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어 천재가 된 홍 대리 - 딱 6개월 만에 중국어로 대화하는 법 천재가 된 홍대리
문정아 지음 / 다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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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든 시작해 본다,는 것이 좋아서 중국어를 배워본 적이 있다. 영어도 제2외국어로 배운 스페인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열정만 앞섰다. 수능이 끝나고 시간이 남는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놀지 말고 공부하자. 중국어 학원은 2층에 있었다. 머리가 긴 여자 선생님이 나를 맞이해 주었다. 목소리가 크고 또랑또랑했다. 혼자만 다니기가 심심해서 친구와 같이 다니기로 했다. 반이 만들어졌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성조부터 배우면서 기본 회화를 익혔다. 처음에는 굉장히 열정적이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업을 들었다. 진도가 나가자 어려워졌다. 한자도 외워야 하고 중국어 배우기 말고도 다른 것들이 하고 싶어졌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다니고 그만두었다. 배움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 그것이 내 특기였다. 

  입학하고 교양과목을 선택할 때 중국어를 골랐다. 우리 과에서는 아무도 듣지 않았다. 친구 하나를 설득해 함께 듣게 했다. 혼자는 심심하니까. 한동안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중국어를 처음 배우는 친구한테도 잘난 척을 했다. 나는 조금 배웠으니까. 1학년 때는 학교에 잘 나가지 않고 학점 몇 개를 F로 장식하는 것이 근사해 보였다. 몇몇 선배들의 학사경고 무용담을 들으며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친구 혼자 그 수업을 들어야 했다. 그 과목의 학점은 D, 후반에는 거의 출석을 하지 않았는데 왜 F를 주지 않았을까. 나의 중국어 공부기는 포기와 포기의 연속이었다. 

  영어 공부나 한자 급수 시험, 한국사 공부를 할 때 먼저 책부터 산다. 책 욕심 또한 많다. 책장에는 앞부분만 필기로 가득한 책들이 꽂혀 있다. 정리를 하려다가도 다시 공부하고 싶을 때가 있을 것 같아 그냥 놔둔다. 문정아의 『중국어 천재가 된 홍대리』를 읽으며 그동안 내가 왜 어학 공부를 포기하고 좌절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는 하루 공부치를 높게 잡았던 것이다. 이 책은 중국 패션 사업을 추진하는 회사에 다니는 홍대리의 6개월 중국어 입문기이다. 다른 어학서와 다르게 허구의 인물이 등장해 그가 중국어를 배우고 익히기까지의 과정이 소설처럼 담겨 있다. 

  중국 출장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한 홍대리는 그날부터 중국어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그에게는 6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다. 그 안에 중국어를 마스터해야 업무를 맡을 수 있다. 그는 박 팀장의 빽빽이 공부 팁을 전수받는다. 눈과 팔이 아플 때까지 단어를 쓰는 것이다. 그러다 곧 이 방법은 무리라는 판단이 든다. 수제 구두를 만들다 택시 운전을 하는 아버지를 통해 문정아 강사를 알게 되고 그녀의 강의를 들으면서 중국어 공부를 새롭게 시작한다. 

  『중국어 천재가 된 홍대리』는 초보자들이 중국어를 어떻게 익혀야 하는지 자세한 설명과 함께 쉬운 방법이 제시되어 있다. 기본 발음을 따라 하고 성조를 익히면서 중국어의 어순에 맞춘 단어들을 학습하는 것이다. 기본 패턴 문장을 익히면 응용이 가능하다. 기본 문장에서 확장된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다. 단어 100개 외우기, 3시간 동영상 보기가 아닌 쪼갤 수 있는 시간 안에서 계획을 짜는 것이다. 많은 학습량 때문에 중국어 공부를 포기하는 것보다 느리더라도 꾸준히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어나 중국어, 한자 급수 시험공부를 포기한 이유 중에 하나가 피곤하고 힘들어서였다. 높게 잡은 학습량을 도달하지 못하면 좌절감이 들어 그대로 책을 덮고 만 것이다. 

