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의 발명 - '엄마'라는 딜레마와 모성애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지음, 이재원 옮김 / 알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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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의 사회학적인 의미 해석

 

 

우리는 항상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아주 밀접한 관계로 생각한다. 그 관계는 너무나 확고해서 세계 어느 곳, 어떤 문화든지 적용되는 생각이다. 모성애를 가진 엄마라면 아이를 위해 그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성애'라는 사고 체계는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대부분의 미디어에 의해 하나의 큰 주제가 된다. 그런데 그런 '모성애'가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발명된 것이라니? 이 책은 '모성애'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모성애'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집안일과 육아를 담당할 사람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나타난 이데올로기라고 보았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살펴보면 '집안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집안일도' 해야하는 슈퍼우먼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책은 독일에서 1975년에 출간되었는데, 특히 주부들에게 많이 읽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2001년에 출간되었는데, 한국의 여성 독자들도 바로 '나'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일 부분이 많을 정도로 공감이 되는 이야기였다. 낙태, 주부우울증, 순결강박증, 여자의 성적 주체성과 해방, 이혼 증가 등의 40년 전 독일의 여성들의 문제가 몇 년 전까지의 한국 여성들의 문제와 닮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문제들까지도 단숨에 뛰어넘어 버린 단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포세대나 사포세대라는 말이 떠도는 것처럼, 연애나 결혼, 출산을 포기해 버린 시점에서 아이를 키우는 상황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것보다는 먼저 취업과 주거의 문제가 너무나 크다보니, 그저 현재의 삶을 즐기는 정도로 만족하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 따위는 없이 말이다.

 

어쨌든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직장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대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핵가족이 되었다. 대가족일 때에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 아이의 육아나 집안일 등을 서로서로 도우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핵가족이 되면서 집안일과 육아를 함께 해줄 사람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남자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집안일과 육아 등을 온전히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슬로건은 '모성은 위대하다'는 관점이었다.

 

부모가, 특히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경우는 특수한 사정이 있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불편하고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모성애'라는 이데올로기가 발명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여자'라는 존재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되었다. 나 또한 여자지만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뒷바라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데, 이 생각이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교육을 받아 온 결과라는 것이다.

 

색다른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아이를 내다 버리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육아는 여성에게만 주어진 의무 사항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수행해야 하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동안 외벌이를 하면 집안일과 육아를 온전히 여자 혼자서 감당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맞벌이를 해도 대부분의 집안일과 육아는 여성의 몫일 경우가 많은 편이다. 직장 생활을 하며 집안일과 육아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워킹맘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왜 외벌이든 맞벌이든 대부분의 집안일과 육아는 여성의 몫일까? 지금은 예전보다는 함께 집안을 하는 남성이 늘어서 다행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집안일은 여성이 해야 하고, 남편은 그것을 '도와준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집안일 분배 문제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최근의 여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면서 직장 생활을 하며 사회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데 자신의 전력을 다한다. 그러면서 남성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위협을 받는다며 경계심을 가진다. 이렇게 되면서 언제가부터 인터넷에서는 서로의 성을 혐오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여혐과 남혐,,, 이러한 대립은 이미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생각이 아닐까 두려워 졌다.

 

너무나 살기 팍팍하고 힘든 세상 속에서 대립과 갈등이 극에 달한 시점인 것 같다. 가슴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친다. 그 분노를 누군가든, 무엇이든,,, 표출하고 싶다. 자신의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아 헤맨다. 나보다 약한 무언가를. 절망과 슬픔, 분노로 인해 썩어 문드러진 가슴,,, 점차 손쓸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 희생양을 짓밟는다. 그것이 언젠가 '나'이고, 바로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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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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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하다!

 

 

'무관심'이란 무엇일까? 한때는 사랑의 반댓말이라고 회자될 때가 있었다. 무관심 앞에 어떤 말이 오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 같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투표를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소중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람시는 '무관심'이 정치, 경제 등의 사회참여적인 의미에서의 '무관심'을 논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예로 들면 70~80년 대에는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이 꽃을 피웠을 때였다. 그 당시 문화 예술 방면에서도 순수예술이냐, 아니면 참여예술이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반인들도 그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었고 아무 관심도 없이 먼 나라의 일로 여기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면 군부 독재 무리의 가해자였거나.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변혁'이 필요한데. 그 변혁의 힘은 일반 민중들의 '참여'에서 나오게 된다. 참여를 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하고, 의식이 깨어 있기 위해서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사회를 바꾸기 위한 전제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참여형 정치를 논했던 그람시로서는 '무관심을 증오'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람시의 사상이 담긴 에세이 같은 것이다.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한 자신의 단상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글을 쓴 시기가 유럽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는 시기에 그에 대한 저항의 방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 가치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사회주의를 옹호하던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은 1910년 대에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쓴 글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100년이 흐른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에 보내는 일침같은 느낌을 받았다. 미약한 군중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자들의 정치 방식, 그에 저항하는 깨어있는 자, 하지만 대부분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 아니, 관심 조차도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몇 명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봐도 그것은 더디고 한계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개개인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나 다급한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들을 포기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까지도 포기할 지경에 이를 경우도 많아졌다. 우울하고 절망스러운 감정을 자기 스스로 감당하지 못 할 수준에 이르르고 말았다. 그것이 그 현실은 본인의 잘못만 있는 게 아니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죄라면 죄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현실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돈을 열심히 벌어도,,,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는 삶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삶일 것인가?

