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가지는 이제는 춘천의 명소가 된 ‘미스타페오’ 카페 작명에 얽힌 이야기다. 95년 어느 날,  태원이가 학교 복도에서 마주친 내게 웬 부탁을 했다.

“호숫가에 들어서는 카페인데 그 이름을 지어 봐.

“웬 카페야?

“와이프가 카페를 해보고 싶다 해서… 준비가 웬만큼 됐거든.

“그럼 시간을 줘. 작명이 되는 대로 말해줄게.

며칠 후 복도에서 다시 만나게 됐을 때 내가 지은 카페 이름을 얘기해 주었다. 무슨 이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순수한 우리 말 이름이 아니었을까? ‘그곳에 가면’같은. 태원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반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빙그레 웃더니 말했다.

“이미 지었어. ‘미스타페오’라고.

전혀 분위기 없는  그 이름에 나는 실망했다.

“‘미스타페오’라니, 그게 무슨 뜻이야?

“최영식이라는 한국화 그리는 후배가 추천한 건데 아메리카 나스카피 족이 쓰는 단어로써”

하며 설명해 주었다. ‘나스카피 부족은 가슴 속 심장 같은 불멸의 영혼을 미스타페오라고 부른다. 그들은 죽는 순간 미스타페오가 자신을 떠나서 다른 사람 가슴속으로 가 되살아난다고 믿는다’는 내용이었다. 글쎄, 경치 좋은 호숫가에 들어서는 카페라면 그런 생경한 이름보다는 ‘그곳에 가면’ 같은 발음하기 좋은 정서적인 이름이 낫지 않을까? 하는 속생각을 나는 했다. 10년 전 모교에서 추상화에 ‘가을의 끝’그림의 작명을 했던 나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태원이의‘미스타페오’라는 카페 이름 선택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순 우리말 이름의 카페들이 즐비한 춘천에서 ‘미스타페오’는 그 독특한 이름만으로도 빛났다. 춘천 사람들은 물론이고 춘천을 관광 차 오는 외지 사람들까지 미스타페오 카페를 모르는 이가 있을까?

 태원이는 카페 작명 후 그 이상한 학교에 같이 근무했던 춘고 동기들을  카페로 초대하기도 했다. 호수 풍경이 그대로 밀려오던 그 넓은 유리창. 정원의 오래된 고목. 잔디밭에 떨어지던 부드러운 햇살. 우리는 미스타페오 카페에서 환담을 나누며 한 나절을 보냈다. 우리는 한창 나이 40대 중반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그 중 한 명은 세상을 떴고 또 다른 한 명은 중병으로 누워 있다 하고… 먼 외국으로 이민 가 사는 동기도 있고 아예 소식이 끊긴 동기도 있다. 아아 인생무상 세월무정.

 

문득 미스타페오의 원저자인‘나스카피’ 부족이 궁금해졌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봤다. ‘성지현’이란 분이 쓴 글에 나스카피 부족에 관한 일화가 들어 있었다. 이런 내용이다.

… 프랑스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17세기 초에 북아메리카의 몽타녜-나스카피 족 인디언들을 처음 만났을 때 여성들이 성적으로 자유로운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한 선교사가 나스카피 족 남자에게 아내를 더 엄격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그녀가 낳은 아이들 중 누가 자기 자식인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꾸했다. "당신들 프랑스인은 자기 자식만 사랑하지만 우리는 부족의 모든 아이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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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태원이는 이상한 학교에 있을 때부터‘교직을 그만 두고 오직 그림만 그리며 사는 생활’을 내게 얘기하곤 했다. 나 역시 이상한 학교를 경험하면서 교직에 대한 회의가 깊어져 그의 그런 얘기를 긍정적인 자세로 경청했던 듯싶다. 그래도 그렇지 실제로 명퇴할 줄이야.