  최신 변화하는 중국의 문화까지도 배우면서 홍대리는 중국어로 더빙한 드라마를 보고 어머니를 가르치는 것으로 6개월의 시간을 보낸다. 그는 중국 지사에 팀장으로 발령이 나고 중국어 학습 슬럼프를 이겨낸다. 한자를 효율적으로 외우고 A4 한 장에 만드는 원페이지 학습법이 이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책의 뒷면에는 부록으로 마법의 문장 300이 선물처럼 붙어 있다. 문법부터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고 듣는 것으로 시작하는 홍대리의 중국어 입문기를 통해 포기하고 숨겨 두었던 중국어 학습이라는 도전을 새로 시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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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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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끝은 죽음. 삶의 끝이 죽음이라고 썼지만 그 후에 일에 대해 나는 알지 못한다. 알 수도 없거니와 아직 알고 싶지 않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조금만 더 살고 싶다. 내가 쓸 수 없는 이야기를 읽고 그들이 겪은 세계의 참혹을 알고 싶다. 가보지 못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상상하고 과거의 발자국을 따라 걷고 싶다. 현재의 순간들을 만끽하며 미래의 일들을 추측하고 싶다. 단지 그것뿐. 죽음이라는 실체에 다가가는 것을 주저하는 이유다.

  소설의 끝은 이야기. 소설의 끝으로 갈수록 이야기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가. 끝이라는 괄호의 세계에 묶여 이야기는 정지되는가. 소설의 첫 장에서 마지막 장으로 작가는 우리에게 거대한 진실의 한 면만을 보여준 채 달아나 버리고 만다. 작가는 없다. 작가의 목소리만 존재하는 소설의 세계에서 우리는 길을 찾아 헤맨다. 목소리의 부름에 따라 서사를 헤치고 마지막으로 달려간다. 그가 끝까지 보여주지 않은 이야기의 조각을 찾아 나는 끝이라는 세계에서 탈출한다. 소설의 끝은 반복이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고 나는 다시 이야기의 처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리처드 플래너건의 소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면 우리가 세계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에 경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서 죽음 이후를 알 수 없는 나는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의 세계 속에서 삶이 끝나는 지점에서 죽음을 마주할 수 있는 온기를 받아들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체온을 상상하는 것이 아닌 죽음이란 마지막 온기를 간직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허구의 인물이 건네는 악수를 받아들고 그가 읽고 외우는 시를 끌어안는 것. 소설은 내게 끝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시작이라는 말로 오독한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보여주는 세계의 모습은 참혹하다. 전쟁이라는 광기의 역사에서 인간의 시간은 지워지고 잊혀 간다. 역사는 한 줄로 요약되고 축소되기를 바라지만 인간의 삶은 전쟁이 끝나고도 이어진다. 국가와 국가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과 살인. 조국의 이름으로 출전한 사람들은 이름을 잃고 포로 번호로 살아간다. 지독한 허기와 가혹한 노동으로 죽어가는 개인들. 전쟁에 필요한 물자처럼 취급되는 사람들이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향해 걸어간다. 

  이 소설의 주인공 도리고 에번스는 막사에서 수술 도구조차 없이 구부러진 숟가락으로 잭의 다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멈추게 한다. 그는 콜레라와 괴질, 각기병에 시달리는 환자들 곁을 돌며 '그래도 살아야지'라고 속으로 되뇐다. 방금 둘러 본 환자가 죽어 있고 들것조차 없이 천으로 죽은 이를 메고 화장을 해야 하는 그곳에서 도리고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일본 제국이 타이-미얀마 간의 철도를 건설하는 곳에서 전쟁 포로이자 군의관으로 복무하는 도리고는 나카무라 소령의 지시에 협상으로 맞선다. 포로들은 영양 상태가 엉망이고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매일 철도 작업장으로 포로들을 내보내야 하는 임무에서 도리고는 의사의 신분으로 모두 내 보낼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건강한 자들은 없다. 모두 죽음의 문턱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시는 법칙이 아닙니다. 운명이 아니에요, 대령님.

