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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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먹어서 취준생으로 살기 쉽지 않더라. 사람은 자기 힘든 것 밖에 보지 못하니까. 나는 그 시절이 힘들었는데 누군가의 눈에는 그래도 괜찮게 보였을 수도 있다. 그걸 의식하기에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게 함정.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는데. 나만 나를 미치도록 신경 써서 괴롭게 한다. 쓸데없는 걱정을 만들어서 고달프게 만든다. 직업이 있든 없든. 놀고먹든. 매일 누워서 책만 읽고 그러다 잠이 들든 말든.


나는 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 데 나를 아는 극소수의 몇몇 사람은 젊다고 여긴다. 놀랍다. 나이 많다고 면접 볼 기회조차 쉽게 얻지 못했다. 겨우 본 면접에서는 나이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운전면허증이 없다는 말에 그 나이 먹도록 뭐 했는지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을 빙자한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아, 애증의 운전면허증. 딸지 말지는 추후에 고민해 보는 걸로.


오늘 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또라는 부사를 쓴 까닭은 이상한 이야기를 자주 듣기 때문이다.) 사후 세계라는 것이 있단다. 국적을 불문하고 한 번 죽었다 다시 깨어난 이들의 증언이 유사하다는 것. 고로 죽으면 끝이 아니라 죽으면 어딘가로 가게 된다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말이지만 사후 세계가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일찍 죽은 소설가 박지리가 못다 쓴 소설을 쓰고 있으면 어떨까. 10년만 더 살고 싶다고 말하던 엄마도 그곳에서 아프지 않게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다.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는 독특한 소설이다. 희곡과 소설의 갈래가 섞여 있다. 소설의 첫 부분은 희곡의 무대장치를 설명하는 해설로 시작한다. 마흔여덟 번째 면접을 보러 가는 M. 취준생으로 살기 전에는 이런 말은 전부 과장인 줄 알았다. 이력서를 100통 넣었다. 몇십 번째 면접을 보러 간다. 이런 이야기들. 내가 겪어보니 알겠다. 그건 과장이 아닌 축소일 수도 있겠다는.


M이 보러 가는 면접장의 풍경은 서글프다. 취준생은 누구나 겪었을 모습. 면접을 보러 가서 한없이 기다리다 사장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면접을 봤는데 알고 보니 사장이 아니었다는. 괴담이 아닐까 의심 되는 에피소드. 그 후에 M은 출제자의 의도가 궁금하고 나아가 출제자의 인성까지 의심하게 만드는 질문을 받고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하고 합격한다. 그걸로 끝? 그러면 너무 재미없지. 이건 소설인데. M은 연수를 하기 위해 합숙소에 들어간다.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만나며 M은 변해간다.


전자책으로 읽어서인지 대화가 잘렸다. 어떻게든 종이책의 원문대로 보고 싶었는데 실패했다. 그래도 M이 착각한 부분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연수원에서 M은 평가표 하나를 본다. 13번에게 적힌 X를 보면서 자신이 13번이 아닐까 고민한다. 결국 M은 자신이 13번이라고 믿는다. 합격을 목표로 조장을 맡고 집 짓는 일에 공을 들인다. 아침밥까지 하면서. 사는 거. 참 어렵다. 취업이 되어도 문제인 게 업무 파악하고 인간관계 맺는 일이 만만치 않다.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은 박지리는 어떤 마음으로 『3차 면접에서 돌발 행동을 보인 MAN에 관하여』를 썼을까이다. 생전에 인터뷰했던 기사를 찾아보니 대학에서 공부한 행정학이 어려워 소설을 썼다고 한다. 취업 공부하기 전에는 문학이 가장 어려웠다. 능력은 안 되는데 글은 잘 쓰고 싶었다. 열등감이 먼저 생겼다. 책을 읽기 전 작가의 나이를 먼저 봤다. 어리다. 나보다. 이제 이렇게 되는구나. 먹고살려고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아, 문학의 언어는 얼마나 다정했던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쉽게 쓰자는 마음.


