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배 때문이다. 그 후배 때문에 평생 스포츠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무심이 총 20kg이 넘는 스쿠버 장비를 착용하고 깊은 물속에 뛰어든 거다.

 

1990년 가을이다. 무심이 시골 읍의 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그 후배가 수시로 다가와 말을 건넸다.

형님, 아랫배가 나온 게 심상치 않습니다. 연구부장 자리에 앉아 지내다보면 배가 더 나오면서 건강이 아주 안 좋게 될 겁니다. 어서 스포츠를 시작해서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합니다.”

무슨 소리야? 이렇게 앉아 있다가도 수업시간만 되면 교실로 가 50분간 백묵 쥐고 몸을 움직이다가 나오는데.”

나 참 형님도! 그건 운동이 아니라 노동입니다. 제대로 된 스포츠를 해야 뱃살도 빠지고 건강해지거든요. 움직이기 싫어하는 형님한테 딱 맞는 스포츠가 있어요. ‘스쿠버인데 이거 재미들이면 주말마다 강으로 바다로 다니느라 뱃살이 확 빠질 수밖에 없어요.”

스쿠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나는 숨쉬기 운동만으로도 충분해.”

, 답답하기는!”

후배는 태백산맥 너머 도시가 고향이다. 온 가족이 이사와 사는 나와 달리, 후배는 혼자 하숙하며 지내다가 토요일 오전수업이 끝나는 대로 넘어간다는데…… 스쿠버 다이빙으로 일요일 하루를 보낸다고 소문나 있었다. 후배가 생뚱맞게도 내게 스쿠버를 권하는 목적은 건강을 염려해서라기보다는같은 직장에서 스쿠버 동호인을 한 사람이라도 만들려는 것주말마다 혼자 태백산맥을 넘어 다니는 일이 심심해서 동행인을 구하려는 것’, 두 가지로 짐작하고 있었다. 읍에서 동해안까지는 자가용차로 두 시간여 걸리는데다가, 그 찻길이 꼬불꼬불한 데가 많았다. 귀한 주말시간을 차를 몰고 험한 산길을 오가는 것으로 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스쿠버는 한 순간 실수로 목숨을 잃기도 한다는 위험한 스포츠가 아닌가. 후배가 아무리 유혹해도 내가 스쿠버에 동참할 가능성은 1%도 안 됐다.

그러다가 일요일 아침에 후배의 전화를 받은 게 사건의 시작이다. 당시는 휴대폰 같은 게 없이 집 전화기만 있는 때다. 늦잠을 자고 있는데 후배가 동해안 바닷가에서 느닷없이 전화를 걸었으니.

형님 지금 뭐해?”

잠자다가 전화 받느라 깼어.”

참 딱하기는. 형님, 지금 당장 옷 갈아입고서 여기 바닷가로 차 몰고 와요. 와서 스쿠버라는 게 과연 어떤 건지 구경이나 해요. 제가 지금 바닷가 식당의 전화기를 빌어 전화 거는 건데 여기 위치가 어디냐면……

통화가 끝났다. 아파트 창밖을 내다보니 푸른 하늘에 햇빛 화창한, 전형적인 가을 날씨였다. 집에 있어 봤자, 낮잠을 자거나 비디오로 무협영화를 보는 것 이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는 시골 읍의 일요일. 그렇다면 후배가 말하는 바닷가로 한 번 가 보자.

해서, 바람 쐬는 겸 차를 몰고 동해시 어느 바닷가까지 달려간 게 무심의 스쿠버 추억의 시작이다. 마침 바닷가에 도착했을 때 스쿠버 다이버들이 하나 둘, 바닷물에서 해안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중에 물안경을 벗어서 얼굴을 알아 봤지만 후배도 그 무리에 있었다. 간간이 흰 파도가 치는 검푸른 바다에서 바닷물에 젖어 가을 햇빛에 몸들을 찬연히 드러내던 그 광경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국어교과서에 있는 전봉건의 피아노라는 시가 떠올랐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1990년은 신용카드가 처음 보급되던 시기다. 한 번도 카드를 그어본 적이 없었던 무심은 그 날 뭐에 홀린 듯, 후배가 권하는 대로 스쿠버 숍에서 비싼 장비들을 일 년 할부로 장만했다. 무심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스쿠버 다이빙 추억이 그렇게 시작됐다.

