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터
유즈키 아사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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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결혼 관련 사기 사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란 왜 저런 바보 같은 일을 하지라는 것이었다. 피해자들의 절박한 호소를 보면서도 마음이 섣불리 동요되지 않았던 건 나라면 절대 저러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 한 스푼까지 곁들여서. 건방진 생각이란 걸 안다. 사람은 자신에게 잘해주고 마음을 열어주면 그 순간 당사자가 아주 힘들거나 외로운 상황에 처해 있으면 더 마음이 훅 간다는 것도 안다. 그러지 않더라도 조건을 따져서 상대를 만나는 사람이라면 어느 날 백마 탄 왕자나 마차 끌고 온 공주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뭔들 내주지 못하겠냐만.


정말 사랑했다고 그럴 줄 몰랐다고. 나 이외에 만나는 사람만 여럿이라는 걸 안 순간 죽을 것 같았다는 절규. 가만있어 봐. 그럴 일도 없겠지만 만약을 가정한다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뻥, 거짓말, 구라, 사기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 것 같은데.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휴일이면 집에서 청소, 빨래, 책 읽기, 리뷰 쓰기, 꽂히는 노래 무한 반복해서 듣기, 드라마 보기(최근에 빠진 드라는 《유미의 세포들》, 세포들이 "유미, 유미" 응원봉을 들고 연호하는데 그게 나를 응원하는 것 같아서 이상한 감동에 휩싸였다.)가 전부라 사람을 만날 기회가 없으니. 결혼을 빌미로 사기를 치려는 상대를 만날 상황 자체가 없다.


인터넷이 있다고? 우리에겐 온라인이 있지 않냐고? 카톡, 블로그 외에는 SNS 활동도 안 하는지라. 뭐, 사람 일은 모른다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그동안 읽은 책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접한지라 대충 보면 짐작 가능합니다요. 이 인간이 어떤 종족인지. 유즈키 아사코의 신간 『버터』는 그런 의미에서 책으로 세상만사 배우기를 즐겨 하는 나에게 딱인 책이다. 600쪽의 단단하고 무거운 이 책은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 '수도권 연속 의문사 사건'을 다룬다.


이른바 '꽃뱀'이 등장하는 사건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다. 결혼을 조건으로 상대 남성에게 접근해 돈을 갈취한 여성의 용모가 '꽃뱀'의 이미지와 달랐다. 여러 남성을 현혹 시킬만한 외모가 아니었다. 평범한 얼굴에 몸무게는 100kg이 넘었다. 여성은 결혼을 원하는 남성에게 접근하고 나중에는 자살로 꾸며 살해했다. 피해자들의 증언에는 여성이 요리를 잘하고 말씨에는 기품이 넘쳤다고 했다. 사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다. 유즈키 아사코는 실화 모티브를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가지이 미나코는 항소심을 기다리고 있다. 주간지 기자 리카는 세 명의 남성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가지이에게 흥미를 느낀다. 대체 어떤 여성이기에 남성을 유혹해 돈을 얻고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것일까. 취재를 시작하면서 리카는 가지이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한다. 세간에서 말하는 뚱보와 악녀 이미지로만 소비될 인물이 아님을 직감한 리카는 적극적으로 가지이를 인터뷰하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구치소에서 대면한 가지이는 리카에게 에쉬레 버터를 이용한 간장밥을 먹을 것을 권한다. 그 후 리카는 가지이가 말한 요리를 대신 먹기 시작한다.


유즈키 아사코의 『버터』는 단순히 실화를 바탕으로 사건을 재구성한 소설이 아니다. 소설에는 일본 사회가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을 비꼬고 해체한다. 예쁜 용모의 여성이 아니었다. 남성들이 한눈에 반할만한 미모가 아니었음에도 대체 왜 가지이의 유혹에 넘어갔던 것일까. 리카는 가지이와 대화를 통해 점점 변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전까지 리카는 마른 몸을 가졌다. 주간지 기자라는 남에게 보이는 용모를 일정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리카였다.