그렇지. 도리고 에번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는 시가 대략 운명과 같은 것임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저 그림 말입니다. 보녹스 베이커가 말했다. 그림 말이에요, 대령임.

그림이 뭐, 보녹스?

토끼 핸드릭스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 그림들은 살아나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살아남을 베이커가 말했다. 그래서 세상이 알게 될 거라고요.

그래?

기억이 진정한 정의입니다, 대령님.


  일본군은 무리하게 철도 건설을 강행하면서 환자까지도 끌어내 일을 시키려 한다. 조금만 게으름을 피우면 구타가 시작되고 먹을 것과 휴식 시간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다. 군화가 없어 떨어진 밑창을 꿰어서 신은 포로들은 병균에 감염이 된 발을 끌며 돌을 깬다. 콜레라가 발병한 환자는 바로 격리를 시키고 그 병동에서는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도리고와 함께 포로로 잡힌 병사들은 그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훔친 오리알을 자는 동료와 나눠 먹고 그림으로 그들의 시간을 그린 토끼 헨드릭스의 스케치를 간직한다. 도리고는 시가 법칙과 운명이 아니라는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에게 시는 운명이었음을 깨닫는다. 

  전쟁에 참가한 그들, 나카무라 수령과 고타 대령 그리고 도리고는 자신들이 읽던 시를 떠올린다. 도리고에게 시는 망각이 이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정의로, 안전장치로 작용한다. 폭력과 인간의 존엄성이 짓밟히는 전장에서 일본인 장군들은 시를 생각하는 것으로 전쟁의 한복판에서 정당성을 확립해 나가려 한다. 천황 폐하의 존재와 그가 내리는 명령을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이기를 스스로 내려놓으면서도 시에 기댄다. 천황을 시로 여기며 가장 위대한 시라고 나카무라는 생각하는 것이다. 죽음이 임박해 오는 순간 그 시는 공포와 괴물로 그의 전 생애를 이루는 가치를 압박한다. 고타 대령은 시를 외우면서 포로들의 목을 벤다. 시를 암송하는 것으로 인간성의 마지막을 지키려고 하면서 생명을 죽인다. 그 이율배반적인 행위 안에서도 시는 존재한다. 인간에게 고통을 내리는 자가 시로써 구원을 받으려 한다.

  도리고는 일본 하이쿠에서 임종시를 발견한다. 시스이가 남긴 임종 시는 하나의 원이었다. 죽음의 마지막 순간에 시인은 원을 그렸다. 도리고와 병사들을 길을 만들기 위해, 라인을 건설하기 위해 행군을 시작한다. 선이 만들어져야 일본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 포로들이 가는 좁은 길은 죽음으로 향해가는 선이었다. 길에서 시작된 죽음은 선 하나를 만들기 위한 일본 제국의 욕심이었다. 철도는 식민지 안에서 끝없이 뻗어나가 일본 제국의 역사를 안고 달려갈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망각은 성취되지 않는다. 물과 식량과 의약품이 보급되지 않는 현장에서 포로들이 쓰러져 가고 느닷없이 시작되는 구타의 만행은 시와 그림으로 기억된다. 

