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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보여서 다행 ㅣ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주란 지음, 임수연 그림 / 마음산책 / 2024년 4월
평점 :
다른 책에 나오는 문장을 빌려 오자면 2차 세계대전 당시, 강도 높은 육체노동에 임한 사람들과 읽기와 문서 작성 관련 일을 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배급량이 지급되었단다. 강도 높은 육체노동에 버금가는 게 읽기와 문서 작성 관련 일이라니. 그러니까 내가 요즘 왜 머리와 등이 아픈지 이해를 받은 느낌이다. 병렬 독서가 주는 힘이다.
안 그래도 저질인데 더 한 저질 체력을 가지게 되었고 집중력은 조각조각 흩어져 날아가 버려 한 권의 책을 꾸준히 읽지 못하는 요즘이다.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를 한 달째 읽고 있는 거 실화임?) 그래도 기특한 건 책을 꾸준히 사는 거다. 꾸준히 읽지는 못하지만 꾸준히 사는 나 자신 칭찬해. 다양한 책을 읽으려고 시도는 해보지만 결국엔.
나는 한국문학으로 돌아온다. 더운 여름날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읽었던 하성란, 전경린, 박완서, 이청준, 조세희를 잊지 못한다. 마음의 고향은 한국. 내내 닦이고만 돌아오는(닦인다는 표현을 아시는지 이 표현은 현장 언어로서 주로 직급이 높은 이들에게 혼난다는 뭐 그런 뜻) 4월과 5월에 읽은 소중한 책은 이주란의 짧은 소설을 모은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이주란의 소설이기에 그런 것도 있지만 책의 표지가 상큼 발랄해서 당장에 꾸준히 책 사는 사람으로서 구매했다. 한동안 밥 먹는 식탁에 『좋아 보여서 다행』을 올려두었다. 극효율주의자(나쁘게 말하면 자린고비)로서 생화는 사서 꽂아두진 못하지만 꽃이 그려진 책은 놓아둘 수 있으니 기부니가 좋아져라 하면서.
우리가 헤어졌을 때 인우의 친구들은 인우에게 잘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내게 전한 것은 인우였고 나는 너무 수치스러워서 다시는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버트를 3주만 돌봐달란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었다. 버트가 집에서 지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이주란, 「1년 후」中에서, 『좋아 보여서 다행』)
그러니까 말들이 돈다. 워낙 이해력도 떨어지고 인간사에도 관심이 없는지라 누군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해도 그러려니 한다. 그 말을 듣고 누군가에게 전달해 줄 능력이 없다는 건 좋은 일인가, 나쁜 일인가. 입이 무겁다는데 그건 아니고 기억력이 나쁜 거다. 헤헤. 바보 이미지 지키자. 이주란의 『좋아 보여서 다행』의 첫 소설인 「1년 후」는 헤어진 연인의 부탁을 받고 그의 집으로 가 반려견을 돌봐주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첫 문장이 아찔하다. 헤어진 연인에게 잘 헤어졌다는 친구들의 말을 전하는 인간의 인성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왜 그들이 헤어졌는지 단박에 알겠다. 어떤 말들이 있고 그냥 그 말들을 놔두면 될 것을 굳이 옮기고 부풀린다. 전 연인의 집에 가 반려견을 보살피고 아버지일지도 모르는 사람과 밥을 먹고 어떤 일을 겪고 나서 그 일이 괜찮아지기를 바란다.
『좋아 보여서 다행』의 착하고 묵묵한 사람들은.
긴 산책을 하고 오랜만에 친구가 변하지 않음에 기뻐한다. 그런 시간과 나날과 오늘이 『좋아 보여서 다행』에 존재해서 다행이다. 자꾸 내일, 미래를 이야기하지만 이제 내가 믿지 않는 건 그런 거다, 내일과 미래의 일들에 대한. 부자가 되는 일보다 내일, 미래를 가진다는 게 현실성이 없다, 내게는. 어느 곳에서든 우리가 그 자리에 서 있다는 것과 변했어도 변함을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 그런 게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