변해가는 M의 모습은 소설 속 인물이라기보다 현실 세계 모두의 모습이다. 망상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절망적으로 변해가는 나에게 단 한 명의 누구라도 위로와 용기의 말을 줄 수 있다면 망상의 지점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들어주는 누군가. 언젠가는 죽을 나. 살아있는 동안 책 많이 읽을 거다. 사후 세계에 가서 작가들과 신나게 떠들려고. 그곳에서 쓴 작품들도 읽어야지. 죽어서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그런 망상으로 버티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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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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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내가 처음 들었던 말은 커피를 사 오라는 것이었다. 그게 취업을 하기 위해 8개월이 넘는 시간을 학원 다니기, 시험공부와 불면의 결과라니. 믿어지지 않으니 일단 믿는 척과 납득한 척 굴었다. 나는 나에게만 혹독하지 남에게는 비굴할 정도로 구는 자아를 가지고 있으니까. 취향을 한껏 드러낸 커피 심부름은 놔두고 일을 배워야 했다. 잊지 않고 틈틈이 자신의 커피 취향을 알리는 사람들. 이 정도야. 술을 사 오라고 하지 않는 게 어디야,라고 생각했지만 후에 나는 술을 사 오라는 이야기를 듣고야 만다.


그리하여 요즘 내가 듣는 말은 문예창작학과, 줄여서 문창과. 처음에는 넘겨 들었다. 문예창작학과 나왔는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글을 써야지. 아무 말도 안 했다. 대답이 필요하지 않은 말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안내문을 만드는데 문창과 나왔으니 나보다 잘해야 하지 않아?라고 하기에 웃었다. 나는 어이가 없거나 황당할 때 웃는 버릇이 있는데 제발 고치고 싶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자리를 피했고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분노가 차올랐다.


이제는 안다. 악의가 없는 말이라는 것을. 누군가에게 나를 소개할 때 문창과 나왔다고 내가 있는데도 이야기하길래 그러려니 했다. 내가 글을 쓴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이니까. 특징 없는 나를 소개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는 것 같아서. 심지어 나를 뽑아준 사람은 내가 국문과를 졸업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정정해 주었다. 문창과입니다.


강화길의 소설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으며 환호했던 순간은 그런 순간이었다. 쉽게 쓰여서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온 나를 굳이 힘들게 하지 않고도 소설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 앞부분을 내가 이해했나 자꾸 더듬게 되면서 시간을 끌지 않을 수 있도록 배려한 듯한 문장으로 쓰였다는 것. 그걸 첫 페이지를 펼치면서 단박에 알았다. 민원 전화를 받느라 귀가 너덜너덜해지고 공부했던 부분과 실무가 달라서 당황하고 등 한 번 바로 펴지 못하느라 집에 돌아갈 때가 되어서야 허리를 펴는 시간을 보내고 온 나를 『대불호텔의 유령』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은 아직 한창이고 가을이 오면 찐따, 병신 같은 행동을 덜하게 될까. 의문하는데 저녁의 하늘은 계절을 넘겨주는 게 서운한 듯 파랗기만 하다. 『대불호텔의 유령』 속 화자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컴퓨터를 켜고 책상에 앉으면 들리는 목소리들 때문이었다. 화자는 상황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어린 시절 멋모르고 들어간 곳에서 맞닥뜨린 악의 때문이라고. 너는 아무것도 아니다. 너는 모든 걸 망치는 사람이다. 너는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다는 목소리들. 자신의 어머니와 친구인 보애 이모가 살아온 서사를 마주하면서 이야기는 풀려나간다.


