뜸 단박에 기습적으로 미움이 생겨버린다. 미워할 구실을 만들어 내지도 않는데 밉고 또 밉다. 미움은 대체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아무래도 이 미움은 일을 하기 때문에 발생된다는 과학적 추측이 가능하다. 일이 아니면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농담을 주고받으며 좋은 사람인 척 굴 수 있을 텐데. 


마음속 소리를 나도 모르게 내지 않는 게 중요하다. 속으로 온갖 욕과 조언과 충고를 가장한 잔소리를 하고 있어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앙 입을 다물고 귀여운 걸 떠올려야 한다. 열에 아홉은 참고 있다가도 진짜 나도 모르게 마음의 소리를 내뱉고 마는데 대나무숲이 절실해진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너 진짜 이딴 식으로 할 거냐. 가마니는 아니지만 가마니가 되고 싶기에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도 예전에 그딴 식으로 굴었다. 거울 치료 당하고 있는 거지 뭐. 


반성에 반성을 하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오늘 제일 잘한 일은 도시락으로 싸갈 김치볶음밥을 만든 거다. 몇 년째 책상에 앉아 점심으로 김치볶음밥을 먹고 있다. 고행 내지는 수행 같은 거라고 나 자신을 설득한다. 이렇게 몇 년만 수련을 하면 세상을 구할 비기를 터득할 수 있다는. 오늘 점심도 김볶을 먹었냐고 해서 넵 했더니 사장이 참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비아냥인지 감탄인지 모를 허나 1초만 생각해도 당연히 전자이겠지만) 하더다.  


진짜 정말 완전 회사에서 맛있는 밥을 먹고 싶지 않다. 맛있는 건 집에서 나 혼자 예능 보면서 먹고 싶다고. 무얼 먹으러 가자 거나 함께 먹자고(동어반복인가. 아무튼 나를 잊어주세요. 점심시간에는.) 권하지 마. 황선우의 에세이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는 일하면서 느껴야 했던 정체불명의 감정들에 이름을 달아준다. 일하다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거나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한숨을 쉬거나 부탁무새로서 넵과 넵넵과 앗넵과 네로 다양한 네의 변형으로 상황을 돌려 막는 바보 인간의 나를 안아준다. 


그나마 내가 쫓겨나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통해서 알았다. '구단의 목표를 구상할 때 강두기의 실력은 변수가 아닌 상수로 취급받는다. 그가 15승은 거둔다는 가정하에 다른 전략들이 논의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있으니 이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단단한 신뢰를 받으며 일한다는 것, 떠날 때 빈자리를 모두가 큰 상실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서는 더 이상 이불 찰 일만 안 만들기를 바란다.' 내가 실력이 있다는 건 아니고 나의 능력은 상수로서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꾸준하다는 능력. 어떨 땐 잘하고 어떨 땐 못하는 게 아닌 꾸준히 그럭저럭 다른 이가 하기 싫어하는 일을 군말 없이 하는 능력. 내가 그만둔다고 하면 청소일 같은 업무를 해낼 사람이 없어 상실로 다가오겠지. 청소부 한 명을 잃어버렸구나.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황선우는 '너무 크고 뾰족하고 울퉁불퉁한 사람들에게' 바친다. 그러니까 나에게 말이다. 자주 미움이 생겨나 가시 돋친 말을 생각하다가 결국엔 해버리고야 마는 한심한 두심한 나에게. 


열심히만 하고 잘하지 못하는 그래도 열심히 하는 걸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일못러에게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는 큰언니의 얼굴로 다가온다. 목숨 걸지 말고 때려치우지도 말자고. 제일 중요한 건 아프지 말아야 해. 몇 년째 김볶을 먹지도 않은 큰언니 황선우는 어떻게 세상이 아닌 나를 구할 비기를 알아냈을까. 나는 아직 한참 멀었다. 평생 김볶만을 먹어야 한다. 좋은 걸 떠올려본다. 떠, 올, 려, 본, 다. 생, 각, 이, 잘. 아, 월급! 무조건 사랑한다고 말해야겠네. 용기 따위 내지 않아도 사랑해, 월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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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 오늘을 만끽하는 이야기 (양장본) 오늘을 산다 2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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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산 전기담요를 3월이 된 지금도 소중히 여기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침과 저녁에는 꽤 쌀쌀한 탓에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고민도 되는 요즘입니다. 도톰한 노란색 겉옷을 입었습니다. 거울을 봤는데 이제 이 옷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라고 느꼈습니다. 낡은 옷이 아님에도 이제는 쿨하게 놓아주어야 할 때. 활동하기에 불편했다고 예전에 내가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입지 않았지요. 추억이 담긴 옷이라 옷장 안에 넣어두었다가 모처럼 꺼내 입었지만 종일 불편했습니다. 


