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
쓰무라 기쿠코 지음, 박정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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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가 지금인가' 하고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한 킨크스의 곡에 집중하며 눈을 감는다. 나는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운동선수였을지도 만화가였을지도 모르고 파일럿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생각나지 않는다. 샐러리맨이 아니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항의 전화를 받기도 하고, 얌전히 있으면 계속해서 일을 떠맡기도 하고 무엇보다 매일 아침 출근하는 것이 괴롭지만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을 먹을 수 있고, 제법 좋은 추억도 있고, 새해 연휴에 만날 친구도 있다. 그런 거야 어렸을 때와 거의 똑같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게 뭐가 나쁜가.


  쓰무라 기쿠코의 소설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의 풍경들은 소설의 제목처럼 설레는 일들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 있을 만큼 평범한 모습이다. 아침 알람을 1분 간격으로 맞춰 놓고도 제때 일어나지 못해서 밥을 챙겨 먹지 못하고 출근하는 모습, 업무 미팅이 끝나고도 일찍 회사에 들어가기 싫어 카레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는 모습. 어제까지 친하게 지냈던 직장 동료가 오늘은 냉담하게 변한 얼굴로 이야기마다 태클을 걸어오는 걸 견뎌야 하는 일들에 설레는 일이 어디에 있을까. 오히려 스트레스로 인한 긴장으로 심장이 두근대는 일들뿐이다.
  디자인 회사에서 근무하는 나카코는 자신의 업무가 아닌 일이 맡겨질 때에도 아무 말없이 일을 해낸다. 두 달 전에는 십 년 가까이 사귄 애인과 헤어졌다. 프리랜서로 맛집 소개나 최신 영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서른한 살, 그녀는 자신의 일상을 둘러싼 일들이 버겁게 느껴진다. 회사 동료들 셋과는 점심을 함께 먹는다. 최근 동료들 중 한 명이 유독 자신의 말이나 행동에 시비를 거는 느낌이 들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막막하다.
  사토는 나카세가와 건축회사의 도쿄 지점에서 일하고 있다. 그는 오사카 출신이지만 회사를 도쿄에서 다니고 있다. 혼자 생활하고 있으며 회사에서 그는 업무를 충실히 하고 남이 하기 싫은 일도 묵묵히 해내는 타입이다. 부장의 지시로 결원이 생긴 오사카 지점으로 항의 없이 내려가기도 한다. 혼자 사는 엄마의 집에 이삿짐을 부려 놓고 몇 달 째 풀지 않고 있다.
  나카코와 사토는 업무 미팅 때문에 만난다. 사토의 회사 안내서를 나카코가 대신 만들고 있다. 몇 가지 수정 사항들을 체크하고 두 사람은 이내 나이와 성이 같다는 것과 생일 역시 같다는 공통점을 발견한다. 업무 때문에 만난 것이라 그 정도만 확인하고 헤어진다. 바로 회사에 들어가기 싫은 나카코는 카레집에 들러 점심을 먹는다. 그곳에서 방금 만난 사토를 우연처럼 다시 한 번 만나고 하지 않아도 될 말을 주고받는다.
  소설은 이 두 남녀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도쿄에서 근무하는 사토가 할 수 없이 나카코가 있는 오사카로 내려오면서 이들의 만남이 성사되지는 않을까 가슴이 졸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하루를 견뎌낸다. 실제 쓰무라 기쿠코는 힘들게 취업을 해서 회사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그곳에서 상사의 괴롭힘으로 10개월 정도를 일하고 그만두었다고 작가 소개에 쓰여 있다. 다시 재취업을 위해 교육을 받고 십 년 넘게 회사에 근무했다. 아쿠타가와상을 받고도 작가는 회사에서 일했다. 회사 내에서 견뎌야 하는 수모와 압박을 생생하게 알고 있는 작가답게 소설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의 모습은 현실적이다.