  식민지 조선에서 차출된 하사 고아나는 일본 패망 이후에야 비로소 자신의 이름인 최상민으로 교수형을 당한다. 전쟁이 끝나고 높은 신분의 일본인들은 전범 재판에서 사형을 피하거나 나카무라처럼 신분 세탁을 한다. 고타 대령은 혈액은행에 취업한다. 신분 세탁을 한 나카무라는 미군 공군 병사를 마취 없이 생체 해부한 의사 사토 이야기를 듣는다. 일본군에게 총상을 입은 미군 병사를 데려와 살아 있는 상태에서 간과 방광, 위를 제거한 이야기를. 미군 병사는 사토가 하얀 가운을 입었기 때문에 자신을 끝까지 믿었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도리고와 사토, 전쟁 속에서 두 의사는 다른 길을 걷는다. 한쪽에서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똥이 가득한 진흙 속에서 수술을 해야 했고 다른 쪽에서는 과학적 테이터를 얻기 위해 생체 수술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타이-미얀마 철도 건설에 실패한다. 두 도시에 원폭이 떨어지고 패망을 선언한 그들은 그 철도의 일부를 신사로 가져온다. 사람들에게 일본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 알리기 위해서다. 그 일은 일본이 전쟁 속에서 조국을 위해 이루어낸 업적을 기리는 것이었다. 

  전쟁의 끝은 기억이다. 도리고의 마지막에서 그는 하이쿠 시인 시스이가 남긴 원의 의미를 이해한다. 선들이 모여도 만날 수 없는 세계에서 원은 시작과 끝이 존재한다. 전쟁 영웅으로 전쟁 이후를 살아가면서 도리고는 기억을 놓치지 않는다. 철도 건설을 위해 행군을 했던 길 위에서, 매일 쓰러지는 포로들을 보면서 살릴 수 없었던 무서운 세상의 진실을 알아버렸던 곳에서. 도리고는 전쟁을 이야기하고 북쪽이 아닌 서쪽의 하늘의 길로 넘어간다.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이야기는 원의 세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도리고는 삶이란 진실과 우연히 주는 섬뜩함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일본인에게 맞아 죽은 디기너와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 전쟁 이후의 자신의 삶을 결정지은 사소한 거짓말 하나가 선의로 가장한 악의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은 완벽하다. 문장은 우리를 더럽고 끔찍한 전쟁 속으로 데려간다. 이야기들은 여지를 주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도리고의 생을 지배한 전쟁의 기억은 죽음의 순간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이야기를 끌고 죽음의 세계로 건너간다. 고통은 시를 남기고 우리는 노래로써 사랑을 완성한다. 도리고의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의 여정을 따라가며 나는 이 세계에서 삶을 노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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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희미하게
정미경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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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왼손을 들어 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짧은 머리카락은 몇 가닥만 남기고 다시 흘러내린다. 네온의 명멸처럼 짧지만 환한 어떤 것이 가슴속에서 반짝 빛났다. 지나온 삶에서, 우연히 다가온 따뜻하고 빛나는 시간들은 언제나 너무 짧았고 그 뒤에 스미는 한기는 한층 견디기 어려웠다. 그랬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함을 하찮게 여기고 싶지 않다. 

(정미경 소설 장마 中에서)


  정미경의 소설집 『새벽까지 희미하게』를 받아들고 오래 망설였다. 빨리 읽고 싶은 마음과 조금 천천히 읽고 싶은 마음들이 부딪혔다. 마음과 마음이 닿아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바람을 몰고 왔다. 어긋난 틈으로 들어오는 이 겨울의 냉기 때문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2017년 1월 18일. 겨울 속으로 소설가가 떠나갔다. 소설가는 떠나고 그가 남긴 작품들이 꼭 일 년 후에 나왔다. 2018년 1월 18일. 초판 발행한 책은 겨울의 바람 속을 뚫고 와 내 손바닥 안에 있었다. 만남과 헤어짐의 반복을 살고 있지만 그 패턴은 익숙해지지 않는다. 소설가 정미경이 남긴 마지막 소설집을 읽는 동안 새벽에서 아침으로 그 미명의 어둠 속에서 번져가는 그리움 때문에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새벽까지 희미하게』에서 그려내는 인물들은 오래 망설인다. 이 생을 치열하게 살고 싶은 그들은 만남과 이별의 선택에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만남의 시작은 서툴고 우연적이다. 「못」에서 그들은 대형마트 전자제품에 코너에서 만난다. 성능만을 묻고 정작 물건을 사지 않는 사람들의 질문에도 성실하게 대답하는 그녀. 회사에서 밀려나 충동적으로 물건을 사들이고 환불을 반복하는 그에게 그녀는 욕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인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그들이 사는 반 지하방으로 들어오지만 그들의 연결은 허술하다. 벽에 툭 불거져 나온 보기 싫은 못처럼 그들의 만남은 자국만을 남긴다. 