미련 없이 헌 옷 수거함에 넣고 집으로 돌아온 저녁입니다.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열어 두고 나가 집이 추웠습니다. 머리를 말리는데 드라이기에서 타는 냄새가 났습니다. 겁쟁이 쫄보라 불이 날까 봐 얼른 코드를 뺐습니다. 10년 넘게 썼기에 이것도 놓아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역시 추억이 담긴 물건이라 쉽지 않겠지만 불이 나는 것보다는 낫기에 안녕, 안녕. 


오늘은  두 개의 물건과 작별하고 책 세 권과 만났습니다. 마이너스와 더하기의 조화가 딱 알맞은 날이네요. 이만하면 괜찮죠? 괜찮은 거 맞는 거겠죠. 기대도 절망도 없이 오늘을 살아가는 일상인의 하루라는 생각이 드는 거 맞죠? 마스다 미리의 만화 에세이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의 주인공 히토미의 하루를 잠깐 따라가볼까요? 


근무를 하고 저녁이 되었습니다. 14살 연하의 회사 후배와 밥을 먹고 가볍게 술 한 잔을 마시고 돌아가는 길입니다. 계속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라고 되뇌면서요. 말 안 해도 알겠죠? 한참이나 어린 직장 후배와 저녁 시간을 보냈습니다. 무슨 의미? 의미가 없을 수 없죠.  봄이 되었고 활짝 핀 벚꽃을 보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합니다. 너무나 솔직한 미용실 거울 앞에서 마흔 살이 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나이를 먹었다는 것과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 사이에서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히토미의 나날입니다. 제목이 참으로 박력 있네요.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라니. 대단한 걸 사지는 못하지만 가볍게 돈을 쓰고 싶은 날 서점에 들른 자신에게 사주면 어떨까요? 『행복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를 말이죠. 행복이라는 자리에 다른 단어를 넣어보면서요. 집은, 자상한 부모님은, 신형 노트북은, 책상세트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실없는 사람처럼 자신이 느껴질지라도 뭐 어떤가요. 글자 몇 개를 바꾸어 내 기분과 마음을 활기차게 만들 수 있다면요. 그렇죠. 가지고 싶은 게 많아 문제인 거죠. 디스커버리 트레이닝복 세트를 가죽 단화를 고민 좀 없이 살 수 있다면. 히토미는 일을 하다 눈을 돌려 석양을 바라봅니다. 사는 건 무엇인가. 잠시 고민하죠. 분주한 시간 사이에 끼어드는 낭만이라고 해두죠. 석양을 보고 아름답다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런 게 인생. 


추억이 담긴 노란색 겉옷과 드라이기야 안녕. 잘 가렴. 그동안 고마웠어. 너희가 있어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어. 자꾸 생각날 거야. 그리움과 기억은 잘 챙겨 두었어. 시간이 흘러도 난 잊지 않을 수 있어. 그 고맙고 행복했던 어제들을. 그걸 안고서 오늘을 살아갈 거야. 그토록 내일도 있으면 참 좋겠다. 쓸쓸한 말이지만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에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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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의 일생 - 오늘이 소중한 이야기 (양장본) 오늘을 산다 1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새의노래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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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멀스멀 올라오는 물욕을 잠재우기 위해 정리 동영상을 보는 주말이었다. 물론 물욕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심도 있게 고찰해 놓은 책도 사 놓았다. 이불 빨래와 청소를 한바탕하고 책을 읽어 나갔다. 왜 우리는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가. 비슷한 물건을 사고 또 사는 이유에 대해 연구와 논문, 사례로 설명해 놓았다. 나의 문제이겠지. 책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이런. 신간인데. 끝까지 읽어야 하는데.


