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의 발명 - '엄마'라는 딜레마와 모성애의 부담에서 벗어나기
엘리자베트 벡 게른스하임 지음, 이재원 옮김 / 알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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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성애'의 사회학적인 의미 해석

 

 

우리는 항상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아주 밀접한 관계로 생각한다. 그 관계는 너무나 확고해서 세계 어느 곳, 어떤 문화든지 적용되는 생각이다. 모성애를 가진 엄마라면 아이를 위해 그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을 것이다. '모성애'라는 사고 체계는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대부분의 미디어에 의해 하나의 큰 주제가 된다. 그런데 그런 '모성애'가 사회학적인 의미에서 발명된 것이라니? 이 책은 '모성애'를 전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는 책이었다.

 

이 책에서 '모성애'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집안일과 육아를 담당할 사람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나타난 이데올로기라고 보았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상황을 살펴보면 '집안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면서 '집안일도' 해야하는 슈퍼우먼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 책은 독일에서 1975년에 출간되었는데, 특히 주부들에게 많이 읽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2001년에 출간되었는데, 한국의 여성 독자들도 바로 '나'의 이야기라고 받아들일 부분이 많을 정도로 공감이 되는 이야기였다. 낙태, 주부우울증, 순결강박증, 여자의 성적 주체성과 해방, 이혼 증가 등의 40년 전 독일의 여성들의 문제가 몇 년 전까지의 한국 여성들의 문제와 닮아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문제들까지도 단숨에 뛰어넘어 버린 단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삼포세대나 사포세대라는 말이 떠도는 것처럼, 연애나 결혼, 출산을 포기해 버린 시점에서 아이를 키우는 상황이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것보다는 먼저 취업과 주거의 문제가 너무나 크다보니, 그저 현재의 삶을 즐기는 정도로 만족하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희망 따위는 없이 말이다.

 

어쨌든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직장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대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핵가족이 되었다. 대가족일 때에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한 아이의 육아나 집안일 등을 서로서로 도우며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점차 핵가족이 되면서 집안일과 육아를 함께 해줄 사람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래서 남자는 밖에 나가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집안일과 육아 등을 온전히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여자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아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슬로건은 '모성은 위대하다'는 관점이었다.

 

부모가, 특히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당연한 것이다. 사랑하지 않는 경우는 특수한 사정이 있거나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해서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불편하고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사랑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희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모성애'라는 이데올로기가 발명되면서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여자'라는 존재에게 '희생'을 강요하게 되었다. 나 또한 여자지만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를 뒷바라지를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데, 이 생각이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으로 교육을 받아 온 결과라는 것이다.

 

색다른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아이를 내다 버리고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식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고방식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육아는 여성에게만 주어진 의무 사항이 아니라 부부가 함께 수행해야 하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동안 외벌이를 하면 집안일과 육아를 온전히 여자 혼자서 감당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맞벌이를 해도 대부분의 집안일과 육아는 여성의 몫일 경우가 많은 편이다. 직장 생활을 하며 집안일과 육아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워킹맘들의 하소연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왜 외벌이든 맞벌이든 대부분의 집안일과 육아는 여성의 몫일까? 지금은 예전보다는 함께 집안을 하는 남성이 늘어서 다행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집안일은 여성이 해야 하고, 남편은 그것을 '도와준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 부부싸움을 하는 이유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집안일 분배 문제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최근의 여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거나 출산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면서 직장 생활을 하며 사회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데 자신의 전력을 다한다. 그러면서 남성은 자신들의 일자리가 위협을 받는다며 경계심을 가진다. 이렇게 되면서 언제가부터 인터넷에서는 서로의 성을 혐오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여혐과 남혐,,, 이러한 대립은 이미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생각이 아닐까 두려워 졌다.

 

너무나 살기 팍팍하고 힘든 세상 속에서 대립과 갈등이 극에 달한 시점인 것 같다. 가슴 속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친다. 그 분노를 누군가든, 무엇이든,,, 표출하고 싶다. 자신의 분노를 쏟아낼 대상을 찾아 헤맨다. 나보다 약한 무언가를. 절망과 슬픔, 분노로 인해 썩어 문드러진 가슴,,, 점차 손쓸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되어 희생양을 짓밟는다. 그것이 언젠가 '나'이고, 바로 '우리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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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관심을 증오한다 - 그람시 산문선
안토니오 그람시 지음, 김종법 옮김 / 바다출판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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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통해 현재를 말하다!