여자가 여자를 무시하고 가볍게 여기고 결국에는 서글프게 만드는 서사는 소설 속에나 펼쳐지는 게 아니다. 『대불호텔의 유령』은 몇몇을 제외하고 여성들로 인물을 꾸린 소설이다. 그들의 역사는 사실 특별할 게 없다. 당신도 나도 아는 여성들의 이야기. 학교에 가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동경하고 결혼과 동시에 삶이 이상하게 꼬여가고 망쳐지는 걸 보기만 해야 했던 그 여자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정작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못한 채 타인의 이야기에 감응하며 살아가는 소설가 화자를 통해 강화길은 오늘의 내가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조건을 제시한다.


'결국 이야기를 쓴다는 건, 살아가는 일과 비슷한 것 같다. 매일매일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그냥 계속 살아가는 것. 삶은 그런 식으로 지속되는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그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그 마음이 결국은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해준 것이라 믿는다.'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中에서)


문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고 있는 2021년의 여름이다. 문창과라는 말을 하는 것도 조롱이지 않을까 단정하여 쓸데없는 상처를 받고서 돌아오기도 한 시간이었다. 이제 아니까. 그건 글을 쓴다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는 게 신기해서 괜히 말을 걸어보고 싶은 마음의 일부라는걸. 매일 사는 것은 매일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 대불호텔의 유령』은 알려주었다. 연락을 기다리고 있다. 전화를 걸어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무슨 내용의 시를 쓰고 있냐는. 전화가 오면 말해주고 싶다. 전화는 오지 않겠지만 나는 그런 상상 속 가정을 즐겨하니까.


『대불호텔의 유령』을 읽었어요. 글이 안 쓰여서 미치기 일보 직전인 다행히 미치지 않고 주변의 이야기를 수집하며 돌아다니며 비로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소설가의 이야기를요. 오래전에 산 노트의 비닐을 뜯어서 시를 썼고요. 이건 비밀인데 저는 제가 쓰는 글이 좋답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합니다. 아직 쓰이지 않을 이야기는 놔두고요. 간신히 쓰지만 간신히 살지 않는 제가 쓰는 글이잖아요. 소설 속 셜리 잭슨의 말처럼 이해하고 사랑받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없다는 걸 눈치챘기에 글을 읽고 씁니다. 우리, 삶을 살기로 해요. 아직은 죽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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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춘단 대학 탐방기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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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으면 어떻게 될까. 길을 걷다 그런 질문을 했다. 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죽는다는 걸 깨닫게 되는 것이라고도 말했다. 아, 나는 죽는구나. 이제 어쩌지. 막막하고 두려운 감정을 느끼는 것. 죽음의 순간을 자각하는 상상이 죽음이 무섭게 여겨진다고. 질문을 받은 이의 대답은 명쾌했다. 죽으면 끝.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거라는 단호한 대답.


그렇구나. 죽으면 끝. 두렵고 무서운 기분을 느낄 새도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은 별것 아닌 게 될 수도 있겠구나. 생일을 며칠 앞두고 길을 걸으며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설가 박지리를 나만 늦게 알게 된 걸까. 나름 한국문학 애호가라고 비밀리에 떠들고 다녔는데. 무지렁이였다. 나는. 부지런한 독자가 아니었다. 좁고 편향된 세계를 살아가는 독자였던 것이었던 것이다.


나만 그런 것 아닌 것 같다는 추측으로 박지리를 늦게 알게 된 걸 위로해 보지만 위로해보아도 소용없는 게 소설가 박지리는 세상에 없다. 일찍이도 세상을 떠났다. 소설가가 남긴 책의 목록을 보면서 그중에 한 권을 읽기 위해 책을 펼치면서도 생각하게 되는 의문. 왜 죽었나. 안다. 사람은 죽는다. 그건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아는 사실이다. 세상에 단 하나의 진실만 남게 된다면 사람은 죽는다는 것.