편의점 음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운다. 취재원이나 기사 소스를 주는 '손님'에게 여성성을 어필하지 않기 노력한다. 자신이 정한 틀에 자신을 엄격하게 가둔다. 그런 리카가 가지이를 만나면서 변한다. 제대로 된 밥을 먹기 위해 요리를 하고 결혼과 인생에 관한 신념을 다시 생각한다. 요즘은 모르는 사람에게도 질문을 받는다. 결혼은 했느냐고. 안 했다고 하면 그럴 줄 알았다고. 어려 보인다고. 그런데 실제로 전 어리지 않습니다, 말하고 싶지만 굳이 그런 말은 안 하고 상황을 모면한다.


관심도 없으면서 관심 있는 척 개인적인 질문 오지게 한다. 유머 센스와 상황 대처 능력이 부족한 나는 얼버무리거나 답을 회피한다. 서른세 살의 리카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을 새롭게 직시한다. 결혼과 출산을 위해 일을 그만둔 절친 레이코, 아이를 양육하기 위해 부서를 옮긴 선배 미즈시마. 리카는 그녀들의 선택이 최선이 아니었음을 최선이라고 믿고 있음을 알아챈다. 여성은 남성을 위해 존재한다. 여성은 남성의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 가지이는 사회가 요구하고 자신이 받아들인 신념을 이용해 유약한 남성을 골라 욕망을 충족했던 것이다.


다양한 요리를 소개하는데도 먹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던 건 문제일까. 요리에는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야 함을 일찌감치 알고 있어 시도 자체를 안 한다. 대충 사는 것 같은데 이게 나의 최선이다. 『버터』에서 내가 감동받은 부분은 리카가 요리에 도전하는 것이 아닌 일, 결혼, 출산, 사랑, 삶에 대한 시각이 풍부하게 바뀌는 부분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선택하길 기다리지 않는다. 타인에게 보일 완벽한 자신을 세팅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이 요구하는 것 같은데 실은 자신이 부여한 기준에 도달하지 않아도 된다. 『버터』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다.


솔직하게 살자.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격려해 주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 않은 건 부적응이 아닌 네가 원하는 일이라는 걸 받아들이면서. 결혼 사기 사건에 휘말리지 않으리라 장담하는 건 일상, 음악, 문학, 문구점 구경, 귀여운 캐릭터 굿즈 모으기, 신간 사서 모으기, 예전에 읽은 책 다시 꺼내기, 대화가 통하는 친구 1인과 걷기 외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방에 앉아서 하늘 바라보기 추가.(오늘은 날이 흐리네요.)


새로운 곳에서 일하면서 안 그래도 없던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지하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버터』를 읽으니 그렇게까지 나를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다. 지하로 떨어진 자존감을 끌어올린다. 너는 틀리지 않았고 다른 것이다.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다. 앞으로의 일을 고민하기 보다 지금 무얼 먹고 싶은지 의문하는 것으로 너의 오늘을 응원해 주길 바란다. 내가 위로받는 건 현실을 직조한 허구의 세계이지만 그게 나를 살게 한다. (나를 포함한 둘 이상과 대화하는 건 어렵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 건가요? 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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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체 (반양장) -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 수상작 사계절 1318 문고 64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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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문장을 읽고는 바로 책을 덮어 버리는 경우가 더러 있다. 웬만하면 읽으려고 마음먹은 책은 끝까지 다 읽기에 재미가 없다 싶어도 그대로 읽는다. 책을 덮는 경우는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다. 와. 미쳤다. 흥미진진을 넘어서 숨 쉴 수 없을 정도로 재미있겠는데. 심장아, 나대지 마. 이러면서 덮는다. 저 혼자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아껴 뒀다가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에. 흥분을 가라앉히고 다시 책장을 연다.