과감하게 책을 덮고 마스다 미리의 신간 만화 『누구나의 일생』을 펼쳐 들었다. 아마 마스다 미리의 책 중에서 가장 두껍지 않을까 하는 정도의 두께였다. 기분 좋은 두꺼움이었다. 이런 두께라면 언제든 환영이다. 나 지금 지쳤거든.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들었고 넷플릭스에 올라온 신작 드라마 《닭강정》에 빠져들었다. (근래 들어 드라마 보다가 이렇게 웃은 적이 있던가. 내내 웃었다. 연극톤의 대사와 자칫 가벼운 유머 같은데 다시 생각하면 철학적인 사색이 담겨 있는 명언이 가득하다. 꼭 보시라.)


어제 청소했다고 오늘 안 하는 건 주말을 보내는 자의 도리가 아닌 듯하여 이틀 연속으로 대청소를 했다. 도대체 먼지와 머리카락은 어디에 있다가 나타나는지. 또 지쳐 누워서 묵직한 『누구나의 일생』을 읽었다. 세상에. 마스다 미리는 왜 나를 또 울리고야 마는지. "기대도 없이 절망도 없이, 오늘을 산다."라는 책의 문구는 오늘을 소중히 여기자는 마스다 미리 세계관의 일부이겠거니 했다. 이야기의 강력한 복선이었다.


그렇듯 일을 하고 돌아와 가족과 저녁을 먹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주인공의 일상이 심심한 그림체로 책에 가득했다. 도넛 가게에서 일을 하는 만화가 쓰유쿠사 나쓰코의 이야기는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척 연기하는 나의 마음을 때리고야 말았다. 지난주는 얼마나 고되었던가. 나의 문제. 그러니까 무턱대고 죄송하다고 말하고 상대가 거친 말로 몰아가도 죄송하다고 하는 나의 잘못이 아님에도 죄송하다고 말하는 죄송무새의 한 주였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게 흘러가는 건 아쉬운 듯해서 아침에 눈을 뜨면 피곤하다고 누워 있기보다(이때 부정적인 생각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온다.) 일어나서 영어 문장 공부를 하고 계간지를 조금씩 읽고 있다. 소중한 하루라고 여기기 위해서. 『누구나의 일생』의 나쓰코는 일을 하고 돌아와 아버지와 저녁을 먹고 자기 방으로 올라간다. 창가 쪽에 놓인 책상에는 그려야 할 원고가 놓여 있다. 피곤한 하루여도 나쓰코는 만화를 그리고 잔다. 


나쓰코가 그리는 만화에는 화과자 가게를 운영하는 하루코가 주인공이다. 나쓰코가 하루를 보내면서 느끼는 단상은 하루코의 세계로 옮겨간다. 코로나19로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 나쓰코이지만 하루코의 시간에는 마스크가 없다. 마스크를 쓰고 일하느라 동료의 얼굴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나쓰코는 그이와의 헤어짐에서 마스크를 벗은 자신의 얼굴을 보여준다. 


소중하고 아까운 하루. 라고 생각하면 그 어떤 수모도 모욕도 괜찮지 않을까. 『누구나의 일생』은 말해준다. 말이 쉽지 그런 상황에 처하면 소중하고 아까운 나의 하루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반박할 수 있겠지. 반박하는 건 나 자신이다. 그렇기에 너의 하루는 온전한 행복을 느껴야만 한다고 말해주는 따뜻한 주사 같은 책이 필요하다. 『누구나의 일생』이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나의 시간에.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 수 없지만 어떻게 죽을지는 안다. 슬프기도 기쁘기도 하다. 신간이 나오면 잠깐 망설였다가 주문할 수 있어서. 이제는 재미없다고 생각이 드는 책은 과감히 읽지 않을 수 있게 되어서. 기대와 절망을 숨겨 놓고 내일도 아닌 오늘에만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할 수 있게 해주어서. 『누구나의 일생』이 애틋하다. 울어도 괜찮아. 뭘해도 넌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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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러네이 엥겔른 지음, 김문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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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들여 화장을 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아침에 일어나서 씻고 화장을 하고 밥을 챙겨 먹고 필요 물품들을 챙겨서 출근을 한다는 것이니까. 나는 시도도 하지 못할 눈 위에 아이라인의 각도까지도 완벽하다. 그에 반해 나는 어떤가. 겨우 눈을 뜨고 씻고 스킨, 로션, 크림, 선크림까지가 얼굴 치장의 전부이다. 머리도 물기만 털어낼 뿐 제대로 말리지 않는다. 빗질도 하지 않는다. 


