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함없는

강가 자갈들은 늙지도 죽지도 않는

박제(剝製) 천벌을 받았다

흘러가버리는

강물을

축하하는 까닭이다

 

덧없는 인생이어서

다행이었다

 

강물이 흐르며 빚어지는 무수한

무늬들

그 중 몇 점이라도 사랑하며

함께 흐르는 게

사는 즐거움이다

 

봄날

강가에서

화창한 冥想 한 점

물결 위에 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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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근처 야산에 올라가보면 풍경이 그토록 삭막하고 조용할 수가 없다. 나무들은 잎들을 따 떨어뜨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서 있고…… 야생동물들은 추워서건, 먹이가 없어서건 어딘가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봄이 되면 야산의 풍경은 확 달라진다. 나무들은 가지마다 푸른 잎을 달기 시작하고 야생동물들은 여기저기서 움직이는 것이다. 청설모나 다람쥐는 물론이고 새들도 짝을 찾거나 먹이를 구하느라 분주하다. 흉측한 뱀까지 여기저기 풀숲을 다니기 시작한다.

  

 

우리 동네에 5일장이 있다. 닷새에 하루, 떠들썩하게 장이 열린다. 나흘 동안은 쥐 죽은 듯 인적이 그쳐 있다가 닷새째 되는 날 온통 떠들썩한 인파로 활기가 넘치는 것이다.

그런 광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쩜, 겨울 산이 봄을 맞아 떠들썩하게 바뀌는 풍경하고 닮았나!’

겨울 동안 산의 생물들이 숨죽이며 있다가, 봄이 되자 제 각기 나타나 떠들썩하게 한 판 장을 벌이는 광경 같은 것이다.

그렇다. 5일장 같은 봄이 머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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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일이다. 어느 선생님이 우리들 공책을 다 걷은 뒤 이틀 후 되돌려주었다. 공책마다 검사 도장이 한 곳씩 다 찍혀 있었는데 선생님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똑같은 검사 도장이 아니다. 공책에 필기를 얼마나 정성껏, 깨끗하게 잘했느냐에 따라 제 각기 다르게 검사 도장을 찍었다. 어떻게 다르게 찍었냐고? 그런 나만의 비밀이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리는 학급에서 공책 필기를 아주 잘하는 친구와 그렇지 못한 친구의 공책을 나란히 펴놓고 어떻게, 찍힌 검사 도장이 다른지 비교해 봤다. 과연 검사 도장이 달랐다. 필기 잘하는 친구의 공책에 찍힌 검사 도장이 더 진했다. ‘선생님이, 공책 필기를 잘할수록 검사 도장을 진하게 찍는다고 쉬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또 다른 친구의 공책에는 검사 도장이 진하게 찍혀 있는데도 필기 상태가 엉망이었던 거다. 그런 친구들이 여럿 나타났다.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자 실장이 소리쳤다.

분명히, 검사 도장이 진하게 찍혔느냐 여부가 비밀의 열쇠가 아니다. 다른 비밀의 열쇠가 있다. 그걸 찾아라!”

그 결과 검사 도장이 바르게 찍혔느냐가 비밀의 열쇠다.’ ‘아니다, 검사 도장이 공책의 상단부에 찍혔느냐, 하단부에 찍혔느냐가 비밀의 열쇠다.’등등 여러 가지 의견이 속출했는데 그 어느 것도 정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이게 비밀의 열쇠라고 확정 지으려는 순간 영락없이 예외의 경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비밀의 열쇠를 찾다가 지친 우리는 결국 그 선생님한테 직접 여쭈어보기로 의견을 모았다. 실장이 대표로서 나섰다.

선생님.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검사 도장이 공책에 어떻게 찍혀 있어야, 필기를 잘한 건가요?”

선생님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그건…… 나만의 비밀이다."

세월이 오래 흐른 후 나는 깨달았다. ‘애당초 비밀의 열쇠 따위는 없었다.’

바쁜 선생님이 어떻게 수많은 학생들의 공책 필기 상태를 일일이 다 보며 검사할 수 있는가. 그냥, 편하게 검사 도장을 찍고 공책들을 되돌려준 것이다. 선생님이 공책 필기 상태를 보며 검사 도장을 제 각기 다르게 찍었다.’고 한 말은 우리들이 공책 필기에 정성을 다하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 허언이었다.

 

어젯밤 외출했다가 귀가하는 길에 강냉이 튀기는 장수가 남겨놓은 물건들을 보았다. 튀겨놓은 강냉이 여러 포대와 튀기는 기계까지 한곳에 모아놓고 넓은 비닐로 꽁꽁 둘러싸 묵었는데, 그 장소가 외지고 어둑했다. 양심이 불량한 자들의 손을 탈지도 몰랐다. 그 때문일까, 강냉이 장수가 매직글씨로 쓴 경고판이 한 옆에 있었다. 종이상자의 한 면을 활용한 경고판인데 그 내용을 고대로 옮긴다.

“CCTV가 가동중임.”

순간 나는 중학교 때 공책 필기 상태에 따른 검사 도장 찍기사건이 떠올랐다. 하지만 양심 불량의 작자들한테 그 경고판이 엄하게 작용하길 바라며 밤길을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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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가구나 되는 마을이 아침부터 산그늘에 있다가 밤을 맞는다. 햇볕 한 번 쬘 일 없이 어둡게 지내는데도 뜻밖에 유원지로 자리 잡은 이 이상한 마을. 그 내력은 이렇다.

이 마을 앞으로 맑고 얕은 하천이 흐른다. 가족 단위로 물놀이하며 놀기 좋은 이 하천이 홍수만 나면 마을을 덮쳤다. 홍수를 피해 마을의 집들이 뒤로 물러나 뒷산 기슭으로 붙었다. 이 뒷산도 묘하다. 높이가 해발 사백구십 미터밖에 안 되지만 가파르면서 북향이니까, 마을은 종일 산그늘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십여 년 전부터 전국적으로 여가를 즐기는 바람이 불었다. 이 마을이 물놀이하기도 좋고 등산하기도 재미난 곳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외지 사람들이 주말마다 몰려들었다. 본래 열다섯 가구이던 게 두 배로 늘어나면서 마을은 유원지처럼 되었다. 대부분 민박집이거나 가게들로 바뀐 것이다.

내 사랑 닭갈비집은 이 마을에서 별난 존재이다. 다른 집들은 모두 산기슭에 자리 잡았는데 이 집만 하천 가에 제방을 쌓고 남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이차선 도로를 사이로 두고 다른 집들과 떨어져 있는 이 집은 그래서, 혼자만 햇빛을 받는다.

 

내 사랑 닭갈비집 박 사장이 산그늘에 깔려 있는 어둑한 마을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낮인데도 등을 켜놓고 손님들 기다리고들 있지만, 그러면 뭐하나? 강아지 한 마리 안 지나가는데……. 이럴 때는 우리 식당이 그만이지, 전등 하나 켜 놓지 않아도 햇빛이 잘 들어서 이렇게 밝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손님이 없을 수가 있나. 이맘때면 대학생들부터 오티니 엠티니 찾아와서 우리 마을 모두들 정신없이 바빴는데…… 올해는 이렇게 썰렁하니, 나 참.

속으로 그러고 있을 때 웬 낡은 경차 하나가 도로에 나타났다. 방향지시등도 깜빡이지 않고 천천히 이 쪽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왔다. 산그늘이 도로까지 드리운 때라서 그 차는 무거운 자주색이었다가 이쪽으로 들어서면서 햇빛을 받아 밝은 색으로 바뀌었다. 예전 같았으면 박 사장은 이럴 때 문을 열고 나가 그 손님을 맞는 시늉이라도 했다. 지금은 그냥 실내에서 지켜보기만 한다.

식당 옆 주차장으로 들어서더니 멈춰서는 경차. ‘우리 식당 주차장에 차 세워놓고 딴 데 일을 보러갈 사람이다.’고 박 사장은 단정했다. 한적한 도로라 해도 도로변 주차는 단속대상이니까 남의 주차장을 슬그머니 이용하는 모습이겠다. 검은색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잿빛배낭을 등에 메는 것을 보고 박 사장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남자는 주차장을 벗어나 도로 쪽으로 걷는다. 다니는 차들도 없으니까 지팡이로 천천히 아스팔트 도로를 탁 탁 짚으며 간다. 등산복에 묻은 햇빛들을 떨어내며 도로를 가로질러 어둑한 산그늘의 마을 쪽으로 가는 남자. 박 사장은 그런 뒷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지금 시각이 오후 두 시 반이다. 이런 시간에 혼자 산을 간다고? 보름 전에 내린 눈이 산에 적지 않게 남아 있을 텐데 등산한다고? 어디 눈뿐인가, 산의 곳곳이 얼음판으로 변해서 위험할 텐데. ……아는 민박집이라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오늘은 그 민박집에서 자고 내일 오전에 산에 올라갈 계획으로 말이다. 그러려면 여자와 함께 민박집으로 가는 게 보통인데 저 남자는 뭐야? 하긴 저런 낡은 경차에 동승할 여자는 없겠지. 쪽팔리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이나 하며 박 사장이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그 남자김 과장은 구멍가게 앞에 섰다. 가게 간판이 짧은데 그나마도 왼쪽 부분이 떨어져나가 니슈퍼이다. 여닫이문이 덜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니까, 담요를 두른 채 졸고 앉았던 구멍가게 주인이 화닥 깨어 눈을 떴다. 이런 가게는 말하지 않고 손짓으로도 충분하다. 김 과장은 진열장의 먼지 덮인 위스키 한 병을 손으로 가리켜 그걸 넘겨받은 뒤 만 원 한 장을 건네고는 거스름돈을 받았다. 배낭 속에 위스키 병을 집어넣고서니슈퍼를 나섰다.