모교로 가자마자 태원이가 명퇴했다는 얘기를 듣게 된 나의 간단치 않은 심적 상황. ‘그렇다. 나도 명퇴하자.1999, 나 역시 모교에서 명퇴를 신청하게 된 사연이다.

하지만‘책정된 예산에 비해 명퇴 신청자가 너무 많아 고경력 자 이외에는 모두 보류시킨다 ’는 도교육청의 조치에 따라 나는 명퇴가 되지 못했다. 교직에서의 명퇴는 그 신청을 반 년 전에 받는다. 태원이가 명퇴를 신청할 때는 전년도인 98년도였고 그 때는 명퇴 관련 책정예산이 충분했던 것이다.

‘모교에 가면 태원이를 만나겠지’했는데 그렇듯 무위로 드러났다. 이제 모교는 지난 60년대의 사춘기 적 꿈의 공간도 아니고 그저 직장일 뿐인데 그마저 마음의 의지가 될 수 있는 친구마저 한 발 먼저 사라져버려, 텅 빈 벌판 같았다. 그즈음 어느 날 후배 되는 한 젊은 교사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선배님. 졸업한 지 30년 만에 모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는 감회가 어떻습니까?

 대단한 회고담을 기대한 듯싶은 그에게 나는 영어로 한 마디 뱉었다.

Nothing.(아무 것도)"  

 

뒤늦게, 모교 오기 전 이상한 학교에 있었을 때 일들이 먼지를 털고 떠올랐다. 두 가지 일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내 딸과 태원이 딸에 얽힌 에피소드다. 94년 여름날이다. 영월 내성초등학교를 다니다가 아비의 전근에 따라 춘천의 부안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 온 딸애가 어느 날 웬 친구를 데리고 집에 와 말했다.

“아빠. 혹시 전태원 선생님이라고 아나?

“그럼, 잘 알지. 아빠 친구야.

“얘 아버지가 전태원 선생님이래.

“뭐?!

 

친구애도 내 딸처럼 키 크고 약간 뚱뚱했다. 내게 수줍게 인사하는 태원이 딸을 다시 보며 나는 한 인연이 또 다른 인연을 낳는, 무수한 인연의 영겁을 보는 듯했다.  내 딸이 이런 말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웃었다.

“우리 둘이 친하게 지내니까, 반 아이들이 우리보고 뭐라고 별명 붙인 줄 알아? ‘은방울 자매’래.

은방울 자매. 한복 입은, 약간 뚱뚱한 여성 뚜엣 가수가 KBS의‘가요무대’에 나와서‘밤 깊은 마포 종점 갈 곳 없는 밤 전차’하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었다. 나는 은방울 자매라는 딸들의 별명에 우스우면서도, 파도처럼 밀려오는 어떤 감회에 말을 잇지 못했다.  

뚜엣 가수 은방울 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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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교는 교명을 밝히기도 싫다. 20년 넘게 세월이 흘렀어도 내게는 여전히 이상한 학교다. 이 이상한 학교에서 만난 태원이. 우리는 어언 40대 중반의 중견교사였다.

별나게 보충수업, 야간자율학습에 집착하는 이상한 학교. 나는 3학년 담임까지 맡아 일요일에도 반 학생들의 자습을 감독해야 했다. 그 즈음 외수형은 시내 교동의 번듯한 2층 집에서 살고 있었다. 세를 든 게 아니다. 자기 집이다. 아래층은 살림 공간으로 하고 2층에서 집필하는, 문인으로서는 이상적인 생활이었다. 83년경 윗샘밭 길가 허름한 단층집을 벗어나 시내 교동 집을 구입해 산 지 벌써 10여년.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형의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각오가 현실화된 것이다. 형은 윗샘밭 시절에 이런 각오였다.

다른 직업을 갖지 않고 오직 소설만 써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겠다.”

지난 얘기이지만 내가 742월 저 먼 삼척의 중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고 춘천을 떠날 때그리고 문학회후배들한테 이런 예언을 남겼다.