  「엄마, 나는 바보예요」의 조는 성공한 정신과 의사이다. 자신만의 규칙이 있고 그것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이다. 일상의 위태로움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에게 환자들은 의료쇼핑족이고 정해진 시간 동안 비용을 내고 상담을 들어주는 존재로밖에 인식이 되지 않는다. 아내와는 묘하게 대화의 초점이 어긋나고 아들은 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유일한 소원이다. 형식적인 의사모임에 가서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는 그에게 삶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흘러가야 한다. 

  표제작 「새벽까지 희미하게」의 두 인물 송이와 유석은 손바닥 공원의 모과나무를 사이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정수기를 설치하러 유석의 사무실에 온 송이를 유석은 즉흥적으로 직원으로 채용한다. 이미 세 명의 직원이 있음에도 유석은 송이의 눈물을 보는 순간 자신과 일을 하자고 이야기한다. 송이는 그들과 겉돌면서 일을 하기 시작한다. 사무실의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 송이. 정작 사무실에서 그들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어 보질 못한다. 어느 밤에 공원 안에서 나무를 끌어안고 있는 송이를 보면서 그들은 터놓지 않아도 될 이야기들을 새벽까지 나눈다. 

  「목 놓아 우네」의 두 심들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다. 교량 설계 프로젝트를 맡고 있는 심은 화장실에 앉아 스팸 김밥을 먹는다. 매일 맛이 달라지는 김밥을 먹으며 있지도 않은 역류성 식도염을 생각한다. 야식을 먹으러 가지 않은 이유를 그것으로 대고 나니 진짜로 병에 걸린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잘못 들어온 문자에 답을 보내면서 심은 성이 같은 심과 연결된다. 트럭을 몰고 운반 일을 하는 심은 같이 살고 있는 룸메이트의 직업을 빌려와 그 자신을 대학 병원 간호사라고 심에게 소개한다. 심과 심 사이에는 문자 수신음과 전파만이 존재한다. 얼굴도 모르는 그 여자, 심을 위해 심은 화장실에 앉아 운다. 

  「장마」의 윤과 남자는 일본에서 처음 만난다. 비행기에서 만난 그들은 비싼 택시비를 지불하기 위해 합승한다. 남자는 일본 출장이 잦은 탓에 싸고 저렴한 숙박 시설을 알고 있다. 말이 많은 그 남자는 윤에게 자꾸만 말을 건다. 숙박 계획이 없는 윤이지만 방을 잡고 그가 먹자는 밥을 함께 먹는다. 부또오를 보러 가고 윤이 가야 할 곳에 남자는 따라간다. 윤을 두고 간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하러 가는 그 길에서 그들은 사소하게 지나갈 만남과 헤어짐, 어둠과 빛을 확인한다. 

