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문이 막히는 풍경이었다.

오늘 춘천 mbc의 전망대에 갔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공지천 풍경에 나는 아무 말 못했다. 그냥 언 게 아니라 겨울바람이 언 것으로 보이는 기막힌 풍경이라니.

표현의 한계를 벗어난 풍경을 절경(絶景)이라 하는데오늘 공지천의 겨울바람이 언 풍경또한 절경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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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학회활동사> -5


그리고 문학회가 창립되기는 19715월 어느 날이다.

 

6개월 전인 197012월 어느 날, 이병욱은 태백산맥 너머에 있는 강릉고등학교 3학년 학생 박기동의 편지를 받는다. 편지의 내용을 간략히 줄이면 이랬다.

제가 내년에 진학할 대학을 강원대로 정했는데 그 이유는 병욱 형님과 문학 활동을 함께하고 싶어서입니다. 강원대에 합격하는 대로 형님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박기동과는 그 전부터 편지 왕래가 있었던 사이. 강릉고등학교에서 운동도 잘하고 시도 잘 쓰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학생으로 소문난 박기동이 어떻게 태백산맥 너머 춘천의 이병욱을 알게 됐을까? 그 해답은 김병덕 선생님덕분이라 할 수 있다. 강릉 사범을 나와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다가 검정고시를 거쳐 중등교사가 된 다소 특이한 경력의 김병덕 선생님은 실력 있는 국어 선생님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 김 선생님이 춘고 교사로 있던 1969년에 이병욱 학생의 고3 담임이었다는 사실. 이듬해인 1970, 김 선생님은 강릉고로 전근 가고 학생 이병욱은 강원대학 국어교육과로 진학하면서 헤어지게 됐는데김 선생님이 강릉고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만난 운동도 잘하고 시도 잘 쓰는 학생이 박기동 학생이었던 것. 그런 연유로 박기동 강릉고 학생이 강원대학 이병욱에게 먼저 편지를 보냄으로써 서로 아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 시절 문학도(文學徒)들의 인간관계는 편지를 보냄으로써 시작됐다.

이병욱의 고 3 때 담임이었을 뿐만 국어과목도 가르친 김병덕 선생님. 문학에 조예가 깊어 춘고 문예반 지도를 맡기도 한 김 선생님은 특히 분석을 잘하셨다. 훗날 이병욱이 소설을 쓰면서도 감상과 분석을 즐기는 건 그 영향일 것이다.

세월이 흐른 1981년에는 춘천의 춘성고등학교에서 연구부장(김 선생님)과 연구부 소속 국어교사(이병욱)으로 만나 2년간 함께 근무하기도 했고1989년에는 영월고등학교에서 교감(김 선생님)과 부장교사(이병욱)로 함께 근무하기도 한, 각별한 인연.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은 1992년 가을 어느 날, 김 선생님이 심장병으로 갑자기 돌아가심으로써 이병욱과 이승의 인연은 막을 내린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이병욱은 김 선생님을 잊지 못해, 2019년에는 글을 써서 블로그에 남기기도 한다.

김병덕 선생님이 그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괜한 헛기침까지 하며 내게 다가왔다.

이 선생. 이번 교직 연수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교직에서 연수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승진에 반영되는 연수. 다른 하나는 승진에 반영되지 않고 단지 참가해 강의를 받는 데 그치는 연수. 승진에 반영되는 연수의 경우, 시험을 치르는 것은 물론이고 그 때마다 겪는 시험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그러니 단지 강의를 받는 데 그치는 연수를 선호할 만한테 나는 그조차 꺼려했다. 그런 연수는 귀담아들을 게 없는강사(講師)들의 시간 때우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내 결론은, ‘모든 연수는 싫다!’ 였다.

그래서 김병덕 선생님이 조심스레 내게 다가온 것이다. 20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는 연수로서 승진과는 관련 없지만 여하튼 연수라면 일단 거부하는 나를 달래려고 다가와 그러는 것이다.

이 선생이 가 봐야지 어떡하겠어?”

