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컴퓨터의 한글 프로그램이 나갔다. ‘깨졌다는 표현보다는 나갔다는 표현이 왠지 마음에 와 닿는다. 영어로 바꾼다면 ‘OUT’이라 하지 않을까?

나는 순간 OUT이 됐다. 최순실이란 여자가 공항이라고 잘못 적은 공황상태가 된 거다. 내 주업이 컴퓨터를 켜 놓고서 한글로 이런저런 글을 쓰는 일이므로, 한글 프로그램이 OUT된 일은 내 자신이 OUT된 듯, 충격 그 자체였다.

십 년 넘게 쓴 일기, 재산 관계 기록, 미발표 글 수십 편, 우리 집 자동차에 관한 갖가지 사항들을 적은 차계부, 전기료 수도료 가스요금을 달 별로 기록해 둔 것, 지난해 여름 생애처음으로 발간한숨죽이는 갈대밭에 관한 갖가지 자료들……이 하나도 모니터에 뜨지 않았다. 과장되게 표현한다면 내 우주가 블랙홀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디지털이 아날로그보다 난 듯싶지만 어느 순간 ZERO가 되는 취약성이 있다는 경고를 실감했다.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이럴 줄 알았더라면 컴퓨터로 글을 쓰지 말고 그냥 볼펜으로 종이에 써 둘 걸하는 후회까지 했다.

특히, 힘들었던 모 학교에서의 하루하루가 기록된 일기가 송두리째 날아갔는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라니. 그 일기를 자료 삼아 언제고 장편으로 써서 문제작으로 발표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OUT된 내 컴퓨터의 한글 프로그램이 되살아나지 못한다면 내 인생의 중요한 시간들이 영영 입증될 수 없다는 참담함에 치까지 떨렸다.

 

천만다행으로, 컴퓨터 기술자를 불러 한 시간여 만에 한글 프로그램이 되살아났다. 한글로 쓴 내 글들이 다 살아났다. 나는 그의 단골손님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중요한 조언을 해 줬다.

컴퓨터에 뭘 쓰고 나면 반드시 백업해 두어야 하며, 백업 중에는 자기한테 이메일로 보내두는 방법이 제일 안전합니다.”

그의 말을 금과옥조처럼 지키기로 다짐했다.

 

이번에 한글 프로그램이 OUT되기 전, 왠지 글 쓰는 일도 재미가 없어지고 사는 것조차 시들했었다. 슬럼프라 할까. 그러다가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난 뒤에 나는 맹세했다. 열심히 살기로.

열심히 살자. 그러려면 열심히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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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7-01-25 0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말씀 드리면 기분 상하실까요? ˝행복이 별거 아니다!˝

무심이병욱 2017-01-25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대 기분 상하지 않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평범한 일상이 유지되는 것만도 행복입니다.
 

     

 

(1)

 

나는 월남에서 돌아왔다.

커다란 군함을 타고 비둘기 태극기 풍선 날리는 조국의 항구로…… 환영의 플래카드 속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비행기로, 중상자 후송 비행기로 사월 어느 날 조국의 남부지방 어느 적막한 공군기지로 돌아왔다.

내 가슴에도 훈장은 걸렸다.

한쪽 발과 한쪽 눈은 영영 내게서 달아나고, 몇 십 그람 무게를 가진 훈장 하나가 가슴에 걸렸다. 온통 붕대에 싸인 채로 나는 한쪽 남은 눈으로 후송 비행기 창을 통해 조국의 거뭇거뭇한 모습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아아 일 년 만의 조국이었다.

나의 한쪽 남은 눈에서, 그래도 눈물은 흘러나왔다.

내가 탄 비행기가 내린 모 공군기지. 거기에 비행기의 엔진이 멎고, 부상자들이 차례차례 들것에 실려 내려질 때 나를 감싼 붕대의 섬유조직 틈새로 밀려들던 조국의 냄새. 매캐한 비행기 연료냄새 너머 밀알이 움트는 냄새, 구수한 흙냄새…….

그리고 공항의 가득한 적막. 적막은 조국에서도 나를 맞이하고 있었다. 한 쪽 면으로 검푸른 바다의 출렁임이 보일 뿐 나머지 삼면은 초록빛 야산뿐인 공항, 엔진을 끄고서 졸고 있는 비행기들, 무료한 표정의 관제탑, 군복무의 임무 속에서 세월의 나사를 매만지는 정비병들, 역시 세월의 들것을 무료하게 나르는 의무병들.

후송병원 침대에 누웠을 때는 유리창을 통해 만발한 벚꽃들이 보였다.

벚꽃들은 절정이었다. 병원 둘레 가득히 벚꽃들은 웃고 있었다. 연분홍, 연분홍 웃음들…….

병원은 벚꽃의 소리 없는 웃음들만 있었다. 일정한 시간으로 들르는 간호장교들의 거동밖에는, 심심하기만 했다. 내 침대머리에 걸린 훈장도 심심해 보였다. 나는 그런 훈장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심심함을 문질러버리는 동작으로 그 병원의 시간들을 걸어 나갔다.

애매한 훈장.

내 한쪽 눈과 한쪽 다리가 달아난 곳은 전쟁터 아닌 전쟁터였다.

나는 사단본부의 안전한 장소에서 복무했다. 내가 작성하는 서류에 의해 수많은 전우들이 월남의 이곳저곳으로 이동하였다. 내 펜대에 의해 부상당하거나 포로가 되거나 승리하거나, 혹은 어느 땅굴에서 베트콩과 부둥켜안고 싸울 거라는 상상이나 하면서 월남파병의 세월을 끄적끄적 보내고 있었다.