  이 소설집의 끝은 정지아와 정이현, 김병종의 산문, 백지연의 해설이 실려 있다. 이것을 보고 소설의 끝에 문인이 아니어도 소설가의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면 어떨까를 생각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는 과정을 알고 평소 그의 인간 됨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독자는 소설가의 책상을 작업실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설렘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별로 돌아간 작가가 남긴 작품을 읽고 추모하는 글이 아닌 이 별에서 살아가는 작가의 어제와 오늘을 확인할 수 있는 글. 작가의 말을 같이 읽으며 책장을 덮고 온기를 느낄 수 있도록 눈을 감아 보는 책. 소설가 故 정미경의 마지막 소설집이라고 쓰인 띠지를 벗기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띠지가 없으면 정미경·소설집으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물들의 오랜 서성거림을 느끼면서 창문을 열었다.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들은 해가 뜨는 걸 보고 돌아갔나 보다. 어둠 속에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을 그들. 환한 빛 속에서는 차마 건네지 못하는 말들을 그들은 새벽의 공원에서 나무를 끌어안고 낯선 언어를 해독하는 외국인들처럼 소곤거렸다. 작가의 말이 실려 있지 않은 책이 슬프다는 걸  『새벽까지 희미하게』를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어떤 작가는 작품으로써 충분한 이야기를 전달했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작가의 말을 쓰지 않기도 한다. 일부러 쓰지 않는 것과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것의 차이에서 나는 작가가 잃어버린 마지막 문장을 생각한다. 아니 마지막 문장이 아닌 첫 문장을 생각하기로 한다. 소설가 정미경이 쓰고 있을 첫 문장을 상상하며 겨울을 건너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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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포토스의 배 - 제140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쓰무라 기쿠코 지음, 김선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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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가세는 스물아홉 살로 로션 공장 라인에서 일한다. 어느 날 휴식 시간에 본 세계 일주 크루즈 여행 포스터에 마음을 뺏긴다. 163만 엔. 세계 일주에 드는 비용이다. 그날부터 나가세는 공장에서 받는 월급을 모두 모으기로 결심한다. 생활은 친구 가게에서 일해서 받는 돈과 컴퓨터 강사 일에서 받는 비용으로 충당하기로 한다. 전에 일하던 곳에서 힘든 일을 당해 겨우 공장에서 다정한 오카다 씨 덕분에 적응 중이다. 세계 일주 포스터를 보기 전에 그녀는 낡은 집을 수리하려고 돈을 모으고 있었다. 엄마와 함께 살지만 각자의 수입으로 생활을 유지한다. 친구들과 어색한 만남에서 돌아오는 길에 썼던 돈들을 정리하면서 하루치의 일당이 날아간 것에 속상해하기도 한다. 


  집에서 기르는 라임포토스는 물만 잘 갈아주면 별 탈 없이 잘 자란다. 세계 일주를 하기 위해 빠듯하게 돈을 모으면서 식비를 해결하기 위해 라임포토스를 먹어볼까도 생각한다. 친구 중에 리쓰코가 남편과의 불화 때문에 그녀의 낡은데 크기만 한 집으로 딸과 함께 들어온다. 에나라는 딸아이는 도감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가세는 친구 리쓰코가 신혼 초에 남편에게 맡겼던 저금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친구의 독립을 지지해주고 쉬는 날 없이 쉬는 날이어도 쉬어도 될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편하지 않은 그녀에게 세계 일주에 가지 못할 수도 있는 일이 생긴다. 그녀는 세계 일주를 떠나 파푸아뉴기니에 도착해 아우트리거 카누를 탈 수 있을까.


  나가세라는 이름에 나의 이름을 넣어도 무방하지 않을 이야기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하다가도 나가세의 세계 일주를 응원한다. 쓰무라 기쿠코의 『라임포토스의 배』에 등장하는 주인공 나가세는 나의 이야기다. 월급 통장을 비우고 앞으로 일 년, 그 일 년 동안 다른 것들은 포기하고 오로지 돈만을 보고 시간을 버틴다. 다가올 일 년을 위해. 독립한 친구의 집에 찾아갈 때 차비가 걱정되어 자전거를 타고 갈까 생각하고 오로지 자신의 걱정은 생활에 관한 것일 뿐이라는 것에 한심해 한다. 


