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데없는 코로나 광풍 속에서 이 선배와 나는 굳이 목숨까지 걸고서 만날 수는 없었다. 그저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28일 날이다. 이 선배가 중국 우한의 더럽기 짝이 없는 가축시장 풍경 동영상을 카톡으로 보냈다.

 

: 동영상을 보니, 전염병이 안 생기면 기이한 일이겠습니다.

이도행 선배 : 그러게나 말이오.

 

간단히 오간 그 대화는, 코로나19 광풍 속에서는 만남을 계속 연기할 수밖에 없다는 공감의 확인이었다. ‘한 번 편하게 만나 아버지 생전의 얘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바람은몇 달째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 이럴 수가.

     

******

    

반년은 지난 611일에야 이 선배와 나는 만났다. 서울에서 만난 게 아니다. 이 선배가 전철로 춘천에 내려온 것이다. 페북으로 알게 된 춘천 후배들(서현종 화백, 지은수 화백, 화양연화 최대식 사장)8호 광장 부근 설렁탕집 감미옥에서 만나는 것으로 이 선배는 춘천 일정을 시작했다. 감미옥에서 인사 나누며 식사한 뒤, 2차로 석사동의 음악카페 화양연화로 함께 이동했다. 그 자리에서 이 선배는 수원에서부터 갖고 온 책(‘봄내춘천 그리움’. ‘봄내춘천 옛사랑’)들을 후배들한테 선사하고는 유쾌한 담소의 시간을 가졌다. (문단 야사라 할까, 유명 문인들의 놀라운 일화를 많이 공개해줬다.)

그런 뒤 후배들과 헤어져 나와 단 둘이 공지천 부근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한 시간 가까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는 오후 4시 직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선배가 춘고 100년사 편찬회의에 참석해야 했기 때문이다. 모교인 춘고 정문 부근에서 나와 헤어진 이 선배는 편찬회의 참석 후 강촌에 있는 지인의 집(느티나무마을펜션)에서 숙박, 이튿날 수원으로 귀가했다.

뒤늦게 나는 깨달았다. 모처럼의 만남임에도 아버지 생전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는 사실을. 일정이 바쁜 이 선배를 보고 내가 속으로 그 얘기는 다음에 해야지.’하고 미뤘던 걸까? 글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물론 아버지 생전 얘기를 카톡이나 전화로 주고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이 선배와 그런 얘기를 용무 해결하듯 나눌 수 있을까. 반드시 한 번은 편한 자리에서 마주보며 제대로 얘기 나눠야 했다.

그런 내 뜻과는 상관없이 돌아가는 일들.

얼마 안 돼 연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이 선배한테 전화를 걸었다. ‘평소에 서울 가면 한 번은 들르고 싶었던 피맛골이란 데에서 선배님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고 내 뜻을 전하자 쾌히 그러지!’하는 응답이 왔다. 마침내 ‘(2020) 1 8일 오전 11시에 종각역에서 만나기로 언약이 됐다. 종각역에서 내리면 바로 피맛골이란다.

서서히 그 날이 다가오는데 다시 변수가 생겼다. 한겨울 날씨가 푸근해지면서 눈 대신 비 내리는 날이 이어지던 것이다. 그러더니 하루 전인 1 7일 오후에 이 선배한테서 카톡이 왔다.

 

이도행 선배 : 내일도 비가 온다는데 약속을 후일로 미루면 어떨까 해서. 내일 아니면 안 된다는 일도 아닌데 싶어 슬몃 문자 던지는 걸세. 그대 생각은?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비 오거나 말거나 그냥 만나는 거죠.’ 하는 대답도 생각했지만 서울 사정을 잘 아는 이 선배가 오죽하면 이런 카톡을 보냈을까 하는 생각에 대답을 이리했다.

 

 

: 그러시죠. 다시 연기하는 걸로.