박지리의 데뷔작 『합★체』가 그랬다. 그때도(중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읽었다. 어쩌다가, 진짜. 우연히. 인생은 알 수 없는 거니까.)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내 인생 소설 1순위에 올라와 있다. 다른 어떤 소설에게도 1위 자리를 내어준 적 없다. 살아 있기 전까지 매해 한 권의 소설을 꾸준히 낸 소설가 박지리. 그의 첫 장편 소설 『합★체』의 시작은 이렇다.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 ※ 사람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옳게 보고 있었다. 난쟁이라는 것 외에, 사람들은 아버지에 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박지리, 『합★체』中에서)


당구장 표시까지 있는 부분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인용 부분이다. 감히 내 최애 작가의 소설을 인용해? 이런 마음이 아니라. 나와 똑같은 부류의(난쏘공을 읽고 난쏘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급기야 문학을 하고 자신의 문학에 난쏘공을 침투 시키는.) 사람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책을 덮었다. 시간이 흐르고 마음이 진정되면 읽으려고. 격한 감동을 뒤로하고 책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로 시작하는 문단을 읽으면서 고이 모셔둔 난쏘공을 다시 꺼내야지 생각하면서.


오합. 오체. 『합★체』의 주인공 두 명의 이름이다. 고등학교 1학년인 두 쌍둥이의 아버지는 난쟁이였다. 난쟁이 아버지와 결혼한 어머니는 후회하거나 자신의 선택에 미련을 두지 않는다. 백설 공주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말해주는 어머니이다. 일곱 난쟁이의 보호를 받으며 자신의 안위를 지켰으면서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생판 남인 왕자와 결혼한 백설 공주의 선택이. 일곱 난쟁이와 살면서 그중에 한 명과는 호감을 키웠을 것인데. 어찌 그런 선택을 했을지 의문하는 어머니.


기발하고 독특한 사고관을 가진 어머니는 난쟁이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두 아들을 낳았다. 의사에게 가보았지만 키는 유전적인 요인이 크게 작용하는 거라는 답을 듣는 게 다였다. 남들 평균 이상으로 키가 자랄 거라는 희망이 사라진 합과 체였다. 합은 공부를 잘했고 체는 그냥 뭐. 체는 공부에 뜻은 없고 오로지 키 생각만 했다. 좋아하는 여학생 윤아에게 잘 보이고 싶은 생각도 함께. 가장 싫은 건 4월에 하는 신체검사였다. 윤아를 비롯한 반 아이들 앞에서 자신의 키가 까발려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북쪽 약수터에서 계룡산 도사를 만나면서 체의 모험 가득한 여름이 시작된다. 뱀에 물린 노인을 구해 주었고 그가 체의 고민을 듣고 비기를 알려주겠다고 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 같았으면 사기꾼, 사이비라고 여겼을 텐데 우리 체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머릿속에 온통 키 생각뿐인 체는 계도사의 말을 듣자마자 엄마 몰래 형 합과 떠날 준비를 한다. 키가 클 수 있다면 체는 뭐든지 했을 거다. 계도사의 말은 자신이 수양한 계룡산에 가서 33일 동안 수련을 하라는 것이었다.


키가 크기 위한 특별 전지훈련을 떠난 오합과 오체의 앞날에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합★체』는 특별한 소설이다. 대범하게 난쏘공의 명문장을 인용했고 아직도 이런 이야기가 쓰이고 유효할 수 있단 말이야 감탄하게 만든다. 남들이 산다는 살고 있다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했다. 그래서 늘 주눅 들어 있었고 눈치 보고 싫어도 싫다는 말 대신 좋다고 말하며 살았다, 산다. 자존감에 대해 오래 생각하는 요즘이다.


일상을 사는 나는 자주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다.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남의 시선을 신경 쓴다. 타인이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싫다는 감정을 숨긴다. 대놓고 싫고 나쁘고를 표현하다 보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 되어 있을 것 같다. 나빠지지 않기 위해서 책을 읽는다. 나쁜 마음을 책으로써 엷게 만든다. 나의 나쁨을 책은 괜찮다고 해준다. 『합★체』가 그러했다.