  비가 오면 비를 바라보고 휴일이 하루쯤은 생겨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히 누워 천장을 바라볼 수 있는 일들을 꿈꾸는 것이다. 지금 벌지 않으면 어제는 관리비를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매일 밥을 먹어야 하고 어두울 때는 불을 밝히고 더울 때는 에어컨을 틀고 겨울에는 가습기 정도 틀 수 있으려면 일해야 한다. 눈치도 보지 않고 책상 위에 엎드려 자는 동료를 보고 그 동료가 곧 결혼한다는 소식과 함께 일을 그만두는 걸 보는 걸 계속 지켜봐야 하는 것도 생활을 위해서다. 지난달에 연말이라 들뜬 마음에 생각 없이 긁은 카드 이용 내역을 훑어보다가 많이 썼다고 주는 포인트를 발견해서 왕 깍두기 2kg을 주문했다, 오예! 돈을 더 보태긴 했지만 왕 깍두기를 사서 신이 난다. 


  쓰무라 기쿠코의 소설을 읽으면 힘이 난다. 주인공들의 삶은 힘들고 희망은 전혀 보이지도 않는데 소설을 읽는 나는 힘이 난다. 세계 일주까지는 아니지만 일 년을 열심히 살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작년에 얻어온 다이어리에 좋아하는 캐릭터 스티커를 붙이고 고정 지출들을 적었다. 보험료와 핸드폰비, 교통비, 가스비들을 적고 나자 숫자들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어제 그 사람이 했던 말은 잊어버려,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다음 달 월급 날짜를 생각해. 고마압다.


  『라임포토스의 배』에는 다른 소설도 한 편 더 있다. 쓰무라 기쿠코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는 「12월의 창가」는 회사에서 무차별적인 폭언과 스트레스를 겪는 쓰가와가 있다. 그녀는 인쇄 회사의 지사에서 일하고 있다. 본사가 아닌 지사라 회사 안에는 인근 고졸 출신의 여직원들이 대부분이다. 파견 근무까지 다녀온 그녀는 이미 관계가 형성돼 그 안으로 들어갈 자리는 없다. 상사도 그녀보다 나이가 어린 여성들이라 편히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혼자 점심을 먹고 휴식 시간에는 맞은편 도가노 타워 안을 바라보는 것으로 회사 생활을 보낸다. 일을 주지 않고 V 계장의 폭언에도 나서 주지 않는 선배와 동료들. 


  필름 한 장이 없어진 사실로 쓰가와를 몰아세우고 사무실 곳곳을 뒤지게 하는 V 계장. 쓰가와는 자신이라는 존재가 녹아버리는 경험을 한다. 그녀가 12월의 창가에서 본 장면으로 이야기의 전개는 다른 방향으로 바뀐다. 마음까지는 아니지만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업무의 피로를 날려버릴 수도 없고 동료들의 이야기에 끼지도 못한다. 무언가를 얘기해도 표정 변화가 없는 선배. 자신의 잘못은 감추고 후배에게 떠넘기는 파렴치함까지. 생활을 위해서 매일 빠져나가는 숫자들을 위해 숨을 죽이고 죄송합니다를 주문처럼 말해야 한다. 