 

 

나중에 안 사실은, ‘피맛골에 공사판이 벌어지는 바람에 여기저기 파헤쳐져서 지나다니기도 편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판에 겨울비까지 계속 내렸으니. ‘좁다란 골목에 맛집들이 아기자기하게 줄지어 있는, 정겨운 피맛골이란 내 상상은 환상에 불과했다. 이 선배와 만나는 일이 연기되면서 나는 이제는 피맛골이 아닌 다른 좋은 명소를 찾아보고 연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느닷없이 코로나 역병이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번 코로나는 특히 기저질환이 있는 노약자한테 치명적이라 했다. 바로 이 선배와 나를 겨냥한 거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이 선배는 오랜 당뇨를 앓는 몸이며 나 또한 가족력인 고혈압 환자. ‘사람들이 많은 곳을 삼가는 게 좋다는 전문가의 조언도 보도됐다. 천생 이 선배와 나는 코로나 역병이 가라앉은 뒤에나 만나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쉬 가라앉을 것 같지 않은 조짐이 연실 보도된다는 점이다.

나는 ()에 들어가려고 몇 번을 애썼으나 결국은 그 성에 못 들어가는 채로 끝나는 카프카의 이란 소설을 현실로 겪는 것 같았다. 공교로운 것은 의 주인공이 K라는 사실이다.

K.

내 두 번째 작품집 이름이 ‘K의 고개이며 작품집 속 동명의 작품에서 K는 실존적 위기에 직면한 채 결말을 맞이하지 않던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효()’ 장례식장에는 많은 분들이 왔다조문을 하고 식당으로 안내됐다그 자리에서 같은 춘천의 노화남 선배를 뵈었고 이어서  지면으로나 알던 한수산 작가를, 이 선배가 나서서 인사소개 시켜주었다.

장례식장 식당은 조문객들이 여기저기 모여앉아 이런저런 얘기로 밤새우기 마련이다나는 이런 기회에 이 선배와 아버지 얘기를 많이 나눌 생각을 했다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이 선배가 모처럼 만난 동기 분들과 2차로 어디를 갈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목회자가 된 선배 분을 뵈러 양구에 다녀오기로’ 했던 것 같다.

이 선배와 얘기도 제대로 못 나눈 채 또다시 헤어진 셈이 됐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보름 후인 11월 23일에 내가 수원에 가기 때문이다좀체 여행 다니는 일이 없는 내가 그 먼 수원까지 가게 된 건 수원 사는 조카네 둘째아들 돌잔치’ 때문이다다른 조카도 아니고 두꺼비 조카’(‘두꺼비라는 제목의 수필까지 썼을 정도로 나는 그 조카를 아낀다)가 초대했는데 안 갈 수는 없었다.

다음은 이 선배한테 한 카톡이다.

 

제 조카가 수원에 사는데 23일에 둘째아들 돌잔치를 한답니다선배님도 뵐 겸해서 그 날 수원에 가기로 했습니다낮 12시에 돌잔치 한다 했으니 잔치 끝나고 오후 늦게 선배님을 뵙지 않나 싶네요.

 

11월 23일이 되었다아내와 새벽부터 움직여 청춘선 기차를 타고 일단 서울로 가는데 생각지도 않은 변수가 있었다철도노조의 총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그 바람에 아내와 나는 수원에 도착해서 낮 12시의 두꺼비네 돌잔치에 참석하고는 이내 귀갓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수원서울춘천의 귀갓길인데 수원에서 서울로 가는 전철 노선이 따로 있지 않았다두세 번은 환승해야 했다파업으로 전철 운행이 감축되어 매 칸마다 승객들이 미어졌다그 바람에 아내와 나는 환승을 잘못해서 한 시간 가까이 지하공간에서 헤맸다그 때 이 선배가 카톡을 보내왔다이 선배는 본시 평안북도 벽동 사람이다급할 때는 평안도 사투리가 카톡에 실린다.

 

이도행 선배 歸春 중이오그대 내외 만나면 수원행궁 행궁동 주마간산하고 예약해둔 밥집에서 저녁식사 하잤는데 철도 파업 땀시 약속 어그러져 심히 유감이오.