합과 체가 약점을 돌파해 가는 이야기를 통해 나의 약점 또한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조짐이 보였다. 혼자는 힘들지만 둘은 된다. 키가 작은 그들이 합체를 하면서 아버지가 쏘아 올린 공을 되받아 골대에 넣었듯이 상처를 가진 자들끼리 연대하면 된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은 땅에 떨어졌다. 공의 속성상 다시 튀어 오른다. 튀어 오르는 공을 재빨리 잡아채서 원하는 그곳을 향해 쏜다. 인생의 승리는 매 순간 이루어질 수 있음을 『합★체』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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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여름 2021 소설 보다
서이제.이서수.한정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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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뭐 다들 그렇겠지만 나이 먹어서 백수로 살려니 고충이 있었다. 국비로 컴퓨터 학원에 다녔는데 몇몇을 빼고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친구들도 있었다. 그 속에서 최대한 나라는 존재를 숨기고 있었다. 숨기려고 했지만 숨겨지지 않았던 건 이해력 부족으로 기본적인 내용을 질문하고 그걸 또 이해 못 해서 다시 질문하고 그러다가 나이까지 공개적으로 밝히고야 말았다. 물어보는데 말 안 할 수가 있나.


뭐가 될지 모르겠다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중학교 때도 안 해본 진로 고민을 하고 있으려니 온몸이 아팠다. 자기 전 파스를 붙이고 잤다. 공부도 체력이 필요한 일이다. 뭐든 안 그렇겠냐만. 자격증 공부하면서도 텔레비전은 봤다. 드라마에 아주 푹 빠져서 밤을 새우곤 했다. 식상한 전개가 빈번하게 연출됐지만 현실의 나보다 참신했다. 백수 됐다고 슬퍼하는 꼬락서니라니.


그래도 책 사는 건 게을리하지 않았다. 『소설 보다 : 봄 2021』을 사고 『소설 보다 : 여름 202』1을 사고. 의무적으로 사는 책이 있는데 '소설 보다' 시리즈가 그렇다. 나의 편협한 문학적 취향을 어찌 알고 서점사에서는 신간이 나왔다는 알림을 보내온다. 좋아하는 바닐라 라테 커피 한 잔 값에 못 미치는 가격으로 책을 살 수 있다니. 감탄하면서 '소설 보다' 시리즈를 산다.


봄을 건너 뛰고 여름을 읽었다. 뭔가 문학적인데. 친구라도 많으면 추천하거나 사서 주고 싶을 정도로 이번 『소설 보다 : 여름 2021』은 최고다. 대개 한 편 정도는 나의 취향과 맞지 않는데 이번에 실린 세 편의 소설 모두 근사하고 멋졌다.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해주고 현재의 나를 격려하고 미래에 있을지도 모를 나를 응원해 주는 소설들이다.


서이제의 「#바보상자스타」는 솔직히 읽지 않고 건너뛰려고 했다. 난해한 소설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니었다. 읽다 보니 바보 같았던 어제의 우리를 농담을 섞어가며 위로한다. 좋아하는 여자애와 친해지고 싶은 사업에 실패한 청년의 넋두리는 소행성이 충돌하기 전까지 지구에서 살아남고 싶게 만들 정도로 유쾌하다. 기후 변화 이야기를 꺼내지 않더라도 인류의 미래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당신과 나 우리 모두 알고 있기에 그때까지는 살아 있어야 한다. 언제까지? 소설이 쓰이는 그날까지.


제발 올해가 가기 전 읽어보라고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이서수의 「미조의 시대」를. 백수 됐다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실의에 빠져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지 않길 잘했다. 문학이 무슨 소용이냐. 이러면서 때려치우자. 있는 돈 없는 돈 끌어모아 공무원 준비해볼까 하다가 포기하길 잘했다. 그랬으면 「미조의 시대」를 읽지 못했겠지. 손목에 파스를 붙여가며 책에 밑줄을 긋고 깜지를 쓰면서 성격 파탄자가 되어 있었겠지.