외출 나간 병사들이 납치될 뻔한 사건이 잇단 뒤로 사단본부의 근무자들은 모두 안전한 영내생활로 제한됐던 그 즈음이었다.

물론 나도 처음 월남에 상륙했을 때에는 전투부대 소대원이었다.

매복 작전.

거미줄 같은 인계철선의 크레모아가 깔린 현장에서 숨죽여 주위를 살피던 긴장 속 나날들. 그런데 매복 작전이 네 달째 이어지면서…… 나는 아무 데로나 총을 갈기고서 영창에라도 가고 싶었다.

끝없는 매복 작전. 숨은 적이 먼저 드러나거나 숨어서 기다리던 우리가 먼저 드러나거나, 어느 쪽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해 몸을 드러내느냐에 전투의 승패가 달린 그 지루한 작전. 성가신 숲 모기들을 견디며 오줌도 매복한 채 누어야 했다. 땀에 젖다가 마르다가를 반복하며 소금기마저 배던 내 몸.

한 번쯤,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치열하게 살아보겠다는 나의 참전지원 의사는 착각이었다. 후회가 막급한 매복생활 다섯 달째 나는 느닷없이 사단본부로 전출되면서 그 지루한 전투부대 생활을 마감한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영문도 모른 채 나는 안전한 사단본부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그 날사건은 터져버렸다.

그 날, 엄폐된 막사에서 책상의 일들을 끝내고 기어 나왔을 때 하늘은 푸르렀다. 비가 그친 직후였다. 월남의 날씨는 늘 그랬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다가도 이내 화창해지는 게, 돌아서면 베트콩이 된다는 그곳 민간인들의 표정 같았다.

나는 푸른 하늘 아래, 본부의 연병장을 걸어가고 있었다.

태양의 무수한 조각들이 땅바닥과 야자수의 푸른 이파리들과 쇳덩이 포신들 위에서 뒹굴고 있었다. 눈이 부셨다. 눈을 가늘게 뜬 채로 나는 걸어가고 있었다.

월남의 태양은 강인했다. 철모를 부술 듯 하늘에서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영내 가득히 펄쩍펄쩍 뛰고 있었다.

나는 눈을 잔뜩 찌푸리고 걸었다. 온몸의 세포들이 꿈틀대는 게 역력했다. 밀림의 모기들처럼 군복을 사정없이 꿰뚫고 들어오는 뜨거운 열기. 땀이 흘렀다. 영내는 넓었다. 적막은 넓었다.

적막 속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내 발끝에 무엇이 걸렸다. 나는 눈을 거의 감은 채로 그것을 걷어차 버렸는데…… 고막의 한계를 넘는 폭음과 함께 미쳐 날뛰는 한쪽 다리와 태양을 보았다. 걷어찬 것은 수류탄이었다. 적막은 찢어졌고 찢어진 틈새로 태양의 비늘들이 가득 퍼부어졌다.

그리고 내게도 훈장이 수여됐다.

정말 애매한 훈장이었다.

내 손아귀에 들어가는 그 쇳덩어리의 면적은, 내 한쪽 다리와 한쪽 눈알을 보상해주기엔 너무 좁아 보였다.

그리고서…… 나는 다시 이 적막한 공간에서 심심함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통증을 호소하는 신음들이 끊이지 않지만 왜 이리 후송병원은 적막한 곳으로 여겨질까? 게다가 판에 찍은 듯 반복되는 일상의 심심함까지. 어쩌면 이런 풍경은 또 다른 전투 풍경일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친 몸을 갖고서 통증을 견뎌 나가야 하는, 지루한 날들에 대한 매복 작전?

유리창 밖으론 벚꽃들이 웃는데 온종일 쑤시는 상처. 내가 남자로 살아있음을 깨닫게 해 주는 유일한 낙인 간호장교들의 몸매와 움직임. 금빛 광택뿐이던 훈장에는 꼬질꼬질한 손때가 묻어갔다.

 

경자를 만난 건 초가을이었다.

벚꽃이 다 떨어져버리면서 끊임없이 등창()과 싸워야 하는 여름이 왔는가 싶더니 어느 덧 선선한 가을바람일 때 경자가 우리 병실에 들어섰다. 경자는 세 번째 바뀐 담당 간호장교였다.

경자는 광대뼈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추녀였다. 모래밭의 개미떼 같은 주근깨들.

그 경자가 가을이 지나가고 매서운 추위가 닥친 날, 내 침대 옆 유리창에 사랑합니다란 글씨를 손가락으로 썼다. 흰 성에가 가득 핀 유리창이 사랑합니다란 글자들로 파이면서 밖의 겨울풍경이 새어들어 왔다. 무거운 잿빛 하늘, 벚나무 가지마다 핀 눈송이 꽃들.

사랑한다니?

몸의 절반이나 잃은 꼴인 나를 사랑한다는 뜻인가? 점심식사 후 낮잠들 자느라 조용한 주위를 둘러보고서 나는 소리 낮추어 반문했다.

정말입니까?”

경자는 정말입니다고 다시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써보였다. 곤혹스러웠다.

경자가 사랑합니다란 글씨를 쓴 것은 그녀가 시월에 오고서 세 달 만의 일이었다.

세 달.

그녀는 정해진 시간에 와 체온을 재고 주사를 놓았었다. 가끔씩 내 침대 맡에 머물며 얘기를 건네기도 해서 말동무가 생기나보다 했는데 그렇게 느닷없이 사랑한다 했다. 일시적인 감정의 충동으로 그런 글씨를 쓸 나이가 아니었다. 서른이란 노처녀 나이. 넙적한 얼굴에 가득한 개미떼들.

나보다 다섯 살이나 더 많은 나이, 결코 일시적인 행위가 아닌 고백, 세 달이란 시간.