네 염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지금 청량리에서 기차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도행 선배 오후 4시 용산으로 간다더니?

나 중간에 열차 환승이 잘못돼서 그리 됐습니다대처승이 열차 파업까지 만나 혼란의 극치입니다!

 

대처승이란 표현 때문에 이 선배가 파안대소할 것 같았다대처승나한테 아내가 어느 날 쏘아붙인 말에 등장했던 단어다.

교직에 있을 때도 남들은 다하는 승진에도 무관심하고… 도대체 책 보고 글이나 끄적끄적 쓰는 것 외에 하는 게 뭐 있어그러려면 혼자 산에 들어가 살든지 해야 하는데결혼해서 처자는 있고그러니까 당신은 스님으로 치면 대처승이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내가 최종남 선배를 알게 되기는 1972년경이다. 석사동 어느 막걸리 집에서 외수 형을 알게 된 후 동기인 최 선배까지 자연스레 알게 된 거다. ( ‘이외수 작가이외수 선배라고 불러야 옳지만 나는 그게 안 된다. 외수 형과 그 추운 1973년 겨울을 함께 나면서 그리 된 거다. , 73년 춘천의 겨울. 형과 나는 망한 연탄직매소의 남은 연탄들을 팔려고 수레도 끌고 다녔다. 그 춥고 고생스럽던 겨울 얘기도 한 번은 소설로 써야 하는데) 최 선배는 이후 춘천의 모 사립고에 국어교사로 근무하게 되면서 춘천지역의 소설가로서 외수 형과 함께 확실한 자리를 잡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강원도 내 시골 학교들을 4,5년 주기로 전근 다니면서 국어교사를 했다. 공립학교 교사이기 때문이다.

최 선배가 거주지를 옮기지 않고 안정되게 근무하는 사립학교 교사였던 때문일까, 부단히 소설들을 써서 발표했다. 그 결과 소설 한 편 쓰지 못하고 교직생활을 한 나와 위상이 달랐다. 지역에서 소설가 최종남을 모르는 이가 없었던 까닭이다. 내가 2004년 명퇴 후 12년만인 2016, 첫 작품집을 내면서 최 선배와 정식으로 같은 소설가로서의 교류가 시작됐지만 친분(親分)까지는 못 되다가뒤늦게 친분을 쌓는가 싶더니 그렇게 병석에 누운 것이다.

최 선배를 함께 문병하고서 이 선배는 다른 바쁜 일로 나와 별 얘기도 나누지 못하고 황황히 수원으로 돌아갔다.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17일이다. 최 선배의 부음을, 이 선배가 가톡으로 내게 알렸다. 조영남의 옛 생각노래와 함께.

 

이도행 선배 : 평생의 글벗이자 동기인 소설가 최종남이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노래는 친구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으며 저와 듀엣으로 자주 부른 노래라 돌아올 수 없는 먼 길 떠난 친구 영전에 바칩니다. 전 잠시 후 춘천 고은리 ''장례식장으로 출발합니다.

: 참 안타깝습니다. 저도 오전 중에 효 장례식장에 문상 가겠습니다.

이도행 선배 : 내가 오후 110분에 춘천역 도착하니 같이 문상 가면 어떻겠는지?

: , 그리하겠습니다. 그런데 자가용차가 아닌 전철로 오는 겁니까?

이도행 선배 : 동기 희곡작가 안성희군이랑 전철로 갑니다. 집사람은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나만 가는 거죠.