봐라. 외수형은 30살을 못 넘길 거야.”

당시 외수형은 제대로 먹지 못하고 살아 뼈만 남았었다. 그런 몸으로 그 추운 73년 겨울을, 방학을 맞아 귀향한 어느 후배의 빈 방에서 나고 있었다. 그런데 20년쯤 지나 이제는 주목받는 인기 작가로서 2층집까지 장만했다니!

그런 지인의 성공은 내게 자극이 되었다. 물론 형처럼 소설만 써서 처자식을 먹여 살린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고 그저더 나이가 들기 전에 나도 소설을 써야 하는데하는 안타까움이었다. 내 안타까움을 태원이가 감지했다. 교내 복도에서 만난 내게 목소리 낮춰 말했다.

내가 말이다, 네가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쓸 수 있는 작은 공간을 교내에서 찾았어. 이건 비밀이야. 따라와 봐.”

따라갔더니 학교 보일러 실 한 편의 빈 공간이었다. 어느 새 책걸상도 한 조 갖다 놓았다.

어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원이가 덧붙여 말했다.

겨울에는 보일러를 작동시킬 거니까 시끄러워 안 되겠지만 그 외 다른 계절은 그럴 일이 없으니 조용하기가 절간 같은 곳이지.”

고마워서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친구가 귀하게 찾아낸 글을 쓸 수 있는 비밀 공간을 나오면서 나는 고마움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작품 하나를 반드시 쓰고야 말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하지만 그런 다짐을 실천하기에는 학교 현실이 너무 고되었다. 결국 한 번도 그 공간을 사용 못하고 이상한 학교에서 근무하다가 992월말 다시 모교로 인사 발령을 받았다.

교원 정년이 65세에서 62세로 낮아지면서 동시에 명퇴 바람이 돌풍처럼 일던 즈음이었다. 태원이가 나보다 먼저 2년 전에 모교로 갔으므로 나는 우리가 또다시 모교에서 재회하는 줄 알았다. 그렇지 않았다. 태원이가 명퇴해 버린 것이다. 

전태원 화백의 ‘ston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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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실 위에 미술실이 있었다. 태원이를 따라 미술실에 들어간 나는 추상화 한 점과 마주했다.

이 그림이야.”

태원이의 말에 우선 그림 감상에 들어갔다. 구체적인 사물을 그린 게 아닌 추상화라서 감상은 물론 제목 붙이기도 쉽지 않았다. 어쨌든 10여분쯤 감상한 뒤 그에게 말했다.

“‘가을의 끝이 어때?”

태원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의 끝그림은 그 해 강원미술대전에서 종합대상이라는 큰 영광을 태원이한테 안겨주었다. 그런 대단한 소식조차 한참 후에 알게 될 정도로 나는 정신없이 바빴다. 종일 수업에다가 야간자율학습 감독까지. 게다가춘고 60년사집필까지 책임졌으니한창 젊은 30대였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과로사 했을 게다.

가을의 끝

그림 사진을 지금 보면 당시 나의 고단한 삶이 떠오른다. 고단한 삶 저편에 어린 공허감마저 비친다. 특히 그림의 반 이상을 차지한, 무채색에 가깝게 처리한 가운데 부분. 가을의 특권인결실도 맺지 못하고 그대로 추운 겨울을 맞는 심정의 허탈함이 여실하게 나타나 있는 듯싶다. 태원이가 80년대 초 인물화에 집착하다가 벗어나기 시작한 시점의 한복판에가을의 끝그림이 등장한 게 아닐까.

국어교사와 미술교사로서 모교에서 만났다는, 뜻 깊은 기간을 그렇듯한 점 추상화에 제목을 붙여준 일한 가지 이외에는 생각나는 일이 없이 그냥 보냈다는 기막힘. 나의 무심한 성격 탓도 있겠지만 오직 학력제고 한 가지 목표로 휘몰아치던 삭막한 학교 분위기가 분명 한 역할 했다.

