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만에 두꺼운 책을 읽었다.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 ( 메슈 닐 지음, 박진서 옮김)’란 인문학 도서다. 사흘 걸려 읽었다. 예전에는 아무리 두꺼운 책이라도 하루 만에 독파했는데 이제는 시력도 떨어진 데다가 지구력까지 저하된 탓에 그렇지 못하다.

언젠가는 두껍기로 소문난··도 하루 만에 독파했다. 그 비결은 단순하다. ‘책의 내용을 빨리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다.

당뇨 악화로 시력이 무척 안 좋은 장모님한테‘K의 고개를 내자마자 한 권 드렸을 때 열흘 가까이 그 안 좋은 몸으로 독파하고 나서 내게 이런 전화를 했다.

이 서방. , 다 읽었어. 재미나게 썼더군.”

아니 몸도 안 좋으실 텐데.”

왜 있잖아, 책을 읽으면 머릿속에 훤히 그려지는 거 말이야. 그 재미에 읽는 거지.”

바로 그것이다. 장모님 머릿속에 훤히 그려지는 것이 내가 책을 읽게 되는 호기심과 같은 것이다.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에서 본 흥미로운 사실 몇 가지.

우선, 로마 제국 초기부터 시멘트로 콘크리트 건물을 축조했다는 사실이다. 황제의 공고한 권력을 상징적으로 과시할 목적이란다. 그렇다면 시멘트는 현대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현대인은 단지 수공업 차원이던 로마 시대의 시멘트를 대량 생산하는 시스템(시멘트 공장)으로 발전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깨달음!

 

로마의 어린이들도 돌싸움을 즐겼다는 사실이다. 내 어린 시절에도, 같은 동네 애들과 무리를 지어 다른 동네 애들과 수시로 돌싸움을 벌였다. 몸을 다칠 위험한 짓이었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머나먼 로마의 어린이들이나 이 땅의 어린이들이나 동네 간 돌싸움 벌이기는 한결 같았다는 사실. 놀랍고 재미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여자란 결함 있는 남자라고 정의했다는 사실도 책 속에 언급된다. 만일 그가 요즈음 그런 발언을 했다면 당장 여론의 질타를 받음과 동시에 사회적으로 매장되고 말 것이다.

 

‘19세기 이탈리아에서 사생아 출산이 급증했고 그 때문에 쿠오타(고아원 벽에 설치되어 아기 엄마가 익명으로 아기를 두고 갈 수 있는 장치)를 사용하는 이탈리아인이 그 어느 때보다 늘어났다는 내용도 무척 낯익다. 시대와 나라가 다르지만 판으로 찍어낸 듯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 수많은 전란의 후유증으로 무질서하게 된 로마 시가를 오늘날의 질서를 갖춘 도시로 그나마 만들어낸 데에는 무쏘리니의 공이 크다는 내용도 놀랍다. 물론 말년에 이르러 실정에다가 독재자로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말이다.

 

첨언:

사실 완전한 번역은 불가능하다. ‘번역은 반역이다는 말이 있는 게 그 때문이다. 예를 들어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영시로 제대로 옮길 수 있을까? 담긴 감정은 둘째고 뜻만 겨우 옮겨질 것이다.

그렇다 해도 로마, 약탈과 패배로 쓴 역사의 번역은 다소 거친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의역보다는 직역에 중점을 둔 결과였을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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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원 화백을 1214, 모 행사장에서 만났다.

 

전 화백과 나는 춘고 42기 동창이다. 학창시절, 예비고사를 치른 날 저녁에 자취하는 친구 단칸방에서 만나 밤새 소주를 마신 적 있다. 지긋지긋한 시험을 마쳤다는 해방감에서다.

그 때가 196912월초였으니… 모 행사장에서 만난 이 날은 정확히 반세기만이다!

작년의 일이다. 나는, 전 화백이 영광의원로예술인상을 받게 됐다는 소식에 어리둥절했다.

아니 다른 상도 아닌, 원로예술인상이라니?”

하지만 뒤늦게 깨달았다. 우리가 어느 새 70세를 코앞에 둔 원로라는 것을 잊고서 한창 젊은 나이로 착각했다는 사실을. 이런 착각을 나는 수시로 한다. 얼마 전에는모처럼, 춘천 지역의 젊은 화가 및 시인들을 만나 즐거운 저녁 식사를 했다SNS에 글을 써 올린 적이 있는데 나중에 깨달은 사실은, 내가 보기에 젊은 분들이지 남이 보기에는 50세에서 60세에 이르는 나이 많은 분들이었다는 것이다.

 

1214모처럼 만난 전태원 화백이 내게 말했다.

병욱아. 학창시절에는 미술하거나 문학하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제는 너와 나, 단 둘이 남았구나.”

그러게 말이다.”