회사 사정으로 권고사직을 여러 번 당한 주인공 미조가 헬조선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을 웃프게 그려내는 소설. 이서수는 굉장한 작가가 될 것 같다. 발랄한 김금희 같으면서 상큼한 이문구, 김종광 같다. 이야기를 써 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잠이 오는데도 끝까지 읽게 만든다. 미조와 엄마와 수영 언니의 하루가 희망적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 때문에. 좋은 소설은 읽고 있으면 글을 쓰게 싶게 만드는 소설이다. 이거 내 이야기잖아. 나도 쓸 수 있다. 써 보자. 알 수 없는 자신감이 솟아오르고 용기까지 내게 만드는 소설.


「미조의 시대」가 그렇다. 우린 전부 「미조의 시대」에 살고 있다. 꿈이 있어서 나에게 미안한 시대. 꿈조차 허락하지 않을 것 같아 가슴속에 고이 접어 둔 시대를 버텨내고 있다. 미조의 엄마가 쓰는 시가 근사했다. 대체 어떤 하루를 살아가고 있길래 시의 표현이 그러했을까. 짐작이 가면서 마음이 아프다. 한정현의 「쿄코와 쿄지」는 놀라울 정도로 광주 5·18 민주화 항쟁을 지금의 시간과 긴밀하게 연결해낸다. 앞으로도 5·18 이야기가 많이 쓰였으면 좋겠다는 한정현의 인터뷰를 잊지 않아야겠다.


여성으로 살아가는 혹독한 시간을 한정현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들려준다. 차라리 거짓말이었으면 좋았을 그 시절에 살아간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이름을 바꿔가며 자신의 삶에 징검다리를 놓아가는 여성들의 연대가 계속 이어졌으면 한다. 누구의 도움 없이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그리하여 너의 삶은 너의 것이라는 전언을 「쿄코와 쿄지」는 남긴다.


주어진 삶이 고통이기보다는 가끔의 기쁨일 수도 있겠다는 위안을 『소설 보다 : 여름 2021』을 통해 얻었다. 가을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머물렀던 봄을 꺼내야겠다. 노란 빛깔의 봄은 책장에 꽂혀 있다. 묵묵히 나를 기다리고 있다, 봄은. 여름에는 힘들었고 가을에도 힘들 예정이지만 지나간 봄이 어떠했는지 기억하고 싶다. 그때도 어렵고 막막했겠지만 봄의 소설을 읽으면 기이한 희망이 부풀어 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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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반양장) - 개정판 시공주니어 문고 3단계 34
로알드 달 지음, 퀸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 시공주니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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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인이 군대에 가기 전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었다. 우리는 소란하고 북적스러운 극장 안에서 그 영화를 보았다. 나로서는 당황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그 시간에(한낮이었다. 그래 한낮이니까 그렇겠지.) 어디에서 아이들이 나타난 것일까. 아마도 유치원 단체 관람이지 않을까 싶다. 선생님과 부모들이 함께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과자와 음료수를 든 아이들이 일렬로 앉아 있었고 우리는 뒷자리에 구겨져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로알드 달과 조니 뎁을 알았다. 이후 애인이 없는 시간에 로알드 달을 읽고 조니 뎁의 출연 영화들을 하나씩 보았다. 그래도 시간이 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대체로 폭소했고 나 역시 어떤 장면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윌리 웡카가 만들어낸 큼직한 초콜릿을 먹고 싶었다. 그 안에 황금 티켓이 있으면 더 좋고. 시간이 흘러도 보면 볼수록 좋은 영화가 있는데 그중에 《찰리와 초콜릿 공장》도 포함된다. 화려한 색감과 흥미진진한 이야기. 교훈적인 결말이라서 세속의 때에 찌든 나의 영혼을 목욕 시켜 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마틸다』를 아직 안 읽었다니. 도대체 왜. 로알드 달의 대표작인데. 가끔 이렇다. 중요한 걸 놓치고서 중요한 일을 했다는 착각을 이어간다. 『마틸다』를 읽지 않고서 로알드 달을 읽었다고 잘난 척을 해댔다. 한국어판 『마틸다』 뒤표지에는 '독서 레벨 3 권장 연령 초등학교 5학년 이상'으로 쓰여 있다. 요즘 5학년은 생각의 깊이가 넓으니 『마틸다』를 충분히 읽을 수 있으리라. 2021년에 읽어도 문제작인 이 소설을.


