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쾌한 미소의 시인 유기택한테서 몇 권의 시집을 선사받았다. 그 중 가장 최근에 낸짱돌시집을 읽어 봤다. 아니 맛봤다. 사실 시는 맛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를 읽는 것은 시가 문학의 한 장르로서 문자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문자. 문자가 있어서 우리는 문학을 감수하는 이점을 얻었지만  그렇기에 생생한 마음을 놓치는 손해를 감수하는 것임을.

우리 주변의 사물에서 느껴지는 감흥을 문자로 옮기는 순간 그 감흥은 박제되는 숙명을 어쩌지 못한다. 이를 시인 박남수는 일찍이 라는 명시에서 갈파했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2.

유기택의 짱돌 시집에 실린 시들에서 나는 그의 동심(童心)을 보았다. 예를 들어이란 시의 이런 표현이다.

 

내가 가끔 당신에게 힘내.”라 말하는 것도

흩어서 거꾸로 묶으면 내 힘으로도 읽히는

 

이렇게 장난기 넘치는 표현이 있을까! 동심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하지만 그 동심은 깊이를 잃지 않았다.

 

그 무의미한 것들에서 문득,

낱낱의 그것이 우리였다는 비의를 캐냅니다

 

라는 표현으로서 인생이란 사실 하루하루가 쌓여서 이뤄지는 것임을 갈파했다. 유 시인은 생각의 틈에 관한 보고서란 시에서도 이런 동심을 보여준다.

 

나는, 내가 식어가는 것이 싫었다

뜨거운 커피를 마셨다

 

삶의 무력감을 견디지 못해 보이는 행동이 뜨거운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한들 무력감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시인은 그런 표현으로써 자신을 지탱한다. 사과의 한 품종인 홍로를 다룬 시도 있다. 빨갛게 익은, 사과나무 밭을 보며 시인은 이리 표현했다.

 

새가 노을을 물어들이는 저런 세상

 

각각이 존재하는 ’‘사과’‘노을이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다. 시인은 이웃이란 시에서 집으로 전선을 들이려다 계획이 바뀌면서 흘린 구멍에 참새 두 마리가 깃들여 사는 모습까지 놓치지 않았다. 동심의 눈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시다.

 

3.

유 시인은 짱돌시집에서, 살아가면서 느껴지는 감흥들을 담담히 노래했다. 문자(시어)를 사용하면 생생한 감흥을 손해 보기 십상인데 그다지 개의치 않는 것 같다. 유 기택. 그는 마치 짱돌들을 여기저기 던지듯 세상을 노래했다. 의외로 그 짱돌들은 맞아도 아프지 않다.

그의 문운을 빈다.

 

 

첨언: 좋은 표현들이 많았다.

 

의자에 앉아 잠깐 졸다

앞으로 쏟아질 뻔했습니다

! 이다지 출렁거리는 생이여

<‘취생몽사 >

 

첫눈을 기다리는 애인들을 위해

매 겨울마다, 거르지 않고 첫눈이 내립니다

<‘첫눈 >

 

물든다는 것

그보다 천천한 혁명은 다시 없을 거라

<‘정경 >

 

무성영화 같은 바깥 풍경들이 종일

마당을 쌀쌀대며 돌아다녔다

<‘몸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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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 그분



 

처음에 그분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자취만 남겼다

우리 내외가 땀 흘려 일군 고구마 밭을한꺼번에 폭탄 맞은 듯한 쑥밭으로 만들어버리는 짓으로 첫 선을 보인 것이다. 처음 겪는 일이라 누구 짓인지 몰라 인근에서 농사짓는 분한테 그 요절난 고구마 밭을 보였더니 이렇게 말씀했다.

멧돼지 짓이네. 그러잖아도 이 지역은 산골짜기라 산짐승들이 자주 내려온다고 알려드리려 했는데. 우리처럼 상주하면서 농사를 짓는 게 아니라면 고구마 농사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아요. 산짐승들도 사람들이 고구마를 맛있어 하면 똑같이 맛있어 하니까 말입니다. 수박 참외 같은 농사를 이 동네에서 엄두내지 못하는 게 그 때문이죠.”

그럼 여기서는 뭘 농사지어야 합니까?”

옥수수 농사가 무난하죠. 그놈들이 옥수수를 따다 쪄 먹을 것도 아니니 밭의 옥수수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내외는 이듬해 봄, 밭에다 옥수수 모종을 사다 심었다. 고추도 겸해서 심었다. 그랬더니 밭에 별일 없이 그 해가 갔다. 다시 해가 바뀌어 2014년 가을 어느 날이다. 아내와 함께 우리 밭 바로 아래 집에 들러 동네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밖에서 누군가 소리 질렀다.

멧돼지다!”

얘기 나누다 말고 뛰쳐나와 그 쪽을 봤더니 우리 밭 가까운 산 쪽으로 뒤뚱거리며 달아나는그분이 보였다. 5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엉덩이만 보이는지라 그 모습을 제대로 본 것은 못됐다. 하지만 멧돼지인 게 분명했다. 흑갈색 털빛이며 돼지 특유의 뒤뚱거리는 걸음이며.