사실 처음에는, 스쿠버 다이빙을 배우다가 짠 바닷물을 몇 번 들이키고는 만정이 떨어져 중단했었다. 하지만 아내가비싼 장비들을 충동구매해 놓고 낮잠이나 자는 모자란 남편으로 보는 눈총에 쫓겨, 울며 겨자 먹기로 스쿠버를 재개했는데…… 한 달여 고생 끝에 스쿠버 다이 빙에 능숙해지면서 무심은 주말만 되면 먼 동해안 바닷가로 스쿠바 장비들을 차에 챙겨 싣고 달려가게 되었다.

물속은 고전소설에 잘 나오는 표현처럼 별유천지(別有天地)비인간(非人間)이었다. 지상에서는 못 봤던 별천지가 바다 속에 있었다. 일 미터 남짓한 작살 하나 믿고 집채만 한, 음험한 물속 바위들을 뒤져 오십 센티 넘는 쏘가리도 잡아보았다   

그 때 추억의 일부분을 소재로 해서 쓴 소설이 그 강의 흰 바위. 당시 무심 나이 40대 중반. ‘40 불혹(不惑)’이라 하여 40세는 세상일에 미혹됨이 없는 나이라는데 무심은 그렇지 못했다.

무심을 5년여 동안 미혹시키고 그 후 연락이 끊긴 후배. 지금은 어디서 뭐하며 지내는지. 후배도 환갑을 지났을 테니 체력이 달려 스쿠버 다이빙은 그만두지 않았을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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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7-10-18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작 배경 소개 자체가 한 편의 작품이네요~ ^ ^

무심 2017-10-18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게 스쿠버 활동은 아주 소중한 추억이 됐습니다. 더 머리가 굳기 전에 그 추억들을 하나하나 글로 써 내고자 합니다.
 

 

잡초는 아내와 함께 밭농사 짓던 체험이 바탕이 돼 쓰였다. 농사가 처음인 데다가, 동화의 한 장면처럼 우거진 숲속 밭이라 충분히 소설 감이 된다고 무심은 판단했다. 일주일 남짓해 소설을 완성했으니 비교적 수월하게 쓰인 셈이다. 그런데 소설이 발표된 뒤 생각지도 못한 부작용이 생겼다. 아내가 작품 속의 아내와 동일시되면서 주위 분들한테부동산투기에 혈안이 된 복부인으로 오해받게 된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해명하건데 절대 무심의 아내는 복부인이 아니다. 정확하게 표현한다면복부인이 못 된다.’

워낙 성격이 무심한 탓에 무심이란 호를 갖게 된 남편과 달리, 세상일에 유심한 아내이기는 하나 부동산 투기 같은 재테크보다는 집안 살림 밭농사 성당봉사활동 같은 건전한 부문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굳이 무심의 소설들 중에서 아내의 실제 모습에 가까운 여성을 고른다면외출에 등장하는 아내일 것 같다.

 

한 편의 소설은 반드시 작가의 상상력을 전제로 한다. 무심의 경우, 티베트의 천장을 소재로 한라싸로 가는 길100% 상상으로 쓰였다. ‘시신을 새들에게 먹이로 주는 천장 풍습이 티베트에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껴 관련 자료들을 수집한 뒤 상상력을 발휘해 쓴 것이다. 월남전에서 중상을 입고 제대한 사내를 소재로 한숨죽이는 갈대밭또한 80% 이상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 소설을 쓸 때 무심은 월남은커녕 제주도에도 가 본 적이 없는 대학교 4학년생이었는데문학의 밤 행사에 발표할 꽁트를 하나 준비해 달라는 후배들의 부탁에 며칠을 고민하다가어느 날 밤갈대밭 초원 앞에 카빈총을 지팡이 삼아 서 있는 사내를 상상하며 밤새워 꽁트가 아닌 단편소설로 완성한 것이다. 100% 상상력의 소산이라 하지 않고 80% 이상이라 한 까닭은 소설의 배경인깊은 산속 분교는 실제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유명작가가 된 *** 선배와, 그 소설을 쓰기 전 해인 1972년 늦가을 일주일 남짓 그런 분교에서 함께 생활한 적이 있었다. 대학가에 갑자기 휴교령이 내려져 기약 없이 놀며 지내야 했던 시기다.