보나마나, 학교 별로 한 사람씩 그 연수에 참가하라고 벌써부터 공문이 왔는데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자 하는 수 없이 교직 경력이 낮은 편인 나를 대상자로 정한 게 아니겠는가. 솔직히, 다른 연세 많은 선생님이 그런다면 나는 안면몰수하고 단호히 거부의사를 밝혔을 테다. 하지만 김병덕 선생님한테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춘고 3학년 학생일 때 담임선생님이셨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같은 국어과 교사로서 작문 분야에 있어서는 거리낌 없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학창시절에는 사제지간이다가 세월이 흘러 교직에서 선후배 사이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알겠습니다.”

내가 마지못해 승낙하자 김병덕 선생님은 옛날 제자가 자신의 위신을 세워줬다는 생각인지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김병덕 선생님은연수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연구과장이다.

문제는 그 후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양가 하나 없는, 강사의 시간 때우기 연수를 듣느라 20시간이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을 걸 생각하니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퇴직한 지 오래인데 무슨 연수야?’

꿈이었다.

꿈에서 깼다. 이른 새벽, 우리 집이었다. 퇴직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교직에 있었을 때 꿈을 꾸다니.

'김병덕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어언 27. 꿈속이지만 정말 오랜만에 선생님을 뵈었다. 특유의 팔자걸음이며 구부정하게 큰 키. 생전에 같은 학교에 재직할 때 제자인 내가 선생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선생님이 내 눈치를 볼 때가 많았다. 나는 순순한 제자가 못 되었다. 후회가 된다.

김병덕 선생님. 그곳에서 잘 계시는지요. 이렇게 제자가 안부를 전합니다.”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


 1974년 12월 14일. 삼척 죽서루 앞 출렁다리에서 찍은 ‘그리고 문학회’ 기념사진 

(왼쪽에서부터 박기동, 이병욱, 김명희, 임명희, 이흥모, 신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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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학회활동사> -4

      

이병욱은 전상국 선생님과 춘고 동기이기도 한 이승훈 시인을 만난 적도 있었다. 그 때의 이야기를 옮긴다.

 

보리수 다방에 가면 운명 교향곡 같은 클래식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창가에 앉아 책을 보거나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이승훈 시인(2018년 별세)’을 뵐 수도 있었다. 그분은 춘천 교대 교수였다. 1970년 어느 날 나는 창가의 그분께 용기를 내 합석을 요청했다. 강원대 국어과를 다니는 학생이라고 나 자신을 밝힌 뒤 문학작품 속에서의 현실과 실제 현실이 다른 데 따른 갈등을 말씀 드리고 해답을 부탁드렸다.

도대체 말이 되는 질문을 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인데다가, 초면의 다른 대학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이승훈 시인은 아주 따듯하게 해답을 말씀해 주었다. ‘그런 갈등 자체를 작품으로 다뤄보며 스스로 해답을 찾아보라는 말씀이었던 것 같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방을 나왔다. 반세기가 흘렀지만 보리수 다방 창가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거나 독서를 하던 그분의 모습이 생생하다. 현대인의 불안이나 소외를 다룬 난해한 시들을 발표하던 시적 경향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던 따듯한 말씀이라니.

-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

 

한편 바로 그 해 여름방학 때 이병욱은 강원대학의 교지 설악창간호 발간을 맡아 조양기업사(출판사)에 출입하면서 타 대학의 교지를 참고하다가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웃한 춘천교대의 교지 석우에 실린 한 소설의 작가 이름이 이도행(李道行)’이었던 것. 처음 보는 이름이지만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함께 교지 발간 일을 맡은 같은 국어과 여학생한테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한다.

이도행이라니 참 이름도 특이하네.”

그러자 그녀가 불쑥 말했다.

이도행이란 사람을 내가 아는데 우리보다 5년 위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말을 이었다.

우리 언니가 이도행 씨와 동급생이라서 잘 아는데 성질 고약하다!’고 그러더라고요.”

뭔가 재미난 사연이 있어 보여서 이어지는 얘기를 기대했는데 그녀는 다시 침묵하다가 불쑥 이런 말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하기사, 소설 쓰는 사람들은 괴팍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

 

 

이도행작가를 반세기 지난 20193월에 김유정 문학촌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내게 춘고 5년 선배일 뿐만 아니라,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버지 살아생전에 가장 아끼던 후배였던 것. 그런 사실까지 알게 된 사건이 몇 달 지난 20197월에, 서울에서 2호선 전철을 함께 타고 가다가 있었다.