그분은 우리 밭에 먹을 작물이 없나 해서 옥수수 밭에 접근했다가 동네 사람이 소리치자 기겁해 달아난 것이다.

가슴이 벌벌 떨린다는 아내 옆에서 나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알아서 산으로 달아나다니, 그럼 자기가 잘못했다는 도덕적 관념이 있단 말인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도덕적 관념이라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자기보다 강한 자(사람)와 맞닥뜨렸다는 두려움에 달아난 거겠지.’

여하튼 결론은 그렇게 내렸지만 그분의 뒤뚱거리며 산속으로 피하는 모습 자체는 사람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뒤 달아나는 행동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구체적으로는불륜을 저지르다가 발각돼 급히 뒤뚱거리며 달아나는 중년 사내같았다.

산짐승임에도 내가그분이라 부르게 된 까닭이다.

 

그 후 몇 년 간 그분은 우리 밭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밭 부근에 살면서 농사짓는 게 아니라, 시내에 살면서 바람이라도 쐬고 싶을 때 차를 몰고 와서 농사짓는 거라 사실 밭을 제대로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서서히 그분에 대한 기억마저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올 가을 들어 그분, 아니 그분들이 큰 문제를 일으킬 줄이야! 밭에 들어와 작물을 휘젓고 달아난 정도가 아니다.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라는, 바이러스 성 전염병의 매체로서 국내 양돈계를 위협하는 악역(惡役)으로서다.

그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그분들을 말살하는 정책이 펼쳐지고 있다. TV 뉴스 시간마다 산과 들, 심지어는 도시의 한복판에서 엽사들에게 사살된 그분들 사진이 뜨는 판이다. 농가에 피해를 주는 정도로 인식되던 그분들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느닷없이 몰살될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추운 겨울이 바짝 다가왔다. 그러잖아도 겨울만 되면 산에서 먹이가 떨어져 인가로 내려오다가 포획되곤 하는 그분들인데이런 범정부적인 조치에 과연 한 마리라도 살아날지 의문이다. 몇 년 전 우리 밭을 방문했다가 달아난그분도 결국은 목숨을 잃게 될 것 같다. 이미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이 산하의 야생동물 중에서 최상위 포식자가 그분들이라는데 그분들의 씨를 이렇게 말려도 괜찮은 걸까? 생태계가 무너지면서 아프리카 돼지 열병 이상의 큰 혼란이 닥치게 되는 건 아닐까? 이른 봄부터 시작한 장편집필도 웬만큼 된 데다가, 올해 농사까지 끝나 한가해져서인지 나는 별 걱정을 다하며 이 겨울을 맞고 있다.


www.kimyouje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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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조카한테두꺼비란 별명을 붙인 건 거의 자연발생적이었다.

19841, 그 두 달 전에 태어났다는 조카를 본 순간 나도 모르게 두꺼비다!”하고 외쳤으니 말이다. 그럴 만했다. 갓난아기치고는 우람한 몸매에 넓적한 얼굴이 딱 두꺼비 같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아우(두꺼비 아비가 되고 만 사람)도 그렇고 제수도 그렇고 모두 함께 와하하 웃고 말았다. 큰아버지()란 사람이 학창시절부터 문학에 뜻을 두어 눈에 보이는 사물을 평범히 표현하지 않는 버릇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두꺼비.

이 땅의 전설에서 두꺼비는 항상 영물(靈物)이었다. 악의 기운을 물리치는, 묵직한 존재. 독사가 개구리는 잡아먹어도 두꺼비는 멀리한다지 않던가. 간혹 눈치 없는 독사가 두꺼비를 개구리인 줄 착각하고 잡아먹었다가는 얼마 못가 뱃속에 든 두꺼비가 내뿜는 독에 죽어버리고 만다 했다. 그 죽어 자빠진 독사의 허물을 벗어내며 두꺼비가 어그적어그적 밖으로 나타난다 했던가.

 

지난 1123일 수원에 사는 두꺼비 조카가 둘째아들 돌잔치에, 우리 내외를 초대했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이란 말이 있더니 과연 그 말처럼 잇달아 아들만 둘을 낳은 두꺼비 조카. 그 날, 여기 춘천에서 수원까지 전철로 가는데 하필 철도 파업에다가 대입 보는 수험생들로, 가는 길이 여간 힘겨웠던 게 아니다. 그래도 수원의 이름있는 한정식 식당에서 두꺼비 조카와 아내, 그 어린 아들들을 봤을 때 힘겨움이 순간 싹 사라져버렸다.

 

몇 년 전에 두꺼비 조카를 만났을 때 내가 이리 물었다.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냐?”

그러자 이리 답했다.

두꺼비집에서요.”

집의 전원을 올리고내리고 하는 장치가 두꺼비집인데 그것을 재치 있게 써먹던 것이다.