잡초의 경우는 상상력이 10% 정도 보태져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아내라는 인물을 있는 그대로 순하고 평범한 주부로 그려서는 작품 맛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생각 끝에 아내를부동산 투기에 혈안이 돼 있는 복부인여자로 만들어 놓자순수한 농토마저 부동산 광풍에 휘말리는 이 시대의 폐단이 선명해졌다.

 

작가에게 현실은 창작의 재료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만일 작가가 상상력 하나 보태지 않고 현실 체험대로만 글을 쓴다면 그건 소설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나 수필이다.

여기서숨죽이는 갈대밭에 얽힌 일화 한 가지를 공개한다.

이 작품을 썩히기 아까워 세월이 몇 십 년 지났지만 세상에 제대로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문제는 빛바랜 문학회지에 활자로 인쇄된 것들을 어떻게 워드로 쳐 바꿔 놓느냐였다. 창작하는 일과 달리 그런 기계적인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궁리 끝에 대학생인 아들을 불러 부탁했다.

아빠가 대학 시절에 문학회지에 발표한 작품이 있는데, 워드로 쳐 다오. 그럼 용돈을 줄 게.”

아들이 용돈 욕심에 숨죽이는 갈대밭을 워드로 쳐나가다가, 자기도 모르게 스토리에 이끌려 호흡이 가빠지더니 워드를 다 치고 나자 소리쳤다.

아빠가 대학시절에 이렇게 소설을 잘 썼다니!”

그러더니 이런 소리도 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경자말이야, 우리 엄마 아닌가?”

어이가 없었다. 무심이 아내를 맞선자리에서 처음 대면한 때는 198358일이다. (그 사흘 전 어린이날, 중공민항기가 춘천의 미군비행장에 불시착했다. 우리는 하필 중공민항기 직원들이 커피 마시며 쉬었다는 모 커피숍에서 대면했다.) 10년 전인 19735월에 쓴 소설의경자가 아내의 모델일 수가 없는 이유이다. 아들이 그런 말을 하고는 낄낄낄 웃었다. 아빠랑 함께 웃고자 한 말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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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소설은 1980년경에 썼다. 무심이 동해안의 모 고등학교 교사였을 때다. 망연히 흘러가는 남대천을 어느 날 지켜보다가, 문득 어떤 구상이 떠올라 이 소설을 쓴 것이다. 그 때 제목이 이었고 분량은 200자 원고지로 50 매쯤이었다. 지금도 동해안에 있는, 40년 넘는 설악문우회의 회지갈뫼지에 발표했다.

그 후 무심은 춘천의 모 고등학교로 전근온 뒤인 198311월경, 분량을 약 80 매로 보완하는 한편 제목도 사초(史草)’ 라고 바꾼 뒤 중앙의 모 일간지 신춘문예에 투고했다. 그 때 이런 결심을 했던 기억이다.

만일 당선되면 그걸 핑계로 교직을 사표내고 나와 전업 작가로 사는 거다.”

돌이켜보면 만용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 신춘문예 최종심에 올랐으나 사초라는 제목이 작품 내용에 걸맞지 않다는 심사위원의 평과 함께 탈락한 것이다. 낙망한 무심은결국 내 팔자는 교사로 살아야하는가 보다체념하고 말았다.

그 후 다시 세월이 흘러 2000년 경에 공동경비구역 JSA ’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무심은 우연히 그 예고편을 보곤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소설  '사초'와 줄거리가 너무 흡사했기 때문이다. 남북으로 갈라진 병사들이 국경 근처에서 벌이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일란성 쌍둥이 같았다. 기분이 나빠 그 후 무심은 지금까지 그 영화를 한 번도 제대로 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상연이란 분이 1996, ‘DMZ’란 소설을 세계의 문학이란 문학지에 발표했는데 이를 박찬욱 감독이 2000년에 각색하여 연출해 나온 영화라 했다.

 

무심은 2004년 봄에 교직을 명퇴했다. 더 늦기 전에 소설을 써보기로 한 것이다. 역시 교직을 명퇴한 한 친구한테 1983년의 사초’  원고를 한 번 보여주었다. 그 친구가 다 읽고 나서 말했다.

감동적인 소설이다! 그런데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와 줄거리가 흡사하다.”