이제 준비는 다 되었다.

구멍가게 옆으로 비좁은 골목이 나있다. 무질서하게 들어찬 민박집들 사이로 생겨난 이 골목을 빠져나가야, 산으로 오를 수 있다. 김 과장은 좁고 퀴퀴하기가 사타구니 같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다른 데는 몰라도 골목길은 다니는 사람들 발길에 지난 번 내린 눈이 다 녹았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걸레쪼가리 같은 꼴들로 추하게 남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살짝 얼어 있기까지 해서, 하마터면 김 과장은 미끄러질 뻔했다. 옆의 담벼락을 잡지 않았더라면 몸을 다칠 뻔했다. 왜 이리 이 골목이 다른 데보다 싸늘한 거야?

그늘진 산기슭에 있어서 다른 데보다 기온이 낮은 게 아닐까? 창자처럼 구불구불한 골목 모양이 긴 굴뚝같은 역할을 하면서 바깥의 찬 공기를 잘 빨아들이니까 다른 데보다 한층 낮은 기온을 유지한 것일 수도 있겠지.

김 과장은 오늘 이 산을 찾은 음울한 목적에 어울리지 않게 과학적인 추리도 해 보며 골목길을 오르는데 ! !”어느 집에서 종이봉지를 찢는 소리로 개가 짖기 시작했다. 다른 집의 개까지 합세해서 짖는다. 민박집들이니까 사나운 개는 없다. 대부분 복날에 잡을 수 있는 종류들인 데다가 찾아들 민박 손님들의 안전을 위해서 목에 줄까지 매어 놓았으니까 전혀 걱정할 게 없다. 작년까지 여기를 자주 지나다닌 김 과장이었으므로 그런 개들의 처지까지 잘 알고 있다. 괘념치 않고 골목길을 가면 되는데 다만 한 군데 신경 쓰이는 데가 있다.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민박집의 개다. 그 놈은 얼토당토않게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고급 견종이다. 그 놈은 별로 짖지도 않고 허연 눈길로 지켜보는데 그게 여간 무서운 게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각 철장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다.

겁먹을 필요도 없이 그 앞을 그냥 지나가면 될 텐데 김 과장은 그러질 못한다. 바닥을 탁 탁 찍던 지팡이까지 들어 올려 두 손으로 쥐고는 조심스런 걸음으로 골목을 올라간다.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험한 겨울 산을 올라가서 음울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이 그깟 철망에 들어 있을 개 한 마리에 신경이 쓰이다니.

그 민박집 앞에 다다랐다. 허연 눈매로 자기를 지켜볼 그 개를 예감하고서 앞만 보며 지나치려다가 언뜻 눈에 들어온 마당 풍경이라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철망 안이 텅 비어 있고 마당에 세워 두던 민박이라고 먹물로 굵게 쓴 목재 입간판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지난 가을부터 산에서 날아들어 자리 잡았을 낙엽들이 즐비하다. 낙엽들만도 아니다. 과자 봉지들,‘단체 오락에 쓰이는 플라스틱 막대’, 터진 빨간 풍선 조각, 검은 비닐봉지 따위도 널려 있다. 무슨 일이 있었나? 물론 김 과장은 이 집 주인이나 가족들을 알지 못한다. 다른 민박집과는 다르게담장이나 대문도 없이 마당 한가운데에 민박이란 입간판 하나 세워 놓는 풍경으로 골목의 끝자락을 점하고 있어서 기억할 뿐이다. 게다가, 사납게 생긴 시베리안 허스키까지 있으니까.

일 년 사이에 이 집이 망했나?

그런 생각을 하며 골목을 빠져나왔는데 그러고 보면 좀 이해가 안 되는 마을 풍경이었다. 작년 이맘때눈 한 번 내리지 않은 겨울이었다.도 혼자 이 마을로 등산을 왔었는데 그 때는 대학생들이 넘쳐나서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기가 변비 걸린 것처럼 여간 힘들던 게 아니었다.

북적대던 이 마을에도 불경기가 찾아들었나? 김 과장은, 길게 산 위 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서면서 불경기 걱정도 해 보았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렇게 쓸데없이 남의 걱정을 하며 산기슭을 오르던 게, 벌써부터 흔들리는 결심이었다.

 

산기슭의 빽빽한 민박집들을 빠져나와 시멘트 길을 밟으며 천천히 산을 오르는 남자가 여기 내 사랑 닭갈비집에서도 보인다. 저 부근은 경사도가 사십도 쯤 된다. 시멘트 길이 휘지 않고 곧게 났기 때문에, 여기서 바라보기에는 남자가 조금씩 위로 이동하며 작아지는 전자게임의 사람처럼 보인다.

저 남자가 절에 가나? 시멘트 길은 백여 미터쯤 나아가다가 오른편으로 꺾이면서 절로 들어간다. 절은 여기서 보이지 않는다. 소나무나 향나무들을 울타리 삼아 가득 심어놓아서, 여기서는 검푸른 색깔뭉치로 보이는 데에 절이 있다. 그 곳을 빼놓고 일대는 낙엽송들뿐이다. 잎들을 다 떨기고 선 낙엽송들 풍경이, 산에 긴 꼬챙이들이 꽂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낙엽송들 사이로 난 시멘트 길에서 우회전하지 않고 그대로 사라지는 남자. 시멘트 길을 벗어나서 그대로 산으로 오르려는 모양이다. 거 참, 눈도 있고 얼음도 깔렸을 텐데.

내 사랑 닭갈비집 박 사장은 그런 알지도 못하는 남자를 걱정하다가, 쳐들었던 오른손을 내렸다. 눈부시게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을 막느라 쳐들었는데 이제 저리기 때문이다. 갈증이 난다. 주방 쪽을 향해 소리친다.“아줌마아!”

아줌마는 주방 바닥에 앉아 김장하다가 박 사장이 부르는 소리에 두 손을 물에 씻은 뒤 냉장진열장부터 향한다.

아줌마, 그거.”

뭐 그렇게 재촉하지 않아도 그녀는 안다. 진열장에서 소주 한 병과, 오이무침을 꺼내어 쟁반에 담아 들고 박 사장이 죽치고 앉아 있는 출입문 가까운 좌석커다란 둥근 쇠판과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나무판에 갖다 놓는다.

술을 쪼금만 하세요.”라는 당부를 잊지 않던 그녀였는데 그냥 주방으로 되돌아온다. 박 사장이 소주라도 마시면서 속상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면 그만도 다행이라는 생각에서다. 글쎄, 같은 여자로서도 이해하기 힘든 박 사장 사모님이었다. 여기 장사는 불황이지만 도시에 아파트를 두 채나 가진 부자인데다가 남편도 착하겠다, 애들도 서울에서 명문대학을 다니겠다, 모실 시부모도 없겠다…… 그런데 뭐가 아쉽다고 바람이 나? 그것도 단골손님으로 들르던 산악회 총무라는 연하 남자와 말이다. 여섯 살이나 어리다니, 그 남자는 고작 서른여섯 살이겠다. 우리 큰아들 나이밖에 안 되는 철부지 남자와 눈이 맞다니, 그건 다 너무 걱정 없이 살다 보니까 쓸데없이 걱정거리를 만든 경우가 아닐까.

아줌마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주방에서 김장을 다시 할 때 박 사장은 소주를 마시기 시작한다. ……. 목구멍을 넘어가자 위벽을 통해 온몸으로 퍼지는 알싸한 소주 맛. 저물녘에 저 산 위로 노을 지는 그 맛이겠다. 불그레하게 사방으로 번져나가다가, 끝내는 어둠으로 사라지는 노을의 맛.

박 사장은 아직도 오후의 햇살이 여전해서 두어 시간은 지나야 볼 수 있는 그 산의 노을을 잔으로 따라 마시는 듯, 취흥에 잠긴다. 사는 게 무어람. 이렇게 소주 몇 잔으로도 불콰해지면 되는 거지.

박 사장이 그러고 있을 때 산 중턱의 김 과장은 낙엽송 지대를 벗어나 생강나무와 아카시나무들이 많은 지대로 들어섰다. 이 부근은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온 바위에 맞아 꺾이거나 밑동이 눌린 나무들이 적지 않다. 눈도 곳곳에 남아 있다. 바위 밑이거나 나무 밑동의 그늘진 곳에 남은 건조한 눈들. 등산화에 밟히면 푸석 하고 속 빈 붕어빵 꺼지는 소리를 내면서 납작해진다.

