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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심산촌의 농막  뒤편에 요염한 백합  한 송이  활짝  피었다.  팜므파탈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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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심 7미터다. 더 내려가자 얼마 안 가 물갈퀴가 강바닥에 닿았다. 수심 9미터. 강을 다녀본 중에 가장 깊었다. 얼결에 이 강의 최대수심에 닿은 것이다. 온몸으로 느껴지는 깊고 컴컴한 물의 무게. 수심 9미터의 강바닥은 의외로 흔한 모래밭에 자갈들이 널린 풍경이었다. 문득 그 풍경이 아주 느리게 회전하고 있음을 느꼈다. 깨달았다. 박 사장이 말했던 흰 바위 아래 소용돌이의 정체였다. 그의 얘기대로라면 내 몸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야 했는데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체감되지 못할 정도의 미세한 소용돌이였다. 피서객들이 소용돌이에 휘말려서라기보다는 이 부근이 워낙 깊고, 멀리서 헤엄쳐 오느라 체력이 다한 때문에 변을 당한 게 아니었을까.

박 사장이 허풍을 친 거다.

괜히 맥이 빠져서 그대로 수면을 향해 올라가려다가, 바위의 뒤편을 못 봤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뒤편으로 돌아선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어린애만 한, 두 자 크기의 쏘가리 한 마리가 바위에 밀착해 있었기 때문이다. 몇 달째 우정 식당의 수조 안을 살펴봤지만 이렇게 큰 쏘가리는 없었다. 쏘가리와 나는 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눈알 하나만도 왕방울만 한 놈. 워낙 몸체가 커서, 들어가 있을 만한 바위틈을 못 찾고 그냥 바위벽에 붙어있는 게 아닐까. 나는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작살의 고무줄을 조용히 잡았다. 놈은 달아날 수 있음에도 그대로 있었다. 아마, 놈으로서도 그 깊은 수심에서 사람과 맞닥뜨린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작살의 고무줄을 길게 잡아당겼다가 탁 놓았다. 작살 촉이 몸체에 꽂힌 순간 놈은 한 번 꿈틀하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잡았구나!’나는 긴장이 확 풀리면서 작살을 쥔 채로 강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때다. 물속 전체가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환해졌다가 다시 어두워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물속에서 겁먹거나 당황하면 위험하다. 천천히, 쏘가리가 꽂힌 무거운 작살을 두 손으로 쥔 채 수면을 향해 올라갔다. 수면에 오르자마자 요란한 소리와 얼굴을 후려치는 물방울들에 정신이 없었다. 소나기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번쩍번개가 친 뒤 얼마 안 가쾅쾅쾅천둥소리가 나기도 했. 강가로 나가는 걸 포기하고 흰 바위 위에 쏘가리가 꽂힌 작살을 올려놓은 뒤 내가 오르려는데…… 여의치 않았다. 손으로 잡을 데 없이 온통 매끄러운 바위에 빗발까지 더해진 탓이다. 얼마나 세찬 빗발인지, 강마을도 보이지 않는다.

 

 

 

빗물이 유입되면서 강물이 느닷없이 부풀었다. 험한 바위들이 많이 박혀 있는 강이다. 내 몸을 강물 흐르는 대로 방치했다가는 다른 바위들에 부딪쳐 크게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 공포에 사로잡힌 나는 기를 쓰고 흰 바위 위로 기어오르려하는데 주위는 칠흑같이 어두워져만 간다.

 

 

 

 < 무심 이병욱의  단편소설  ‘그 강의 흰 바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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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풍경의 주인공은 컨테이너 농막도, 여인도, 초록 파라솔도, 시커멓게 드리워진 땅 그늘도 아니었다. 화창한 초가을 햇빛이 바로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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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7-09-18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의 집은 무심선생님 농막이겠지요?

무심 2017-09-18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상상에 맡깁니다. 삭막한 두릅나무가 꽃을 피울 줄은 몰랐습니다. 마치 사람이 나이가 들어 흰 머리털들이 느닷없이 난 모습 같았습니다.
 

 

내 청춘의 어느 한 때 양양고등학교 운동장 가에 정렬해 있던 플라타너스들. 40년 전보다 더 자란 모습으로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얼마간 감동 없이 살았다. 감동 없이 산다는 말은 아무 감정 없이 하나의 사물처럼 살았다는 뜻이 아닐까. 하긴 감정을 갖고 살기에는 세상이 너무 삭막해졌다. 물론 이럴 때 세상은 나 자신도 포함하는 낱말이다. 그러다가 201792, 감동을 받았다. 평균 나이 58세나 되는 제자들의 따듯한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1977, 78년 태백산맥 너머 양양고등학교에서 맺은 사제지간의 연이 장장 40년째 잊히지 않고 존재할 줄이야 

솔직히 나 자신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머리 희끗희끗한 제자들에게 물었다. 

내가 자네들을 가르칠 때, 어땠지? 실수가 많고 어설프지 않았나?” 

제자들이 말했다 

선생님이 그 당시 아주 열정적으로 가르치셨어요! 그리고 늘 저희들과 소통하려고 애쓰셨고요! 그래서 저희들이 여태 잊지 못하는 거여요.” 

놀랐다. 무심한 나한테도 그런 때가 있었다니.

 

그 날 잠시 시간을 내 양양고등학교 교정의 한 곳을 사진 찍은 것이다. 40년 전 운동장 조회가 있을 때마다 교사들은 저 플라타너스나무들을 등지고 서서 학생들을 지켜보았다. 뻗은 가지들도 몇 없어 볼 품 없던  플라타너스나무들이 이제는 왕성한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왕성해지는 추억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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