설명해 무엇하랴. 마틸다는 태어날 때부터 비범했다. 스스로 글을 깨치고 수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는 아이였다. 다만 부모만이 몰랐을 뿐이다. 사기로 중고차 사업을 하는 아버지. 종일 빙고 게임에 빠져 있는 어머니. 평범한 소년인 오빠 마이클. 마틸다는 아버지에게 책을 사달라고 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텔레비전이나 보라는 것이었다. 세 살이 된 마틸다는 집에 요리책밖에 없다는 걸 안타까워한다. 스스로 걸어가 공공 도서관에 간다. 그곳에서 펠프스 여사를 만나고 마틸다의 체계적인 독서가 시작된다.


얼마나 다행인지. 소설이지만 마틸다가 책을 읽지 못하는 이야기로 계속 가면 나 책 안 읽을 뻔했어. 다섯 살이 된 마틸다는 학교에 들어가고 그곳에서 엄청난 모험을 한다. 첫눈에 마틸다가 천재임을 알아본 하니 선생님과 함께 말이다. 초등학교 5학년 이상용이지만 『마틸다』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라도 읽어야 할 소설이다. 천재 이야기꾼 로알드 달은 아동용이라고 해서 평범한 이야기를 써내지 않았다. 여성의 교육, 가혹한 학교 수업과 체벌, 방임을 일삼는 부모.


시공간을 초월해 읽는 『마틸다』에는 지금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문제를 날카롭게 풍자한다. 하니 선생님의 놀라운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삶을 사랑하는 방식을 배우고 싶다. 문제가 있지만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한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전부를 바꿀 수 없다면 일부를 바꾸며 살아가는 것이 근사할 수 있다는 걸 알려준다. 천재 소년 마틸다와 세상을 다정하게 이해하려는 하니 선생님의 우정은 경이롭다. 요즘 뜨고 있는 대안 가족의 형태도 로알드 달은 무리 없이 그려낸다.


안다. 책을 읽는다고 해서 세상을 힘들지 않고 살아가는 게 어렵다는 것을. 내가 그 경우다. 삶을 책으로 배웠어요의 표본이다, 내가. 빈 방에서 드러누워서 책만을 읽던 내가 뒤늦게 사람을 많이 만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다양한 성격과 행동의 사람들. 서툴러서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책을 읽었는데. 역시 이론은 실전과 다르다. 마틸다처럼 비범한 능력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다만 나는 하지 못하는 그 일들을 해내는 마틸다를 보며 용기를 얻는다.


어린이는 어른이가 되었다. 나이를 먹고 몸집이 커졌을 뿐 세상을 대하는 건 여전히 힘들다. 어린이 적 읽은 환상과 모험이 가득한 세계가 펼쳐지는 책을 읽은 어른이는 좀 다를 수 있다. 유해보다는 무해의 방식으로 자신을 다독일 수 있다. 극적으로 상황을 타개할 순 없지만 죽지 않고 버티면 나아질 수 있음을 안다. 소설의 방식 대로. 이상 월요일이 두려운 일요일의 어른이가 쓴 마틸다 독후감이었습니다. 다들 마틸다 읽으셨죠. 또 나만 안 읽고 뒷북 날리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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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진
이동은.정이용 지음 / 창비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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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아는 부모 없이 혼자 일을 하며 동생 학비를 번다. 낮에는 청소. 밤에는 대리운전. 동생만은 대학교에 보내고 싶다. 소식이 끊긴 아버지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는다.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알 수 없어 사망 신고조차 하지 못했다. 그게 동생의 발목을 잡고 있다. 사망 신고가 되어야지 특별 전형으로 대학에 갈 수 있단다. 사망 신고서를 받기 위해 병원에 찾아가지만 밀린 병원비를 갚으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수진은 친언니와 식당을 운영한다. 남편 없이 아들을 혼자 키웠다. 단골손님으로 온 임소장과 관계를 가졌는데 임신을 하고 말았다.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는 상황. 난감한 수진은 어찌할 바를 모른다. 임소장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은 정관 수술을 했다는 말이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공무원에 합격한 아들은 여섯 살 많은 여자와 사귀고 있다. 어느 날 아들이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한다.


