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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계 장군이 역성혁명을 준비하면서---- 사기장 심룡에게 백자들을 만들라고 명했다. 그 모습이 백자 박물관 앞에 상으로 만들어져 있다. 늦가을 싸늘한 그늘 속에서 용이가 빚던 것은 백자라기보다는 담담한 숙명이 아니었을까?  

양구백자박물관에서 고려말 사기장 심룡을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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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반을 맡았다는 책임감 때문이었을까? 담임선생은 월말고사라든가 중간고사 등의 성적이 나오는 대로 석차 순으로 우리를 앉힘으로써 치열한 성적 경쟁을 유도했다. 그러니 우리 반 교실에 들어서면 누가 일등이고 누가 꼴찌인지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 잔인한 구조였다. 춘천 지역만 아니라 도내 각 지역의 초등학교에서 1,2등을 다투던 아이들인데 특수반이라는 초() 경쟁학급에 편성됨으로써 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돌이켜보면 그런 비정상적인 학급 편성 또한 당시의 시대상과 연관이 돼 있었다. 1964년은 5·16이 난 지 3년밖에 안 되는 해로써 군사문화가 사회 곳곳에 자리 잡던 때였기 때문이다.

친구와 같은 특수반이었음에도 그리 친하게 지낸 기억이 없는 까닭은 그 때문이 아닐까? 친구는 어떠했는지 모르지만 나는 쉬는 시간 10분에도 시험공부를 했던 것 같다. 종이에 암기해야 할 국사 내용들을 깨알같이 적어 수시로 들여다보며 나름대로 월말고사나 중간고사를 대비했던 기억이다. 그 반의 구성원들은, 요즈음에 유행하는 말을 인용해서 표현한다면. 흙수저와 금수저가 반반씩 있었던 듯싶다. 아버지가 의사라든가 회사 사장이라든가 하는 잘사는 애들과, 아버지가 실직 상태인 못사는 집 애들이 반반쯤 되지 않았을까?

그 친구와 나는 후자에 속하는데 그 즈음 우리 아버지들은 주로 다방에서 소일하다가 귀가하는 생활 모습이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요즈음이야 다방이 사양업종이 돼 찾아보기 힘들지만 당시에는 시내 곳곳에 다방이 있었다. 다방마다 실업가가 아닌 실업자들이 하루 종일 죽치고 앉아 있었다. 물론 나는 어린 나이라서 다방이란 데를 출입할 자격이 못 됐지만, 어쩌다가 아버지를 급히 찾을 일이 생기면 그 다방이란 데를 찾아가야 했으므로 그런 풍경이 눈에 선한 것이다. 그 시절 춘천의 유명한 다방이 예맥이었다. 중앙로 로터리 부근에 있었는데 아마 80년대 들어와 사라진 듯싶다.

 

나는 부속국민학교를, 친구는 이웃한 봉의국민학교를 다녔다. 두 학교는 작은 야산을 가운데 두고 이웃해 있었지만 사이는 좋지 못했다. 부속국민학교는 잘사는 집 애들이 다니는데 봉의국민학교는 그렇지 못한 애들이 다닌다는 게 그 원인이었던 것 같다. 가끔씩 그 야산을 전장 터로 삼아 돌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부속국민학교에 입학할 때는 꽤 잘사는 집 아들이었지만 2학년 때부터는 집안이 망하면서 못사는 집 아들이 돼 있었다. 부속국민학교 어린이라면 하얀 방울이 달린 모자에 교복까지 입어야 했다. 나는 그런 모자와 교복 차림으로 등하교를 하고는 있었지만 아침에 멀건 죽 한 그릇밖에 못 먹은 탓에 늘 어지러웠다. 겉만 잘사는 집 아이처럼 보였을 뿐 실상은 배고파 쓰러지기 일 보 전의, 딱한 어린이였던 거다.

그래도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이 금수저가 다닌다는 부속국민학교 어린이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었던 듯싶다.

더운 여름 어느 날 나를 데리고 공지천의 한 하꼬방 앞으로 갔을 때 분명 친구 아버지한테 이렇게 묻지 않았을까?