그 말에 무심은 다시 이 작품을 서재에 처박아두었다. 그러다가 요즈음 들어 생각을 바꿨다. ‘그 작품이 불쌍하다. 블로그에라도 올려 세상의 빛을 보게 하자.’

하여 이번에 가뭄’ 으로 이름을 바꿔 블로그에 올렸다. 다만 30여 년 전 작품이라 구식 문장들을 며칠 다듬어야 했다.

 

이 기회에 재차 밝히는 것은 이 작품이 공동경비구역 JSA’보다 최소한 십 년 이상 앞섰다는 사실이다. 이를 입증할 수도 있는데 1980년 경 발간된 설악문우회의 갈뫼지가 그것이며 1983년 중앙의 모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이 그것이다. 시간을 내어 찾고자 하면 나올 수 있는 근거들이다. 물론 무심에게도, 오래 되어 원고지들이 누렇게 빛바랜 사초원고도 있다.

 

 

제목을 이라 했다가  사초라 했다가  가뭄으로 자리 잡았듯이, 30여 년 흐르는 동안 다소 기구한 운명을 겪은 작품이다. 하지만 무심은 요 며칠 동안 이 작품을 다듬으면서 특히, 결말 부분에 이르러서 자신도 모르게 감명을 받았다. 자기 작품에 자기가 감명 받다니, 요즈음 말로 자뻑일 수 있다. 어쨌든 자신의 여러 한() 중 하나를 그나마 푼 듯하다.

 

이런 생각들을 해 본 적이 있다.

이 작품이 1983년 신춘문예 투고 때 당선되었더라면, 그래서 교직을 사표 내고 전업작가로 나섰다면 내 삶의 행로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작품이 1983년에 당선되지 못한 것은 제목 때문이 아니라, 당시 남북관계가 몹시 안 좋던 시기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의 원작이라는, 박상연 작가의 ‘DMZ’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솔직히 그럴 기분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과 무심 작품이 흡사한 것은, 세대를 격했지만 분단된 땅에서 살고 있다는 동질감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우연한 사건으로 보는 것이다.

 

기구한 역정의 이 작품에 무심은 할 말이 많다. 하지만 그만 적기로 한다. 불원간 친구를 만나 막걸리 한 잔 나누는 것으로 뒤늦은 뒤풀이라도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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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구, 양구에서도 물 맑은 동네 방산에는 백자 박물관이 있다. 산골에 이런 훌륭한 문화시설이 들어선 까닭이 있었다. 최선일(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한봉석(충북대학교 겸임교수) 두 분이 쓴양구 백자와 심룡 콘텐츠 전략이란 글의 일부를 소개함으로써 독자 여러분께 그 까닭을 짐작하도록 한다

 

"----강원도 양구군 방산면 일대는 수입천(水入川)이 흘러 도자기 생산에 필요한 물을 구하기 쉽고, 나무가 풍부하며 좋은 질의 백토가 풍부하여 백자 가마를 운영하기 좋은 지역이다. 이전에는 수동강(水同江)과 수입천의 합류 지점인 반구뫼에서 수로(水路)를 통해 경기도 광주 분원까지 사람과 물자를 운반하기 쉬웠다. 이와 같은 이유로 양구는 고려 말부터 근대까지 600여 년 동안 백자를 생산하였다. 특히, 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양질의 태토는 조선시대 분원의 설립 때부터 지속적으로 제공되어 최고의 백자를 만드는 재료가 되었다.

양구 지역의 도자기 관련 문헌을 살펴보면, '세종실록(世宗實錄)'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등에 자기소와 도기소가 운영된다고 적혀 있다. 특히, 최근 보물로 지정된 이성계 발원 불사리 장엄구 일괄품에 포함된 5점의 백자는 이 지역에서 생산된 대표적인 백자이다. 이 불사리 장엄구는 1932년에 강원도 금강산에서 발견되었고, 사리기를 넣었던 두 점의 백자에 음각으로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 가운데 백자를 만든 장인이 방산사기장(方山砂器匠) 심룡(沈龍)’이라고 적혀 있어 1391년에 양구에서 활동한 사기장의 존재를 알려준다. 하지만 심룡이 만든 다른 작품은 드러난 것이 없고 남은 문헌도 많지 않아 그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명확히 밝힐 수 없다. -----"

 

무심이 지난해 12 양구 심룡 문학창작기행 참여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양구백자박물관과 가마터 등을 둘러보며 ‘방산 사기장 심룡어른을 알게 된 것이다. 귀가한 뒤, 제목을 방산 용이라 정해놓고 소설 쓰기 시작했다. 실존한 인물이라 상상력만으로 작품을 써서는 안 될 터. 고려 말 조선 초라는, 간단치 않은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공부해 가며 집필했다. 원고 분량은 적지만 일종의 역사소설이었다. 600여 년 전의‘방산 사기장 심룡이란 분이 과연 제대로 형상화됐을까?

