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를 향한 그리움이 날이 갈수록 사라지는 게 아니라 여전하다면 어떻게 표현하는 게 좋을까?

그리움이 사무쳐만 간다.’

그리움이 더해간다.’

그리움이 깊어간다.’

등등 여러 표현이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대중가요의 제목인 그리움만 쌓이네.’는 어떤가? 아주 문학적인, 괜찮은 표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 그 까닭을 밝힌다.

 

그리움이란 정신적 현상을 마치 눈앞의 사물처럼 쌓이네라고 표현했다는 사실부터 놀라웠다. 이는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물이나 관념을 낯설게 하여 새로운 느낌이 들도록 표현하는 예술적 기법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이다.

 

한 편쌓이네의 기본형은 쌓이다이다. ‘쌓이다 겹겹이 포개지면서 많이 모이는 것이다. 그럴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려본다면 먼지라든가 이라든가 장작개비 등 허다하다. 그런데 그리움만 쌓이네에서는 꽃잎이나 낙엽 같은 아름다운 사물이 쌓이는 것으로 봐야 되지 않을까?  그대를 향한 그리움이 낙엽이나 꽃잎처럼 하염없이 쌓이는정황(情況)이다.

세월이 흘러가도 그대를 향한 그리움이 사라지지 않고 더해 감을 이처럼 애절하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

타고난 싱어송라이터 여진의 대표곡 '그리움만 쌓이네'.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품격을 한 단계 높여준 명곡이다.

그 가사를 일부 옮긴다.

 

다정했던 사람이여 나를 잊었나

벌써 나를 잊어 버렸나

그리움만 남겨놓고 나를 잊었나

벌써 나를 잊어버렸나

 

그대 지금 그 누구를 사랑하는가

굳은 약속 변해 버렸나

예전에는 우린 서로 사랑했는데

이젠 맘이 변해버렸나

 

아 이별이 그리 쉬운가

세월 가버렸다고 이젠 나를 잊고서

멀리 멀리 떠나가는가

 

오 나는 몰랐네 그대 마음 변할 줄

난 정말 몰랐었네

오 나 너 하나만을 믿고 살았네

그대만을 믿었네

오 네가 보고파서 나는 어쩌나

그리움만 쌓이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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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새로 놓는다는 철도 노선이 K가 사는 동네를 지나갈 거라는 사실이 언론에서 보도됐다.

왜 그런지 몰라도 K그 노선이 아예 우리 집을 지나가도록 선제조치를 한다면, 그 보상금으로 동네 갑부가 되고도 남을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가만있을 수 없었다. 분가해 나간 자식들까지 급히 불러 모아 사는 집 한쪽 벽을 허무는 작업에 돌입했다. ‘철도가 지나가는 자리를 미리 마련해 놓는 것이다. 아들은 삽을, 딸은 호미를 각기 들었고 K는 진두지휘하는 모양새로 무거운 곡괭이를 들었다. 각자 땀범벅이 되도록 열심히 한쪽 벽을 허물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도 아내는 뒷전에서 지켜보기만 한다. 간간이 걱정스런 눈빛까지.

K당신 그렇게 있지 말고 시원한 음료라도 갖고 오라고. 목 좀 축이게하고 면박을 주려다가 참았다.

마침내 벽 한 쪽이 다 사라졌다.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걱정이 생겼다. 날이 금세 어두워져 초겨울 밤의 한기가 몰아치는데 벽 한 쪽이 없으니 집이 여간 추운 게 아닌 것이다. 자식들은 벌써 담요를 찾아 두르고들 앉아 있었다. 간간이 한기에 몸을 떨기까지 하면서. K는 속으로 못난 자식들 같으니. 몸을 움직이면 땀이 나면서 괜찮을 텐데 저러고들 있어?’ 책망하면서 아내를 불렀다.

