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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과 우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맞선다.

강폭은 그들의 얼굴이 노란 콩알처럼 보일 만큼 넓다. 그래도 그들을 늘 보게 되자 특유의 동작이나 몸집이 눈에 익으면서 구별이 가능해졌다. 그 쪽에서 활 잘 쏘는 놈이 나서면 곧바로 우리 쪽에서도 그런 자가 나서서 응사할 수 있는 게 그 때문이다.

그들과 우리는 자기 편 강나루를 지킨다. 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갈 수 있는 강나루는 전략적 요충지일 수밖에 없다. 본래는 사절들의 왕래를 위해 만들어졌다지만 유사시엔 피비린내 나는 첫 장소가 될 것이다. 삼십 년 전의 전란도 그들이 우리의 이 강나루를 야습하며 비롯되었다. 노략질하러 쳐들어온 그들을 다시 강 건너로 패퇴시키기까지 일 년이나 걸렸단다. 그 후론 정기적인 사절들의 왕래마저 단절되고, 증강된 병력으로 강나루를 지킨다.

 

 

우리는 밤낮으로 경계를 선다. 환한 낮은 물론, 밤에도 횃불들 밝혀놓고 강 건너 나루를 경계한다. 그들도 매한가지다. 밤마다, 우리와 거의 같은 수의 횃불이 시뻘건 눈초리들처럼 떠 있다.

날이 밝으면 그들이 먼저 요상한 피리를삐리삐리분다. 우리는 북을쿠당쿠당쳐서 대응한다. 그들이 화살을 쏘면 우리도 비슷한 수의 화살을 쏜다. 심지어, 우리가 엎어놓았던 배들을 바로 놓고 손질하면 그들도 덩달아 자기네 나룻배들을 갖고 법석 떤다.

 

 

날마다 반복되는 일이다. 지루하다.

당장이라도 배타고 건너가 창칼 한 번 부딪치고 싶다. 복무연한인 이 년 내내 적을 지켜보다 끝날 것만 같아서다. 그래도 쳐들어가라!’는 임금님의 명이 없는 한 어쩔 수 없다. 삼십 년 전, 일 년 간의 전란이 끝난 뒤 그 후유증으로 온 나라가 십 년 가까이 고생한 뒤로는 임금님은 이 강나루를전쟁을 사전에 방지하는 보루로 여기는 것이다. 그들이 먼저 쳐들어온다면 모를까 이 지루한 경계가 쉬 해제될 것 같지 않다.

그들은, 삼십 년 전 도발한 전란의 보복이 반드시 있을 거라 판단했는지 강 건너 우리에게 한 치의 허점도 보이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자기네가 먼저 피리를 불고 활을 쏘고 욕을 퍼부음으로써 긴장을 조성해 간다. 그렇다고 강을 건너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그들 역시 전쟁의 사전 방지에 주안점을 둔 게 아닐까.

강물은 검푸르게 흐른다. 그 모습이, 엄청나게 큰 검푸른 구렁이가 꿈틀거리며 가는 것 같다. 바람이 불어 허연 물결이 일면, 마치 구렁이의 비늘들이 허옇게 서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강나루를 지키는 게 그리 어렵지 않지만 겨울 들어 강이 얼기 시작하면 달라진다. 엄청나게 고생해야 한다. 물가라 별나게 춥기도 하고, 언 강 위로 그들이 쉽게 걸어서 쳐들어올 수 있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지난겨울만 해도, 수만 개의 표창들처럼 온몸을 찌르는 추위 속에서 우리는 털가죽 한 장씩 두르고 강 복판을 지켜보아야 했다. 강 복판이 국경선이라, 그곳을 그들이 넘어온다면 전쟁이 시작되는 신호인 거다. 천만다행으로, 양 강가에서부터 형성되던 얼음장이 복판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봄이 되자 양 강가에 얼어붙은 것들마저 다 녹아버렸다.

지난겨울 그리도 우리를 괴롭혔던 강이 지금 눈앞에서, 언제 그랬냐는 듯 시침 뚝 떼고 유들유들 흐르고 있다.