우리 아들은 부속국민학교를 다니는데 자네 아들은 어느 국민학교를 다니나?”

봉의국민학교를 다니지.”

아버지들 간에 그런 대화가 있지 않고서야, 몇 년 뒤 춘천중학교 같은 반에서 그 친구를 본 순간 쟤는 봉의국민학교 출신이지하는 인지가 내게 이뤄질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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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까지 4년간 농사지었다. 옥수수와 배추를 농사짓는 정도라 그리 힘들 것 없건만 해마다 체력이 떨어져서 그게 문제다. 과연 2017년 새해에 농사를 지을까 말까 갈등하다가, 작년 봄에 찍어둔 우리 밭 전경 사진을 보고는 마음을 다잡았다. 새해에도 농사 짓기로 말이다. 밭을 갈고 비닐멀칭까지 한 것을 보니 4월말경이라 여겨지는데 가슴이 뛴다. 봄을 맞아 푸릇푸릇한 대지. 땀흘려 일하고 난 뒤에 앉아서 쉬는 저 나무의자. 이제 두어 달 지나면 다시 만날 봄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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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가 왜 오랜이란 수식이 필요한지 이유부터 밝힌다.

 

내가 그 친구를 처음 만난 때는 초등학교 3학년쯤이었다. ‘이란 표현을 하는 것은 그 시기가 확실치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4학년 초일 수도 있고 2학년 말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그 친구나 나나 가정형편이 매우 어려울 때 만났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만났다기보다는 아버지들끼리 만나는데 우리가 곁에 있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될 듯싶다.

그 때 우리 아버지는 운영하던 제지공장이 망한 뒤 사실상 실직자가 된 처지였다. 당시 흔치 않았던 기와집을 나와 변두리 동네에서 셋방을 사는 처지로 전락했는데 여름 어느 날 나를 데리고 공지천으로 간 것이다.

공지천 제방에도 '하꼬방'들이 여럿 있었다. 훗날 깨달았는데, 그 때만 해도 625동란이 끝난 지 채 10년이 안 되었으므로 시내는 하꼬방 천지였다.

아버지가 한 하꼬방 앞에 다다라, “자네 있나?”하고 불렀던 듯싶다.

그러자 하꼬방 밖으로 우리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어른 한 분이 나와 두 분은 악수를 나누며 이런저런 얘기를 길에 서서 나누었다. 하꼬방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마도 좁은 데다가, 더운 날씨였던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 때 나는 좁은 하꼬방 안에 있는, 내 또래 아이를 보았다. 여위었으나 두 눈이 둥근 얼굴이었다. 어른들이야 이미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그 아이와 나는 처음 보는 사이라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어느 한 쪽이 말을 건넸더라면 금세 친구가 됐을지도 모르는데, 나나 그 아이나 말이 없는 성격들이라 서로 소 닭 보듯 한 것이다.

 

어제 내가 그 장면을 얘기하자, 친구 역시 그 소 닭 보듯 했던 순간을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 날 우리 아버지가 친구 아버지를 찾아간 이유도 (정말, 거의 60년 만에 밝혀졌다) 알게 되었다. 두 분은 지방 신문사를 설립하는 문제로 그 날 만났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처럼 친구 아버지도 그즈음 창간호에 실을 원고를 모으고 그랬었는데, 친구와 나의 짐작이지만, 자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결국 무산되고 만 거다. 625동란이라는 참화의 여파가 여전한 그 즈음 두 분은 비록 작은 도시이지만 언론사를 하나 만들려고 했었다. 당시 두 분의 나이 30. 포부는 하늘을 찌르지만 정작 자금이 안 돼 마음고생이 심했을 두 분 어른.

가슴 아프다.

 

그러다가 2,3년 뒤 그 친구와 나는 같은 중학교에서 만났다. 우리는 국어 산수에다가, 턱걸이 같은 간단한 종목을 시험 본 뒤 춘천중학교에 합격한 것이다. 요즈음 나라를 뒤흔든 청와대의 모 여자와 우리는 같은 학번이다. , 묘하다.