여보. 당신이 도울 게 있어. 옷장에서, 두꺼운 솜이불을 꺼내와. 그걸로 나하고 이 벽을 커튼처럼 치는 거지. 그러면 밖의 한기가 차단되지.”

그러자 아내가 옷장으로 가지는 않고 이렇게 쏘아붙인다.

그런데 정말 이렇게 벽까지 허물어놓으면 철도가 우리 집을 지나가는 거야?”

그럼.”

누가 그래?”

누가 그런 건 아니고 내 생각이야.”

아이고 맙소사!”

털썩 주저앉으며 절망하는 아내. 그러자 K는 어이없게도 의구심에 휩싸였다. ‘과연 내 생각이 맞을까?’

자신이 없었다. 제기랄 벽 한 쪽은 이미 다 허물었는데.

 

K는 새벽꿈에서 깨어났다. 온몸이 식은땀에 젖어 있었다. 꿈이길 천만다행이었다. K는 별 일 없는 벽들을 보며 안심하다가 왜 그런 황당한 꿈을 꾸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진출처= http://www.kocis.go.kr/koreanet/view.do?seq=2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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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여름날이다. 나와 함께 교지편집 하던 동급생 박○○ 양이 춘천교대 교지에서 이도행이란 이름을 보고 불쑥 말했다.

이도행이란 사람을 내가 아는데 우리보다 5년 위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말을 이었다.

우리 언니가 이도행 씨와 동급생이라서 잘 아는데 성질 고약하다!’고 그러더라고요.”

뭔가 재미난 사연이 있어 보여서 이어지는 얘기를 기대했는데 그녀는 다시 침묵하다가 불쑥 이런 말로 얘기를 마무리 지었다.

하기사, 소설 쓰는 사람들은 괴팍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 뒤, 나는 그 문제의 이도행 씨를 만나게 됐을 뿐더러 친분까지 쌓게 됐다. 그래서 농담처럼 박○○ 양이 한 말을 그대로 옮기고 성질 고약하다!’의 진위를 물었다. 그러자 이 선배가 금세 알아듣고서 정색하며 해명했다.

나는 해명을 다 듣고 나서 박○○ 양 언니의 오해였음을 알았다. 글쎄,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떤지 모르지만 내게 이도행 선배는 성질이 고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긴 이런 말을 하는 내 자신도 스스로는 순한 성격이라고 여기는데 다른 사람은 그리 보지 않으니 문제다.

 

작년 한 해 내 생활을 옥죄었던 장편소설 박쥐나방동충하초(임시제목)’.

 1월에 퇴고하다가 중단했다. 200자 원고지로 1100매 분량이나 썼지만 퇴고하면서 다시 읽어보니까 충분하게 쓰지 못했다!’는 자체결론이었다. 제대로 쓰려면 1500매 이상은 써야 했다. 지쳤다. 일단 그냥 쉬면서 다시 집필할지 여부를 판단하기로 했다.

지난 5월에 외수 형 문병을 다녀왔다. 형은 뇌출혈로 병석에 누웠다. 아직은 거동이나 의식이나 충분치 못한 상태. 그런 형한테 형수가 이렇게 또박또박 말해줬다.

추운겨울에 함께연탄 리어카 끌었던 병욱 씨가 왔어!”

그러자 형이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이 연재수필을 마무리 지은 오늘(7 18), 나는 형이 재활치료에 들어갔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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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이도행 선배님 연재수필을 5회 정도로 마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13회까지나 써나갔다. 미처 생각도 못한, 내 잠재의식 저변의 무엇을 건드린 탓이다. 이제 이 수필은 이만 멈춰야 한다.

 

오랜 인연의 결과로 만난 이도행 선배. 전업 작가이나 동기 작가 분들(한수산, 이외수 등)에 비해 빛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상황. 특히 중편소설 무채도가 빛을 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추운 날 밤에는, 시신을 태워서 잔열이 남은 화덕에 들어가 자는 양 중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스토리의 기발성과 독자들에게 던지는 삶과 죽음의 물음에 나는 반했다. 그래서 연재수필 이도행 선배님을 계획해 써나갔다.

