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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평점 :
집에 돌아가면 무엇이 있으면 좋을까. 생각나는 도시 괴담 하나. 침대 밑에 사람이 있는 것보다 귀신이 있는 게 더 괜찮다는 이상한 밸런스 게임. 그치. 사람이 있으면 죽을 텐데 귀신이 있다면 내가 지금 미쳐 있구나 하는 정도겠지. 다행히 센서 등은 고장이 나지 않아서 문을 열면 2초 후에 불빛을 내어준다. 그전에. 집 앞에 택배가 있으면 내돈내산이지만 선물 같은 착각으로 일시적으로 마음이 환해질 수 있겠다.
매일의 택배라면 무엇이 좋을까 하다가 그래 책! 만 오천 원 이상이면 무료배송이니 딱 한 권씩 책 택배가 오게 하자. 13년 만의 장편소설 신간이라는 말에 시간이 그렇게 되었단 말인가 하면서 주문한 김애란의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받아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정리 다 해놓고 책을 펼쳤을 때 그 안에 책표지와 같은 엽서가 있었다. 이런 게 좋다.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뜻밖의 선물 같은 한 장의 마음을 받아드는 일. 주황색 불빛 아래에서 천천히 엽서를 읽어갔다. 그중에.
나이 들어 더 느끼는 바지만 시간은 가차없고 시간은 무자비하지요. 하지만 가끔 출발점과 도착점 사이에 어떤 선이 생겨, 이런 이야기를 선물해 주는 게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그 '선' 덕분에 저 또한 사람을 대하는 마음과 눈이 더 깊어졌고요. 그 사이 여러분은 어떤 시간을 보내셨나요? 어떤 이야기에 다치고, 어떤 거짓말에 기대고, 또 어떤 말 때문에 웃으셨을까요? 그 시절을 제가 감히 다 짐작할 순 없지만, 지금도 또 앞으로도 여러분이 가증한 한 좋은 이야기 속에 머무셨으면 좋겠습니다.
(2024년 늦여름 김애란)
장편소설은 쓰지 않았지만 그동안 단편과 산문을 썼다고 소설가 김애란은 밝힌다. 13년의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장편소설만을 쓰지 않았을 혹은 쓰지 못했을 뿐이다. 쓰지 않아도 쓰지 못해도 쓰는 시간이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어 가기 전 엽서에 적힌 문장을 여러 번 읽었다. '어떤 이야기에 다치고'(모든 이야기에 다친 것 같아요), '어떤 거짓말에 기대고'(우리, 나중, 계획이라는 말이 거짓말 같았어요), '어떤 말 때문에 웃으셨을까요?'(일상 대화하다가 뜬금없는 말들에 웃어요)
이런 다정한 질문들이라면 새벽이 가깝도록 내밀한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독자라서 소설가의 늦여름에 도착한 소설과 편지에 주접을 떨지 않을 정도의 슬픔과 기쁨을 표현할 수 있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는 소리, 지우, 채운이라는 세 아이가 등장한다. 모두 혼란스럽고 어쩔 줄 모르는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다. 그 시절 세상은 왜 내게만 각박하게만 구는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징징대고 싶었다.
세계는 나로 인해 돌아가야 하는데 한편으로는 나를 제외한 채 잘만 굴러가는 듯해 억울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는 시기, 청소년기. 세 아이는 각자의 비밀을 끌어안으면서 시절을 지나온다. 같은 반이지만 접점이 없이 지내던 세 아이는 그림과 도마뱀, 손의 감촉을 통해 서로를 알아간다. 그들이 모인 반의 담임 선생님은 특이한 자기소개를 제안한다. 다섯 문장으로 자기소개를 하는데 그중 하나에는 반드시 거짓말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
다섯 문장 안에 들어 있는 하나의 거짓말을 맞춰야 한다. 나를 표현하는 문장을 만들고 거짓말을 섞으면서 진짜 나의 내면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 속에 진실처럼 숨어 있는 거짓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거짓말로 위장했지만 실은 무거운 진실이어서 차라리 거짓이면 좋을 나의 비밀.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 했지만 나조차도 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미래라고 부르는 어느 시간, 그러나 현재.
나는 친구 만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나는 불량학생이었습니다.
나는 부모님이 있습니다.
나는 미래를 계획합니다.
나는 사랑이 전부입니다.
이중 하나는 진실이다. 소설 속 자기소개와는 반대로 가보았다. 모든 것이 거짓이어도 단 하나의 진실만을 내게서 찾을 수 있다면 당신의 어느 시간과 나는 함께 할 수 있겠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속 세 아이들에게 나이만 먹은 채 어른이 되어 버린 내가 겨우 해줄 수 있는 말은 기쁘게도 없다. 대신 손을 잡아주고 엉망인 글씨로 편지를 써주는 정도. 매일 내가 나에게 선물을 해줄 수 있는 오늘을 지낸다면 그걸로 괜찮은 정도. 지쳐도 괜찮고 아파도 괜찮다. 늦여름인 오늘을 살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