그래도 의문과 의심과 의구심은 남는다. 왜 죽었을까. 살아 있었다면 더 좋은 작품을 써냈을 텐데. 처음으로 읽은 『양춘단 대학 탐방기』를 읽는 내내 안타깝고 서글펐다. 소설을 읽어보면 안다. 일찍 세상을 떠난 소설가의 죽음이 이토록 마음이 아픈 이유를. 내가 뭐라고 평가를 하겠느냐만. 박지리의 문장은 대단하다. 공선옥 이후에 전라도 사투리를 능숙하게 써내는 작가는 박지리가 처음이다. 물론 내가 읽은 작품에 한해서. 더 잘 쓰는 작가도 있겠지만 내가 제일로 여기는 작가는 공선옥이다.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제일의 낙으로 여기는 김영일, 양춘단 부부. 평생 농사를 지으며 마을 사람들과 도란도란 살줄 알았다. 어느 날 덜컥 영일이 큰 병에 걸렸다. 치료를 받기 위해 서울로 상경을 한다. 살던 집은 마을 사람에게 잠시 내주고 영일, 춘단은 아들이 사는 곳으로 간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고 병원에서 알게 된 인연으로 춘단은 대학교에 미화원으로 일을 시작한다. 청소 일이지만 대학에 가는 것을 큰 자랑으로 춘단은 여긴다.


자신이 아는 모든 이에게 전화를 걸어 대학에 가게 됐노라고 어린 시절 학교에 가지 못한 설움을 한풀이하듯 자랑으로 풀어낸다. 『양춘단 대학 탐방기』는 시대를 앞서간 소설이다. 시대를 정확히 읽어내기 위한 노력이 담긴 소설이다. 청소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 시간 강사의 비애, 노동 운동의 현실이 소설 안에 총망라되어 있다. 석공의 딸로 태어난 양춘단의 시선을 통해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파고든다.


춘단은 대학에 청소하러 가게 된 것이 생애 가장 큰 행운으로 여긴다. 그곳에서 춘단은 자신이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뜬다. 시간 강사 한도진과의 우정은 춘단을 성숙하게 만든다. 참, 사는 거 별거 아닌데. 너무 어렵게 산다. 별거 아니라고 쓰는 건 진짜 별게 아닌 게 아니라 마음을 바꾸어 먹으면 어려운 일은 없다는 뜻이다. 조급해 하지 말고 욕심부리지만 않으면 오늘은 고마운 시간이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하다고 간지럽지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할 순 없었을까. 『양춘단 대학 탐방기』를 읽으며 든 생각이다. 이토록 아름답고 현실을 투명하게 반영하면서 문제의식조차 슬프게 표현할 수 있는 재능을 가졌으면서. 왜. 도대체. 왜. 춘단의 결의는 대단했다. 미화원들이 농성을 벌일 때 자신은 그저 시급이 깎여도 대학에 다닐 수 있다는 점에 만족하면서 혼자 청소를 했던 춘단이었다. 같이 점심을 나눠 먹던 한도진이 세상을 등지고 그가 남긴 공책에 적힌 일기를 화장실 벽에 쓰면서 춘단은 각성한다.


하나의 계기가 필요할 뿐이다. 한 인간이 가진 가치관과 세계관이 바뀌는 건. 나의 얄팍한 경험으로 볼 때 계기가 만들어지는 건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죽음을 목도하는 순간 나의 세계는 이동한다. 불온하고 위험한 세계 쪽으로. 박지리의 세계는 끝이 아니다. 죽으면 끝이라고 했지만 박지리의 세계는 끝나지 않았다. 그가 두고 간 절박하고 서늘한 세계는 남았다. 위험한 그곳을 알게 되어서 살아 있는 나는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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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소 몬스터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크로스로드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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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러니까 이런 식이다. 이사카 고타로의 신작 『시소 몬스터』를 주문해 놓고 책을 받아서 머리맡에 놓는다. 며칠 그래 놓고 바쁜 척 잊어버린 척하다가 책을 펼친다. 내가 왜 이걸 지금에서야 읽고 있는 거야. 좀 더 빨리 읽어야 했던 거잖아. 왜 그랬는지 안다. 아까우니까. 아까워서. 이제 나는 알거든.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좀처럼 현실로 건너올 수 없는 이사카 월드라는 게 존재하거든. 그러니 최대한 빅재미를 남겨 놓고 싶다는.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감춰 두고 심신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기어 들어가 꺼내서 방전된 나를 충전해야 할 때를 위해서 킵 해 놓은 거지. 『시소 몬스터』를 신나게 읽고 리뷰를 쓰기 위해 인터넷에 접속해 놓고 딴짓을 하고 있네, 이게 뭐 하는 거임? 십수 년 전 겨울에 신춘문예에 응모해 놓고 떨어진 거 알고도 산 한국일보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보내준다는 문학 기사 '무낙'을 구독하고. 그때는 신문 가판대를 돌아다녔는데. (언제 적 이야기하는 거지? 나이가 어느 정도 들었다는 이야기.)