나는 아무 말 못하고 앉아 있었다. 그런 내게 그녀는 자기의 손목을 내밀어 내 손으로 쥐게 만들었다. 곤혹스런 내 외눈엔 눈물이 가득 고였다. ‘사랑합니다’ ‘정말입니다의 글씨들로 벗겨진 유리창의 성에 틈새로 보이던 겨울의 풍경들도 얼룽얼룽해졌다.

그 겨울이 가고 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도시의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정작 친지들보다 더 많은 잡지사와 신문사 기자들이 식장으로 달려왔다. 취재의 화살은 나보다도 경자에게로 퍼부어졌다. ‘어떻게 몸이 불편한 분과 장래를 약속하게 되었습니까?’

경자는 간단한 대답으로써 기자들의 호기심을 일축하였다.

저는 이분을 사랑합니다.”

그 이상의 대답은 필요 없었다.

부모님부터 고모 이모네까지 참석한 우리 쪽에 비해, 경자네 쪽에선 같이 일하던 간호장교 두셋이 가족처럼 왔을 뿐이라 양가 어른들의 인사 차례도 생략하고 간단히 치러진 결혼식이었다. 나중에 경자가 해명하기로는, 어머님 한 분이 살아계시지만 노환으로 누운 데다가 친척도 별로 없는 자기 집안이라 했다.

기자들은 결혼식장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피고서 요란뻑적지근한 판단을 내렸다. ‘신부네 집에서 극심한 반대가 있었는데도 결국은 한 여성의 진실한 사랑이 승리를 거둔 것이다.’. 기자들은 경자의 이름을 필두로 자기네 감정까지 듬뿍 발라가며 기사를 써갈겨댔다. 우리의 결혼은 그렇게 뉴스거리가 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나흘간의 불국사 신혼여행.

신혼여행을 마치자마자 경자는 신문들에서 우리 관련 사진과 기사들을 찾아 따로 스크랩해놓느라 바빴다.

나는 그런 경자를 지켜보면서 방구석에 심드렁하게 누워 있었다. 경자의 몸은 돌덩이였다. 아무리 껴안아도 변화가 오기는커녕 오히려 소름 돋는 피부로 나를 맞는 불감증…… 경자는 석녀(石女)였다. 나흘간의 신혼여행은 초등학교 아이들의 수학여행이나 다를 바 없었다. 아니, 그보다도 못한 따분하고 쓸쓸한 여행이었다.

어떻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 묻진 않았다. 그녀와의 약속, 결혼식을 올리기 전 날의 약속 때문이다. ‘서로의 상처는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는 그 약속이 나는 내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알고 또 눈물을 흘렸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상호쌍무적인 약속이었다.

경자는 첫날밤부터 도무지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어리둥절한 내게 그녀는 자기는 본시부터 그랬다면서 쿡쿡쿡 울었다. 나는 술만 마시다가 새벽녘에야 녹아 떨어져 잠이 들었다. 나흘간의 신혼여행은, 내가 경자한테서 사랑합니다란 유리창 글씨를 받던 순간 곤혹스럽던 무엇을 처음으로 헤아리게 된 여행이었다.

어쨌든 단칸셋방에서 우리의 신혼살림이 시작되었다.

상이용사와 사랑에 빠진 간호장교 출신 여인을 격려하는 전국 각지의 성금과 물품들이 답지하기를 보름여, 더 이상 답지할 게 없는 즈음이 되자 경자는 물품들을 모두 반값에 내다팔았다. 성금에다가, 병원을 퇴직할 때 받은 자기 퇴직금은 물론 내게 지급되는 상이군인 연금까지 자기 통장으로 끌어 모으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경자는 큰 가방 두 개로 짐을 꾸렸다. 무슨 짐이냐고 묻자 경자가 답했다.

당신은 그저 따라오기만 해요. 시골로 가는 거니까.”

어리둥절한 내게 그녀는 그곳에 직장과 살 집도 얻어 놨으니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나는 더욱 어리둥절했다.

우리는 기차를 타고 가다 낯선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탔다. 포장이 안 된 도로 탓에 심히 덜컹대는 버스로 가길 두어 시간. 마침내 버스에서 내렸다. 허허벌판에 우리 둘만 서 있었다.

큰 가방 두 개를 양손으로 나누어 든 경자와 목발을 짚은 내 그림자가 흙먼지 이는 벌판에 드리워졌다.

경자는 앞장을 서서 벌판 끝 산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쩔룩쩔룩 뒤따라가다가 힘겨워 멈춰 섰고 그러면 경자는 그걸 모르고 얼마만큼 가다가 멈추어 서서 나를 기다리곤 했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늦봄의 햇살은 비스듬한 각도로 들이쳐서 나는 고개도 똑바로 들지 못하고 풀풀 날리는 경자의 발걸음 흙먼지를 주시하며 뒤따라야 했다.

조금도 지치는 기색 없이 손에 쥔 두 가방을 앞뒤로 엇갈려 흔들며 앞장서가는 경자.

산과 산 사이의 골짜기 길로 들어섰다. 옆으로 다가서는 산들로 점점 좁아지는 하늘, 십 리쯤에 한 채씩 보이는 민가, 요란해지는 계곡의 물소리.

저녁나절에 어느 낡은 너와집 앞에 도착했을 때 내 목발이 부러져나가, 긴 나뭇가지를 대신 짚어야 했다.

너와집은 화전민이 사는 집이었다. 머리 한 번 감은 적이 없어 보이는 봉두난발 화전민 내외가 우리를 맞았다. 비어 있는 옆방이 우리가 며칠 묵을 방이라 했다. 빛바랜 신문지들로 도배된 벽, 가마니 두 장이 장판 대신 깔려 있는 방바닥. 보리밥 저녁을 얻어먹자마자 나는 물먹은 솜처럼 쓰러져 잤다.