이윽고 비탈이다. 수직에 가까운 비탈이니까, 겁먹은 여 등산객들은 오를 생각을 포기하고 갖고 온 김밥이나 까먹고 다시 하산한단다. 이 비탈은, 중간 중간 서 있는 참나무들을 타잔이라도 된 듯 잽싸게 잡아가며 올라야 한다. 그런 나무 잡기에 실수했다가는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 십상이다. 이런 험한 비탈 때문에 이 산을 오르는 게 재미있단 소문이 나고 그래서 등산객들이 몰려들면서 산그늘 마을이 번창하게 된 게 아닐까?

김 과장은 배낭끈을 다시 한 번 조이면서 잠시 쉬었다가, 마침내 비탈을 오르기 시작한다. 오를 때 손으로 잡는 참나무들 밑동에는 바위가 걸려 있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나무 밑동에 걸린 것들이다. 그런 바위들도 조심해야 한다.

나 참, 자살하려는 놈이 이런 조심까지.

어찌 됐건 이런 어수선한 비탈에서는 죽고 싶지 않은 김 과장이다. 정신없이 비탈을 다 올라왔다. 땀도 나고 기진했으므로 쉬어야 한다. 두 평 넓이의 너럭바위가 하나 있다. 김 과장은 배낭을 벗어서 그 바위에 놓고 앉았다.

돌이켜보니까, 뜻밖에 비탈에는 눈이 없었다. 경사가 심하니까 내린 눈이 쌓일 수가 없었거나, 동쪽 비탈이라서 아침마다 햇빛을 받으면서 다 녹았을지도 모른다.

7부 능선에서 8부 능선 사이가 될 이 너럭바위 부근에는 눈이 허옇게 남아 있다. 비탈을 오르기 전에 만났던 건조한 눈도 아니다. 얼음처럼 된 단단한 눈이다. 이런 눈밭에 싸리나무, 철쭉나무들이 이파리 하나 없는 앙상한 몸체들로 남아있다. 김 과장은 배낭을 연다. 그 속에는 아까 니슈퍼에서 산 위스키와 음울한 목적을 위해 준비한 밧줄이 꽈리를 튼 꼴로 들어 있다. 계획은 다 서 있다. 우선은 위스키로 만취한 뒤에 부근의 벼랑 위에서 몸을 던지거나,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든든한 나무그루를 찾아서 가지에 밧줄을 건 뒤 목을 맬 계획이다. 두 가지 자살 방법을 설정해 놓았으니 이제는 선택만 남았다.

벼랑은 여기서 삼사 미터를 나아가면 나타난다. 벼랑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까마득하게 산기슭이 보인다. 술김에 눈을 감고 벼랑을 뛰어내린다면 까마득한 허공으로 몸이 떨어지면서…… 산기슭의 바위들에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날 테다. 그게 내키지 않으면 그냥 이 부근에서 나무를 찾아 목을 매면 될 것이고.

이 일대는 키 작은 관목들이 대부분이지만 제법 큰 소나무도 두엇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사실 이 곳으로 장소를 정하기도 간단치 않았다. 최소한도 집에서는 결행하고 싶지 않은 김 과장이었다. 결혼해서 십오 년째 살아온 지긋지긋한 공간이란 점도 그렇고, 아내가이 인간이 나가서 뒈지지 않고 이게 뭐야하며 자기 시신을 타박할 것 같은 우려에서였다. 동네 야산을 생각했지만 사람들이 많은 거기서 남의 이목들을 피해 결행한다는 게 불가능할 것 같았다. 더구나 요즈음은 봄방학이라고 학생들까지 야산을 놀러 다니고 있었다. 결국 김 과장은 지난 번 내린 눈이 여태 남아 있을이 산을 결행 장소로 정하고 오후를 기다려 차를 몰고 온 것이다. 이 산을 전에 다녀본 자신의 경험에 의하면 사람들은 오전에 등산하지, 오후 들어서 하는 경우가 없었다. 오후 시간에 이 산 아래로 차를 몰고 온 이유는 그러했다.

김 과장은 위스키 병마개를 딴 뒤 우선 한 모금 맛을 본다. 왜 이리 써? 소주처럼 달착지근하게 쏘는 맛도 아니고, 이건 그냥 쓰다. 소주 사 올 것을 그랬나? 죽는 첫 번째 순서를 밟으면서도 이렇게 생각이 많다.

 

내 사랑 닭갈비식당 안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길어졌다. 안 쪽의 냉장진열장까지 닿았다. 오후 네 시는 되겠지. 박 사장은 벽시계를 본다. 역시 오후 네 시 오 분이다. 도로 건너 산그늘 속에 있는 가게들의 불빛이 이 무렵에는 유난해 보인다.

기우는 햇살이 산의 서쪽에 강하게 달라붙으면서 산그늘의 어둠이 더욱 부각되니까 가게 불빛들이 유난하게 보이는 게 아닐까. 그건 산그늘 밖의 서녘 햇빛과 만나려고 몸부림치는 모양 같다.

내통하려고.

아내가 그 놈과 대낮에 도시의 모텔에서 만나 껴안고 뒹굴고 그러다가 시치미를 떼고 식당으로 돌아오고 그러는 줄은, 박 사장은 몰랐었다. 아내는 은행 일 따위를 본다고 정기적으로 도시를 다녀왔고, 박 사장은 그런가 보다 하고 식당만 지키고 있었다. 주인이 가게를 비우는 횟수에 비례해서 매상이 떨어지게 마련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온 마을 사람들에게 다 퍼진 아내의 바람소문인데도 혼자만 까맣게 몰랐던 건 이 식당만 도로를 건너 혼자 있는 탓이다. 웬만해서는 도로를 건널 일 없이 지내는 박 사장이니까.

그냥 집에서 살림이나 하라 할 것을, 식당의 품삯을 조금이라도 아끼려고 아내를 끌어들인 게 잘못이었다. 지금, 주방 아줌마는 모르고 있지만 박 사장은 이 식당을 도시의 아는 복덕방마다 부탁해 놓았다. 가격대가 맞으면 팔아 버리고 이 마을을 떠날 것이다. 애들 이름으로 사 놓은 도시의 아파트 두 채 중에서 한 채도 팔고 그러면 다른 데 가서 무슨 장사인들 뭣하겠나.

박 사장은 소주병이 다 비워졌으므로 다시 한 병을 갖다 마시려고 의자에서 일어나다가 콰당 넘어졌다. 주방에서 김장을 마쳐가던 아줌마가 허겁지겁 달려온다.

괜찮아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비틀대며 일어나는 박 사장이다. 밥도 제대로 먹지 않고 오후만 되면 술타령인 사람이니, 딱하다. 쯧쯧쯧. 아줌마는 혀를 차다가 말한다. “고만 마시지요.”

괜찮아요.”

하면서 박 사장은 그예 냉장 진열장으로 가서 소주 한 병을 집었다.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웠는데도 왜 이리 정신은 말똥말똥한 거야?

이거 중국산 짝퉁 위스키 아니야?”

하고 산 위의 김 과장은 혼잣말로 떠들어보는데 짝퉁 위스키는 아닌가 보다. 자기가 지금 떠드는 말이 라디오 방송처럼 귀에 들리니 말이다. 취한 것은 분명하다. 일어서려니까 사방이 어지럽다. 다시 너럭바위에 털썩 주저앉았는데, 몸은 휘청거리고 정신은 말똥한 이 기괴한 분리 현상이 감당하기 어렵다. 이런 몸으로는 벼랑까지 가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나무를 찾아 밧줄을 걸어놓기는 더욱 힘들 것 같다. 그예 걱 걱 울기 시작한다.

어떻게 내가 사 년 만에 폐인이 된 걸까? 사 년 전 직장에 사표를 던지고 나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이제 마흔임에도 나이 많다고 받아주는 곳 없는 취업현실에다가,‘집안의 생계를 맡을 수밖에 없다며 어딘가를 다니기 시작한 아내, 낮잠 자기나 텔레비전 보기로 소일해야 하는 날들의 무료함 등은 나를 이 지경으로 내몰았다. 특히 아내의 변화. 최소한의 잠자리도직장 일로 피곤하다며 거부한다. 대학 후문 부근의 카페에서 주방 일을 새벽까지 보고 오느라 피곤하다는데, 얼마 전 알았지만 아내는 노래방 도우미를 다니고 있었다. 그건 사실상 매춘이다. 나는 창녀의 기둥서방이 되었다.

한 때, 여기서 멀지 않은 도시의 자동차 판매 대리점의 과장이던 사내가 지금 찬 기운이 들이치는 산의 8부 능선에 앉아 울고 있다. 이십 여 분은 울다가, 일어서서 산 아래 쪽을 내려다보니까 뜻밖에 마을 풍경이 훤히 보인다. 전에는 푸른 숲이나 무성한 나뭇잎들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풍경이, 겨우내 잎들이 떨어지니까 그렇게 훤히 보인다.

문득 오줌이 마렵다. 허연 김을 날리면서 흰 눈밭에 검은 구멍을 송송 만드는 오줌줄기. 더하는 한기에 몸을 떨고서 김 과장은 바지춤을 여몄다. 여유를 갖고 경이로운 눈길로 산 아래 마을 쪽을 내려다본다. 산기슭의 많은 집들이 지붕이나 옥상을 보이며 어둑한 산그늘 속에 있는데 오직 도로 건너 한 집만 햇빛을 받고 있다. 차를 두고 온 그 식당이다. 그 옆의 검붉은 한 점처럼 보이는 그 차. 서쪽에서부터 긴 땅거미가 깔리고 있어서, 그 식당이 혼자서 받는 지금의 햇빛도 한낮처럼 밝고 투명한 빛이 아니다. 불그레한 게 왠지 불길하다. 어둑한 산그늘 속의 집들보다, 지는 햇빛을 받는 그 식당이 오히려 음울하게 보이는 이 기괴함이라니.

