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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춘고 3학년 때를 회상한다.

학천이는 자신의 불우한 삶을 획기적으로 바꿀 방편으로 현상문예 공모에 매달렸던 것 같다. 하지만 결과가 허탈하게 드러나자 서울에 있는, 외국어대학으로 진학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합격했다. 하지만 고액의 입학등록금이 문제였다. 시골에서 농사지어 사는 부모한테서 집안 형편상 그 등록금을 해 줄 수 없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다. 결국 나라에서 학비를 대주며 초등학교 교사로 양성하는 2년제 춘천교대로 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대로글 솜씨를 인정받았으니 수도권 대학에 특별한 자격으로 입학할 거란 기대에 부풀어 있다가 허망하게 처리되면서 강원대학교로 진학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학원사는 이미 경영난에 빠져서 당사(當社)의 문학상을 받은 학생들한테 무슨 혜택을 줄 여건이 못됐던 것이다. 우석대학교 또한 재단의 어려움으로 1년 뒤인가 고려대학교에 병합되고 말았느니 참으로 나는 운이 없었다.

결국 학천이와 나는 고교를 졸업하고도 춘천에서 여전히 만나는 사이였다. 도찐개찐이란 말이 있다. 조금 낫고 못한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비슷비슷하여 견주어 볼 필요가 없음을 이르는데 우리들 운명은 결국 도찐개찐이었다. 나는 그 흔한 문학회 하나 없는 강대 캠퍼스 분위기에 좌절해 제대로 소설도 못 쓰고 그저 술자리나 찾는 방황이 시작되었다. 시를 쓰는 춘고 동기김두중을 만났으니 망정이지 그 친구마저 없었더라면 자퇴해버렸을지도 모른다. (김두중 그는 시인 한승태의 외삼촌이다. 그는 영어교육과, 나는 국어교육과 새내기였다.) 이듬해인 1971, 강릉에서 시를 쓰는 고등학생박기동’(그는 훗날 강대 교수가 되었다.)까지 강대로 진학하면서 5월 어느 날 우리들은 시내 다방에 모여 문학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문학회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문제는 학천이였다. 교대 생이지만 예외적으로그리고에 동참시켰으나 전혀 협조하는 태도가 아니었다. 내가 그를 보고 싶어 교대 캠퍼스로 찾아가도 보는 둥 마는 둥 하였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그는 외국어대에 합격하고도 못 간 자신의 불우한 처지에다가, 문학적 자신감마저 잃고 만사가 귀찮을 뿐이었다. 그런 친구의 심정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나는 급기야 그가 없는 어느 술자리에서 선언했다.

학천이 자식, 나한테 한 번 매 맞아야겠어.”

그 말이 얼마 안 가 당사자인 학천이 귀에 들어가면서 생각지도 못한 일이 전개됐다. 신경쇠약이라 할까, 학천이가 나는 얼마 안 가 병욱이한테 맞아 죽을 거다.’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게 된 거다. 나중에는 같은 고향 (인제) 출신인 외수형한테 찾아가 하소연까지 했다. 그러자 외수형이 고향 후배 학천이 앞에서 다짐했다.

걱정 마라. 내가 그 병욱이라는 놈을 찾아, 네가 걱정 없이 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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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때 도내 실기 대회에서 시 장원을 한 학천이. 화가나 소설가를 꿈꾸는 동기들에게 예술가의 참 모습(?)이 무언지 생생하게 보여주던 그가 좌절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3학년 2학기 때부터라고 나는 짐작한다. 1969년 초겨울 어느 날 예비고사가 끝나고 5명이 모여 소주 파티를 벌였을 즈음에 이미 학천이는 문학에 대한 신념이 흔들리고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놀랍게도 원인 제공자는 바로 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 자랑하는 것 같아서 조심스럽지만 50년 전 학창시절 얘기이니까 이제는 털어놓아도 될 게다.

1969년 가을에 글 쓰는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국적인 현상 공모가 두 군데 있었다. 하나는13회 학원문학상이었고 다른 하나는17회 우석대학교 현상 문예였다.