사흘 후.

경자가 어디서 구해온 목발 하나. 나는 다시 경자 뒤를 따라 나서야 했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또 다시 산길. 긴 뱀이 아무 일 없다는 듯 가로지르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괴기한 새 울음소리. 웬 사마귀가 경자의 머리카락에 붙었다가 날아가기도 했다.

쩔룩쩔룩, 경자를 따라 굽이굽이 산길을 갔다.

산 위의 태양은 엄청난 소리로 맴돌며 땀에 젖은 내 몸을 무겁게 내리 눌렀다. 나는 앞으로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목발을 짚었다.

한나절 걸려 도착한 곳은 조그만 학교였다. 교문도 없는 운동장 저 편에 자리한 교실 한 칸짜리 분교.

돌투성이 운동장은 잡초들까지 무성했다. 나는 목발을 내던지고 운동장 어귀의 포플러나무 등걸을 부여잡고 섰다. 겨드랑이 살갗이 벗겨지고 문드러져서 피가 웃옷에 배어 있었다. 게다가 어지럽기까지.

빈혈 증세.

분교의 빛바랜 유리창들마다 한 개씩의 태양이 담겨져 운동장을 내다보는 한낮. 나는 가쁜 숨을 가누면서 어질어질한 채로 서 있었다.

경자는 건물 한쪽 끝으로 달려가더니 종을 치기 시작했다.

땡 땡 땡 땡……

종소리들이 유리창의 널린 태양들과 함께 내 지친 신경을 후려치고 있었다. 나는 옷 속의 훈장을 만지며, 그 차가운 촉감을 손바닥으로 받으며 빈혈증세와 싸우고 있었다.

  

 

(2)

 

화전민 아이들 일곱 명이 전교생인 분교.

척박한 오지라 의무교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했다. 우리가 오기 한 달 전에도 어떤 청년이 일 년을 근무하다가 황황히 사표를 내고 떠났다 했다. 그런 식으로 배운 아이들이라 제대로 배운 게 없었다. 전교생 일곱 명 중 항상 두어 명은 결석하는 교실. 나는 그런 애들을 썰렁한 교실에 앉혀놓고 국어, 산수, 자연, 도덕, 미술 등 모든 과목을 가르쳐야 했다. 뺄셈도 제대로 못하는 애들한테, 주워온 도토리들을 들고서 수십 번 나눗셈을 반복설명하다 보면 오전이 다 지나가면서 끝나는 수업이었다.

내가 교실에서 수업할 때 경자는 밖에서 돼지새끼들에게 매달렸다.

양돈축산의 미래란 책자를 방바닥에 펴놓고 수시로 메모하며 양돈 연구에 전념하는 경자. 경자는 여기 오기 전부터 양돈사업을 계획했던 게 분명했다. 주변 산에서 나무 등걸들을 주워 일정한 길이로 잘라 직사각형 돈사를 만들고, 삼 십여 리 떨어진 읍내에 나가 실한 돼지새끼 두 마리를 사 오는 등…… 경자는 혼자 몸으로 양돈사업을 시작했다.

아무리 가르쳐도 제자리인 애들에 비해 대견스럽게도 잘 크는 돼지들. 잡식성 동물답게 인근 개울의 가재들부터 산기슭의 도토리들, 주변의 잡초들, 우리가 먹고 남기는 음식찌기까지 모두 다 좋은 사료였다. 돼지들의 성장이 기대 이상이었으므로 경자는 돈사를 새로 더 짓기로 했다.

일요일이었다.

경자는 읍에서 불러온 인부들을 데리고 개량식 돈사 짓기에 나섰다. 반듯한 슬레이트 지붕, 환기가 잘 되는 울타리 구조, 일정하게 사료가 나오는 급식장치, 분뇨가 잘 빠지는 바닥 시설……. 외진 골짜기에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돈사였다.

그럴 때 나는 방바닥에 엎드려 학습지도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각 과목별로 작성해야 하니 그 분량은 만만치 않았다. 물론, 학습지도안의 작성교사 이름은 박경자였다.

나는 고용직으로, 경자는 교사로 채용된 신분이었다. 정작 초등 준교사 자격증을 가진 경자는 돼지를 기르는데, 아무 자격증 없는 나는 애들을 가르치며 학습지도안도 짜는 교사 역이었다.

양돈으로 대성해 보겠다는 경자.

경자는, 아무 거나 잘 먹고 번식력도 왕성한 돼지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 몇 년 안에 양돈축산계의 혜성으로 떠오를 계획이라고 내게 털어놓았다. 돼지의 약점이라고는 오직 전염병에 취약할 뿐인데 이곳은 가까운 민가가 십여 리나 떨어진 깊은 산골짜기이니까 그런 면에서 아주 안전한 청정지대라 했다.

얼마나 치밀한 경자의 사업 계획인가.

경자는 우리의 첫 만남부터 양돈사업까지, 모든 일을 철저한 계획 아래 이끌어가고 있었다.

산골짜기는 비좁은 하늘 때문에 하루해가 짧았다.

동쪽 산등성이에 가려 오전 열 시경에 떴다가 오후 네 시경만 되면 서쪽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 그 때부터 골짜기는 서늘한 산그늘에 들어 있다가 별들이 뜰 때부터는 적막한 밤에 파묻힌다.