지금 몇 시나 됐을까? 폴더에 시간이 나타나는 휴대폰을 바지주머니에서 찾았는데, 없다. 어떻게 된 걸까? 분명 바지주머니에 있었는데…… 차에서 내릴 때 떨어트렸나? 이럴 때가 종종 있다. 무슨 생각에 골몰하면서 차에서 내리다 보면 휴대폰이 자기도 모르게 운전석 밑에 떨어져 있었다. 이따 내려가서 찾아 봐야지. 결국 김 과장의 음울한 목적은 이런 식으로 흐지부지 되었다. 하긴 다부지게 자살할 사람이었다면 오직 죽겠다는 마음 하나로 이 산을 올랐어야 하지 않을까? 아까 민박집들 골목을 빠져나올 때부터 이런저런 것들에 신경을 썼으니, 솔직히 그 때부터 김 과장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어떻게 하산하느냐이다. 취해서 휘청거리는 몸에, 가파른 비탈길에, 어두워지는 시간에, 휴대폰도 없는 처지에.

김 과장은 취기가 빠지느라 그런지, 아니면 해가 지느라 그런지 더욱 오싹한 한기에 몸을 쭈그리고 앉아서 당면한 문제의 해결책을 생각해 본다. 그렇다. 술이 더 깰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때 내려가자. 갖고 온 밧줄을 이용해서 참나무에 걸었다가 풀기를 반복하면서 비탈길을 내려가면 되지 않을까? 괜히 서둘렀다가는 참나무들에 부딪치며 굴러 떨어질 텐데 중상을 입기 십상이다.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 서두르지 말자. 깨끗하게 죽느니 만도 못한 몸의 꼴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김 과장은 민망하게도 자기 목에 걸려고 준비했던 밧줄을 믿고 이 험난한 비탈길을 내려갈 참이다.

 

아줌마는 박 사장한테 퇴근을 허락받았다. 경기가 좋았을 적에는 늦은 밤에도 손님들이 찾았지만 요즘 같아서야 어디. 그녀는 만일 손님이 드시면 연락 주세요.”라는 말은 남기고 식당 문을 나선다.

사실, 박 사장은 소주를 세 병째 마시고 있는 중이라 종업원이 무슨 말을 해도, 다 듣지도 않고 고개부터 끄덕일 것이다. 그런 주인을 두고 종업원이 먼저 퇴근한다는 것은 안쓰럽지만 동시에 부담스럽기도 해서 그녀는 그렇게 먼저 퇴근한다. 막냇동생 나이 되는 주인이지만 남녀가 유별하지 않나. 좁은 이 마을에서 부인이 바람나서 홀아비가 된 남자와 단 둘이서 밤늦게까지 있기는 좀 뭐하다.

그녀가 도로 쪽으로 발걸음을 뗄 때 무슨 고상한 클래식 음악이 들렸다. 도로 건너 카페에서 나는 쿵쾅거리는 음악은 아니다. 뭐에 갇혀 있는 듯 답답한 느낌이 있는 음악. 그녀는 멈춰 서서 둘러보다가 옆의 주차장 구석에 있는 경차에서 그 소리가 나고 있음을 알았다. 다가가서 차 안을 살펴보니까 역시 운전석 아래에 떨어져 있는 휴대폰이 그런 음악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발길을 되돌렸다.

저녁을 지나면서, 일대는 어둠을 뒤집어쓰고 있다. 해가 떠 있을 때에는 햇빛을 받는내 사랑 닭갈비집과 그렇지 못하고 산그늘 속에 있는 가게들로 양분된 마을이었는데이렇게 밤이 되면 그런 구별이 없어지면서 모두가 한 어둠 속에서 불들을 밝히며 지내는 다정한 풍경이다.

아줌마는 가로등 불빛과 가게들 불빛이 서로 겹치거나 엇갈리느라 어지러운 도로를 건넌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그녀는 집에서 민박을 치면서 살았다. 술을 즐기던 영감이 추운 날 뇌졸중으로 마당에서 쓰러지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영감은 두 달 만에 세상을 떴지만 남은 것은 빈한한 살림과 시베리안 허스키라는 괴상한 양놈 개 한 마리. 개 사료 대기도 어려운 판에 뜸해가던 민박손님들마저 끊긴 불경기. 그녀는 그 양놈 개를 도시의 사람에게 헐값에 팔아치우고 민박 일도 닫아 버렸다.

닫고 말고도 없었다. 벌써부터 들지 않는 손님이었으니까. 그냥 고인이 소싯적 익힌 붓글씨라며 쓴 민박이란 입간판을 뒤꼍에 갖다 놓는 것으로 십여 년 된 생업을 접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와서 주방 일을 거들어 달라고 연락을 준 박 사장님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런 착하고 좋은 분이 저렇게 폐인이 되어가고 있다니……. 사모님도 나쁜 분은 아니었는데. 인물도 고운데다가 마음씨도 상냥해서, 사모님을 보러 식당 단골이 되었다는 손님들도 적지 않았는데.

아줌마는 니슈퍼옆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비좁고 어두운 길이지만 수 십 년 간 다녔으니까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이웃집 할미도 지난 가을에 산으로 땔감 하러 갔다가 발목을 삐끗한 게 여태 낫지 않아 절룩이는데.

자기 집에 다 다다랐을 때다. 골목 위쪽에서 누군가 멈춰서는 모양이면서 독한 술 냄새. 그녀는 하는 수 없이 몸을 가자미처럼 옆으로 돌려 담벼락에 바짝 붙인 꼴로 한 발 한 발 올라간다. 이윽고 어둠 속에서 만난 사람 역시 그녀처럼 몸을 담벼락에 바짝 붙이고 지나쳐 내려갔다. 지나갔는데도 여전한 술 냄새. 그리고 비릿한 피 냄새도 나는 듯싶다. 늙었으나 냄새 맡기에 관한 한 그녀는 아직도 젊었다.

감이 잡힌다. 눈도 덜 녹은 이 때 겁 없이 산에 올라 술까지 마신 사람이 하산하다가 비탈길에서 구르면서 어디를 다친 모양이다. 전에 민박 일을 할 때에는 저런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불러서 집의 옥도정기라도 발라주고 보냈었다. 안 됐으니까. 이제 그녀는 그런 마음도 다 사라졌다. 먹고 살기 어려운 지경이 되니까 마음씨도 팍팍해졌다.

아줌마가 자기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서 세수부터 하고 있을 때 김 과장은 경차 안에 앉아 있었다. 비탈길을 거의 다 내려와서 마음을 놓았다가 그만 발을 헛디디며 굴러 떨어졌는데…… 얼굴 오른 쪽도 까여서 피가 나다가 멈춰 있고, 발목도 시큰거리는 게 여간 아픈 게 아니다.

그래도 살아 내려오지 않았나. 역시 운전석 바닥에서 찾은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어서 수신하라며 깜빡이고 있고 부재중수신이라는 표식도 하나 있다. 먼저 부재중수신부터 확인해 보니까 중학교 일학년인 딸의 번호가 뜬다. 문자메시지도 딸이 보낸 것이다. 메시지는아빠 지금 어딨어?’이것뿐이다. 그 외에는 아무런 문자메시지도, 부재중수신번호도 찍혀있는 게 없다. 아내한테서도 오지 않았다. 아내는 지금쯤 화장을 떡칠처럼 하고 노래방에 나갈 채비가 아닐까? 아내와의 대화는 김 과장이 직장에 사표내고 나온 지 딱 일 년이 되던 날의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그 후로는 대화다운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사표 내고 나온 지 딱 일 년이 되던 날 저녁에 아내는 김 과장한테 말했다. “그래, 과장들은 맡은 과에서 한 명씩 줄일 직원을 알아서 적어내라 했다는데…… 그래, 고민 고민하다가 자기 이름을 적어내는 사람이 어디 있나? 당신은 여하튼 너무 마음이 약해서 탈이야.”

아내는 그런 말을, 설거지를 하면서 내뱉었다. 음식 찌꺼기를 싱크대 바닥에 버리듯이 내뱉었다. 대화도 아니고 독백이나 같았다. 그 후로 부부는 더 이상의 대화를 끊었다. 아내의 당신은 여하튼 마음이 약해서 탈이다는 말이 맞다. 나는 오늘도 눈 덮인 산까지 올라갔는데 결행하지는 못했다.

김 과장은 참담한 마음으로 앉아 있는데 이제 문제는 어떻게 집까지 가느냐이다. 이 차자동차 판매 대리점에서 근무할 때, 전시했던 것을 헐값으로 불하받았다.를 몰고 갈 수는 있다. 도시의 아파트까지 삼십 리 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몰고 갈 수 있다. 운전경력이 십오 년이다. 다만 술 냄새가 걱정이다. 음주운전 단속에 걸렸다가는 면허정지에다가 벌금이 대단하다는데……. 백 만 원 이상은 기본이란 말을 어디서 들었던 듯싶다. 힘들게 산을 내려왔나 했더니 여전한 돈 문제. 살아 있는 한, 돈 문제를 벗어날 길은 없는가?