나는 사실 그런 공모가 있는 줄도 몰랐었다. 단지 여름방학 들어 별스레 소설 쓰고 싶은 욕망에 불타올라 만사 제치고 밤마다 다락방에 올라가 소설 쓰기에 전념했던 거다. 예비고사를 코앞에 둔 3학년이라 여름방학 중 보충수업은 물론이고 밤에도 교실에 남아 야간자습을 해야 했다. 나는 낮의 보충수업은 참을 수 있었지만 밤의 야간자습은 그 시간에 소설이 쓰고 싶어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방법을 찾았다. 석간(夕刊)신문을 배달하는 경우에는 야간자습 불참을 학교에서 허용했다. 마침 친구들 중에 신문 배달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한테 부탁했다. 말도 안 되는석간신문 배달 학생 증명서한 장 얻기다. 그 친구가 신문보급소 총무한테 부탁해서 그런 증명서를 받아다가 내게 건넸다. 나는 담임선생께 그 서류를 제출한 뒤 밤마다 집의 다락방에 올라가 소설을 썼다. 그러느라 학천이를 만나 볼 생각도 못했다.

여름방학이 끝나자 소설 두 편이 완성됐다.‘황사(黃砂)’3월의 이사(移徙)’. 때마침 학원사와 우석대학교에서 전국 고교생 대상으로 문예작품을 공모한다는 걸 알고는 '3월의 이사'는 학원사에, ‘황사는 우석대학교에 우송한 뒤 개학을 맞았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0월 초순경 나는 잇달아 당선 통지를 받았다. ‘3월의 이사는 우수작에, ‘황사는 당선작에 뽑혔다는 내용이었다. 반면에 학천이는 둘 다 좋은 소식 하나 못 듣고 만 것이다. 나한테 그 두 군데 공모에 응모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적은 없지만 왠지 침울해진 표정만으로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학천이 입장에서는 어찌 보면 제자가 스승보다 더 뛰어나게 됐다는 청출어람(靑出於藍) 같은 경우로 여겨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청출어람을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젊은 나이였다. 낭패감과 굴욕감에 문학에 대한 자신감이 무너져 버리고 만 듯싶다.

돌이켜보면 학천이의 그런 좌절이 결국은 85년경 30대 중반을 막 넘은 한창 나이에 세상을 쓸쓸히 뜨게 된 원인(遠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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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9년도 초겨울, 예비고사가 끝난 날 자취방에 모여서 소주 파티를 벌였던 미술 문학 연합 팀 5명 중 둘이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 종열이와 학천이다. 그나마 종열이는 친구들의 애도 속에 삶을 마감했지만 학천이는 그렇지 못했다. 85년경 낙향해서날마다 술만 마시다가 병을 얻어 급작스레 세상을 떴다는 안타까운 소문이 그의 마지막이라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이학천’.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의 한자 이름은 李鶴川이었다. 우리보다 한두 살 위였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나기는 춘고에 입학한 67년도 봄 문예반에서다. 처음부터 친하게 지낸 것은 아니었다. 우선 고향과 출신중학교가 달랐다. 나는 춘천 토박이에 춘중을 거쳐 춘고에 들어왔고 그는 인제 출신으로 인제의 어느 중학교를 거쳐 춘고로 들어왔다. 외모만 봐도 나이가 나보다 훨씬 위로 보여서 친근감을 갖기 힘들었다. 그러다가 결정적인 계기로 급격히 친해졌으니 그 해 가을 도교육위원회에서 주최한도내 고등학생 대상 예능 실기대회, 문예 부문에 학교 대표로 함께 선정된 일이다. 대개는 2학년이나 3학년 생 중에서 학교 대표를 정하는데 그 해는 달랐다. 담당교사인김병덕 선생님이 이런 선정 원칙을 발표한 것이다.

선배라 하여 선정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실제 실력으로 선정돼야 한다. 문예부원들은 이번 주 내로 각자 쓰고 싶은 글 한 편씩 써서 내게 제출해라. 그 글들을 보고서 산문과 운문 별로 각 한 명씩 학교 대표를 선정하겠다.”

그랬더니 뜻밖에 산문부로는 내가, 운문부로는 학천이가 선정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둘 다 1학년생이었으니 문예반 23학년 선배들의 체면이 한순간에 꾸겨지고 말았다. 김병덕 선생님의 특별한 선정에 부응하듯 얼마 후 홍천에서 열린 대회에서 학천이는 운문부 장원 상을, 나는 산문부에서 장려상을 받았다.

그 일을 계기로 학천이와 나는 급격히 친해졌다. 아니, 수정한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학천이를 내 문학수련의 모델로 삼고 따랐다. 같은 1학년이긴 하지만 도 실기대회 첫 번 참가에장원이라니. 게다가 학천이 사는 모습은 소문으로나 들었던 문학하는 사람의 전형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태원이도 나와 똑같이 기억한다.

