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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구들 대부분이 불 꺼져 있는 데다가 보안등까지 고장 난 게 많아 아파트 단지는 어둠의 단지가 되었다.

철지난 검은 동복 차림에 뒤축이 반쯤 닳은 운동화를 신고서 어둠의 단지 안으로 걸어 들어온 아이. 삼십여 분 전에 돌발사건을 겪어서 경황없는 정신상태다. 이상한 것은, 그런 정신상태가 되자 아이는 이곳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사실, 아이가 걸어올 때 도로 변 전주에 있는 불법주정차 단속카메라나 상점들의 방범카메라, 심지어는 지나가던 차량들의 감시카메라에도 그 모습이 잇달아 찍힐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생각이었다면 돌발사건 현장에서 부근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갔어야 했다. 그 골목은 감시카메라 하나 없이, 비좁고 긴 터널 같은 길로 이어져서 도피 로로써는 최적이었다. 아이는 그러나 아무 생각 없이 터벅터벅, 넓은 보도를 걸어서…… 어둠의 단지 앞 정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정문이라고는 하지만 기둥 구조물들만 남은 열린 공간이다. 게다가 양쪽 기둥 구조물에 설치한 등 두 개도 그 중 하나는 아예 켜지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제 촉광을 잃고 일대의 어둠에 눈치 보듯 아주 흐릿하게 켜져 있었다. 지친 모습으로 들어서는 아이를 아무도 보지 못한 까닭이다.

정문을 지나자마자 왼편으로는 단지 내 상가가 있다. 열 개 점포 중‘2단지 슈퍼마켓하나만 전등불을 켜놓아서 단지 내 상가임을 겨우 알리고 있었다. 그 옆을 지나서 어둠 속 보도를 이십 미터쯤 걷던 아이는 문득 멈춰 섰다. 긴 밤을 노숙하려면 아무래도 맨 정신으로는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든 때문이다. 아이는 동복 안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폐 한 장을 확인했다. 지난번에 학교에 잠깐 들른 형이 비상금 하라며 쥐어 준 돈 만 원이다. 형은 시내 독서실에서 총무를 맡아 그곳에서 먹고 자며 한 달에 사십 만원 받는다는데, 아이와 함께 지낼 십 평 원룸의 전세 보증금 오백만 원을 목표로 그 돈 대부분을 예금하고 있다 했다.

  

 

 

아이는 방금 지나친 상가 쪽으로 되돌아 걷는다. 어두운 바닥의 보도블록도 깨지거나 파인 것들이 많아서 걷기가 편치 않다. 아스팔트가 깔린 차도로 내려와 걷는데 그 때, 정문 쪽에서 웬 차 한 대가 전조등 불빛을 두 눈처럼 부라리며 들어왔다. 아이는 경찰차가 아닌가 싶어서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차는 전조등 불빛을 쏘면서 아이 가까이로 다가오더니, 휘발유 태우는 시큼한 냄새를 남기고 옆으로 지나쳐 갔다. 아이는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다시 상가 쪽으로 걷는다.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박쥐가 된 아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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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가구나 되는 마을이 아침부터 산그늘에 있다가 밤을 맞는다. 햇볕 한 번 쬘 일 없이 어둡게 지내는데도 뜻밖에 유원지로 자리 잡은 이 이상한 마을. 그 내력은 이렇다.

이 마을 앞으로 맑고 얕은 하천이 흐른다. 가족 단위로 물놀이하며 놀기 좋은 이 하천이 홍수만 나면 마을을 덮쳤다. 홍수를 피해 마을의 집들이 뒤로 물러나 뒷산 기슭으로 붙었다. 이 뒷산도 묘하다. 높이가 해발 사백구십 미터밖에 안 되지만 가파르면서 북향이니까, 마을은 종일 산그늘 속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십여 년 전부터 전국적으로 여가를 즐기는 바람이 불었다. 이 마을이 물놀이하기도 좋고 등산하기도 재미난 곳이라고 소문이 나면서 외지 사람들이 주말마다 몰려들었다. 본래 열다섯 가구이던 게 두 배로 늘어나면서 마을은 유원지처럼 되었다. 대부분 민박집이거나 가게들로 바뀐 것이다.

내 사랑 닭갈비집은 이 마을에서 별난 존재이다. 다른 집들은 모두 산기슭에 자리 잡았는데 이 집만 하천 가에 제방을 쌓고 남았기 때문이다. 마을에서 이차선 도로를 사이로 두고 다른 집들과 떨어져 있는 이 집은 그래서, 혼자만 햇빛을 받는다.