김 과장이 경차 안에서 그러고 있을 때 약 사 미터 거리의내 사랑 닭갈비식당 박 사장이 일을 벌였다. 식당 한 쪽 벽 위에 장식용으로 걸어둔 등산용 밧줄에 자기 목을 질끈 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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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들 대부분이 불 꺼져 있는 데다가 보안등까지 고장 난 게 많아 아파트 단지는 어둠의 단지가 되었다.

철지난 검은 동복 차림에 뒤축이 반쯤 닳은 운동화를 신고서 어둠의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온 아이. 삼십여 분 전에 돌발사건을 겪어서 경황없는 정신상태다. 이상한 것은, 그런 정신상태가 되자 아이는 이곳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아이가 걸어올 때 도로 변 전주에 있는 불법주정차 단속카메라나 상점들의 방범카메라, 심지어는 지나가던 차량들의 감시카메라에도 그 모습이 잇달아 찍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면 돌발사건 현장에서 부근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그 골목은 감시카메라 하나 없이, 비좁고 긴 터널 같은 길로 이어져서 도피 로로써는 최적이었다. 아이는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넓은 보도를 걸어서…… 어둠의 단지 앞 정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정문이라고는 하지만 기둥 구조물들만 남은 열린 공간이다. 게다가 양쪽 기둥 구조물에 설치한 등 두 개도 그 중 하나는 아예 켜지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제 촉광을 잃고 일대의 어둠에 눈치 보듯 아주 흐릿하게 켜져 있었다. 지친 모습으로 들어서는 아이를 아무도 보지 못한 까닭이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왼편으로는 단지 내 상가가 있다. 열 개 점포 중‘2단지 슈퍼마켓하나만 전등불을 켜놓아서 단지 내 상가임을 겨우 알리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서 어둠 속 보도를 이십 미터쯤 걷던 아이는 문득 멈춰 섰다. 긴 밤을 노숙하려면 아무래도 맨 정신으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아이는 동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 한 장을 확인했다. 지난번에 학교에 잠깐 들른 형이 비상금 하라며 쥐어 준 돈 만 원이다. 형은 시내 독서실에서 총무를 맡아 그곳에서 먹고 자며 한 달에 사십 만원 받는다는데, 아이와 함께 지낼 십 평 원룸의 전세 보증금 오백만 원을 목표로 그 돈 대부분을 예금하고 있다 했다.

아이는 방금 지나친 상가 쪽으로 되돌아 걷는다. 어두운 바닥의 보도블록도 깨지거나 파인 것들이 많아서 걷기가 편치 않다.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로 내려와 걷는데 그 때, 정문 쪽에서 웬 차 한 대가 전조등 불빛을 두 눈처럼 부라리며 들어왔다. 아이는 경찰차가 아닌가 싶어서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차는 전조등 불빛을 쏘면서 아이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휘발유 태우는 시큼한 냄새를 남기고 옆으로 지나쳐 갔다. 아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다시 상가 쪽으로 걷는다.

지린내 가득한 상가로 들어섰다. 문 닫은 점포 개수만큼이나 공허한 어둠 속에서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2단지 슈퍼마켓’. 무덤덤한 표정으로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앉은 주인 영감은, 아이가 소주 한 병과 오징어 구운 것 하나를 고른 뒤 만 원을 건네자 잠시 갈등했다.‘까짓 거, 학생복을 입었다고 해도 부모 심부름으로 온 줄 알았다 하면 되는 거다고 속으로 다짐한 뒤 돈을 받았다.

아이는 상가를 나와서 다시 걷는다. 105동 아파트를 향하는 걸음이다. 그 몇 분 사이에 더욱 무거워진 어둠.

일 년 전만 해도 아이는 105동의‘3-4’현관을 향해 늦은 밤마다 이 길을 걸어갔었다. 학교에서 야간자율학습까지 하고 오느라 몸은 지쳤지만 마음은 항구에 닻을 내리는 배처럼 안온했었다. ‘우리 집에 다 왔으니까. 아버지가 105403호 안방에 혼자 해골처럼 누워 있어서, 썩어가는 몸 냄새로 십팔 평 공간이 진동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 왔다는 생각에 아이 마음은 안온했었다.

지금 아이는 그런 안온한 닻 하나 내릴 데 없이 사는 삶이다. 오늘 105동 아파트의 밤 풍경이 생소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일까? 일 년 전보다 불 꺼진 빈 집들이 더욱 늘어난 탓도 있겠지만.

아이는 걸음을 멈췄다. 105동의 ‘3-4’ 현관이 코앞에 있는, 공중전화 부스와 예전의 꿈동산 유치원건물 사이다. 공중전화 부스는 그대로 남아 있지만 유치원은 현대 재활용 센터로 간판이 바뀌었다. 재갈대던 유치원 꼬마들 대신에 빈병과 폐휴지 따위가 와글거리며 모여 있는 걸까?

아이는 주공 2단지 아파트 열 개 동 중 가장 전망 좋고 양지바른 곳이라던 105, 그 중의 403호를 어둠 속에서 올려다본다. 예전에 중간고사라도 치르고 일찍 귀가하면 아이는 저 403호의 발코니에 서서 눈앞에 펼쳐지는 한낮의 전경을 즐겼다. 멀리 단지 앞 차도를 느릿느릿 지나가는 시내버스들, 단지 내 상가의 다양한 간판들, 그리고 바로 앞의 꿈동산 유치원 꼬마들이 병아리들처럼 재갈대며 귀갓길을 서두르는 모습들…….

덥수룩한 머리에, 뒤축이 반쯤 닳은 운동화에, 철지나서 땀내 풀풀 나는 동복 차림으로 잠시 회상에 잠겨 있는 아이. 누가 아이의 지금 외양을 봤다가는 고등학생이기는커녕 밤거리의 노숙자인 줄 알고 기겁했을 게다. 하긴, 기숙사의 사감 선생이 오늘 낮에 아이를 보고 이런 말을 했다.“, 노숙자냐?”

사감 선생이 보기에 아이는, 당신이 기숙사 일을 맡은 지 세 달 만에 처음 보는용의 및 복장 상태가 100% 불량인 학생이었다. ‘어떻게 이런 자식이 내 눈길을 피해서 기숙사에서 지내왔지?’하는 험한 눈빛으로 다시 아이한테 이렇게 물었었다. “그래, 너는 부모님도 없냐? 용돈이라도 타서 이발하고 운동화도 사 신고 그래야 되지 않겠어?”

아이는 답했다.“네에…… 부모님이 없는데요.”

그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쾅 맞은 듯했던 사감 선생의 표정을 떠올리면 아이는 우습다기보다 캄캄한 나락으로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심정이다.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게 다, 일 년여 전에 우리 집안이 해체된 후 벌어지는 일들이다. 조금 전의 돌발사건도 그렇다. 그 여자는 내가 어쩐 게 아니었다. 그 여자는 나와 마주치자 제풀에 놀라 차도 건너 편 보도로 달아나다가, 그 때 마침 달려오던 시내버스에 치인 것이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버스가 뭐에 부딪힘과 동시에 급정거하는 소리를 내며 섰고 순식간에 일대가 소란스러워질 때 나는 그냥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을 뿐이다. 어디로 가는 길이었냐면…… 그냥 가는 길이었다. 처음부터 그냥 가는 길이었는데 그렇듯 그 여자는 보도에서 나와 맞닥뜨리자 제풀에 놀라서 달아나다가 그랬다.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 자리를 떠나 보도를 걸어 올 때 구급차가 경광등을 희뜩이며 내 옆의 차도로 허겁지겁 지나갔다. 그 여자를 수습하려고 가는 건지, 다른 일로 가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알 바가 아니니까. 솔직히 나는 그 여자가 모르는 여자였다면 그 자리에 남아서 사건을 수습했을 테다. 여자가 숨이 붙어 있었다면 택시라도 잡아서 응급실이 있는 종합병원으로 갔을 테고, 그것도 아니라면 하다못해 그 자리에 남아서 신고를 받고 달려온 경찰한테 전후 사정을 진술했을 테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그 여자였으니까. 그냥 나는 내 갈 길을 걸어갔다. 오가던 차량들이 일제히 급정거하고 행인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어수선한 사고 현장을 나는 그렇듯 담담하게 벗어났다. 그때가 만일 대낮이었더라면 어쩔 뻔했을까? 행인들이 사고 현장에서 나를 붙잡고는 멱살을 쥐고 난리 치지 않았을까? 정말 어둡고 어수선하기가 천만다행이었다.

햇빛 환한 대낮은 내게 늘 두려운 시간이었다. 오늘 대낮만 해도 그렇다. 평상시였다면 교실이나 기숙사의 방 같은 그늘진 데서 편히 지냈을 대낮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연휴를 맞아 기숙사에서 ‘12일 전원 귀가'를 실시하니까, 갈 데가 없는 나는 대낮에 잘못 나온 박쥐처럼 거리를 헤매다가 결국 이 지경에 다다랐다.