 

희망 없는 사회! 더 나빠질 가능성이 너무나 확실한 절망적인 현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앞으로 걸어나가야 할 것인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다. 그람시는 말한다. "우리 스스로를 바꿀 필요가 있다."라고. 우리가 변해야 우리가 있는 사회가 변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몇 년 안 되어 전혀 다른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표현, '외침'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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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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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길을 향해

 

 

며칠 전 미국 클럽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다. 테러단체인 IS를 흠모하던 외로운 늑대형의 한 인간이 저지른 일이었다. 50명이 죽고 50명이 다쳤다. 이것은 개인의 복수극이 아닌다.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차별적인 테러 행위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곳곳의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은 총기 사건이 자꾸 일어나고, 우리나라에서는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그 분노를 쏟아낸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생각 했을까?

 

세계 여행을 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를 모를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테러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그게 아니면 폭염이나 홍수, 화산폭발 등의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니, 정말 집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한 일인지도 모른다. 밖에 나가 친구를 만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요새는 산에 올라가는 일도 무섭게 되어 버렸다. 왜 우리의 세계는 테러 행위 등의 폭력적인 사태가 자꾸 일어나고 있는 걸까?

 

우리나라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럽과 같은 나라 저편에서는 수많은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새해에는 그런 난민들을 향한, 난민 중의 누군가가 성추행을 하는 범죄 행위가 무차별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난민들이 들어오면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난민들을 받아들였지만,,, 더 이상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벌이는 범죄 행위나,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먹여 살릴 만한 재정이 탄탄하지 않다. 그들을 정착시키는 문제는 자국의 국민들의 직업을 구하는 경쟁이 심화되고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유럽 각국의 나라는 난민들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난민들에 대한 대처 방안을 선택하고 있다.

 

나 또한 우리나라에 당장 난민들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먼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난민들로 인해 생기는 문제도 그저 흘러 넘길만한 사소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어쨌든 처음에는 난민들이 왜 생길까 궁금했다. 난민들이 생기는 이유는 아프리카의 내전 문제 때문이지만, 결국 그것도 알고보면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의 국가들을 자기 마음대로 국경을 나누고 강대국들의 욕심으로 경제를 성장시킨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난민 발생에 대한 책임이 유럽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민 발생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등의 정책적인 대안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들이 얼마나 약소국들을 핍박했는가? 경제 성장은 더디고 정치사회적인 다양한 문제점을 가지게 된 것도 결국 첫단추를 잘못 끼우게 만든 강대국들이 아닐까?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졌지만 말이다. 어쨌든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난민들이 많이 발생할 것이고 여러 나라에서 테러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라고 한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어떤 '행동'이라도 하는 것이 세상을 향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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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느질 소녀 사계절 아동문고 86
송미경 지음, 김세진 그림 / 사계절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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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치유하는 아이의 이야기

 

 

예전에 어떤 마을에 개나 고양이들이 죽기 시작했다. 사람이 아닌 동물이 죽었기 때문에 그 사건은 주목받지 못한 뉴스가 되어 우리의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졌다. 미국의 유명한 연쇄살인마들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의 공격성을 드러내었다고 한다. 연쇄살인마를 잡고 그의 삶을 역추적하였더니, 어렸을 때 마을에서 개나 고양이들이 갑자기 죽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개나 고양이가 죽었다고 해서 크지 않은 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에는 연쇄살인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아주 먼 나라의 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최근의 사람들을 보면 자신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공격적으로 변하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간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개나 고양이가 상처를 받듯이,,, 우리도 서로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은지 모르겠다. 육체적인 상처는 물론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상처를 받은 날에는 생각한다. 누군가 나의 상처를 치유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 동화책 속에서는 그런 꿈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수지는 자신이 기르던 강아지인 구름이가 사라졌다. 구름이를 찾기 위해 돌아다니는데, 이제 거의 쇠락해 가고 있던 반달 공원에서 구름이와 비슷하게 생긴 강아지를 찾게 된다. 구름이와 비슷하지만 네 다리가 정상적으로 붙어서 뛰어다니는 강아지라 구름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수지는 자신이 만들어준 목걸이를 보고 구름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구름이는 한 다리를 못 썼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수지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반달 공원으로 찾아간다. 그 곳에는 바느질을 하는 거지 소녀가 있었다. 수지의 마을에는 최근에 개와 고양이의 꼬리가 잘린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꼬리가 잘린 개와 고양이가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것이 바느질 소녀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송미경의 단편 동화집인 <돌 씹어 먹는 아이>를 재미있게 읽어서, 이 동화책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요즘 아이들의 소재와는 관게가 먼 듯한 '바느질'을 가지고 어떤 동화의 세계를 만들어 낼까 싶었다. 그런데 <돌 씹어 먹는 아이>에서의 독특한 이야기 세계를 찾아 보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아픈 동물들을 바느질을 해서 고쳐줄 수 있다니? 게다가 인간까지? 정신적인 문제까지? 하나님 만큼의 무한한 능력을 지닌 '거지 소녀'는 대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것일까?