 

 

내 사랑 닭갈비집 박 사장이 산그늘에 깔려 있는 어둑한 마을을 내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낮인데도 등을 켜놓고 손님들 기다리고들 있지만, 그러면 뭐하나? 강아지 한 마리 안 지나가는데……. 이럴 때는 우리 식당이 그만이지, 전등 하나 켜 놓지 않아도 햇빛이 잘 들어서 이렇게 밝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손님이 없을 수가 있나. 이맘때면 대학생들부터 오티니 엠티니 찾아와서 우리 마을 모두들 정신없이 바빴는데…… 올해는 이렇게 썰렁하니, 나 참.

속으로 그러고 있을 때 웬 낡은 경차 하나가 도로에 나타났다. 방향지시등도 깜빡이지 않고 천천히 이 쪽으로 방향을 틀어 들어왔다. 산그늘이 도로까지 드리운 때라서 그 차는 무거운 자주색이었다가 이쪽으로 들어서면서 햇빛을 받아 밝은 색으로 바뀌었다. 예전 같았으면 박 사장은 이럴 때 문을 열고 나가 그 손님을 맞는 시늉이라도 했다. 지금은 그냥 실내에서 지켜보기만 한다.

식당 옆 주차장으로 들어서더니 멈춰서는 경차. ‘우리 식당 주차장에 차 세워놓고 딴 데 일을 보러갈 사람이다.’고 박 사장은 단정했다. 한적한 도로라 해도 도로변 주차는 단속대상이니까 남의 주차장을 슬그머니 이용하는 모습이겠다. 검은색 등산복 차림의 남자가 차에서 내리더니 잿빛배낭을 등에 메는 것을 보고 박 사장은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남자는 주차장을 벗어나 도로 쪽으로 걷는다. 다니는 차들도 없으니까 지팡이로 천천히 아스팔트 도로를 탁 탁 짚으며 간다. 등산복에 묻은 햇빛들을 떨어내며 도로를 가로질러 어둑한 산그늘의 마을 쪽으로 가는 남자. 박 사장은 그런 뒷모습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지금 시각이 오후 두 시 반이다. 이런 시간에 혼자 산을 간다고? 보름 전에 내린 눈이 산에 적지 않게 남아 있을 텐데 등산한다고? 어디 눈뿐인가, 산의 곳곳이 얼음판으로 변해서 위험할 텐데. ……아는 민박집이라도 찾아가는 게 아닐까? 오늘은 그 민박집에서 자고 내일 오전에 산에 올라갈 계획으로 말이다. 그러려면 여자와 함께 민박집으로 가는 게 보통인데 저 남자는 뭐야? 하긴 저런 낡은 경차에 동승할 여자는 없겠지. 쪽팔리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들이나 하며 박 사장이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그 남자김 과장은 구멍가게 앞에 섰다. 가게 간판이 짧은데 그나마도 왼쪽 부분이 떨어져나가 니슈퍼이다. 여닫이문이 덜그덕 소리를 내며 열리니까, 담요를 두른 채 졸고 앉았던 구멍가게 주인이 화닥 깨어 눈을 떴다. 이런 가게는 말하지 않고 손짓으로도 충분하다. 김 과장은 진열장의 먼지 덮인 위스키 한 병을 손으로 가리켜 그걸 넘겨받은 뒤 만 원 한 장을 건네고는 거스름돈을 받았다. 배낭 속에 위스키 병을 집어넣고서니슈퍼를 나섰다.

이제 준비는 다 되었다.

 

< 무심이병욱의 단편소설 '두 개의 밧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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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높은 나무 위의 까마귀들, 산길에 떨어진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들, 청설모들이 K를 볼 때마다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저 사람, 오늘도 왔네.”“그러게 말이야.”“저 사람은 해코지 할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아무 걱정할 것 없어.”“맞아 맞아.”“웃기고 자빠졌네. 저러다가도 갑자기 해코지할지 모른다고!”“무슨 쓸 데 없는 소리!”

K는 어이없어 발길을 멈추었다. 산짐승들은 이내 숨죽이고 K의 눈치를 살폈다. 긴장된 침묵의 공간을 K는 지팡이로 가볍게 저은 뒤 다시 산길을 걸었다. 산짐승들이 등 뒤에서 떠들거나 말거나, 깊어가는 가을 산을 K는 말없이 다녔다.

주로 비탈길 산을 다녔다.

비탈길 산 등산은 봉우리 아래 넓적한 바위에 앉아 쉬며, 먼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지팡이의 뾰족한 끝이 닳아 무뎌질 무렵 밤새 찬 서리가 내렸다.