바람결에 흩날리듯 들리다 말다 하는 라디오 방송. 코 골며 자는 경자. 석유램프 불을 끄면 그런 소리들 이외에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방. 그럴 때 또 하나의 소리로 보태지던 나의 수음 소리. 죽지 않고 살아나는 젊은 성욕을 수음으로 달래는 그 쓸쓸한 어둠. 어쩌다가 경자를 깨워 관계를 시도하지만 필경은 딱딱한 돌덩이를 안은 느낌에 제풀에 죽던 그것이었다. 반쪽짜리 내 몸으로는 도저히 헤어날 길 없는 질긴 어두움, 깊은 골짜기.

늦가을로 접어들었다.

낮이 더욱 짧아지면서 찬바람도 자주 불어쳤다. 개울의 가재들도 바위 밑으로 깊숙이 숨고 갈참나무 낙엽들이 무더기로 분교 주위에 쌓여갔다. 경자는 바빠졌다. 김장을 담그고, 숙소 곳곳을 비닐로 감싸고, 가마니들로 돈사를 겹겹이 둘러주고…….

마침내 암퇘지 놈이 발정하였다.

밤의 골짜기를 뒤흔드는 야릇한 울음소리를 듣고 플래시를 들고 나간 경자는 희색이 만연해져 들어왔다.

이제 접 붙여야지! 그게 벌겋게 변했더라고. 책에 적힌 그대로이네.”

그 날 밤 경자는 돈사에 매달려 밤을 지새우는데 나는 느닷없이 저리며 쑤셔오는 왼쪽다리에 방바닥을 구르면서 어쩔 줄 몰랐다. 월남에서 떨어져 나간 그 다리가 아픈 것을 어떻게 납득해야 할까. 없기 때문에 달랠 수도 없는 허공의 통증.

나는 부엌에서 소주를 찾았다. 그 소주는 경자가 음식 간을 맞출 때 쓴다고 남겨 둔 큰 병 소주였다. 2/3정도 남은 그것을 다 들이켰다. 그래도 없는 왼쪽다리는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급기야는 사라진 왼쪽 눈알까지 함께 쑤시기 시작했다.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깨어났을 때는 늦은 아침이었다. 경자가 끓여놓았는지, 머리맡에 놓인 미음을 떠먹었으나 쓰린 속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없는 다리 쪽을 만져보았다. 덜렁거리는 바지가닥이다. 어둑한 방안에 그대로 누워 있을 수 없었다. 기진한데다가 숨 막힐 것 같은 좁은 방안. 나는 목발 없이 기어서 밖으로 나섰다. 태양이 좁은 골짜기의 하늘 안에 비집고 들어와 있었다.

무거운 햇빛들.

나는 숙소 외벽에 기대고 섰다가 풀썩 쓰러졌다. 온몸의 피가 다 빠져버린 듯한 빈혈 증세. 뒤통수부터 휘몰아치는 어지러움.

운동장 어귀 쪽에서 덜커덩 소리가 들려온 게 그 때였다. 경자였다. 수레에 무언가 잔뜩 싣고 돌투성이 많은 운동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최고가의 양돈 사료들이 반입되고 있었다.

 

늦봄에 돼지새끼를 열두 마리나 얻으면서 꿈에 부풀던 경자였다.

일 년 만에 돼지 마릿수가 열네 마리가 되었으니 몇 년 안에 백여 마리 돼지에 달할 듯싶었다. 사료도 몇 번씩 사 나르고 개량식 돈사도 세 채나 추가로 지으며 몇 년 안의 대성공을 눈앞에 둔 듯한 경자가…… 허무하게 쓰러져 버릴 줄이야!

가장 가까운 민가가 십여 리에 있는, 아주 청정한 골짜기라 믿고 지내왔는데 돼지 전염병에 열네 마리 돼지 모두가 차례차례 죽어 자빠질 줄은 몰랐다.

돼지콜레라라고 했다. 돼지들은 피를 토하며 죽어 버렸다. 뒤늦게 읍내 수의사까지 모시고 왔으나 소용없었다. 죽은 돼지들을 수레에 싣고 나가더니 저녁이 다 되어 경자는 들어왔다. 술 냄새가 독하게 났다.

이런 데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폐인이 된다며 내가 마실, 숙소의 술병들까지 내다버린 그녀가 술주정뱅이 꼴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수레는 어디다 팽개쳐두고 왔는지 보이지 않았다.

며칠을 두고 경자는 방에 틀어박혀 울다가 자다가를 반복하며 폐인처럼 보냈다.

어느 날 아침.

경자는 결연한 표정으로 밥상 위에 원고지들을 펴 놓고 앉았다. 골짜기 개울의 찬 물에 세수하고 들어오더니 그런 모습으로 방 가운데에 자리 잡은 것이다. 마침내 나는 사랑하는 그이와 큰 꿈을 품고서 도시를 떠났다-……로 시작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수기였다. 몸의 절반을 잃은 상이군인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체험 이야기. 경자가 두 달 가까이 밤잠까지 설쳐가며 매달린 끝에 완성된 수기의 제목은 나의 사랑, 절망을 딛고.’

수기 작성에서도 얼마나 치밀한 경자인가. 돼지들을 치다가 절망에 빠지는 사람은 그이였고 아내인 자신은 학생들을 맡아 가르치는 교사로서 분교 교육에 헌신하면서 장애자 남편 일도 돕는 얘기로 수기는 꾸며져 있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동안 아이들을 가르친 사람은 문서상으로 박 경자였으니까. 어차피 그 누구도 들여다본 적 없는 수업들이었으니까.