그런데 걱정이 생겼다. 언제부턴가 강물이 줄어들고 있다!

그 동안 안 보이던 물속 바위가 그 등을 보이는 것만 봐도 분명한 현상이다. 하긴, 지난겨울 눈 한 번 제대로 내리지 않고 춥기만 했다. 올봄 들어서도 비 내린 날이 몇 번 없었다. 이 여름 들어와선 빗방울 비슷한 것도 떨어지질 않는다. 가뭄이 시작되려는가?

그렇다면 국경은 어떻게 되는 건지,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가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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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대통령 박근혜가 마침내 법정에 선 그 날, 봉하마을에서 전 대통령 노무현의 추도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살아도 죽은 목숨과, 죽어도 산 목숨의 극명한 대비가 그 날 목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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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반도를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곳이라 자랑한다. 나이 어릴 적에는 자화자찬하는 말인 줄 알았다. 나이가 들자 과연 산자수명한 땅임을 실감한다.

살고 있는 데에서 조금만 가면 해발 1000미터 안팎의 산이 있으며 항상 강물이나 내가 흐르는 산자수명한 땅 한반도.

그 때문일 게다. 무심은, 우리나라에서는을 평범하게 표현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부산에 산복도로(山腹道路)’가 있다. 산의 중턱을 지나는 도로라는데, 분명 산을 사람의 몸처럼 여겨 중턱 부분을 배로 비유한 말이다.

그런가 하면 '산허리'란 말도 있다. 이 또한 산을 사람의 몸처럼 여겨 허리처럼 중간쯤 되는 산의 지점을 가리킨다. “산중턱에 걸려 있는 달보다 산허리에 걸려 있는 달이란 표현이 훨씬 맛있다.

산자락이란 말도 있다. ‘자락옷자락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 옷이나 피륙 따위의, 아래로 드리운 넓은 부분이다. ‘산자락이란 산이 평지에 드리운 넓은 지대를 표현한 말인 것이다.

산등성이란 말도 있다. 사람이 엎드려 있으면 등이 나온다. 산을 엎드려 있는 사람처럼 본 데서 나온 말이 산등성일 게다.

 

을 아기자기하게 표현한 우리말이 더 있을 듯싶다. 우선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적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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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는 자기 음식 앞에서 잠시도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는다만일 개가 음식을 먹을 때 당신이 다가간다면 금세 으르릉거리며 허연 이빨들을 다 드러낼 것이다. 자기 음식을 지키려는 개의 욕심일 것 같아 나는 그 모습이 딱해 보였다. 마음 편히 음식 한 번 먹지 못하다니 얼마나 불쌍한가.

 하지만 요즈음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개가 음식 먹을 때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는 것은 적에게 방심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는 본능일 거라는 생각이다. 음식 섭취는 모든 생명체의 존재 방식이다. 음식 섭취가 이뤄지지 못하면 그 생명체는 유지되지 못한다. 동물이 음식을 대하는 순간 온 신경을 집중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렇기에 그 순간은 적에게 기습의 호기(好機). 동물이 음식을 먹는 순간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건 그 때문이다. 야생동물의 생태를 찍은 영화를 보면 보잘 것 없는 먹이에 다가가는 순간에도 사방을 살피며 경계하는 야생동물의 모습이 역력하다.

 

그러에도 불구하고음식을 먹을 때 경계심이 없는 동물이 있다. 애완견들 중에 있다. 그건 오랜 세월 인간들에게 길들여져서 순치된 결과다. 따라서, 음식을 먹을 때 가까이 다가가도 별 일 없는 애완견이 있다면 그 애완견은 생명체로서의 존재방식마저 잃은 딱한 경우다. 나는 단언한다. 동물의 야성 정도(程度)는 그 동물이 음식을 먹을 때 얼마나 주위를 경계하느냐로 결정된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사람이 음식을 먹을 때 다른 사람들과 대화는 물론 그 음식을 나눠먹기도 하며 조금도 경계하지 않는 것을 나는야성에서 그만큼 멀리 떠나온 모습이라고 여긴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문화라 부르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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