내가 모교에서 저 먼 영월고등학교로 떠난 때가 892. 그 후 5년 동안 서로를 못 봤다가 20043월에 다시 고향 춘천에서 재회했다. 이번에는 모교가 아닌 다른 학교에서였다.    

전태원 화백의 ‘가을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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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85년 그해 전태원이 춘천에서 처음 개최되는‘66회 전국체전의 카드섹션 도안과 연출의 총책임을 맡아 도교육청 별관으로 출근하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인사 발령은 춘고로 났지만 막상 근무는 딴 데에서 한 것이다. 태원이는 당시를 이렇게 술회했다.

별관에 출근해서 꼬박 1년간 카드섹션 밑그림을 수십 장 그리고 나니 시력이 급속하게 나빠졌지. 그 때부터 내가 안경을 쓰게 된 거야. 그 무리한 행사 준비 또한 전두환 정권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니겠어?”

전국체전이 끝나고서야 태원이는 모교로 출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88년까지, 우리는 3년여를 함께 근무했음에도 딱히 좋은 추억 하나 만들지 못했다. 정말 안타깝다. 굳이 까닭을 댄다면 지난 60년대와 너무도 다르게 바뀐 모교 분위기가 있다. 80년대의 모교는 학력제고밖에 모르는 입시학원 같은 분위기였다. 미술을 가르치는 태원이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나는주요과목 국영수중 국어를 맡았다는 죄로 종일 수업하느라 도통 겨를이 없었다. 어디 그뿐인가. 밤에는 담임한 반 학생들의 야간자율학습도 감독해야 했다.

839월에 결혼한 나는 가장이 돼 집안까지 이끌어가느라 정신 하나 없이 바빴다. 이런 일화가 있다. 83년 그 해 11월 초순의 어느 날이다. 그 날은 모처럼 야간자율학습 감독이 아니어서 저녁 시간에 퇴근했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후평동 2단지 주공아파트로 귀가를 서두르다가 문득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야아. 내가 결혼했구나! 집에 가면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결혼한 지 50여 일만에 결혼했음을 새삼스레 깨달았다니, 그런 희극이 어디 있을까. 여하튼 기분이 몹시 좋아진 나는 가까이 있는 가게에 들어가 알록달록한 사탕 봉지 하나를 샀다. 17평 아파트의 주방에서, 모처럼 일찍 귀가한 남편을 위해 저녁 밥상을 준비하는 아내한테 그 사탕봉지를 건넸다. 아내가 영문을 몰라 했다. 내가 말했다.

이거 선물이야.”

10여 년 뒤 아내가 그 날의 일을 얘기하며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이 내게 뭘 선물하기는 그 날이 처음이야. 당신은 정말 무심한 사람이야.”

 

모교의 정신없이 바쁜 교사생활.

그런 중에 딱 한 번 태원이와 내가 만났다. 물론 한 학교에서 근무하니 복도나 교무실 같은 데에서 수시로 만났겠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만남이 아니라 스쳐지나감이었다. ‘별 일 없어?’ ‘그럼. 자네는?’ ‘별 일 없지.’하는 정도의 대화나 나누는. 당시 교사들은 물론이고 학생들까지 숨이 콱 막히게 휘몰아치던 학력제고의 현장, 모교. 사실 그런 비교육적인 현상은 춘고만이 아니었다. 전도(全道)적이었다. 몇 년 뒤인 1989년경 참교육을 부르짖는 교사들의 전교조가 등장하게 된 배경이다.

태원이가 모처럼 만난 내게 진지한 낯으로 말했다.

내가 그림을 한 점 그렸는데, 그 그림 제목을 붙여줄 수 없나?”

87년 가을 어느 날이었다.

전태원 화백의 ‘The Wave 시작도 끝도 없는‘ (2018.09.04. ~09.16.) 전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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