  두 남녀가 회사에서 겪어내는 생활의 모습과 감정들을 꼼꼼하고 세밀하게 담아냈다. 사토는 자신이 맡고 있는 건축 현장에서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항의 전화를 받는다. 항의 그 자체를 즐기는 듯한 남자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이야기한다. 나카코는 프리스쿨의 신입생 모집 팸플릿 작업을 의뢰받아 일을 하면서 계속되는 수정 사항 요구에 지쳐간다. 수정 사항에 맞춰서 다시 보내면 장문의 요구 사항이 덧붙어서 메일이 온다. 감정들을 다스릴 때까지 라커룸에 들어가 음악을 듣는다. 여자 친구들을 대부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아 기른다.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나카코 자신의 일을 비하하는 분위기의 말을 하는 친구의 대화 때문에 집에 돌아와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한다.
  『설레는 일, 그런 거 없습니다』에는 한 편의 소설이 더 실려 있다. 지하 공사 현장에서 한 달 넘게 일하면서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사카마키가 등장하는 「오노우에 씨의 부재」, 이 소설은 한 회사에서 근무하는 오노우에 씨의 갑작스러운 부재의 이유를 그다지 친하지 않은 동료들이 모여 궁금해하고 추측해 나가는 이야기이다. 회사에서는 필요한 인간과 필요하지 않아 해고의 명단에 올려야 하는 인간의 두 부류로 나뉜다. 오노우에 씨는 고졸 학력이지만 회사에서 자신만의 기준으로 실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그가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있어 해고 명단에 오른 것인가 과연 회사는 대졸 그것도 유명한 대학 출신들을 승진 시켜 오노우에 씨를 내 보낼 것인가 사카마키와 동료들은 걱정을 한다. 그들의 걱정과 불안의 끝은 어떻게 될 것인가.
  회사의 반대말은 퇴사가 아닐까 할 정도로 퇴사에 관련된 소설과 에세이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 소설은 결국 회사를 다니는 우리들은 꿈을 포기한 자들이 아닌 우연한 만남이 쌓여 기분 좋은 인연을 시작하고 후배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알려주는 기쁨을 느낄 수 있는 행복한 하루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위로를 주고 있다. 어렸을 적 꿈들의 자리에 비록 샐러리맨이 없었어도 지금의 나는 상사가 주는 일을 떠맡기도 하고 항의 전화와 수정 사항이 담긴 장문의 메일을 보내 그 속에 담긴 숨은 뜻을 짐작해내야 하지만 ‘지금까지 먹어본 기억이 없어도, 입에 넣는 순간 몸속에 지나온 역사가 새겨지는 맛’을 찾아내어 그 혹은 그녀와 함께 먹을 수 있는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설레는 일은 그것으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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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말더듬이 선생님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이수경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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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이다, 이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시게마츠 기요시의 『말더듬이 선생님』을 읽고 든 생각이었다. 표지에 자리 잡은 책 소개 문구도 '다행이다'이다. 이 책은 십 대들뿐만이 아니라 어른도 읽으면서 자신의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마음을 다독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서쪽으로만 향해 있는 칠판을 일제히 바라보면서 공부하라는 말에 의문조차 품지 않았던 시간. 모두를 위해서 나를 숨겨야 했던 교실의 분위기들. 모두와 다른 것이 이상한 것이라 여겨져 은밀한 추방을 당해야 했던 순간들이 『말더듬이 선생님』에 담겨 있다.
  『말더듬이 선생님』에는 총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중학교 교실이 배경으로 비상근 선생님으로 근무하는 무라우치 선생님이 주인공이다. 아니다. 주인공은 무라우치 선생님이 곁에 있어주는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진로를 찾으려 하고 모두 똑같은 선택에 대해 반감을 가지면서 세상을 향한 고요한 목소리를 낸다. 그 목소리는 작고 희미해서 모두에게 들리지 않는다. 무라우치 선생님만이 아이들의 고요한 외침에 응답한다. 무라우치 선생님은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 말을 더듬는 사람이 어떻게 선생님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지만 그 자신은 언제부터 말을 더듬었는지 기억에 없다.