겉옷은 검은색 롱패딩과, 카키색 야상 점퍼를 돌려 입는다. 출근을 하면 나만의 유니폼 몇 년 전에 만 오천 원을 주고 산 바람막이를 몸에 장착한다. 검은색은 얼마나 관대한 색인가. 온갖 이물질이 묻어도 다정하게 품어준다. 괜찮아 모두 내게로 오라 하는 듯이. 아무도 내게 옷과 얼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지금, 행복한가. 누가 뭐라고 하지 않는 대신 내가 나를 검열하고 다그친다. 


사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체중계 위에 올라가는 일. 숫자를 보면서 우울해지고 화가 나지만 이 짓을 멈추지 못하고 있다. 체중계 중독에 걸린 것일까. 근 10년 넘게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데, 괜찮은 걸까. 냉정하게 말하면 몸무게 강박이다. 운동은 하지 않고 먹는 것만 약간 조절할 뿐이다. 밥을 많이 안 먹는 대신 간식은 엄청 때려 먹는데 다이어트 맞나 싶을 정도이다. 


다시 냉정하고 사실에 입각해 말하자면 나는 못생겼다. 키가 작고 팔다리는 짧고 허벅지는 굵고 배가 나왔다. 다이어트와 요요 사이에서 방황 중인 한심한 중생이다. 과체중에서 정상 몸무게로 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다시 뚱뚱이 시절로 돌아갈까 무섭다. 그때의 기억이 박혀 있어서인지 옷을 크게 입는다. 배와 허벅지를 가리기 위해. 남성복의 크고 넉넉한 사이즈가 좋다. 운동복을 사러 갔는데 크롭 티를 추천받아서 기겁하고 나왔다. 


러네이 엥겔른의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나처럼 외모 강박, 신체 혐오를 가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사례로 다룬다. 책 표지에 쓰인 '오늘 거울 속 내가 별로여서 약속을 취소했습니다.'라는 문장은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현시대의 여성의 일상을 대변한다. 늘 내가 별로이기 때문에 약속 자체를 잡지 않지만 가끔은 오늘 무얼 입고 갈까 고민은 한다. 어차피 검은색 유니폼으로 무장하겠지만. 


꾸밈 노동을 하지 않는 대신 몸을 작게 만들고 싶은 강박에 지치는 요즘이다. 예전에는 먹지 않아도 살이 빠졌지만 이제는 먹지 않는데도 몸무게가 늘고 있다. 왜 이럴까, 나는.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책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사례를 통해서 말이다. 그녀들은 어린 시절부터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었다. 


말라야 하고 예뻐야 한다. 특별한 자리가 있으면 남성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옷차림을 강요받는다. 완전 뚱뚱이는 아니었는데도 나는 누구에 비해 살이 쪘다는 소리를 계속 들었다. 딱 맞는 옷을 입지 못한 이유는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이리라.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말한다. 우리의 몸을 심미적인 것보다 기능적인 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손이 있어서 글을 쓸 수 있고 다리가 있어서 뛸 수 있다. 


거울 앞에서 시선을 돌려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거울 속 나 자신이 아닌 세상 속에서 살아갈 나의 건강한 몸을 응시해야 한다. 어떻게 생긴 게 문제가 아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동안 내가 가져온 생각을 단숨에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여전히 몸무게를 재고 우울해하면서 지낼 것이다. 그래도 알아냈다. 더 말라야 한다는 강박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지를. 울퉁불퉁한 허벅지를 꼬집는 대신 걸을 수 있게 해주어서 감사하다고 쓰다듬어 줄 것이다. 이제는. 


인상적인 부분. 


이런 문화 속에서 여성은 신체 자신감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메세지를 받는다. 네 몸을 사랑해! 하지만 너무 사랑해선 안 돼. 자신감을 가져! 하지만 겸손해야 해. 마음속으로 편안함을 느껴!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그걸 드러내서는 안 돼. 우리는 신체 자신감을 설파하면서도 자신의 외모를 좋아하는 여성을 거만하고 심지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이런 모순적인 기준 탓에 여성은 칭찬을 받아들이는 것을 어색하게 여긴다. 이는 외모 강박의 대책으로써 여성에게 아름답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이런 이중 잣대로 인해 여성은 외모에 대한 칭찬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다른 여성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자신의 외모를 비하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러네이 엥겔른,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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