이동은·정이은의 만화 『진, 진』에 나오는 인물들의 사정을 간략하게 적어보았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한숨이 나온다면 당신은 어느 정도 세상을 경험해 본 사람이 분명하다. 가을장마에 축축한 마음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겠고 음악을 틀어 놓고 등이 아파서 누워 있었다. 업무에 관련된 책을 펼쳐만 놓은 채. 밑줄도 긋고 암기도 하면서 읽어야지 하는 마음뿐.


에라. 모르겠다. 일이야 어떻게든 되겠지. 실제로 어떻게든 되는 걸 오늘에야 경험했다. 그러니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 라고 쓰지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드러누워서 내일 일을 걱정하고 있다. 책을 읽자. 숫자 가득인 책이 아닌 어둡고 칙칙한 그림체와 짤막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진, 진』을 펼쳤다. 순식간에 읽을 줄 알았는데 세 시간 넘게 걸려서 읽었다.


진아와 수진은 딱 한 번 만난다. 진아가 대리운전을 하고 차가 없어 한밤중 길에 서 있는 걸 수진이 발견한다. 차에 탄 진아와 수진이 대화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그걸로 끝이다. 이후 둘은 한 번도 만나지 않는다. 이름에 진이 들어가는 두 여자의 삶을 담담하게 『진, 진』은 펼쳐 놓는다. 두 여성 다 사는 게 녹록하지 않다. 전문적인 직업 없이 그날 벌어 그날을 사는 삶.


나 자신도 버거운데 누군가를 책임져야 하는 삶. 그게 힘들고 어려울 걸 알기에 어떠한 시도도 하지 않는다. 돈이 좀 생기면 책을 사고 굿즈를 고르고(장바구니를 털어 장바구니를 얻었다. 무려 고흐의 그림이 프린트된 장바구니다!) 책을 받는다. 읽고 싶은 책이 한가득. 그거면 됐다. 상황 대처 능력이 떨어져 바보 같은 행동을 종종 한다. 자책을 하고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


책을 읽으면 좀 낫다. 『진, 진』 같이 현실의 단면을 예리하게 잘라내어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나 혹은 당신의 이야기를 읽으면. 나만 바보처럼 사는 건 아니었고 그건 틀리지 않고 다르다는 그럴 수 있다는 공감을 보내주는 책. 『진, 진』은 그런 책이다. 공무원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사망 신고를 마친 수진의 독백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그때는 안 됐지만 오늘은 된다.'


『진, 진』에 등장하는 여성의 삶은 서글픈데 꿋꿋하다. 타인을 동정하거나 연민하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럴 자격이 되지 않으니까. 당사자는 그걸 바라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주는 것. 오늘도 나는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읽는다. 이야기가 내 안에서 시와 소설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면접을 볼 때 딱 두 가지를 말했다. 주말에는 쉬고 저녁 6시가 되면 퇴근하는 삶.


고비가 나의 삶이라고 말하는 수진. 그때는 안 됐지만 오늘은 되는 걸 경험한 진아.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진, 진들이 살아가고 있다. 매일 하나씩 경험하는 무시와 홀대를 견딜 수 있는 건 집에 돌아와 읽을 수 있는 책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진, 진』을 읽은 어제는 참을 수가 없었다. 현명하게 굴지 못 했던 것에 대한 무력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진, 진』이 곁에 있어서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두 여성이 헤쳐 나가는 허구 속 삶이 진짜라는 걸 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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