  처음 만난 아이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말을 심하게 더듬는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말을 더듬기 때문에 자신은 중요한 말만을 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아이들은 대놓고 선생님을 무시하는 표정을 짓지만 선생님은 아이들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진로 때문에 고민하는 아이, 자전거 사고를 당한 친구를 도와주기 위해 벽보를 붙이는 아이, 교실에서만 말을 하지 못해 손수건을 꼭 쥐고 있는 아이, 반 아이를 괴롭혀 그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 곁으로 다가간다. 아이들과 대화할 때도 말을 심하게 더듬지만 ‘중요한 말’을 할 때는 혼신의 힘을 다해 이야기를 한다.
  성이 아니라 이름을 부르면서도 말을 더듬지만 이름이 불린 아이는 어른이 돼서도 무라우치 선생님을 잊지 않는다. 무라우치 선생님은 학교에 임시직으로 짧은 기간 동안 수업을 하지만 만나는 아이들에게는 최선을 다하는 선생님이다. 말을 더듬기 때문에 판서 글씨를 똑바로 쓰고 잘 정리된 프린트 물을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중에는 입시 성적 때문에 무라우치 선생님의 수업이 피해가 된다는 학생이 있어 다음날 학교를 떠나기도 하지만 선생님은 자신의 수업에 최선을 다한다. ‘중요한 것, 곁에 있어주는 것, 외톨이가 아닌 것’이라는 말을 칠판에 쓰고 선생님을 존경하는 아이가 내는 그리운 소리를 들으며 교실을 떠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그 학생이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거짓말은 나쁜 게 아니라 쓸쓸한 것이라는 말로 거짓말을 하는 학생의 슬픔을 알아준다. 무라우치 선생님이 쓸쓸하다는 단어를 말할 때  말을 더듬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란한 개인기 같은 수업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의 말을 들어주며 곁에 있어주는 것이다. 무라우치 선생님은 학교를 옮길 때마다 만난 아이들에게 근사한 말을 장황하게 하는 대신 더듬거리는 말로 시집을 읽어보라는 것과 책임을 가지고 잘못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말들을 들려준다. 방황하는 학생의 곁에 앉아서 학생이 질문을 던지거나 이야기를 할 때까지 곁에 있어준다.
  연하장을 보내온 학생에게는 교실 칠판이 어느 쪽에 있을까는 황당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학생이 새로운 답을 찾으면 즐거워한다. 모두 똑같을 필요는 없다고 말을 잘하지 못해도 자신의 생각을 말로써 완벽하게 담아낼 수 없다고 해도 그건 나쁜 일이 아니라고 말해준다. 외톨이가 둘 있으면 그건 이미 외톨이가 아니라고도 이야기한다. 외톨이를 알아보고 말을 걸고 곁에 있어주는 것, 무라우치 선생님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유다. 말을 심하게 더듬어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지만 아이들 곁에서 문제를 알아봐 주고 함께 고민해 준다.
  나 역시 말을 더듬는다. 발음이 희미해서 하려는 말과는 다른 말이 되어 사람들을 웃기거나 당황하게 한다. 중요한 말이 있어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서 상대방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한다. 그래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들은 안다. 어떤 마음을 담아 말을 했는지. 우리는 모두 웃을 수 있고 즐거워할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말의 형식은 중요하지 않다. 무라우치 선생님도 중요한 말은 칠판에 써서 아이들에게 진심을 보여주었다. 시게마츠 기요시를 알아서 다행이다. 그의 작품들이 한국에 번역되어 있어서 다행이다. 아이와 어른의 세계는 다르지 않다. 한 세계를 살아내면서 겪는 고민과 아픔들을 말이 아닌 글로써 치유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오늘 찾아낸 다행한 일들이 내일과 모레를 살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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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김동영 지음 / arte(아르테)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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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순간들을 압축적으로 정리하면 김동영의 신작 에세이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의 목차처럼 '살아간다, 떠난다, 돌아온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고 떠나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그렇게 돌아오고 떠나고 살아간다로 순환된다. 삶의 모습은 세 가지의 말로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지만 그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내면은 단순하지 않다. 매 순간 치열하고 복잡한 감정으로 생의 순간들을 마주 봐야 한다. 관계는 엉뚱한 곳에서 뒤틀리기도 하고 불안은 수시로 튀어나와 우리를 괴롭힌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내다가 긴장으로 묶인 끈이 풀리면 떠난다. 서랍에 넣어둔 여권을 챙기고 그동안 부었던 적금을 미련 없이 해약한다. 책상 앞에 붙여둔 세계지도를 물끄러미 보다가 비행기 표를 예약한다. 열어둔 창문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햇살이 우리를 등 떠밀 때 떠나온다.