기숙사 친구들이 인디언처럼 끼호끼호소리까지 지르며 신나게 귀갓길로 나설 때 나는 사감실을 찾아가 이번 연휴 동안에 혼자 기숙사에 남아 있으면 안 되냐고 말씀 드리려 했다. 말씀드리기도 전에 사나운 얼굴로 내 용의복장의 불량부터 지적하던 사감 선생님. 급기야는 내가 부모님이 없다고 말씀 드리자 놀라서 입을 떡 벌린 그 표정이라니. 내 얘기를 듣고 나서 하는 그분의 대답이란 게 이랬다.“어찌 됐건…… 예외는 없다. 여하튼, 이 기숙사를 나가서 하루 지내고 내일 오후 다섯 시까지 귀사 하는 거다. 이상 끝.”

일은 그렇게 꼬이기 시작했다.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이번 사감 선생님이다. 먼젓번 사감 선생님은 달랐다. 작년 연휴 때 내가 그런 사정까지 다 말씀 드리자, 참 안 됐구나 하는 표정으로 침묵하다가 이렇게 말씀해 주었었다.“그렇다면 말이야, 다른 애들한테 절대 말하지 말고 너만 혼자 남아 있어라. 다만, 내가 기숙사의 철문을 닫고 전원도 내려놓고 갈 거니까, 그런 불편은 참고 지내야 해. 웬만해서는, 낮에 공부하고 밤에는 그 동안 밀린 잠이나 열심히 자두는 게 어떻겠니?”

그 때가 작년 추석연휴 때였다. 그런 분도 있었는데 올해의 사감 선생님은 영 아니다. 교장선생님보다도 더 늙어보여서인자한 할아버지일 거라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까다롭기가 여간 아니다. 일이 그래서 꼬이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하룻밤 잠자리를 얻고자 힘겹게 찾아간 아는 교회마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일 년 전까지도 고등부 활동에 빠지지 않은 나였으니까 그것을 믿고 찾아간 것인데 그 모양이 되어 버렸다. 닫힌 교회의 문짝에는 이런 글이 A4 용지 한 장에 적혀서 달랑 붙어 있었다.‘연휴를 맞아 12일로 산상기도회를 갑니다. 연락처 011-’

교회 문 앞 층계에 맥이 쭉 빠져 주저앉아 있을 때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던 햇살은 얼마나 무겁던지. 그래, 나는 한 마리 박쥐였다. 잘못돼서 대낮에 나온 박쥐. 환한 대낮이 그토록 끔찍할 줄이야.

, 내 책가방? 지금 내 손에 들린 것은 소주병과 구운 오징어뿐이다. 그럼, 기숙사를 나설 때부터 들었던 책가방을 내가 어디에 놓았지? 연휴 중에도 풀어야 할 문제집만 골라서 담은 책가방인데. 나 참. 여하튼 그 여자와 아까 마주친 것 하나만 봐도 오늘은 재수에 옴 붙은 날이다. 인구 이십만을 넘었다는데도 그 여자와 보도에서 딱 마주쳤으니 아직도 좁은 도시다. 그 여자나 우리 형제나 서로 마주치지 않으려고 신경을 쓰며 살아왔을 텐데, 오늘 참, 일이 더럽게 꼬여 버렸다. 나야 항상 교실이거나 기숙사에서 지냈고, 형은 독서실을 밤낮으로 지키면서 사는데 어떻게 내가 오늘 그 여자와 보도에서 맞닥뜨리는 재수 없는 일이 생겨났을까?

이게 다 늙은 사감 선생 새끼 때문이다. 개새끼. 기숙사에 빈대 붙어 사는 내 처지를 이해하고 그냥 넘어가 준다면 길어야 아홉 달 뒤에 수도권 대학에입학성적 우수 장학생으로 합격하면서 이 도시를 영영 떠날 것인데…… 그거 하나 봐 주지 않아 내가 대낮부터 헤매다가 책가방도 잃고 이 고생이다. 에에 개새끼 퉤퉤퉤.

아이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분무되는 빛들에 몸을 반쯤 적시고 서서 침을 욕처럼 뱉다가, 105동의 ‘3-4’현관 쪽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웬 인기척 때문에 이루어진 행동이다. 아이는 방문할 집이라도 있는 양 바삐 걸어 ‘3-4’현관으로 들어갔다.

노인 한 분이 폐휴지 가득한 수레를 끌고 나타난 것이 웬 인기척의 정체였다. 공중전화 부스의 빛들에 모습을 드러낸 노인은현대 재활용 센터건물 앞에 수레를 세워놓고서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박 선생은 화장실 좌변기에 쭈그리고 앉아 있다. 모처럼 연휴를 맞아 집에 와서 불고기를 많이 먹은 게 체한 듯싶다. 나 참, 그 아이가 그런 기막힌 사연으로 기숙사에 맡겨진 줄을 몰랐다. 삼월 인사이동으로 이 학교로 전근 오면서 맡은 기숙사 사감 일이다. 세 달째로 접어드는데 팔십 명 되는 기숙사 애들 중에 그런 애가 끼어있을 줄은 나는 정말 몰랐다. 진작부터 애들의 신상을 파악해 두었어야 하는데, 낮에는 교실에서 수업을 하고 밤에는 기숙사를 지켜야 하니까 바빠서 그럴 사이가 없었다. 직접 드릴 말씀이 있다면서 사감실로 찾아온 그 아이. 처음 보는 얼굴에 복장까지 아주 불량해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야단치려는데 그 아이가 하던 말. “네에…… 부모님이 없는데요.”

그런 충격적인 존재한테 무슨 꾸지람인가? 그 아이의 용의나 복장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못했고,‘연휴에 혼자 기숙사에 남아서 공부하고 싶다는 바람이나 묵살해 버렸다. 괜히 이런 이상한 자식을 남겨 두었다가, 전기도 내린 기숙사 방에서 무슨 사고라도 내지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촛불이라도 켜놓고 지내다가 잘못돼서 기숙사에 불이라도 낸다면 그건 정말 수습할 수 없는 사고다. 사감인 내가 책임을 지게 되면서 최소한 교감으로 승진하고자 하는 노력이 하루아침에 무산될 게 뻔하다. 내 나이가 어언 오십육 세. 교장보다는 두 살 아래이지만 교감보다는 다섯 살 위다.

아이를 박정하게 처리해서 내 보냈는데, 뒤늦게 께름칙한 마음이다. 오갈 데 없는 그 아이가 그 꼴로 거리를 헤매다가 무슨 사고를 저지르지 않을까 걱정이다. 내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면서 생겨난 쓸 데 없는 노파심인가? 아니다. 아무래도 불길하다.

!

하고 힘을 주는데도 편치 않은 아래뱃속의 것이 나올 기미가 없다. 꾸럭꾸럭 속이 편찮은 대로 더 기다려 봐야 하나? 결국 일을 못 보고 화장실을 나왔다. 거실의 아내는 오전에 목욕탕에라도 다녀왔는지 허벅지 속살을 언뜻언뜻 보이며 이심전심의 욕정을 전한다. 제기랄, 보름 만에 서울 집으로 올라와 편히 쉬려도 아내 욕정을 달래줄 의무가 기다리고 있다니. 그 아이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아서 뱃속도 시원치 않은데 그런 의무가 가능할까?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는 있지만 그 아이 걱정뿐이다.

아비가 위암으로 삼 년이나 앓다 죽고, 그 바람에 집안이 거덜 나면서 엄마마저 다른 남자와 재혼해서 산다는 막장 가정의 아이. 몇 안 되는 친척들도, 아이 아비가 사업할 때 보증 선 것이 잘못되면서 남만도 못한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아이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피붙이라고는 독서실에서 총무를 한다는 형 하나. 그 형도 집안이 해체되자 숙식을 해결하고자 그 곳에 가 있단다.

기가 막힌 아이 사정이 학교에 파악된 게 작년 삼월 학기 초에 학급 별로가정환경조사 자료를 걷으면서였다고 했다. 그 때부터 학교에서는 아이를 기숙사에 넣어 숙식을 해결해 주는 한편으로학업성적은 우수하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위한 장학금까지 주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 아이가 학교 측의 후의를 단단히 입게 된 것은,‘서울대 합격 가능성이 높은, 학업성적 우수 학생이라는 사실이 적극 고려된 때문이라 했다. 이런 사실들을 나는 오늘 오후에야 알았다.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데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아이여서, 동서울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의 담임한테 전화를 걸어낮에 기숙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의견을 구했더니 그렇게 그간의 사연을 일러주었다.

담임은 이런 말을 덧붙이며 통화를 마쳤다. “너무 염려 마세요. 요즈음 날씨가 더워졌으니까 아무 데서 잔들 얼어 죽기야 하겠습니까? 하하하. 애들은 말입니다, 야영가면 밤새 한 잠 안 자고 잘 놀잖아요? 그런 애들이니까…… 부장님, 전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럼 이만 끊습니다.”

담임은 사십 대 초반의 사내이다. 그런 나잇대 사람이니까 말을 쉽게 하는 것이지, 어디 나처럼 세상의 이런저런 풍파를 보거나 겪으면서 살아온 나이의 사람이 그럴 수 있나? 지금 어느 곳에서 헤매고 있을 그 아이. 내가 여기서 어떻게 해야, 그 아이가 안전하게 오늘 밤을 보낼 수 있을까.