이제는 클릭 한 번에 내 메일함에 문학 기사가 줄줄이 꽂힌다니. 메일 주소만 적었는데 이름도 알아내서 구독해 주셔서 고맙다고 보내네. 참으로 신기하고도 이상한 인터넷 세상.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만 있으면 생전 보지도 못하는 이에게 이름이 불린다. 번잡한 인간관계에 엮이고 싶진 않지만 문학 이야기를 하고 싶은 나에게 인터넷은 그럭저럭 유용하다.


싸움에 재능이 없다는 건 일찌감치 알아챘다. 어떤 사건인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뒤에 앉은 아이에게 수업 시간 내내 욕설이 담긴 이야기를 ASMR처럼 듣는데도 대꾸 한 마디 하지도 못한 그때부터. 싸움이 시작될 기미가 보인다. 피하거나 숨거나 인과 관계도 따지지 않은 채 사과하는 식으로. 살아왔다. 상대가 욕이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은 이상 무례한 행동을 해도 참는 식으로. 살아간다.


『시소 몬스터』는 대립과 갈등, 싸움에 대한 이야기다. 써놓고 보니 유의어를 나열해 놓은 식이네. 문장력 없는 티를 내고 있다. 이사카 고타로를 읽는 독자들은 공감할 거다. 왜 이런 식으로 리뷰를 쓰는지. 모를 수도 있으려나.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은 이 글을 쓰는 인간은 소심하고 결정을 못 내리고 남의 말에 끌려다니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라는 걸 간파하셨을 거다. 그러니 리뷰도 이따위로 쓰는 거고.


논리적이고 유용한 『시소 몬스터』의 해석을 기대하셨을 텐데. 어쩌나. 신간이 나올 때마다 놀라 자빠지는 작가가 둘인데 한 명은 스티븐 킹이고(정말 정말 대단하다. 먹고 자는 것 이외에는 소설만 쓰는 건가. 스티븐 킹은.) 다른 한 명은 이사카 고타로이다. 이사카 고타로에 꽂혀서 그가 쓴 책을 전부 읽고자 목록을 만들었다. 목록을 만들 정도로 쓴 양이 방대했다. 무서운 건 계속 써 나가고 있을 예정이라는 거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이상 두 작가의 작품을 읽을 수 있는 행운이 있다, 있다. 아싸.


일본의 거품 경제 시대를 배경으로 얼핏 보면 고부 갈등이 핵심으로 읽히는 첫 번째 이야기 「시소 몬스터」. 제약 회사의 영업직으로 일하는 나오토는 술자리에서 선배에게 일미 무역 갈등보다 첨예한 자신의 집에서 펼쳐지는 고부 갈등을 상담한다. 상성이 맞지 않아 충돌하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는 후반으로 가면서 놀라운 비밀이 드러난다.