언젠가부터 나의 여행은 현실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이고, 조금 과장되게 의미를 부여한다면, 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하는 '돋보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통해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여행은 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충실하게 살아가기를 이행한 우리는 여행을 떠나면서 돋보기를 얻는다. 여행이 피난이든 도피로 불리든 우리는 그곳에서 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가진다. 처음에는 많은 곳들을 돌아다닌다. 여행자의 모습으로 박물관과 미술관을 간다. 사람으로 가득한 곳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언뜻 보기도 하면서 최대한 많은 것들을 담고 얻으려고 한다. 카메라를 잃어버리는 것보다 그 안에 담긴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찍은 사진들 때문에 강도에게 맞서기도 하는 무모함을 여행지에서 보인다.
  어느 순간, 카메라로만 보던 풍경을 실제 눈으로 오래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서 무거운 카메라를 내려놓는다. 유명 관광지를 찾아가는 여행이 아닌 한 곳에 머무르면서 그곳의 풍경과 하나가 되어 있기로 마음이 바뀌는 것이다. 여행자이지만 어느 여행자의 카메라 안에서 우리는 풍경이 된다. 카페에 들어가 말하지 않아도 매일 먹는 메뉴를 가져다주는 호사를 누리고 낯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도 한다.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지 하나 마한 질문을 던졌다가 이 여행이 끝나는 순간 생각해보겠다는 아름다운 대답을 듣기도 한다.
  나로부터 벗어나는 여행이 시작된다. 일상의 나와 여행에서의 나는 다르지 않다. 똑같은 모습의 나는 낯선 풍경이 주는 편안함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뿐이다. 버스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나가야 하는 조급함이 사라진 세계에서 햇살과 햇빛의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떠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날 위해 울어줄 사람이 누구인지를. 그들을 볼 때마다 늘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들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까지는 잘 살아온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에 갇히고 끝없이 펼쳐지는 사막과 변하지 않는 풍경으로 이어지는 길의 모습에서 돌아온 우리가 마주하는 건 다시 시작되는 살아가기다. 관계를 만들어가거나 이어가고 돌아온 집을 정리한다.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최종 도착지가 있다는 것에 안도를 느낀다. 고양이들은 여전히 시큰둥하지만 산책길에서 혼자 앉아 있다가 마주한 녀석들은 돌아온 나를 반겨주는 것 같은 얼굴이다.
  『너도 떠나보면 나를 알게 될거야』 라는 책에서 시작한 십 년의 여행과 방황 그리고 글쓰기를 통해 생선 작가는 우리에게 말한다, 『무엇이 되지 않더라도』, 괜찮아라고. 그 자신이 무엇이 되기를 열망했고 좌절했던 순간들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응원의 말을 해줄 수 있었다. 작가의 꿈을 이루고 타인이 보기에 자유로운 사람으로 보이는 자신이 서먹해지는 순간을 이야기한다. 십 년 전에 떠났던 미국의 그 길 위로 그는 다시 떠났고 돌아왔다.