그렇다. 비상시를 대비해서 내가 지갑 안에 접어서 넣어둔 유인물 한 장이 있지 않나. ‘기숙사 학생회 임원 명단 및 전화번호’.

회장 녀석의 휴대폰 번호를 찾아 통화를 시도한다. 녀석은 뭔 바쁜 일이 있는지 일 분 넘게 있다가 전화를 받으며 내게 한 첫 마디가 이랬다. “, 누구니 새끼야?”

기가 막히지만 화를 억누르고 답한다. “나다, 사감 선생이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선생님! 저는 제 친구가 건 줄 알고!”

괜찮다. 다름이 아니고 내가 하나 물어볼 것이 있거든.”

예예 말씀하십시오.”

멋모르고 전화 받은 죄를 씻고자 회장 녀석은 아주 어조가 공손하다. 휴대폰을 들고 연실 고개를 조아리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싶다. 내가 그 아이의 이름을 대며연락할 일이 있는데 혹시 휴대폰 번호라도 알지 않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 걔요. 걔는 휴대폰 같은 것도 없어요. 그냥 밤낮으로 공부만 하는 애에요. 왜 그러세요, 선생님?”

내가 꼭 연락할 게 있어서 그러거든.”

걔는 기숙사에 남아 공부하지 않나요? 작년 연휴 때도 걔는 특별히 봐 주는 것 같더라고요. , 걔는 엄마가 쌩까서 그렇게 된 애잖아요? , 안 된 애죠.”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쌩깐다는 말은 일부러 모른 척 한다거나 도망갔다는 뜻이 아닐까? 애들도 다 아는 그 아이의 가정사이구나. 그렇다면 내가 굳이 조심스레 얘기할 것도 없겠다. 솔직하게 말하자.“그러면 너를 믿고 말하겠다. 다름이 아니고.”

하면서 낮에 그 아이가 사감실을 찾아와서 벌어진 일을 대강 말하고서, 내가 지금 걱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회장 녀석이 반문했다.“무슨 걱정이세요?”

그 아이가 잠자리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다가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지. 그 아이한테 하나 있는 형이란 사람도 자기 몸 하나 해결하기 바쁜 처지라니…… 아이가 형한테 들를 것 같진 않고. 그래서 내가 그 아이와 연락이 닿으면, 거 뭐야, 학교 수위실에 딸린 방에서라도 하룻밤 잠을 자라고 일러주려는 거지. 그 방이야, 내가 수위 아저씨한테 전화 한 통 걸어주면 되니까.”

선생님, 잘 알겠습니다. 제가 만일 그 애를 만나거나 연락이 닿으면 그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휴대폰으로 전해지는 바쁜 어조로 봐서 회장 녀석은 뭐 이런 시시한 일로 전화를 다 하시나?’하는 표정인 게 역력했다. 어찌 됐건 이만 하면 됐다. 내가 아이한테 여기 멀리서 할 수 있는 조치는 다 했다. 그러면…… 가만 있자, 우리 아내가 어디 있나? 이제야 한 번 안아줄 마음이 생겨나는데 말이야.

 

앞뒤바퀴의 바람이 다 빠진 낡은 자전거가 105‘3-4’현관의 왼쪽 벽에 기대어 있다. 그 위쪽에 있는 각 호별 우편물 수취함.

아이는 수취함에서 403호 칸을 본다. 오래 되어‘403’이란 페인트 글씨는 흔적도 없고 이삿짐센터 스티커들만 겹겹이 붙어 있지만 아이는 403호 칸인 것을 안다. 그 칸 아가리에 무슨 유인물이 물려 있다. 아이는 아가리 덮개를 쳐들어 그것을 꺼내어 본다.‘재개발 사업 시행 인가 고시

다른 칸의 아가리들도 같은 유인물을 물고 있다. 어떤 것은 상품 광고 전단들까지 물고 있어 구토하는 모양 같다.

일 년 전, 403호 칸의 아가리에는 기분 나쁜 우편물들이 끊임없이 물렸다.‘채무변제 3차 독촉’‘법적처리 통보’’신용불량자 등재를 예고함’‘파산신청 안내 등등. 해골이 다 되어 누워 있는 아버지를 대상으로 날아들던 기분 나쁜 문서들. 그 때부터 어머니는, 아니 그 여자는 집에 들어오는 날이 줄어들어갔다.

아이는 재개발 사업 시행 인가 고시유인물을 수취함 아가리에 다시 쳐 넣고서 층계에 발을 디딘다. 사 년 전인가, 일 층의 103호에 살던 귀여운 꼬마가 층계 벽에 그려놓은 그림이 여태 남아 있다. 빨강 크레파스로 그려놓은 꽃 한 송이. 그 즈음부터 이 아파트는최소한의 관리로 들어서지 않았을까?

이 층.

삼 층.

사 층으로 오르는 층계에서 아이는 가슴이 떨린다. 그럴 리가 없지만 이제 층계를 다 올라서 403호 문을 열면 멀리 안방의 아버지가 희미한 기척으로 자기를 맞을 것 같다. 아버지는 병석에 누워 지내면서 힘이 다 빠져버려, 머리맡의 물병을 손으로 쓰러뜨려 소리 내거나 부스럭거리는 이불 소리로 당신의 반가운 마음을 알렸다. 그러면 아이는 아버지, 저 왔습니다.”하면서 현관으로 들어섰다. 책가방을 거실바닥에 내려놓고서 여기저기 창문들부터 활짝 엶으로써, 십팔 평 실내에 가득한 역한 냄새부터 환기시키는 첫 번째 집안일을 했다. 두 번째 집안일은 아버지의 병 수발이다. 병 수발이랬자, 아버지 샅에 채워진 기저귀를 갈아주고 죽 그릇을 설거지한 뒤 새 죽을 끓여 담아 놓는 일이다. 죽도 그냥 방치하면 곰팡이가 퍼렇게 껴서 내버려야 했다.

아이가 당신 샅의 기저귀를 갈 때 눈을 꾹 감고 마른 장작개비처럼 움직여지던 아버지 모습. 아이는 그 아픈 기억을 지울 듯이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레 403호의 문 앞을 지나 오 층으로 향한다. 밤 열 시도 안 되었을 텐데 무덤처럼 어둡고 조용한 통로다. 텔레비전 소리나 어느 집 말다툼 소리 같은 것도 없다. 아까 공중전화 부스 옆에 서서 올려다봤을 때 열 가구 중 두 가구가 불을 켜고 있었는데…… 불 꺼진 가구들은 모두 다른 데로 이사 간 걸까?

이제 오 층이다. 층계가 끝났다. 여기서 벽에 있는 쇠사다리로 삼 미터쯤 오르면 자물쇠로 채워진 정사각형의 철문이 있고 그 문을 열면 옥상이다. 그 열쇠가 아직도 있을까? 관리소 아저씨가 그 자물쇠의 열쇠를 층계 벽의 작은 환기창에 몰래 놓고 다니던 것을 아이는 기억해 냈다. 높은 환기창이라 아이는 발끝을 곧추세우고 오른팔을 바짝 올려 손바닥으로 더듬어 본다. 있다, 먼지 속에. 아이는 차가운 그 열쇠를 입에 물고서 쇠사다리 틀을 하나하나 잡으며 오른 뒤, 자물쇠를 따고 철문을 연다. “삐이이걱

낮에 달궈진 옥상의 더운 기운이 아이 얼굴을 공격한다. 아이는 철문을 열어놓은 채 다시 쇠사다리로 오 층까지 내려와 동복 상의를 벗는다. 팔소매들을 서로 잡아매자 상의는 광주리처럼 되었다. 그 안에, 아까 바닥에 놓았던 소주병과 오징어 구운 것을 담은 뒤 목에 걸고 조심조심 쇠사다리를 오른다.

지상은 어둠에 깔리면서 낮의 열기가 식었는데, 옥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이는 뜨듯한 옥상 바닥에 주저앉은 뒤 소주병 마개를 따고서 꿀꺽꿀꺽 소주를 마신다. 점심은 기숙사 식당에서 먹고 나왔지만 저녁은 먹은 게 없어, 목구멍 너머로 들어간 소주는 이내 독한 기운으로 내장에 퍼진다. 아이는 벌써 흔들리는 눈길로 오징어를 찾아 두 손으로 뜯어 먹다가, 다시 소주병을 들어 마신다.

밤하늘의 별들이 총총하게 보여야 할 옥상인데 그렇지 않다. 백여 미터 거리를 두고 지어진 이십오 층 고급 아파트의 휘황한 전등불빛들이 여기 옥상까지 날아오면서 밤하늘을 허연 그물처럼 막은 탓이다. 그 여자가 산다는 저 이십오 층 아파트의 어느 집. 그 여자는 아버지 화장한 재를 강물에다 뿌리고 돌아온 날 저녁에 우리 형제한테 이런 메모 한 장을 남기고 사라져버렸다.‘나는 네 아버지와 이혼해서 벌써부터 남이었다. 인제는 너희끼리 잘 살기 바란다.’