: 그럼 그 시간에 제가 춘천역 앞에서,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쓰는 장편이 구성단계 중 위기에 들어갈 참이다. ‘주인공을 돕는 박쥐나방동충하초 회사의 사장이 행방불명되고, 사장의 빈자리를 노리는 자들의 갈등이 본격화되는 중이다. 예전 같았으면 이 선배가 어떤 내용의 카톡을 보내도 나도 모르게 신경질을 냈거나 아예 카톡을 받지 않았거나 했을 게다. 하지만 지난 7월의 사건 이후 나는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두 번 세 번 혼자서 다짐한 터!


https://youtu.be/zSnwe_O94CE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를 어쩐다?’고 난감해지기는 오후 1시가 막 지나서다. 그 때까지 장편소설을(임시제목 박쥐나방동충하초’) 쓰느라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난 2월말, 200자 원고지로 1000매쯤 되는 장편 완성을 목표로 시작한 집필이 500매쯤 됐다. ‘티베트의 오지 마을에서 친구 따라 먼 여행길에 나선 주인공이, 친구가 자기 목숨을 노리고 여행 동반을 제의했음을 깨닫고 탈출하면서 빚어지는 갖가지 사건들을 한창 써나가는 참이었다. 내가 아는 원로 문인께서 사실 문학하는 사람은 정신이 어딘가 이상한 사람이다고 말씀한 적이 있는데 정말 나는 며칠째 밤잠을 설쳐가며 정신이 어딘가 이상한 사람의 짓을 한창 하는 중이었다

어쨌든 겸사해서 춘천에 온 김에 얼굴이라도 보려고 전화한 이 선배한테 나는 잘못을 해도 수준 낮은 잘못을 했다. 지난번 카톡으로 이 선배가 나중에 만나면 듣고픈 얘기가 많네.’ 했던 대목까지 뒤늦게 떠올랐다. 몰랐던 우리 아버지에 얽힌 얘기들을 제대로 편하게 듣고 싶어서 전화한 것을 그렇게 퉁명스레 대했으니.

이를 어쩐다?’

엎질러진 물을 다시 담고자 했다. 급히 전화했다.

선배님, 접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제가 점심을 대접하고 싶거든요.”

그러자 이 선배가 먼저 작은 목소리로 아내 분한테 거 봐. 당신이 오해하는 거야.’ 말하곤 이내 서둘러서 내게 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차 안에 있네. 수원으로 돌아가는 중일세. 춘천 일을 대부분 봤거든.”

이 선배는 차 운전을 하지 않는다. 아내 분이 운전한다. 차를 구입할 때만 해도 이 선배가 술을 즐겼던 게 아닐까. 그래서 차 운전을 아내 분이 맡는 거로 정해진 게 아닐까.

점심도 대접하지 못하고 선배님! 죄송해서 어쩌지요?”

, 다음에 또 볼 텐데.”

그렇게 모처럼 춘천 온 이 선배 내외분한테 나는 점심 대접도 못하고 황황히 보내드리고 말았다.

솔직히 나 같으면 두 번 다시 그런 후배와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선배는 이해하고 넘어갔다. 세 달 후인 10 11, 이 선배가 다시 춘천 오면서 내게 전화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딱부리(이 선배가 즐기는 최종남 작가의 별명이다.) 최종남이가 강대 병원에 입원했다 거든. 기흉이 악화된 거지. 이번에 안 보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불길한 예감에 문병 가려는데 바쁘지 않으면 동행해도 좋소.”

바빠도 동행해야죠.”

최종남 선배와 나는 지난 5월에 후평동의 연당막국수 집에서 점심을 같이한 데 이어 9월 중순에 김유정 문학촌에서 중고등학생 대상 글짓기 심사를 함께 맡게 되면서 알게 모르게 가까워진 사이. 바로 열흘 전인 10 2일에 문학촌 행사장에서 앉을 자리를 찾아 서성이는 나를 보고 최 선배가 손수 빈 의자를 마련해 주면서 하던 말이 여태 생생하다. 창백한 안색에 숨도 편히 못 쉬는 채로 말이다.

 앉아.”

 

그런지 열흘도 안 돼 강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다.

산소호흡기 줄과 링거 줄은 기본이고 그 외도 여러 생명 유지 장치에 매여 병상 침대에 누인 최 선배. 이 선배를 먼저 만나고는 다음으로 내게 손짓해 가까이 다가오도록 했다. 너무나 딱한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내게 안경도 쓰지 않은 창백한 얼굴로 겨우 말했다.

우리는 너무 늦게 만난 것 같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