그 친구와 나는 같은 중학교에 입학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반이 되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는 특수반이었다. 학교에서 입학 성적순으로 50명을 선정하여 특수반을 만든 것이다. ‘특수반이라니, 사실 요즈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비교육적인 일이 아닐까?

       

이 글은 굳이 장르로 말한다면 경수필에 속한다. 심각하지 않게, 편하게 내 주변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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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는 성적으로 대단한 과도기이다. 무심이 고등학교를 다닌 60년대 말, 그 때 겪은 사춘기의 모습 중 한 부분을 글로 써 남긴 게 승냥이.

명문고를 다닌다 해도 사춘기가 생략되는 게 아니었다. 잿빛 눈동자를 한 친구는 밤마다 공설운동장을 누비는 Lady killer였고 다른 한 친구는 사창가 출입을 일삼다가 결국은 몹쓸 병에 걸려 자퇴했다. 그런 병 정도는 치료가 되었을 텐데 자퇴까지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 부모님이 너무나 실망이 커서이런 자식은 더 이상 공부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자퇴원을 내도록 했던 게 아닐까. 요즈음 같아서는 있을 수 없는 어르신들의 독단이지만 그러나 60년대는 극히 당연한 조치일 수 있었다.

밤마다 공설운동장을 누비던  Lady killer 친구얘기와 사창가 출입을 일삼다가 몹쓸 병에 걸려 자퇴한 친구얘기를 하나로 혼합해 완성한 작품이 무심의승냥이인 것이다.

 

정작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쓰지 못했고 몇 년 지난 대학교 3학년 때 쓴 것이다. 그 때가, 박정희 대통령이토착적 민주주의라는 궤변으로 유신을 선포한 1972년 늦가을이었다. 대학가에 휴교령까지 내려져 하릴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글 쓰는 선배가 찾아왔다. 무심을 보고 싶다며 먼 시골에서 올라온 것이다. 하릴없던 무심은 그 선배를 따라 시골로 내려갔다.

시골에서 가재나 잡아 삶아먹으며 며칠을 보내다가우리 이러지 말고 각자 작품을 씁시다하여 무심이 두어 시간 만에 완성한 게 승냥이였다. 200자 원고지로 50매쯤 되었다. 휴교령이 해제되고 이듬해, 무심은 교지에 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 후 여학생들이 무심을 승냥이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접근 자체를 꺼리면서…… 정말 외로운 날들을 보내야 했다. 기가 막히다. 어떻게 작품을 쓴 사람과 작품 속 주인공을 혼동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시절, 70년대 초는 그러했다.

 

올해 생애처음으로 작품집을 내기로 했을 때 그런 박대를 받은 작품 승냥이를 복권시키기로 무심은 마음먹었다. 내용을 보완해서 200자 원고지로 70매 가량 되는 승냥이가 완성돼 활자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출발은 짐승이다. 어느 때가 되면 발정 난 짐승 같은 시기를 겪기 마련이다. ‘승냥이란 작품은 그런 측면에서 감상해야 한다. 내용 전개 상 거친 표현과 낯 뜨거운 묘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무식한 어느 동창 놈이 대학 시절 교지에 실린승냥이를 읽고 난 뒤 말했다.

2의 방인근이 나타났구먼!”

당시에 방인근이란 음란소설 작가가 있었다. 무심은 그 때부터 그 동창 놈을 아주 무식한 놈으로 여긴다. 어떻게, 음란소설과 순수소설을 구별도 못하는 놈이 국문과를 나오고 나중에 국어선생까지 했는지 난해할 뿐이다.

 

한 편, 이 소설을 쓸 때 어울렸던 선배는 훗날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유명작가가 되었다.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 것이다. 지금은 소원해진 사이라 그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훗날 때가 되면 그 이름을 밝힐지 모른다.

 

작가에게 작품은 그의 자식이다. 비록 거칠고 낯 뜨거운 내용이 많지만 무심은 작품승냥이를 사랑한다. 몸으로 직접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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