  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울어줄 누군가를 생각하는 일상을 사는 것으로 이 별에서의 여행기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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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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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동안 어두운 내용의 책들로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 상실의 아픔과 상처를 다룬 책들이란 다들 그렇게 무참한 내면을 다독이고 상처로 터진 마음을 달래는 것이리라고 생각했다. 죽음은 너무나 흔해서 어느 날에는 일상처럼 뻔한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다. 죽음을 보면서 겪으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에 안도하기 바빴다. 누군가의 존재가 지상에서 사라졌지만 그와 함께 했던 시간과 추억과 물건은 남는다. 시간과 추억은 남은 자들에게는 그와의 기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 힘이 될 수 있지만 물건은 아니다. 물건들은 짐이기도 하고 죽은 자가 끝까지 살고자 했던 희망으로 생각되어 남아 있는 사람의 시간을 무겁게 짓누른다. 그들과 끝까지 함께 하지 못했던 물건들을 처분하면서 남아 있는 나날을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와 결별할 수 있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영국 작가 패드라 패트릭의 첫 장편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의 주인공 아서는 죽은 부인의 유품들을 정리하기까지 일 년여의 시간이 걸렸다. 아내 미리엄이 급성 폐렴으로 갑자기 죽자 아서의 일상은 견고함을 가장한 채 무너져 내렸다. 아서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청소를 하고 화분에 물을 준다. 외출은 하지 않은 채 자식들과도 자주 연락하지 않는다. 마을에 사는 다정한 부인 버나뎃이 파이를 들고 찾아와도 집 안에 숨어서 없는 척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미리엄과 40년을 살면서 아서는 열쇠 수리공으로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고 아내 역시 훌륭하게 가정을 보살폈다. 밖에 나가 일을 하는 동안 미리엄은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r그들의 사춘기를 지켜보았다.
  아서는 미리엄의 사망 절차를 처리하느라 제대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했다. 아내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그는 일 년 동안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았다. 딸 루시와 아들 댄이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고 말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일상에 스며 있는 실패와 우울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아내의 옷들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참 팔찌에는 여덟 개의 참들이 달려 있었다. 코끼리, 꽃, 책, 팔레트, 호랑이, 골무, 하트, 반지가 달려 있었다.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 참 팔찌를 해본 적이 없었다. 화려한 금 팔찌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서는 대체 이 참 팔찌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에 빠진다.
  코끼리 참에서 전화번호를 발견해 전화를 거는 것으로 아서의 아내의 과거를 향한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미리엄이 인도에서 보모를 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내면서 아서는 세상 밖으로 나간다. 버나뎃의 제안으로 호랑이 참에 달린 아내의 과거를 추적하고자 여행 가방을 꾸린다. 40년을 함께 살아가는 동안 아서는 미리엄의 과거에 대해 묻지도 않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현재의 시간에 충실하며 그녀와 함께 하는 삶에서 만족을 얻었다. 그녀가 떠나고 남겨진 팔찌에는 그녀의 과거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들이 있었다.
  아서는 규칙적인 일상이 자신을 옭아매고 슬픔에서 견딜 수 없게 만든 것이었다는 사실을 여행을 통해서 깨닫는다. 자신의 안락한 침실이 아닌 낯선 집에서 잠을 자고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처음 본 사람의 집에 따라가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다. 팔찌에 달린 참들의 의미와 미리엄의 과거를 알아가면서 아서는 한 사람의 생애를 관통하는 기억과 과거를 마주 볼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미리엄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실망하기도 하지만 그녀의 시간은 자신과 함께 한 현재 속에서 충분히 안락함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된다. 딸 루시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 오지 못한 이야기를 듣고 이웃집 여자 버나뎃과 그녀의 아들의 고민을 들으면서 자신의 현재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미리엄의 과거를 여행하면서 그녀의 과거의 시간들을 받아들인다.