 

그런데 바느질을 해서 여러 동물들과 사람을 고쳐준다는 생각은 조금은 위험한 사고일 것 같았다. 바느질을 해서 고쳐준다는 것 자체가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을 고쳐서 '완전한 것'으로 바꾼다는 사고방식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완전한 것이 '정상적인 것'이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것'은 고쳐야 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그 존재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어느 누구든 완벽한 사람은, 아니 완벽한 동물은 있을 수 없다. 하나님도 인간을 만들 때 똑같이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똑같이 복제한다는 것은 생명이 없은 로봇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유전자 복제도 완전하고 완벽하게 똑같게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자라나는 환경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쌍둥이도 서로 똑같을 수 없는 것처럼.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느 누구나 조금씩은 부족한 게 당연하다. 그 부족한 것을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메우기도 하고, 그런 관계가 더 잘맞는 사이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닌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화를 읽으면서 조금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어느 누구나 하나님 같은 존재가 나타나 아픈 곳을 싹 다 고쳐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은 현상이다. 내가 비현실적인 사건으로 불편함을 느낀 이유는 바느질 소녀의 그 행위 자체에 대한 설득력이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선과 악이 분명한 세계이다. 그 세계 속에서 아이들은 꿈을 꾼다. 슈퍼맨과 같은 바느질 소녀를 말이다. 하지만 요즘의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 자신이 직접 행동하여 상황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나는 아이들이 직접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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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주의 결혼식 푸른숲 역사 동화 2
최나미 지음, 홍선주 그림, 전국초등사회교과 모임 감수 / 푸른숲주니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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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결혼 형식이 변화된 모습

 

 

누구나 결혼을 한다. 아니,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한다. 옛날에는 부모의 강압에 의해서. 오늘날에는 개인의 선택 비중이 높아졌다. 옛날에는 결혼을 하지 않으면 개인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적당히 괜찮은, 자신과 맞는 사람과 만나 결혼을 했다. 하지만 이제 '결혼'은 선택이 되었다. 경제적인 이유든, 개인의 취향 문제이든 말이다.

 

보통 결혼을 하게 되면 여성의 일이 많아진다고 한다. 가사와 육아는 물론이고 명절이나 제사를 챙기는 일까지도 말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시댁에 들어가서 사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여자는 시집 살이를 당하며 힘들게 지냈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란 말도 이것 때문에 나온 우스갯 소리였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부터 결혼을 하고 시댁에 들어가서 살게 된 것일까? 바로 그 시점을 보여주고 있는 게 바로 이 책이다. <옹주의 결혼식>은 세종대왕 시대에 유교를 서민들에게까지 정착을 시키면서 유교적 결혼 문화를 알리기 위한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세종대왕 자신의 친척을 결혼시키고 시댁으로 보낸 것이다.

 

옹주인 운휘는 자신이 하고 싶은 꼭 하고야 마는 아이이다. 자신만의 고집을 가지고 좁은 궁궐을 답답해 하는 아이였다. 자꾸 말썽을 부리는 운휘는 떠밀리 듯 결혼을 강요 당하게 된다. 궁궐 속에서의 어지럽고 비정한 정치에 의해서 말이다. 그것을 피하려고 해도 어린 나이의 운휘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주변의 여성들은 서로의 힘을 모아 세종대왕의 의견을 물리치려고 한다. 운휘에게 자신읙 결혼 형태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한다. 하지만 운휘는 결국 조선 최초로 시댁에 들어가서 사는 여성이 된다. 하지만 서로 엇갈리고 부딪치는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사이를 처음으로 견뎌낼 수 있을까? 운휘는 시댁에서 자신의 어머니 제사를 지내려고 하지만, 시댁에서는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운휘는,,,

 

결혼 문화는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것이다. 잘 변하지 않지만 조금씩 변하기는 한다. 요새 스몰웨딩이 조금씩 뜨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아직 우리의 결혼 문화는 허례허식이 많은 것 같다. 두 명의 부부가 함께 해 나가는 '처음'을 빚으로 시작하고 마는 것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일까?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커플이 싸우고 깨지기도 하던가?

 

어쨌든 옹주 한 명의 결혼식을 위해 많은 여성들의 사이에서 많은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가 저 상황의 운휘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유교적인 문화의 결혼식으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을까?

 

'결혼식'이라고 해서 전통적인 결혼식에 대한 설명이 많이 나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결혼 전 후의 상황에 대한 설명이 많았다. 운휘의 성격을 만들어 가고 왜 운휘가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나, 그리고 왜 결혼 이후 갈등이 있었고, 운휘가 결국 어떤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전통 결혼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으로 아동이 읽기에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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