경자는 읍내에서 사진사까지 모셔 와 피투성이로 남은 절망의 현장들을 사진 찍게 했다. 돼지새끼들이 죽어버린 돈사 앞에 목발 짚고 선 내 독사진과 교실에서 열심히 수업하는 자기 모습의 사진들. 어리둥절한 아이들을 야단쳐서 저요! 저요!’ 손들고 발표하는 동작들까지 만들어낸 경자. 수기 원고에 증거자료로 첨부한다고 했다. 이백 자 원고지로 천이백 매. 모 잡지사에서 창간기념 생활수기를 거금을 걸고 공모한다 했다.

우리는 분교를 떠나기로 했다.

경자가 묵직한 수기 원고를 소중하게 천으로 싸면서 내린 결정이었다.

  

 

(3)

 

짐 가방 두 개로 정리된 우리의 분교생활.

스크랩북의 결혼식 사진까지 증거자료로 첨부된 수기는 읍내의 우체국에서 잡지사로 발송되었다.

밖에서 경자를 기다리며 서 있던 나는 길옆 가게의 유리창에 비쳐진 내 몰골을 보았다. 산그늘 속에서 살아온 1년 반 동안 창백하게 말라비틀어진 몰골. 목발로 기울어진 체형.

머리가 사정없이 핑 도는 빈혈증세가 되살아났다. 후송병원에서부터 링겔로 부축되던 빈혈. 그 빈혈은 내게 컴컴한 그 무엇을 말해주었다. 그것은 은밀한 목소리였다. 나는 호주머니 속의 훈장을 만졌다. 훈장은 매끄럽고 찼다.

우체국 밖으로 나온 경자는 다시 가방들을 들고 앞장을 섰다. 시골 읍에서도 가장 싼 여인숙을 찾아 가방 둘을 앞뒤로 흔들며 가는 경자. 그리 오래 걷는 게 아님에도 나는 수시로 지쳐 멈춰 서곤 했다.

짐을 푼 허름한 여인숙 방.

며칠간 하품만 하며 누워 지내던 경자는 문득 제안을 했다.

우리 여행을 가요. 여기서 오십 리 남짓한 산 너머에 갈대가 무성한 초원이 있는데, 풍경이 꽤 좋다거든요. 거기에서 하루나 이틀 야영을 해 보는 거지요. 어때요, 내 생각이?”

생활수기 당선작 발표를 사흘 앞둔 날의 늦은 오후였다. 느끼한 햇살이 쥐틀만한 유리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경자의 제안에 나는 처음으로 내 의견을 말했다.

그럼, 거기서 사냥도 하자고.”

 

버스를 타고 그 산의 아랫마을에 도착한 뒤 갈대밭 초원을 찾아 길을 나섰다.

분교를 찾아갈 때처럼 짐들을 양손에 들었는데도 지치지 않고 앞장서서 굽이굽이 산길을 가는 경자. 쩔룩쩔룩 뒤따르다가 멈춰 섰다가를 반복하며 뒤를 쫓는 나.

마침내 갈대밭 초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등성이에 다다랐다. 붉은 황혼 빛에 흠뻑 물든 초원 앞에서 경자는 환호성을 질렀다.

야아호 야아호……

환호성은 끝없이 메아리쳤다.

우리는 그 자리에 텐트를 쳤다. 저녁밥을 지어 먹고서 배낭 속 포도주 병을 꺼내 나누어 마셨다. 행복에 겨운 경자의 표정. 경자는 자신하고 있었다. 이틀 후 야영을 끝내고 여인숙으로 돌아가면 수기 당선자임을 알리는 통지가 와 있을 거라고. 그 날을 미리 자축하는 밤이었다.

밤중에 승냥이의 울음이 들렸다.

경자는 내 몸을 잔뜩 끌어안고 떨었고, 나는 엽총에 탄알을 넣고 승냥이를 기다렸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날이 밝았다. 초겨울 같은 추위가 엄습했다가 서서히 풀리며 훤하게 동트던 새벽.

동녘에서 태양이 떠오르자 갈대밭은 일시에 금빛으로 젖었다. 금빛 바다, 그 바다로 우리는 아침 밥 짓는 연기를 푸르게 날려 보냈다.

아직도 싸늘하게 남은 새벽추위에 벌벌 떨며 밥을 먹을 때 경자는 일부러 냠냠 소리를 내면서 자기가 한 입, 남편에게 한 입 하는 식으로 장난스런 숟가락질도 하였다.

태양이 하늘 가운데로 옮겨가자 갈대밭은 아침 금빛들을 낟알처럼 털어내고 퍼렇고 누런 제 모습을 찾아갔다. 경자는 점심 반찬을 마련해야겠다며 야아호 야아호 소리 지르며 갈대밭으로 내려갔다.

나는 텐트 속에 누워 갈대밭을 내려다보았다. 키 작은 경자는 갈대밭 속으로 스며들어가서 그 움직임은 갈대의 움직임으로 나타난다.

태양은 흰 이빨들로 웃기 시작했다. ‘낄낄낄웃음소리들이 갈대밭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나는 배낭을 뒤져 소주를 꺼냈다. 한 모금 또 한 모금 마셨다.

적막이 내게 눈짓을 했다. 빈혈도 은밀하게 말을 건넸다.

끝내버려.’

우체국 부근에서 본 내 퀭한 몰골이 눈앞에서 웃고 있었다.

나는 엽총을 들었다. 갈대밭을 겨누었다. 빈혈이 가늠쇠 구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여러 장면들이, 땀에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끊임없이 부침했다. 캠퍼스 시절 다방탁자에 가득 쌓이던 성냥개비들…… 내 동정을 삼킨 창녀의 하품…… 치열한 전투를 각오한 참전 지원…… 사단 연병장, 찢어진 적막의 햇살…… 사랑합니다’, 벚나무의 눈꽃들…… 산길, 목발…… 돼지새끼, 아이들, 생활수기 공모……

 

경자가 마침내 나타났을 때 나는 내 목발을 던졌다. 흰 선을 그으며 목발은 갈대밭 속 경자 부근에 파묻혔다. 얼떨떨한 표정의 경자에게 큰 소리로 일러 주었다.