지금으로부터 몇 십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미래를 다룬 「스핀 몬스터」는 정보란 믿을 수 있는가라는 명제를 파고든다. 뉴스라고 말해지는 것. 사건은 사건이 될 수 있는가. 인터넷으로 모이는 정보를 신뢰할 수 없는 이들에 의해 생겨난 신종 직업인 인간 비둘기 미토는 신칸센에 오른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운전을 할 수 없는 미토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달한다. 사소한 정보라도 인터넷에 퍼지면 악용이 될 수 있다는 걸 인지한다. 손수 쓴 편지를 사람 대 사람으로 전하는 미래가 배경이면서 과거지향적인 시대의 이야기, 「스핀 몬스터」.


신나고 재미있게 읽었다는 걸로 끝나면 좋겠다. 이상한 음모에 엮여서 고생하는 인물들의 서사를 따라가면서 현실에서는 절대로 벌어지지 않을 대 환장의 모험을 보면서 모든 것의 파괴로 끝나지 않은 결말을 마주하면서 다행이다고 안도하는 걸로 말이다. 하루 종일 숫자를 보면서 대체 어디서 틀렸을까. 설명해야 하는데 설명할 수 없는 막막함을 안고 돌아오는 관점만 다르게 보면 별것 아닌 일인데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할 수 없어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질 때 이사카 고타로. 나의 고민이 별것 아닌 건 아니었다고 말해주는 인물들의 대화를 곁에서 듣는 것으로 『시소 몬스터』는 멋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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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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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불편하진 않다. 달라진 건 없다. 좀이 쑤시지도 않는다. 울적하거나 우울해하지도 않는다. 여행 이야기다. 코로나19로 가장 어려워진 산업은 여행 업계이다. 공항이 닫히고 비행기는 발이 묶여 있다. 수시로 여행을 떠나던 그 많던 여행가들은 무얼 하며 지낼까. 자신이 도착한 도시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추억하고 있으려나. 아니면 얼른 이 사태가 끝나고 가게 될 여행지의 루트를 짜고 있을까.


여행을 글로 배웠다. 도서관에 가면 여행 서적 코너에 서성였다. 론리 플래닛도 뒤적이고 그걸 사기도 했다. 언젠가는 가겠지. 미래의 나는 떠날 준비를 하며 설레고 있을 거야. 상상했지만 상상은 현실이 되지 못했다. 귀찮고 귀찮았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들 부지런히 정보를 모으고 돈을 모으고 가방에 들어갈 짐을 꾸릴까. 대단해. 존경해 마지않는다.


가끔 보는 카카오톡의 누군가들의 프로필에는 그래도 여행지에 찍은 사진이 올라와 있다. 열명 남짓의 카톡 친구들. 이로써 빈약한 인간관계가 드러났습니다. 제주도를 많이 가던데. 제주도 역시 글로 배웠다. 신청만 하면 무료로 나눠준다는 말에 제주도 지도를 받아 놓고 책상에 펼쳐 놓고 어디를 가볼까 고민만 했다. 그 지도 어디 있는지 난 몰라.


오랜만에 쉬게 된 토요일에도 일어나서 책을 읽었더랬다. 주중에는 몇 페이지 펼쳐보지 못해 아쉬운 책을. 아침 6시에 일어나 읽었다. 정세랑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여행을 선호하진 않지만 다정한 친구들의 권유에 이끌려 떠난 뉴욕, 아헨, 오사카. 타이베이, 런던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체력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낸 탓에 여행을 즐기진 않았다고 한다. 소설에 전념하기 위해 정규직인 편집자 생활을 청산하고 여행을 떠난다.


정규직 직장을 그만둔다. 떠난다. 여행자의 신분으로 낯선 도시에서 잠시 산다. 이런 서사는 얼마나 황홀한가. 내 이야기는 못 되지만 남의 이야기는 흥미로운 법. 내 고통은 바로 보지 못하지만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라면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맥락과 비슷하려나. 요즘엔 논리가 바로 서지 않는다. 논리라는 게 있기나 있었나. 이대로 가다가는 코로나가 끝나기는커녕 코로나와 일상을 공유하게 된다는데. 코로나가 끝나면이라는 가정은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암담한 예상.