  나가세와 쓰가와의 내일을 조심스럽게 지지한다. 그녀들의 내일은 곧 나의 내일이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서 만난 그녀들은 현실에서 만난 어떤 사람들보다 열심히 살면서 자신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라임포토스의 배 위에 올라 세계를 여행하고 꾸깃꾸깃 접은 사직서를 부장에게 건넨다. 최선이 아니라도 묵묵히. 오늘 쓴 돈을 적으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쓰고. 이 생에서 아쿠타가와상은 받을 수 없지만 캐릭터 스티커로 꾸민 노트북으로 책 이야기를 마음껏 쓸 수 있는 오늘이 있어서 알람이 울리기 전에 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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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과 비평 178호 - 2017.겨울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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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마음을 대체 무엇이라고 말하면 좋을까. 2017년은 미친 사람처럼 감정이 고조되었다가 가라앉기도 해서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상태로 지냈다고 떠올려 본다. 기쁜 일에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날뛰었다.화가 나는 일에도 벌컥벌컥 분노를 드러내서 주변인을 힘들게 만들었다. 사소한 일에도 마음은 숨겨지지 않았다. 마음이 문제였다. 동물이나 식물처럼 마음을 볼 수 없는 존재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에 실린 김금희의 소설 『경애(敬愛)의 마음』을 보는 순간 제목만으로 사람을 울릴 수 있구나, 아직 읽지 않은 소설인데도 위로를 받았다. 「조중균의 세계」를 읽을 무렵, 한국 단편 소설을 거의 읽지 않고 보냈던 시절이었다. 가 닿을 수 없는 그 세계를 원망과 미움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문학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내가 문학을 버린 것이라고 자위했다. 매몰차게 이별을 고했지만 한밤중 자니라는 문자를 하는 옛 애인처럼 나는 문학에게 자꾸만 찌질하게 굴었다. 읽지 않겠다고 했지만 그 해의 우수 단편들을 모아놓은 책에서 나는 김금희의 소설 「조중균의 세계」를 발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이 세계의 책무를 다하는 인물이 건네는 공손한 화해의 악수를 그 소설을 통해 받았다. 

  2017년의 봄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쓴다. 그 일들을 겪으며 나는 당신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는 다짐을 받았다. 우리는 신호를 기다렸다. 지구별에서 쏘아 올린 신호는 미약했지만 곧 답을 받을 수 있었다. 축제의 봄을 맞이했고 우리는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봄에서 시작한 소설 『경애(敬愛)의 마음』을 읽으며 여름과 가을, 겨울을 마주했다. 반도미싱에서 팀장 대리로 이상한 직함을 달고 일하는 상수와 상수가 회사에 요구해서 그 밑에서 일하게 된 경애는 폐기되어야 할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대화는 묘하게 핀트가 어긋났고 친해질 수 없는 공간인 회사에서 그들의 마음은 한 점으로 모이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려간다. 누군가의 마음을 만나는 일,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채는 일들. 경애는 그 마음의 무늬를 헤아리다가 시간을 놓치고 현재의 시간에서 발목을 잡힌 채 살아가고 있다. 돈 내고 나가라,라는 말에 갇힌 경애의 과거. 김금희의 소설에서 내가 발견한 건 조각으로 부서진 누군가의 마음들이었다. 경애의 마음과 상수의 마음.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자 아픈 가슴 때문에 페이지를 넘길 수 없는 나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 들. 소설은 일상을 사는 우리의 흩뿌려진 마음을 이어 붙이려는 김금희 작가의 위로와 격려로 가득하다. 

  창작과비평 2017년 겨울호로 『경애(敬愛)의 마음』은 끝이 났다. 소설의 매력은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이다. 봄에서 시작한 소설은 겨울에 끝이 났다. 12월의 마지막 날 해가 바뀔 때 100개들이 지퍼를 주문하는 인물의 마음을 상상하며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었다. 소설 속도 현실 안도 외로운 마음들이 떠다니고 있음을 확인했다. 괄호를 치고 (연재 끝)이라는 글자를 마지막으로 썼을 소설가의 마음을 어두운 방에 누워서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같은 한자와 한글을 하나씩 나누어 쓴다는 것으로 이 세계에서의 인연을 강조하고 싶은 이곳의 나와 그곳의 소설가가 만날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그럴 수 있다면 서로의 고독한 마음을 주고 받고 소설로서 공손하게 내민 그 악수를 돌려주고 싶다. 우리의 마음은 폐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고 사랑하는 것으로, 경애의 마음으로 무참한 이 세계를 살아갈 수 있는 기억으로 쓰일 수 있었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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