내 이름을 편하게 불러주는 예술 하는 친구가 같은 춘천에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월의 덧없었음을 쉽게 이겨나갈 것 같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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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20-01-0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심 선생님, 오랫만에(?) 인사 드립니다.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 ^ ^ 장편은 언제 출간이 되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 ^

ilovehills 2020-01-07 05:01   좋아요 1 | 수정 | 삭제 | URL
처음 써 보는 장편이라 시행착오가 큽니다. 퇴고를 마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단 쉬기로 했습니다. ‘장편소설 쓰다가 머리털이 다 빠져 대머리가 된다‘는 얘기가 있더니 과연 그럴 만합니다.
아마 퇴고를 더한 뒤 연말이나 내년초쯤에 출간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찔레꽃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강원대 1학년 학생이던 1970년에 박계순 선배만 알게 된 게 아니었다. 그 늦봄 어느 날 춘천 교대에 고교 적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교정 잔디밭에서 네잎클로버를 찾고 있던 최돈선 시인을 만나 인사를 드리기도 했다. 그뿐 아니다. 태백산맥 너머 강릉고 3학년 학생이 내게 편지를 보내와 내년에 강원대에 진학해서 이 선배님과 함께 문학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란 포부를 밝혔으니 바로박기동 시인이다.

이듬해인 19712, 박기동 학생이 강원대에 진학하게 되면서 역사적인(?) 만남이 이어졌고 세 달 후 5월 어느 날 우리는 지하다방 남강에서 그리고문학회를 결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다. ‘그리고 문학회를 하필 남강 다방에서 결성하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1년 전 내가 박 계순 선배와 처음으로 만나 커피를 마시며 문학 대화를 나눈 장소가 바로 남강 다방이었음을. 남강 다방은 시내 중심가에 있었으며 맞은편에는보리수 다방이 있었다. 남강 다방과 보리수 다방은 여러 모로 대조되었다. 남강 다방은 팝송 및 대중가요를 틀어주었고 보리수 다방은 클래식음악만 틀어주었다. 남강 다방은 지하 1층에 있었고 보리수 다방은 지상의 2층에 있었다.

지하 층계로 해서 남강 다방에 들어서면 그 날 밤 이슬이 맺힌 눈동자, 그 눈동자하면서 가수 이승재의 눈동자Ray A. Peterson‘Tell Laura I love her’노래가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보리수 다방에 가면 운명 교향곡 같은 클래식음악이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창가에 앉아 책을 보거나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이승훈 시인(2018년 별세)’을 뵐 수도 있었다. 그분은 춘천 교대 교수였다. 어느 날 나는 창가의 그분께 용기를 내 합석을 요청했다. 강원대 국어과를 다니는 학생이라고 나 자신을 밝힌 뒤 나름대로 문학적인 고민을 말씀 드리고 해답을 부탁드렸다.

초면의 다른 대학 학생임에도 문학적인 고민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이승훈 시인은 아주 따듯하게 답을 말씀해 주었다. (그 문학적 고민의 내용은 나중에 밝히기로 한다.) 나는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다방을 나왔다. 반세기 된 시간이 흘렀지만 보리수 다방 창가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거나 독서를 하던 그분의 모습이 생생하다. 현대인의 불안이나 소외를 다룬 난해한 시들을 발표하던 시적 경향과는 전혀 부합되지 않던 따듯한 말씀이라니.

(이승훈 교수님. 삼가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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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도 넘은 일이다. 1963년에가수 박일남은갈대의 순정으로 가요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그의 매력적인 저음과갈대의 순정’ 노래는 아주 잘 어울려서 당시 30만 장이라는 기록적인 음반 판매고를 기록했다. (요즈음으로 치면 300만 장 이상이다.)

이런 사실을 떠나 갈대의 순정’ 노래는 대한민국의 사내라면 한 번쯤은술자리나 노래방에서 불렀을 거라 짐작한다글쎄요즈음의 신세대들이처음 듣는 노래인데요?’하며 반발한다면 … 나는 딱히 할 말이 없다수능이나 공무원 시험에 나올 문제는 아니니까 말이다.

어쨌든 우리나라 대중가요 사에 한 획을 그은 갈대의 순정’. 노랫말이 이렇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사랑에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울지를 마라

아 아 아 아 아 아 갈대의 순정

말없이 가신 여인이 눈물을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눈물에 약한 것이 사나이 마음울지를 마라

아 아 아 아 아 아 갈대의 순정

 

 

그런데 나는 이 노랫말이 부분적으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갈대의 순정이라 했는데 … 노래를 부르는 사내(화자마음이 갈대의 순정이라는 건지사내 곁을 떠난 여자의 마음이 갈대의 순정이라는 건지 문맥 상 분명치 않은 것이다.

얼마나 국민적인 노래인지합창으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술자리모임을 파하기도 했는데 그 순간에도 나는 도대체 갈대의 순정이란 표현의 주체는 사내냐여자냐하는 의문을 어쩌지 못했다.