  미리엄은 팔찌를 남겨 두었고 아서는 그것을 찾아냈다. 그가 슬픔과 절망의 바닷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더라면 결코 찾지 못했을 물건으로 아서의 시간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 소설은 한 사람의 죽음 뒤에 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야 할지 위트 있는 문체로 그려내고 있다. 소설은 무거운 주제를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물들로 표현해 낸다. 남편이 죽고 혼자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는 버나뎃, 그녀는 마을에 혼자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이야기를 하고 음식을 준다. 미리엄이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은 상처를 혼자 껴안고 슬퍼했던 사람들이었다. 미리엄은 그들에게 위로와 내일의 시간들을 들려준다. 아서는 죽은 미리엄의 과거를 추적하면서 만난 사람들을 통해 오늘을 사는 용기를 배운다.
  과거와 결별하기를 바랐지만 아서는 미리엄의 과거를 온전히 마주 보고 그녀가 살아가지 못한 오늘과 내일을 충실히 살아가기를 맹세한다. 우리는, 남아 있는 나는 그가 두고 간 물건들을 떠나보내는 대신 그가 보내온 미래의 시간을 선물로 받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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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그대 눈동자에 건배 : 히가시노 게이고 소설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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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째 미세 먼지가 창문 밖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요즘, 밖으로 나가기 싫

은 당신을 위해 한 권의 책을 추천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으로 구성된 『그대 눈동자에 건배』.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그 이름, 히가시노 게이고. 미스터리를 좋아하지 않는 독자라도 베스트셀러 목록에 늘 들어 있어 이름을 들어 봤을 그 이름, 히가시노 게이고. 추리 소설에 빠져 도서관에 열심히 다녔을 때 일본 문학에서 마지막 ㅎ 부분을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로 차지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책들은 대출이 많이 됐는지 겉표지가 너덜거리기까지 했다. 시간은 많고 할 일은 많지 않은 그때 최대 열 권까지 빌릴 수 있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들을 부지런히 읽었다. 그의 추리 소설들은 인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각이 작품 전반에 깔려 있다. 죄를 지은 인간을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죄와 죄의식의 물음을 독자에게 던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는 무거운 주제 의식을 다루고 있지 않다. 인간 사회의 허위를 가벼운 필치로 그려내는 이번 단편집은 미세 먼지로 가득한 연말을 마음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아홉 편의 단편을 다 읽고 난 당신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이 일 것임을 예상한다. 추리 소설이라 모든 이야기의 줄거리를 나열하는 것은 읽는 재미를 떨어뜨릴 수 있다. 이번 책은 단편 하나하나에 소소한 재미를 선사할 수 있는 반전들이 가득하다. 친절하게 독자를 추리의 세계로 끌고 가는 히가시노 게이고는 어려운 지적 유희를 요구하는 트릭은 쓰지 않는다. 소설을 읽다 보면 인물들이 주는 익살에 웃음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열심히 살았지만 주변인들에게 폐만 끼치는 것이 두려워 죽음을 택하려는 부부의 하루가 있고 미스터리 작가로서 성공을 누린 인기 작가의 긴장감 넘치는 저녁 식사 시간이 있다. 경마장에서 마권이나 사면서 동창에게 소개팅 자리를 주선 받는 젊은이의 연애 이야기에 빠지다 반전을 만나기도 하고 딸을 시집보내려는 아버지의 허전한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아기를 빌려주는 회사가 있어 부모의 삶을 체험해 볼 수 있는 가능성과 고양이의 뇌를 이식해 새로운 종을 만들 수 있다는 설정으로 미래 사회를 그리고 있다. 크리스마스에는 죽음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로 자신의 죽음을 연기하고 아버지가 이루어낸 기적의 하루를 아들이 체험하는 이야기를 단편집에서 만날 수 있다.
  기발한 설정과 반전 끝에 인간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느낄 수 있게 만든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적 구성력은 놀랍다. 미래 사회의 어느 날을 살아도 우리는 인간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마음을 주고받고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내일도 그 다음날에도 유지해야 한다. 길 고양이와의 우연한 만남에서도 우리는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아버지의 유언장을 읽으며 마술 같은 어느 하루를 아버지에게 선물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꿈을 향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는 인물을 통해 나의 꿈에 응원을 받을 수 있다. 이 모든 놀라운 일들은 독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대 꿈들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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