경자야! 빨리 도망가. 도망가야 산다니까.”

그리고 타앙한 발을 허공에 쏘았다. 총소리는 타앙 타앙 타앙 초원을 흔들며 퍼져나갔다. 경자의 앙탈 섞인 목소리가 이내 기어 올라왔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내 입술로 흘러드는 땀의 짠맛을 느끼며 나는 답했다.

무슨 소리냐고? ……더 이상 경자의 남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소리야. 경자. 경자는 이제 빨리 도망가서 다른 남주인공을 찾으라구. 양 다리가 달아나고, 양 눈이 다 달아나간 멋진 주인공 말이야.”

나는 다시 타앙 타앙 타앙 세 발을 그 주위로 쏘아 갈겼다. 악에 받친 앙탈의 소리가 다시 나오르려다가 경자는 허겁지겁 갈대밭 속으로 몸을 낮추어 숨었다. 경자의 모습 대신 갈대의 움직임이 있었다. 나는 엄습하는 졸음과 현기증을 고개 흔들어 깨우면서 갈대밭의 움직임을 조준해 한 발 한 발 쏘아갔다. 갈대의 움직임은 한참씩 안 나타나기도 했다.

경자가 갈대밭 속에 웅크리고 앉아, 불감증의 손으로 주근깨의 얼굴에 뒤범벅인 땀과 눈물을 닦으며 핵핵 떨고 있을 게 분명했다.

갈대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나는 그것을 놓치지 않고 겨냥해 쏘았다.

마침내 연거푸 두 발을 쏘았을 때 짧은 신음소리가 튀면서 갈대밭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모든 풀과 나무와 바람과 하늘은 숨을 죽였다.

태양은 숨을 죽였다.

하늘에서 쏟아지던 태양의 파편들도 그대로 공중에 얼어붙었다. 갈대밭 초원에는 그 파편들 대신 적막이 쌓이고 있었다. 나는 엽총을 목발 대신 짚고 그 적막을 내려다보았다.

넓기만 한 초원.

! 하는 소리와 함께 훈장이 발 주위에 떨어졌다.

무공에 관한 찬사의 글씨들이 다 닳아버린 훈장, 거기에는 바짝 얼어붙은 태양이 숨죽이며 들어 있었다.

자아 어디로 가야하나.

초원은 넓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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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고 있는 지역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평소에는 모르다가, 영화의 배경장면으로 등장했을 때 아니, 내가 살고 있는 곳이 저렇듯 아름다웠나!”하고 놀라며 감탄하기 일쑤다. 어젯밤 몹시 추운 날씨임에도 아내와 함께 다른 길이 있다는 영화를 보러 영화관에 간 건 그 때문이다. 우리가 춘천에 살고 있는데 이 영화가 춘천을 주요 배경으로 아름답게 촬영되었다지 않던가


 

 

   영화를 보고 난 뒤 아내와 나는 영화 감상평을 얘기 나누었다. 그 결과 다음의 의견들이 모아졌다.
1. 자살 사이트에서 만나 자살하는 장소로 선정한 춘천의 겨울 풍경은 일품이었다. 로케이션을 잘했다는 뜻이다. ‘죽음의 차가운 예정 장소이기는 하나 아름다운 겨울 미학을 보여줌으로써 결국은 재생의 희망을 모색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2. 남자 주인공을 발굴해내었다. 선한 눈망울이지만 우울함이 짙게 배어 있는 표정이어서 마치 '자살하려고 태어난 사람' 같았다.
3. 결말이 아쉬웠다. 자살을 공모한 두 사람 모두 극적으로 되살아난다는 게 현실감이 없었다. 둘 중 한 사람만 극적으로 살아나는 것으로 결말지어야 리얼리티도 있고 관객들 가슴에 와 닿지 않을까? 주인공 둘 다 되살린다는 것은 우리에게 마치 자살 방지 계몽 영화한 편을 본 느낌을 갖게 했다. 하긴, 이 영화의 제목 다른 길이 있다부터가 이미 계몽적이다. 이 기회에 감독에게 권하고 싶다. 영화의 주제는 그렇더라도 제목은 추상적으로 설정해야 한다고. 예를 들어 겨울의 끝이나 춘천 어디서라는 제목은 어떨까?
4. 대체로, 배우들이 맡은 역을 성실하게 연기했는데 일부 연기자는 경직된 연기로써 실망시켰다. 또한, 연탄가스에 중독되면 주위에 토사물이 널려있는 게 자연스러운데 그렇지 않고 단정한 장면으로 처리돼 있어 아쉬웠다.
 
  지구 온난화 탓일까, 근래 들어 많이 약화됐지만 춘천의 겨울은 춥기로 악명이 높았었다. 하지만 그만큼 아름다운 겨울 풍경도 갖고 있었다. 춘천 토박이들도 잊고 살았던 춘천의 아름다운 겨울 풍경을 새삼 되돌아보게 만든 이 영화의 관계자들에게그 노고에 격려의 박수를 쳐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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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내 잠자리 베개 맡엔 Miconos 항구의 그림이

언제나 열려 있다.

 

술 취한 밤이면 Miconos

붉은 반란을 내다보고

술 깬 아침이면 滿船을 펼치는 갈매기들……

 

나의 갈매기들이여

너희는 얼마큼 나는가

태양이 빠진 Miconos 바다 위로

얼마나 날아가는가.