우선 학천이는 가난했다. 우스운 얘기 같지만 당시가난은 문학인의 첫 번째 필수조건처럼 여겨졌다. 학천이는 인제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이 부쳐주는 월() 생활비가 넉넉지 못했고, 그마저도 늦을 때가 잦아서 효자동에서 하는 자취생활이 궁핍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일요일에 그의 자취방을 찾아가면 밥 대신에 간장을 몇 방울 떨어뜨린 냉수 한 사발을 끼니 삼아 들이키고서 온기 하나 없는 차가운 방이불 속에 누워 있었다. 가난한 모습으로만 일관했다면 나는 교동 우리 집에서 걸어서 한 시간 가까이 걸리던 그 자취방을 그만 다녔을 게다. 학천이는 그런 모습으로 문학하는 이의 풍모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배를 굶주리면서도 담배 피우기를 잊지 않았고 게다가, 소주나 막걸리도 틈틈이 마셨다. 그럴 때 방 한 구석에는창작과 비평같은, 전문문학인이 구독하는 잡지들과 습작시를 가득 적어놓은 대학노트가 사법고시생 대학노트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 쌀이나 연탄을 못 사더라도 문학을 향한 일념만은 대단했던 것이다. 그러니 막연하나마 소설가가 되는 꿈을 품은 내가 어찌 학천이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점은 태원이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 만난 태원이가 한 말이다.

춘고 시절 학천이야말로 어떤 모습이 예술가의 모습인지를, 우리 미술반 친구들한테 보여주었지! 정말 그 친구가 꿈도 못 펴보고 그리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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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평동 투다리 집에서 종열이와  만났다. 30년 만에 보는 종열이 얼굴이 별로 안 변한 것 같아  놀랐다. 머리칼만 희끗희끗 셌을 뿐이다. 얼굴만 안 변한 게 아니다. 옷차림도 30년 전처럼 검정색 반코트 차림이었다. 다만대학 노트에 전위적(?)인 소설을 써 갖고나오지는 않았다.

태원이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종열이가 변함없이 쾌활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는 네가 학창시절에 소설 써서 상을 타고 그래서, 머지않아 대작가가 나타났다는 신문기사가 날 줄 알았다. 그랬는데, 선생 30년 동안 국어를 가르치기만 했다니 참 어이가 없구나. 뭐 그래도 늦진 않았어. 요즈음은 100세 시대라고 해서 50대 중반은 젊은 나이거든.”

종렬이는 고향이 양구이다. 춘고로 진학해서 전태원 최종걸과 함께 셋이 춘고 미술반의 전통을 이었다. 태원이와 종걸이가 미대로 진학할 때 종열이는 진로를 바꾸었다. 그림을 그려서 캐나다로 수출하는 회사에 들어간 것이다. 일컬어수출화 (輸出畵)’라 했다. 한때 잘나갔다. 태원이가 언젠가 내게 한 말이다.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 종걸이와 나는 종렬이만 만나면 술값 걱정 없이 술 마셨지. 감자바위들이 돈 잘 버는 친구 하나 둔 덕에 호강했지.”

후평동 투다리 집에서 나는 종렬이가 같은 회사 여직원과 늦게 결혼했으며 아직 자식을 낳지 않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아니, 나이 50을 넘었는데 아직도 자식을 낳지 않았더니 너무 늦은 게 아냐?”

하는 내 말에 종열이가 껄껄껄 웃으며 말했다.

수시로 중국 출장이라 어디 마누라 얼굴이나 볼 새가 있어야지.”

수출화 그리는 일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쓰기에는 너무 고임금이라 하는 수 없이 저임금의 중국에서 현지 사람들을 써서 할 수밖에 없다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그 바람에 수시로 중국 출장이란다. 밤늦게 투다리 앞에서 헤어질 때 내가 물었다. 그 물음은 사실 30년 전과 똑같았다.

춘천에 잠잘 데나 있어?”

종렬이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고는 싸늘한 가을 밤 거리로 사라졌다. 30년 전에는 이렇게 대답했었다.

누나 집이 있어. 거기서 잘 거야. 누나가 춘천에서 초등학교 선생을 하거든.”

3년 지나 2008년경 가을이다. (연도를 확실하게 못 박지 못하는 건, ‘오래 전 일은 기억을 잘해내지만 근래 일은 기억이 분명치 않기때문이다. 노화의 한 현상일까?) 종열이가 불쑥 이른 아침에 내게 전화를 걸었다.

뭐해? , 지금 니네 동네에 와 있어. 해장국집이야. 이리 와.”

해장국 집으로 찾아가자 종열이가 이미 술 한 잔 걸친 얼굴이었다. 쾌활하게 웃으며 자신의 딱한 처지를 내게 알렸다.