 

아이들을 낳지 않아 지금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판이다. 이럴 때 잇달아 떡두꺼비 같은 아들들을 낳은 두꺼비 조카. 애국까지 하는 모습에 나는 큰아버지로서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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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배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극작가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후배의 친동생은 이름난 시인이다. 그런 집안 분위기로 봐 후배는 문인이 될 법했다. 하지만 문인이 되는 일 없이, 평범한 국어교사의 길을 밟은 후배.

 

그 까닭에 나는 후배를 볼 때마다 속으로 의아해했다. 집안 분위기에 더해, 외양까지 바짝 마른 데다가 눈빛까지 형형해 시인의 전형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후배는 고달픈 교직생활 속에서 시심을 잃지 않고 아름다운 시를 항상 발표하는 시인이어야 했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백묵가루를 날리는 국어교사로서 성실하게 사는 모습.

 

그런데 후배한테 독특한 생활습관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얘기 듣게 되었다. 후배는 일요일 새벽이면, 여기 춘천에서 속초 동명항까지 혼자 차를 몰고 가서는 신선한 회 한 접시를 사 먹고 돌아온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나 다니기 좋지만 그 당시에는 몹시 구불구불한 데다가 좁은 2차선 국도였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을 일요일 새벽에 혼자서 그런 국도를 차 몰고 동명항까지 간다는 후배. 상상만으로도 위험하고 이해가 안 됐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흘렀다.

오늘 나는 아내와 속초 동명항에 바람 쐬러 왔다가 후배의 그 이해가 안 되던 독특한 습관이 섬광처럼 납득되었다. 후배는 단지 신선한 회 한 접시 때문에 동명항에 다닌 것이 아니라 부두에서 만나는 풍경들 때문에 다녔다는 것을.

끝없이 일렁이는 검푸른 바다. 밤새 조업을 마치고 귀항하는 어선. 혹은 조업하러 아침 일찍이 항구를 나서는 어선. 긴 방파제 끝의 빨간 등대.

 

나는 깨달았다. 비록 시를 쓰지 않았지만 후배는 시인이었다. 원고지에 갇혀 지내기를 거부했을 뿐 그는 진정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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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덕 선생님이 그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괜한 헛기침까지 하며 내게 다가왔다.

이 선생. 이번 교직 연수에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교직에서 연수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승진에 반영되는 연수. 다른 하나는 승진에 반영되지 않고 단지 참가해 강의를 받는 데 그치는 연수. 승진에 반영되는 연수의 경우, 시험을 치르는 것은 물론이고 그 때마다 겪는 시험 스트레스가 엄청났다. 그러니 단지 강의를 받는 데 그치는 연수를 선호할 만한테 나는 그조차 꺼려했다. 그런 연수는 귀담아들을 게 없는강사(講師)들의 시간 때우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내 결론은, ‘모든 연수는 싫다!’ 였다.

그래서 김병덕 선생님이 조심스레 내게 다가온 것이다. 20시간을 앉아 있어야 하는 연수로서 승진과는 관련 없지만 여하튼 연수라면 일단 거부하는 나를 달래려고 다가와 그러는 것이다.

이 선생이 가 봐야지 어떡하겠어?”

보나마나, 학교 별로 한 사람씩 그 연수에 참가하라고 벌써부터 공문이 왔는데 아무도 가지 않으려 하자 하는 수 없이 교직 경력이 낮은 편인 나를 대상자로 정한 게 아니겠는가. 솔직히, 다른 연세 많은 선생님이 그런다면 나는 안면몰수하고 단호히 거부의사를 밝혔을 테다. 하지만 김병덕 선생님한테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내가 춘고 3학년 학생일 때 담임선생님이셨으니까. 그뿐만이 아니다. 같은 국어과 교사로서 작문 분야에 있어서는 거리낌 없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학창시절에는 사제지간이다가 세월이 흘러 교직에서 선후배 사이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알겠습니다.”

내가 마지못해 승낙하자 김병덕 선생님은 옛날 제자가 자신의 위신을 세워줬다는 생각인지 미소를 지으며 돌아갔다. 김병덕 선생님은연수 관련 업무를 처리하는 연구과장이다.

문제는 그 후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영양가 하나 없는, 강사의 시간 때우기 연수를 듣느라 20시간이나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을 걸 생각하니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퇴직한 지 오래인데 무슨 연수야?’

꿈이었다.

꿈에서 깼다. 이른 새벽, 우리 집이었다. 퇴직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교직에 있었을 때 꿈을 꾸다니.

'김병덕 선생님'이 돌아가신 지 어언 27. 꿈속이지만 정말 오랜만에 선생님을 뵈었다. 특유의 팔자걸음이며 구부정하게 큰 키. 생전에 같은 학교에 재직할 때 제자인 내가 선생님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반대로 선생님이 내 눈치를 볼 때가 많았다. 나는 순순한 제자가 못 되었다. 후회가 된다.

김병덕 선생님. 그곳에서 잘 계시는지요. 이렇게 제자가 안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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