판단은 독자 여러분께 맡긴다.

 

 

 

 

http://www.yanggum.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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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는 성적으로 대단한 과도기이다. 무심이 고등학교를 다닌 60년대 말, 그 때 겪은 사춘기의 모습 중 한 부분을 글로 써 남긴 게 승냥이.

명문고를 다닌다 해도 사춘기가 생략되는 게 아니었다. 잿빛 눈동자를 한 친구는 밤마다 공설운동장을 누비는 Lady killer였고 다른 한 친구는 사창가 출입을 일삼다가 결국은 몹쓸 병에 걸려 자퇴했다. 그런 병 정도는 치료가 되었을 텐데 자퇴까지 하다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 부모님이 너무나 실망이 커서이런 자식은 더 이상 공부시킬 필요가 없다!’면서 자퇴원을 내도록 했던 게 아닐까. 요즈음 같아서는 있을 수 없는 어르신들의 독단이지만 그러나 60년대는 극히 당연한 조치일 수 있었다.

밤마다 공설운동장을 누비던  Lady killer 친구얘기와 사창가 출입을 일삼다가 몹쓸 병에 걸려 자퇴한 친구얘기를 하나로 혼합해 완성한 작품이 무심의승냥이인 것이다.

 

정작 고등학교를 다닐 때는 쓰지 못했고 몇 년 지난 대학교 3학년 때 쓴 것이다. 그 때가, 박정희 대통령이토착적 민주주의라는 궤변으로 유신을 선포한 1972년 늦가을이었다. 대학가에 휴교령까지 내려져 하릴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글 쓰는 선배가 찾아왔다. 무심을 보고 싶다며 먼 시골에서 올라온 것이다. 하릴없던 무심은 그 선배를 따라 시골로 내려갔다.

시골에서 가재나 잡아 삶아먹으며 며칠을 보내다가우리 이러지 말고 각자 작품을 씁시다하여 무심이 두어 시간 만에 완성한 게 승냥이였다. 200자 원고지로 50매쯤 되었다. 휴교령이 해제되고 이듬해, 무심은 교지에 이 작품을 발표했다. 그 후 여학생들이 무심을 승냥이의 주인공으로 여기면서 접근 자체를 꺼리면서…… 정말 외로운 날들을 보내야 했다. 기가 막히다. 어떻게 작품을 쓴 사람과 작품 속 주인공을 혼동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시절, 70년대 초는 그러했다.

 

올해 생애처음으로 작품집을 내기로 했을 때 그런 박대를 받은 작품 승냥이를 복권시키기로 무심은 마음먹었다. 내용을 보완해서 200자 원고지로 70매 가량 되는 승냥이가 완성돼 활자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출발은 짐승이다. 어느 때가 되면 발정 난 짐승 같은 시기를 겪기 마련이다. ‘승냥이란 작품은 그런 측면에서 감상해야 한다. 내용 전개 상 거친 표현과 낯 뜨거운 묘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무식한 어느 동창 놈이 대학 시절 교지에 실린승냥이를 읽고 난 뒤 말했다.

2의 방인근이 나타났구먼!”

당시에 방인근이란 음란소설 작가가 있었다. 무심은 그 때부터 그 동창 놈을 아주 무식한 놈으로 여긴다. 어떻게, 음란소설과 순수소설을 구별도 못하는 놈이 국문과를 나오고 나중에 국어선생까지 했는지 난해할 뿐이다.

 

한 편, 이 소설을 쓸 때 어울렸던 선배는 훗날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유명작가가 되었다.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 것이다. 지금은 소원해진 사이라 그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훗날 때가 되면 그 이름을 밝힐지 모른다.

 

작가에게 작품은 그의 자식이다. 비록 거칠고 낯 뜨거운 내용이 많지만 무심은 작품승냥이를 사랑한다. 몸으로 직접 낳은 자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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