 

전철 좌석에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춘천의 김유정 문인비얘기에 이르렀는데 이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그 비(), 내가 잘 알던 선배님이 세운 비이거든.”

그 말에 놀란 내가 대꾸했다.

그 비는 우리 돌아가신 아버지가 세웠는데?”

뭐라고? 그럼 자네 선친 함자가?”

내 입에서 선친 이름이 나오자 이 선배가 놀라서 내 손을 쥐고는 더 이상 말을 못했다. ‘절그덕 절그덕전철 가는 소리만 존재했다. 이 선배가 이윽고 감회에 젖어 말했다.

자네가 그 선배님 아들이었다니!나를 얼마나 귀여워하고 대견해하셨는지 몰라. 막걸리 집에서 많은 얘기를 하시곤 했지. 당시 춘천의 몇 안 되는 낭만파 예술인이셨다고. 1969년에 내가 군대 갔다가 제대하면서 춘천에 돌아왔지만 집안이 그 사이에 서울로 이사 간 바람에 따라가느라고 미처 못 뵙고 헤어진 건데그 후 세월이 흘러 선배님이 돌아가셨다는 소문만 듣게 돼유족이라도 만났으면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나중에 자세한 얘기를 듣겠네.”

 

전철에서 내려 지상으로 나왔다. 따가운 햇살이 이 선배와 나를 맞았다. 재경동창회 사무실을 찾아 앞서 걸어가는 이 선배를 뒤따르면서 나는 이런 생각에 잠겼다. ‘소설(픽션)이 현실을 못 따라가는구나. 소설은 현실을 가공해서 나오는 거라고 말들 하는데이렇게 현실이 소설을 압도할 줄이야.’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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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학회’ 활동사> -3

6,70년대 춘천지역의 문인들과 인연을 맺는 과정에서 이병욱은 전상국 선생님(소설가)도 만나게 된다. 다소 길지만 그 때 이야기를 옮긴다.

 

1966년 봄날에 춘천에서 1회 개나리 문화제가 열렸다. 행사의 일환으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백일장이 열렸고 뜻하지 않게 나는 시() 장원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뜻하지 않게라는 표현을 쓴 건, 영문도 모르고 백일장에 참가한 때문이다.

당시 나는 춘천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는데 학급담임선생님이 수업은 걱정하지 말고 글짓기 대회에 다녀와라.”고 갑자기 외출(?)시킴으로써 얼결에 이뤄진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장원으로 뽑힌 내 시의 제목을 기억한다. ‘산길이었다.

난생처음으로 국어사전까지 부상으로 받는 영광의 날, 며칠 후 아주 젊은 선생님이 나를 찾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부임한 지 얼마 안 돼 3학년 국어를 맡은 선생님이라 했다. 3학년이 8개 반이나 돼 국어 선생님 두 분이 4개 반씩 맡아 가르쳤는데 다른 반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네가 이번에 시에서 장원한 이병욱이냐?”

.”

가만 있자, 병욱이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시냐?”

아버지 성함을 말씀 드리자 선생님은 !’ 하면서 어떤 감회에 젖어 말을 못했다. (왜서 그랬는지는 이 글의 후미에 밝힌다.) 잠시 후 선생님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병욱이가 시 공부를 하면 좋은 시인이 될 것 같구나. 내가 아는 시인이 한 분 있는데, 네 시 공부를 부탁해 놓을 테니까 앞으로 토요일 오후에는 학교에 남아야 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무실을 나왔다.

토요일 오후가 됐다. 나는 잠시 갈등하다가 깜빡 잊은 척하고 귀가해 버렸다.

아마 선생님이 우리 반 국어를 가르치는 분이었다면 당장 그 다음 주 월요일 수업시간에 나를 보는 대로 야단을 쳤을 게다. 하지만 다른 선생님한테 국어를 배우는 학생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그냥 넘어가 버리고 말았는데 어쩌면 이런 맹랑한 녀석은 일찌감치 포기해버리자며 알아서 단념해버렸을지도 몰랐다.