 

오늘 한 번 따져보았다.

다행히도 박일남 씨가 밝힌이 노래의 가사에 대한 뒷얘기가 인터넷에 있었다최근,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에서 박일남 씨가 한 얘기란다.

 

원래 갈대의 순정이 그 가사가 아니었다작곡가 오민우 선생님이 불러보라고 했는데 가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몇 군데 고쳤다제가 쓴 부분이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아랴였는데 그 부분이 어필된 것 같다.”

그렇다면 갈대의 순정이란 표현의 주체는 따져볼 만큼 복잡다단한 게 아니라는 데 내 심증이 굳어졌다대중가요 노랫말은 그 노래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이해해야 할 거란 평범한 판단이다더구나 이 노래가 만들어진 때가 남녀평등의 분위기가 아닌남자가 우선인 시대다남자는 결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되던 시대였다사나이라면 속으로 울어야 했다.

따라서 갈대의 순정이란 표현의 주체는 여자라고 봐야 옳았다.

이런 스토리다.

여자가 갈대처럼 마음이 쉬 흔들려 남자 곁을 떠나가 버렸다남자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지만 속으로 운다왜냐면 사랑에는 약하기 때문에그래서 남자는 자신한테 다짐한다울지 말자고.’

 

이런 내 판단의 근거가 노랫말의 후반부에 제시된다.

 

말없이 가신 여인이 눈물을 아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

 

즉 여자는 남자의 눈물도 모르고 떠나가는데 그 까닭은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갈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

 

결국 남자는갈대처럼 쉬 흔들리는 여자를 원망하지만 바로 그런 여자 때문에 속으로 울 수밖에 없다는 뜻이라서 피장파장이다.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뒤로 항상 되풀이되는 과제(課題)일 터!

그림 = 김춘배​


https://youtu.be/aW4vMW6OT9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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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춘천문협에 가입하기는 올 정초다. 최현순 시인이 지난 연말에 나를 찾아와문협에서 함께 활동하는 게 좋지 않으냐고 간곡히 부탁한 게 계기다. 나는 사실 교직생활을 그만두고는 소설 쓰기에 전념하는 생활이므로 어떤 조직에 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돌아가던, 게다가 승진을 향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던 모 학교에서의 경험이 역겨워서 , 다시는 조직 같은 데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결심한 바도 있다.

하지만 고교 시절 문예반 후배이기도 한 최현순 시인(현 춘천문협 회장)의 간곡한 부탁에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춘천문협에 든 것이다.

춘천문협에 들면서 소스라치게 놀랐으니 100명 넘는 회원들 대부분이 시 혹은 수필을 쓰는 분이라는 사실이었다. 소설 쓰는 분은 나까지 포함해 단 3명이었다. 그러고 보면 같은 문학을 해도 나는 무심하게도 고단한 짓을 해 온 것이다. 하긴 두문불출하는 성격이라면 죽치고 앉아 글 써야 하는 소설가가 적합하지 않겠는가.

 

서두가 길었다.

1214, 전상국 선생님의 북콘서트에 갔다가 박계순 소설가를 만났다. 박 선배는 소설가가 극히 드문 시대에, 더구나 여성이다. 당사자는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희귀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여류 소설가이다.

나와의 인연은 저 1970, 강원대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나는 국어교육과 1학년생이었고 박 선배는 서울에 있는 모 대학을 다니다가 고향 춘천으로 내려와 강원대 모 과로 학사 편입했다. 나보다 3년 선배다.

강대 학보에 자주 실린 내 글을 보고 흥미를 느껴, 박 선배가 먼저 말을 걸었다. 같은 교양강좌를 들은 게 계기다. 우리는 잣나무가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교정의 길을 걸으면서, 화사한 늦봄의 햇살 아래 문학을 중심으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자리를 옮겨 시내 중앙로에 있는 지하다방 남강에서 커피 마시며 얘기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얼마 전 만났을 때 ‘1970년 늦봄 어느 날, 남강 다방에서 커피 마시며 대화 나누기도 했다는 내 얘기에 박 선배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부분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전의 특별한 경험에 대한 내 기억은 놀랄 정도로 생생하다. 70년대 춘천 중앙로에 있었던 남강 다방. 지하라서 늘 습했던 그 공간. 기회가 되면 남강 다방을 소재로 글 한 편 쓸 것이다.)

 

 

얼마 후 여름방학이 왔고 개학하면서 2학기가 됐다. 그런데 박 선배를 더는 캠퍼스에서 볼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박 선배는 1학기를 마치자마자 자퇴해 버렸단다. 하긴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 무용을 전공했으니, 그 비슷한 과조차 없는 강원대에서 박 선배는 견디기 힘들었을 것 같다. 어쨌든 박 선배와 나의 인연은 1970년 강원대학교 1학기, 늦봄의 두어 번 만남이 전부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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