어른들 말 하나도 틀린 법이 없지. 젊었을 때 빨빨거리고 돌아다녀야 한다는 말. 100세 시대니까 나는 아직 청년을 살고 있다고 자위한다. 아직은 청년이니까 돌아다녀 볼까 했는데 코로나. 비겁한 변명입니다. 어차피 코로나가 없어도 집에서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았을 거면서. 한여름에도 이불을 덮고 자는 저입니다. 더워서 땀을 질질 흘리면서 깨고 일어날 준비를 하기 위해 또 누워 있지요.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다정한 사람들을 만난 기록이다. 부지런히 세운 계획으로 떠난 여행은 아니었지만 약간의 즉흥성으로 시작한 여행에서 정세랑은 시절 인연을 쌓아간다. 마지막에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별로라고 죄송하다고 하는데 전혀 그럴 일이 아닌 사진이 실린 책은 피곤한 하루를 보듬어 주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할 여행지에서의 흥분과 열기와 두근거림의 감정이 활자를 타고 넘어온다. 미라클 모닝이 유행이라는데 그게 아니라 아침에 일어나는 게 기적이라는 말에 빵 터지고야 말았다. 자꾸 그 유머가 생각나는 요즘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게 기적. 10년 넘게 야행성으로 살았는데 일찍 끝나야 밤 열시여서 새벽 한 시, 두 시에 자서 정오에 일어나는 삶이었다. 그걸 한 번에 바꾸려니 쪼까 힘들다.


30분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으려고 전날 계획했지만 늘 실패한 한 주였다. 다행히 토요일이 있어서 (왜 아침 6시에 눈 뜬 건데) 완독할 수 있었다. 한 달에 열 권 이상은 읽었는데. 7월에는 다섯 권 읽었네. 오늘은 8월 7일. 한 권 읽었다. 숫자에 집착하는 병을 고쳐야 하는데. 그래도 명색이 책 리뷰니까, 감동받은 구절을 옮겨본다.


뮤지컬을 보고 나서 더더욱 자주 로알드 달의 말을 떠올린다.

"친절함이야말로 인류의 가장 큰 특징이 아닐까 한다. 용기나 대담함이나 너그러움이나 다른 무엇보다도 친절함이 말이다. 당신이 친절한 사람이라면, 그걸로 됐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의 말을 어설프게 번역해보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야, 세상의 보고 싶지 않았던 면들을 보고 나서야 이 말이 의미 있게 와닿았다. 아동문학을 쓰고 싶었는데 다른 방향으로 와버렸지만, 세계에 대한 태도를 다시 다잡고 싶을 때는 역시 아동문학을 찾게 된다.

(정세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中에서)


소설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떠났던 여행지에서 정세랑은 친절함이라는 가장 따뜻한 감정을 온몸으로 받고 돌아온다. 간혹 이상한 인간들도 만났지만 뜻밖의 인연과 맺은 기억은 정세랑이 아닌 소설가 정세랑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좋았던 것들'의 목록을 적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는 것. 이건 부당한데라는 생각을 그 순간에 하고 발끈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명제에 붙들리고 싶지 않다는 것.


두서없는 사고 끝에 난 잘할 수 있을 거야, 이미 좋은 사람을 만났고 좋은 사람을 만날 예정이므로 괜찮을 수 있을 거야 스스로에게 용기를 준다. 이해는 하는 것이 아닌 되는 것. 이해한다는 가짜고 이해된다가 진짜 같다고 나이가 드니까 이해라는 개념을 무식하게 정의해 버리게 된다. 이해되지 않는 건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넘어가자고 슬퍼하는 나를 달랜다. 간혹 우리 사는 이곳에 외계인이 아닐까 고민하게 만드는 종족을 만나곤 하는데 그땐 사랑스러운 인류애로 가득한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었다는 기억을 떠올리는 것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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