    

 

         2

 

주민등록증을 받고 돌아오는 저녁

이마 위로 떨어진 갈매기 한 마리

 

돌아올 수 없는 나의 船舶을 통지해 주었다

 

아아

빗장을 걸고 얼굴을 잡으려 했으나

거울엔 鍍金만이 있을 뿐 아무 것도 없었다

 

없었다

 

재발급 받은 것은 기억이었다 빗장 걸린 현주소

구겨진 항구, 本籍이여

 

닷새를 술에 적신 날

나는 Miconos 항구로 기어나갔다

 

캄캄한 밤이

碇泊해 있었다

 

*작가의 말

 

 

 이 시는 대학 4학년 때인 19736월경에 썼다.   

 

문학회 회원들 중 시를 쓰는 후배들이, 춘천 시내 한복판에 있는남강이란 지하 다방에서 시화전을 계획했는데 그 때 내게 형님, 시 한 편만 써 봐요.’부탁하여…… 밤새워 나온 작품이다. 소설 숨죽이는 갈대밭이나 승냥이처럼 하룻밤에 쓰인 것이다. 지금은 체력이 달려 엄두조차 못 내지만 대학시절만 해도 그런 일이 가능했다.

이 시를 쓸 때 내 방 한 쪽 벽에 붙어있는 그리스 Miconos 의 사진을 보며 시작(始作)했다. ‘아아같은 탄식이 등장하는 등 어설픈 면모가 역력하지만 당시의 쓸쓸하고 참담한 심정이 나름대로 잘 표현됐다고 믿고 싶다.

 

시화전 첫날 국어과유병석교수님도 다녀갔다. 그분은 문학 평론가였는데 다방 벽에 걸린 시들을 쭉 보다가 걸음을 멈추더니 한 마디 했다.

이 시가 제일 좋다.”

바로 내 시‘Miconos 이었다. 사실 그분은 개인적으로는 나를 그다지 좋게 보지 않았다. 강의를 성실하게 듣는 모범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버릇없는 학생이었는지 그분이 있는 회식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여하튼 (나한테) 학점 안 좋게 주는 교수들은 각오해야 할 거야.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술기운을 빌려 한 말이었지만 얼마나 버릇없는 학생이었을까. 그런데 그분 역시 만만치 않았다. 떠들썩한 술자리니 못 들은 척 넘어갈 수도 있었건만 이렇게 답했다.

그래? 그것도 참! 조심해야겠네.(쓴웃음)”

내 젊은 시절의 만용에 대해 후회가 많다. 유병석 교수님에 대한 얘기만으로도, 나는 소설 한 편을 쓸 수 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쓸 것이다. 물론 그분은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43년 만에, 먼지 덮인 박스 안에서 이 시 ‘Miconos 을 찾아내곤 지금 관점에서는 미흡해 보이지만 여하튼 햇빛을 받게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Miconos 항은 세계적인 관광국(觀光國) 그리스의 아름다운 항구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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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을 알게 됐다.

그 중 한 젊은이인 J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생각이 너무 많은 젊은이다. 멀쩡히 다니던 대학을 굳이 다녀야 할 의미가 없다며 자퇴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문제는 J가 대학 자퇴 후에 의미 있게 사는 삶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좋으나 싫으나 우리 사회는 아직은 학력사회라 고졸 학력으로는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 어려운 탓이다. 그래서 J는 전단지 돌리기 같은, 몸으로 하는 힘든 일을 하며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 결과 현실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던 것 같다.

 

J한테 친한 친구 K가 있다. K는 한 때의 방황을 극복하고 이제는 회사를 다니며 열심히 살고 있는 젊은이다. 둘이 만나 술이라도 한 잔 하다보면 그 때마다 J나는 외국으로 갈 거다!’고 외쳤단다. 현실에 대한 불만을 에둘러 표현한 게 아닐까? 그런 외침도 한두 번이지 매번 만날 때마다 그러니 어느 순간 K가 짜증이 났단다.

그래, 외국으로 나가! 말만 하지 말고.”

몇 번 그랬더니 놀랍게도 J가 정말 외국으로 나갔단다.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도 아니다. 비행기로 열 시간 넘게 타고 가야 하는 먼 외국으로 갔단다. 더 놀랄 일이 벌어졌다. J가 이런 전화를 K한테 했다니.

외국에 오기는 왔는데 이제 어떡해야 하니?”

어이가 없어 K가 되물었다.

그럼, 거기 왜 간 거야?”

그냥 온 거야.”

통화가 끝나고 K가 나한테 와 전후사정을 말하고는 좋은 의견을 구했다. 멘토라 할 나도 사실 무심한 데가 많아 지인이 호를 무심이라 붙여줄 정도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번 J의 경우는 무심을 넘어 한심한 게 아닐까. 나는 K한테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그 녀석한테 말해. 좋은 경험 했다 치고 그냥 귀국하라고. 귀국한 다음에 다시 한 번 제대로 살아보라고 해.”

글쎄, 이번 일이 어떻게 귀결될지 모르겠다.

 

사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순진한 경우가 아닐까?

몇 달 전부터 온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박근혜 사건을 보자. 두 사람의 국정 농단의 내용들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대통령 당선 뒤 청와대에 들어간 뒤 웬만하면 사람들을 대면하는 일 없이 관저에서 지내기를 즐겼다는 사실도 그렇고…… 공황장애란 단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고 공항장애라고 쓰는 최순실이란 여자가 대통령 연설문을 다듬고 심지어는 국정 인사까지 개입했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아는 젊은이의 어처구니없음은, 최순실박근혜의 어처구니없는 국정농단에 비해 얼마나 순진한가. 나는 J가 지난해의 목적 없는 외국여행을 좋은 경험 삼아, 새해에는 아주 열심히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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