내가 중국 출장 갔다가 귀국해서 회사에 출근하니까 무슨 일이 벌어진 줄 아니? 글쎄, 내 자리가 사라진 거야. 중국의 저임금이 고임금으로 바뀌자 회사에 적자가 나기 시작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렇지 담당자인 나를 그런 식으로 처리하다니! 회사에 사표 내라는 거거든. 나 참!”

비극을 쾌활하게 말하니, 나는 뭐라 위로의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듬해 종열이가 폐암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가 결국 숨을 거둔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 돼서다. 태원이, 종걸이가 그의 장례에 다녀온다 하여 나는 부의금이나 건네고 말았다. 당시 내게 무슨 바쁜 일이 있었을 게다.

이종열. 그는 내 기억 속에 가을바람처럼 허허로운 친구로 남았다.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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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퇴만 하면 글이 물 흐르듯 줄줄 쓰일 줄 알았다. 실제는 그렇지 못했다. 혼자 서재에 앉아 컴퓨터를 켜 놓고서 글쓰기는커녕 인터넷 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뉴스도 보고 유투브 동영상으로 가수들이 노래하는 것도 많이 봤다. 어느 날은 갓 제대한 무명 가수가 기막히게 노래 잘 부르는 것을 지켜봤다, 그는 얼마 안 가 톱 가수가 됐는데 바로‘김범수’다. ‘사랑이 나를 또 아프게 해요’ 하며 시작되던 ‘하루’.

김범수가 부르는‘하루’는 사랑의 아픔이 주제였지만 명퇴한 내게‘하루’는 그저 막막한 시간일 뿐이었다. 집 밖에는 별나게 화창한 봄 햇살이 범람하고 TV 뉴스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문제로 시끄러웠다.  

그런 어느 날 아내가 ‘먼 시골로 하루 출장 가는데 차를 몰아 달라’고 제의했다.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는 남편이 폐인 될까 걱정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말 오랜만에 아내의 일일 장거리 운전기사를 맡아 춘천을 떠났다.  

150리는 달려 도착한 시골 읍의 모 컨벤션홀. 정문 앞에 아내를 내려다놓고는‘오후 5시 반에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뒤 혼자서 여기저기 차를 몰고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뜻밖에 생각도 못한 시설물들이 시골에 있었다. 그 중 하나가 개인이 폐 분교를 분양받아 차린 미술관이다. 내가 차를 주차장 (예전에는 운동장이었으므로 그렇게 널찍한 주차장도 없었다. 주차된 차라고는 낡은 중형차 한 대뿐. 나중에 깨달았는데 그 차는 미술관 관장의 차였다.) 나무그늘에 주차시킨 뒤 미술관 안으로 들어서자, 화가이자 관장 되는 분이 몸소 반가이 맞았다. 꽤나 적적해서 방문객을 학수고대했던 게 아닐까. 관장실로 나를 안내하더니 커피를 대접하며 자신의 대단한 작품 활동을 자랑하기 바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어째 작품들이 기대에 못 미치는 미흡한 수준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제 친구도 화가인데 이름이 ‘전태원’입니다. 아십니까?

관장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럴 만했다. 그는 강원도 사람이 아니고 먼 남쪽지방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강원도에 와 화가를 자임하면서 ‘전태원’을 모른다니 더 대화 나눌 게 없었다. 나는 ‘참, 제가 다른 바쁜 일이 있거든요’ 하며 간단히 인사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 봄이 가고 여름을 지나 가을이 되었다.

나는 여전히 글 한 줄 안 쓰이는 공황(恐惶) 속에서 지내고 있었다. 전년도 늦가을, 명퇴 신청을 생각할 때다. 모처럼 만난 명퇴 선배 태원이가 내게 말했다.

 

“명퇴, 다시 잘 생각해 봐. 물론 나는 명퇴했지만 그렇다고 너도 명퇴하라는 말은 못하겠어.

뜻밖의 말에 나는 당황했다. 그의 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하지만 결국 내 결심대로 명퇴하고 만 것이다. ‘직장 생활만 그만 두면 소설이 술술 쓰일 텐데 무얼 망설여?’하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 한 줄 쓰이지 않는 현실에 자존심 상 태원이한테 내가 먼저 전화 걸어‘만나서 술 한 잔 하자’는 제의를 할 수 없었다. 그랬더니 태원이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인데‘이종렬’이 나를 찾았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휴대폰에 떠서 받았더니 종렬이 목소리였다.

“태원이한테 얘기 들었어. 명퇴해서 글을 쓴다며? 잘했어. 너는 진작에 직장을 관두고 글을 써야 했어. 그 길이 너한테 맞아. , 만나서 자세한 얘기 나누자.  어느 술집에 잘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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