사실 내가 감히 선생님의 호의를 외면한 건 학교에서 수업이 끝난 뒤에 따로 남아 하는 특별활동에 마음의 상처가 깊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년 간 그림 잘 그리는 어린이로서 매일같이 학교에 남아 미술반 활동을 했던 고된 경험이 그것이다. 여하튼 그 바람에 선생님과 소중한 인연이 시작될 뻔했다가 사라졌다.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 선생님이 전상국 선생님이라는 사실. 그 때 내가 말씀대로 토요일 오후에 따로 남아시 공부를 했더라면 일찍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

 

내가 춘중 3학년 학생일 때 우리 아버지 성함을 물어서, 말씀 드렸더니 전상국 선생님이 어떤 감회에 젖어 말을 못하던 까닭이 반세기 지나 밝혀졌다. 2019년 정초에 사석에서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였다.

이병욱 작가의 아버님이, 내가 춘고 학생일 때 강원일보 현상문예 심사를 맡으셨는데 내 소설을 당선작으로 정하셨지. 그 때의 당선으로 내가 소설 쓰는 일에 자신이 생기면서 나중에 소설가가 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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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문학회활동사> -2

 

한편 이병욱은 강의가 없는 날이면 이웃한 교대로 놀러가 춘고 시절 문우 이학천(당시 교대 학보사 편집장)을 만나 문학 얘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이 때 이미 등단한 최돈선 시인을 소개받았다. 다음은 그 때의 이야기다.

1970년 늦봄 어느 날, 춘천교대 잔디밭에서였다. 당시 교대 학보사 편집장인 친구가 내게 최 선배님을 소개해 줬다.

이번에 월간문학 시 부분 신인상을 탔는데 우리보다 4년 선배이셔. 인사 드려.”

재학 중 시인으로 등단했다는 사실에 나는 경의의 마음으로 인사를 드렸다. 그러자 최 선배님은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정작 눈길은 풀밭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뭘 찾으세요?”

네 잎 클로버지. 행운의.”

하면서 미소 지었다.

-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

 

 

그런가 하면 강원대에서, 합동강의실에서 교양 영어를 배우다가 박계순 소설가를 만나기도 했다. 그 때의 이야기다.

 

박계순 소설가와의 인연은 1970년 봄, 강원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국어교육과 1학년생이었고 박 선배는 서울의 숙명여대 무용과를 다니다가 고향 춘천으로 내려와 강원대 모 과로 학사 편입했다. 나보다 3년 선배다.

강대 학보에 자주 실린 내 글을 보고 흥미를 느껴, 쉬는 시간에 박 선배가 먼저 대화를 청했다. 합동강의실에서다.

이름이 이병욱, 맞죠? 학보에 실리는 글을 아주 재미나게 보고 있는데 점심시간에 얘기 좀 나눌 수 없을까?”

박 선배와 나는 잣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교정의 길을 걸으면서, 화사한 늦봄의 햇살 아래 문학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자리를 옮겨 시내 중앙로에 있는 지하다방 남강에서 커피 마시며 얘기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얼마 후 여름방학이 왔고 개학하면서 2학기가 됐다. 그런데 박 선배를 더는 캠퍼스에서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 선배는 1학기를 마치자마자 자퇴해 버렸단다. 하긴 서울의 숙명여대에서 무용을 전공하다가 그 비슷한 과조차 없는 강원대에서 강의를 받자니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

1995년에 제 1회 김유정소설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실 공히 여류작가로서 자리 잡은 박계순 선배. 지난 20167월에 첫 장편소설 의 출판기념회 사석에서 이런 말을 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1970년에 잠깐 다닌 강대에서 이병욱 씨를 만난 일이, 내 문학의 씨앗이 됐다니까. 내 본래 전공이 무용이잖아. 이병욱 씨를 만나면서 처음으로 문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 거라고.”

- ‘무심이병욱의문학산책에서 발췌

 

지금 춘천의 인구는 30만이지만 6,70년대 춘천 인구는 10만 내외였다. 그래서일까 춘천 토박이인 이병욱은 알게 모르게 춘천지역의 문인들과 인연이 맺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건, 1945년 광복을 전후해서 태어난 선배 문인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이다. 최돈선 시인과 박계순 소설가는 물론이고 이외수 소설가, 이도행 소설가, 최종남 소설가가 그 예이다.

그 중 최돈선 이외수 이도행 최종남은 춘천교대 동기생이었다. 무슨 까닭인지 최돈선 이외수 이도행은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다가 자퇴해버렸고, 오직 최종남만 졸업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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