오늘, 웬 일로 이른 아침부터 비탈길 산을 오르는 K였다. 워낙 된서리라 부근 풍경은 뿌옇기만 했다. 서리에 산길 바닥의 낙엽이 축축하게 젖어, 미끄럽기까지 했다.

산길 위로 뻗은 잣나무 가지 위에 청설모 한 놈이 앞발을 모으고 앉아, K를 지켜보았다. 된서리로 뭉개진 주위 풍경 속에서 놈은 마치 연극무대에 혼자 등장한 주인공 같았다.

조심성이 있는 놈이라면 K를 본 순간 다른 높은 가지로 이동해야 했었는데…… 가까이 다가오는 K를 미동도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

K는 놈의 검정콩 같은 두 눈알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짚고 있던 지팡이를 들어 놈을 때려잡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도 놈은 겁 없이 그대로 앉아 있었다. 늘 말없이 지나다니기만 하는 K를 믿은 것일까?.

서로 눈길이 마주치자 놈이 말했다.

이른 아침부터 웬일이어요?”

K는 가슴이 아팠다. 맞는 말이었다. 오전 열한 시는 넘어서 오르던 산길을, 오늘은 여덟 시도 되기 전부터 올랐으니. 된서리에 해가 보이지 않을 뿐 이른 아침이었다.

딸애가 이상해져서 집에 있지 못하겠더라고……

라는 말을 털어놓으려다 창피하단 생각에 K고개를 떨어뜨리고 말없이 청설모가 앉아 있는 그 나뭇가지 아래를 지나갔다.

지나간 뒤 생각했다. ‘내가 그 말을 청설모 놈한테 털어놓았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랬다가는, 놈이 놀라 다른 나뭇가지 위로 부리나케 달아났겠지. 그 사연에 놀란 게 아니라 생각지도 못한 내 말소리 때문에. 워낙 조용한 산길이니까.’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가섭 별전'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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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상대의 압력에 의해 자신의 의지나 주장을 꺾고 순응하는 행동을 꼬리 내린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아버지의 엄한 말씀에 아들은 대꾸도 못하고 꼬리 내렸다.’고 표현하는 식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봤다.

아득히 먼 옛날 우리가 꼬리 달린 원숭이에서 진화했음을 자백하는 표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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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반신의 긁힌 상처들을 냇물에 여러 번 씻고 난 용이는, 지게를 지고 일어서는 대신 등태 속의 그 칼을 다시 빼들었다. 길이가 한 자밖에 안 되지만 날이 잘 서 있다. 백자를 열 점이나 대장장이한테 주고 장만한 거다. 사내가 듣거나 말거나 용이는 사나운 낯으로 말했다 

자네 말이야, 내가 그만 따라와도 된다고 할 때까지는 나를 따라와야 해. 만일 또 제멋대로 달아났다가는 그 때는 이 칼로 죽여 버릴 거다.”

고개를 다 내려가면 전대의 볶은 콩들을 다 주겠다고 한 약속은 얼버무려졌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세상은 강자가 하자는 대로 약자가 순종하며 돌아가기 마련 아닌가.

이 냇물을 건너고 나면, 정도사까지 오 리쯤 된다. 십 년 전 천도재를 지내려고, 단발령 고개 너머에서 가장 가까운 절을 찾다가 정도사를 만난 것이다. 사실상 오늘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 그렇다면…… 이 냇물만 건너면 사내를 풀어주자. 남은 볶은 콩들도 그 때 주자. 벙어리가 다리를 절면서 여기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꽤 고맙지 않나?

 

 

사실 말이 오 리지, 산길 오 리를 혼자 무거운 지게를 지고 갈 걸 생각하면 쉬운 결정이 아니다. 하지만 용이는 다시 좋게 마음먹었다. 하긴 냇물이 거울처럼 맑고, 붉거나 노랗거나 한 단풍들이 지천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가을 풍경 속에서 마음을 모질게 먹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용이는 벗은 짚신 켤레를 새고자리에 매단 뒤 바지 대님을 풀었다.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이고는 지게를 지었다. 사내의 도움을 뒤로 받으며 냇물로 조심조심 들어섰다. 얼음장같이 찬 냇물에 발가락들이 다 얼어 떨어져버릴 것만 같다. 참아가며, 매끄러운 조약돌들을 조심조심 밟으며 나아간다. 연한 물빛으로 얕은 데는 걷기가 괜찮지만 검푸른 물빛으로 깊은 데는 허리춤 가까이 냇물에 젖어, 사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고생깨나 했을 게다.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방산(方山) 용이'  중에서 >

 

사진자료 :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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