그 때부터 엄마는 그 여자가 되었다. 엄마가 아버지와 이혼한 사실은 우리도 아는 오래 전 일이었다. 아버지의 부채가 넘어오는 것을 피하기 위한 문서상의 위장이혼이라 했는데…… 그것을 실제로 적용시킨 것이다. 아버지의 건강음료 판매사업이 그럭저럭 되어가고 있었을 때 그 여자는 엄마였었다. 아파트 관리비니 전기료니 하는 것들을 꼬박꼬박 잘 내고 살 때는 좋은 엄마였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그래도 오늘 밤, 예전에 십 년 넘게 살았던 105403호 가까운 위에서 지내게 되지 않았나. 403호 안방의 아랫목처럼 따듯한 옥상 바닥이라니……. 소주에 취한 탓일까, 아이는 눈물이 글썽글썽해진 채로 앉아 있다가, 벗었던 상의를 이불처럼 뒤집어쓰며 옥상 바닥에 누웠다. 밤잠을 청한다. 뒤집어 쓴 상의가 검은색 동복이니까, 박쥐가 하늘로 날아오르려다가 쳐 놓은 빛 그물에 걸려 추락해 버린 꼴 같았다.

 

다음 날.

오후 다섯 시까지 학생들이 기숙사로 들어오게 되어 있다. 박 선생은 서울 집에서 오후 세 시쯤 학교가 있는 지방 도시로 출발해도 될 텐데 오늘은 점심을 먹자마자 한 시에 바로 출발했다. 아무래도 그 아이가 마음에 걸려 집에 있느니 기숙사에 일찍 가 있는 게 나을 듯싶었다. 오후 세 시도 되기 전에 학교 내의 기숙사에 도착한 박 선생.

이 층 건물인 기숙사의 일층 출입구 옆에 전원박스가 있다. 그것을 열어 기숙사에 전기가 들어오게 하고, 이어서 출입구를 가린 철제문의 잠금장치를 풂으로써 기숙사는 정상이 되었다. 쥐 죽은 듯 조용한 기숙사 내부. 박 선생은 뚜벅뚜벅 걸어 사감실로 들어가서는, 벽에 붙은각 실 별 명단부터 살핀다. 일 층에는 101호실부터 110호실까지 있고, 이 층은 201호실부터 210호실까지 있다. 그 아이 이름은 210호실에 들어 있었다. 이 층 맨 끝 구석방이다.

그 아이가 그 동안 내 눈에 뜨이지 않았던 게 맨 끝 구석방인 때문이었나? 그보다는 그 아이가 내 눈길을 피해 생활했을 개연성이 더 크겠다. 각 호실마다 네 명씩 배정되어 있는데, 애들은 기숙사를 수학여행 온 여관방처럼 여기는지 쉬지 않고 들락날락거리며 떠들어댄다. 그 아이가 그런 소란 속에 숨어 있으면 내가 몇 달 정도는 모르고 지낼 수도 있지.

박 선생은 사감실을 나와 어둑한 복도를 걸어 210호실에 다다랐다. 문을 열자, 하루가 지났는데도 여전한 악취. 한창 크는 애들이라 수컷의 냄새에다가 안 빤 양말 냄새, 땀 냄새 등이 뒤섞여 남아있다. 방의 왼쪽에는 사 단으로 설치된 침대가 있고 오른 쪽에는 네 조의 책걸상이 나란히 놓여 있다.

네 조의 책걸상 중 가장 구석에 있는 그 아이의 자리. 책상 앞 벽에는 아이가 형으로 보이는 청년과 함께 찍은 사진 한 장과, ‘서울대 합격!’이라고 검은 매직으로 굵게 쓴 종이가 나란히 붙어 있다.

박 선생이 놀란 것은 책상 밑에 가득한 책들이다. 어둑해서 미처 못 봤었는데 의자에 앉아 두 발을 뻗기 힘들게 책상 밑에 꽉 찼다. 극빈이라는 아이가 웬 책이 이렇게 많아?

궁금해서 책 하나를 꺼내 환한 창가에서 보니까 영어 문제집이다. 들쳐보자 지저분한 밑줄 긋기도 많은데다가, 책 표지에 적힌 이름도 그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 이름이다. 그제야 감이 잡혔다. 아이가 문제집을 살 돈이 없자 학교 쓰레기장에서 주운 것이다. 요즈음 애들은 학년이 오르거나 졸업하면 그 동안 보던 책들을 미련 없이 다 쓰레기장에 내다 버린다. 조금 풀다가 말아서 새 것이나 다름없는 문제집도 그냥 다 내버린다. 여하튼 공부 하나는 열심히 하는 아이이구먼.

그런 아이를 기숙사에 남겨놓는다면, 내가 전기를 꺼 놓아도 양초라도 구해 밤새 공부했을 게 뻔하다. 그건 안 돼지. 이렇게 책들도 많고 좁은 방에서 그랬다가는, 자칫 양초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기숙사 전체로 불이 번져 대형화재가 될 텐데. 안 됐지만, 내가 어제 아이한테 나가서 자고 오라 한 것은 아주 잘한 결정이었다. 암 그렇고말고.

박 선생이 사감실로 돌아와 텔레비전의 재방 드라마를 보는 중에 오후 네 시가 되었다. 그 때부터 아이들이 와글와글 기숙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다섯 시. 박 선생은 사감실의 방송장치를 켠 뒤 마이크를 잡고서 각 방의 대표들에게 현재인원을 즉각 보고하도록 알린다. 잠시 후 이십 명의 대표 모두 사감실 앞에 모여 101호실부터 보고하는데 210호실에 이르도록 단 한 명의 결원도 없었다. 일부러 210호실의 대표에게 재차 확인했으나 전원이 입사했단다.

그럼 됐구나. 어제 오후부터 편치 않은 박 선생의 마음이 확 풀렸다. 그 아이가 여하튼 들어왔으면 되었다. 박 선생은 기숙사 구내식당을 인터폰으로 불러기숙사생들의 여섯 시 저녁식사에 차질이 없도록당부해 놓고 다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본다.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갈등이 본격화될 때 그 아이가 왔다. 부은 듯한데 겁먹은 얼굴이다. “기숙사 학생회장 애가,(콜록) 사감 선생님이 어제부터 저를 찾으셨다고 해서, 왔습니다.(콜록)”

내가 말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너를 학교 수위실 빈 방에 재울 것을 그랬나 싶더라고. 그래서 찾았지. 그래, 간밤에 잠은 어디서 잘 잤냐?”

.”

기침하는 것을 보아, 어디 공원 벤치 같은 데에서 잠잤을 듯싶다. 박 선생은 캐묻지 않았다. 이제 그만 가 봐도 된다고 손짓해서 보냈다. 그래놓고 생각해 보니, 녀석이 여전히 땀내 나는 동복 차림에다가 덥수룩한 머리인 게 어제처럼 용의복장 불량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런 녀석을 방치해서는 집단의 질서를 잡을 수 없다는 게 지론이지만 이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이고, 이놈의 기숙사 사감 짓도 못할 짓이다. 밤새 들락날락하며 떠드는 놈에다가, 배탈 났다고 찾아오는 놈, 물건 잃었다고 찾아오는 놈, 다른 호실에 들어가 잠자는 친구를 후려치고 도망 오다가 잡힌 놈 등등. 어디 그뿐인가? 수시로 막히는 화장실의 변기, 수시로 갈아주어야 하는 형광등, 수시로 시내 기술자를 불러들여 고쳐야 하는 고물 세탁기. 게다가, 화장실에 비치하는 두루마리 화장지는 하루나 이틀 만에 거덜 난다. 다섯 칸이나 되는 화장실에 비치되는 것들이 거의 동시에 그런다. 학교의 행정실장은 나만 보면 투덜거린다.“두루마리 화장지 비용으로 올해 기숙사 운영비가 다 나가겠습니다!”

객지의 하숙비도 아낄 겸, 교감 승진이 되기 위한 평가 하나 잘 받아보려고 자원한 고생치고는 고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사감이란 짓은 올 한 해로 끝이다. 내년에는 학교 부근에서 하숙하며 설렁설렁 출근하다가…… 교감 자격 연수로 들어가야 되겠지. 어쩌다가 마누라를 안아주는 일도 버거운 늙은 놈이 이제 무슨 낙이 있나. 교감, 교장이 되는 것, 그 낙밖에 없지.

박 선생이 신세타령을 속으로 하고 있을 때 누가 문을 노크한다. 문을 열자 이번 주 화장실 청소를 맡은 녀석이 서 있다. 이 녀석은 지난주에 화장실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 이번 주 화장실 청소 전담이라는 벌을 받았다. 이 녀석은 왜 왔나? “무슨 일이냐?”

선생님, 변기 구멍이 하나 막힌 것 같은데요.”

다음 날 오전.

학교 교무실로 형사 두 사람이 찾아 왔다. 한 사람은이 학교 동복을 입은 아이가 웬 여자를 시내버스 쪽으로 세차게 밀치는장면이 찍힌 감시카메라 사진 한 장을 손에 쥐었고 다른 한 사람은 헌 책가방을 들었다. 헌 책가방을 든 형사가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사고현장에서 이 책가방을 채증해 왔기에 그 안의 책들을 보고 용의자를 특정하려 했는데 책마다 적힌 이름이 다 다르니, 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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