과연 이런 나의 작은 노력이 이 선배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나 자신이 무명작가이기 때문에.

 

노년임에도 지치지 않고 소설 집필에 전념하는 이 선배. 내게 선사한 두 권의 작품집 이후에도 대하장편을 써냈다. 춘천의 오지 삼막골에 들어가 썼다는 산 자()의 레퀴엠’.

나는 그 제목만으로도 충격 받았다. 레퀴엠은 진혼곡이란 뜻. 산 자의 영혼을 달래는 곡이라니, 얼마나 모순형용이며 그래서 그 시사(示唆)가 가슴 아픈 것일까. 나중에 이 선배가 내게 털어놓았다.

삼막골에서, 글도 글이지만 술이나 마시다가 죽을 결심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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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생전 때 얘기를 한 번 편히 나눠보자 해 놓고 반년 넘게 그러지 못하는 사태를 냉정하게 분석해 보았다. 깊은 내 잠재의식까지 살폈다. 그 결과 소스라칠 의문이 제기됐다.   

내가 아버지 생전 때 얘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렇다. 코로나 역병도 역병이지만 실상은 어두운 70년대 가정사를 다시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불편한 마음 한편이 무겁게 꽈리를 틀고 있었다.

그 춥던 1973년 겨울이 떠오른다.

외수 형이 인제(麟蹄) 집에서 가출(?)해 춘천의 우리 집에 얹혔다. 정확히는, 남의 집에 전세 사는 우리 집에 외수 형이 얹혔다. 그 집 주인은 집이 하도 낡아 남한테 전세 놓고서 다른 동네에 가 사는 부자(富者)’였다. 우리 식구가 전세 들어 사는 건물과, 도로 변에 접한 작은 건물(10평 남짓한 건물로, 가게로 세를 놓다가 잘 안 돼 포기했는지 텅 비어 있었다.)이 그의 소유였다. 건물들이 하도 낡아 2년 전세 기한이 끝나는 내로 부숴버리고서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지으려는 것 같았다.

김유정 문인비 건립 일로 거두리 야산을 헐값에 팔아버리고, 예총 일도 그만두고, 전화기 한 대로 버티던 아버지는 시내의 다방에 앉아 같은 실업자들과 무력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필생의 사업에 나섰다. 도로 변의 그 비어 있는 작은 건물을 활용한 연탄 직매소 차리기였다. 대단한 용기였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연탄을 만지지 않는, 판매담당을 따로 둔 사장이었다. 10평 되는 낡은 공간의 사장이라니, 그 처절한 자존심. ( 나는 이때를 회상하면 작가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나이가 떠오른다. 아홉 켤레의 구두를 가지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그의 반짝이는 구두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켜 나가려는 상징물이다. 하지만 궁핍한 현실 속에서 무력하게 몰락해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채 두 달이 못돼 연탄직매소는 망해버렸다. 판매를 담당한 분이 밀린 임금 한 달 치 문제로 사나흘 항의하다가 포기했는지 사라져버리고아버지 또한 사업자금이랍시고 빌린 돈 때문에 어디론가 피신해 버렸다. 결국 애먼 연탄들만 백여 장 직매소에 남았다.

나는 외수 형과 함께 그 연탄들을 팔아치우기에 나섰다. 집 주인한테 그 건물을 어서 되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괜한 월세마저 누적될 판이었다. 형과 나는 연탄 수레를 끌고서 추운 거리와 골목을 누볐다.

연탄 직매소마저 망한 사업가(?)가 아버지였다.

그 후에 이어지는 아버지에 얽힌 뒷얘기는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 나는 이 선배와 아버지 생전 이야기를 하기로 언약하고는 늘 마음 한편이 편치 않았다. 결국 나는 아버지 생전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으면서 꺼내려는 자기 갈등 속에 있었다. 내가 를 제대로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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