 

 

'무관심'이란 무엇일까? 한때는 사랑의 반댓말이라고 회자될 때가 있었다. 무관심 앞에 어떤 말이 오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것 같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투표를 포기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는 사람에게 무관심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소중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그람시는 '무관심'이 정치, 경제 등의 사회참여적인 의미에서의 '무관심'을 논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를 예로 들면 70~80년 대에는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의식이 꽃을 피웠을 때였다. 그 당시 문화 예술 방면에서도 순수예술이냐, 아니면 참여예술이냐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반인들도 그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한 사람도 있었고 아무 관심도 없이 먼 나라의 일로 여기며 살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면 군부 독재 무리의 가해자였거나.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변혁'이 필요한데. 그 변혁의 힘은 일반 민중들의 '참여'에서 나오게 된다. 참여를 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깨어 있어야 하고, 의식이 깨어 있기 위해서는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바로 사회를 바꾸기 위한 전제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는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참여형 정치를 논했던 그람시로서는 '무관심을 증오'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그람시의 사상이 담긴 에세이 같은 것이다.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한 자신의 단상들을 모아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글을 쓴 시기가 유럽의 파시스트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는 시기에 그에 대한 저항의 방향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더 가치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사회주의를 옹호하던 그람시는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자신이 믿는 '신념'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것이다.

 

이 책은 1910년 대에 독재 정권에 저항하며 쓴 글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100년이 흐른 현재 우리나라의 현실에 보내는 일침같은 느낌을 받았다. 미약한 군중들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자들의 정치 방식, 그에 저항하는 깨어있는 자, 하지만 대부분의 민중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권력에 저항하지 않고 순응한다. 아니, 관심 조차도 없는 것이다.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함께 행동해야 한다. 몇 명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봐도 그것은 더디고 한계가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개개인들의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나 다급한 현실적인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 인간관계 들을 포기하게 되었다. 결국에는 자신의 '삶'까지도 포기할 지경에 이를 경우도 많아졌다. 우울하고 절망스러운 감정을 자기 스스로 감당하지 못 할 수준에 이르르고 말았다. 그것이 그 현실은 본인의 잘못만 있는 게 아니다. 금수저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죄라면 죄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희망'도 가지지 못하게 만든 우리 사회의 현실에 그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아무리 돈을 열심히 벌어도,,,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는 삶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삶일 것인가?

 

희망 없는 사회! 더 나빠질 가능성이 너무나 확실한 절망적인 현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앞으로 걸어나가야 할 것인가,,, 우리 모두에게 묻고 싶다. 그람시는 말한다. "우리 스스로를 바꿀 필요가 있다."라고. 우리가 변해야 우리가 있는 사회가 변할 수 있다. 현재 우리 사회는 몇 년 안 되어 전혀 다른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으로 무장해야만 한다. 어떻게든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있다는 표현, '외침'일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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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계급투쟁 - 난민과 테러의 진정한 원인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희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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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 사회가 가고 있는 길을 향해

 

 

며칠 전 미국 클럽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있었다. 테러단체인 IS를 흠모하던 외로운 늑대형의 한 인간이 저지른 일이었다. 50명이 죽고 50명이 다쳤다. 이것은 개인의 복수극이 아닌다.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은 무차별적인 테러 행위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곳곳의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미국은 총기 사건이 자꾸 일어나고, 우리나라에서는 묻지마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을 향해 그 분노를 쏟아낸다. 그들은 아무 이유 없이 피해를 당한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생각 했을까?

 

세계 여행을 어느 곳으로 가야할 지를 모를 정도로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테러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그게 아니면 폭염이나 홍수, 화산폭발 등의 자연재해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으니, 정말 집에 있는 게 가장 안전한 일인지도 모른다. 밖에 나가 친구를 만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세상이다. 요새는 산에 올라가는 일도 무섭게 되어 버렸다. 왜 우리의 세계는 테러 행위 등의 폭력적인 사태가 자꾸 일어나고 있는 걸까?

 

우리나라에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럽과 같은 나라 저편에서는 수많은 난민들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새해에는 그런 난민들을 향한, 난민 중의 누군가가 성추행을 하는 범죄 행위가 무차별적으로 일어났다고 한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난민들이 들어오면서 수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주의적인 관점에서 난민들을 받아들였지만,,, 더 이상 한계에 다다른 상황이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벌이는 범죄 행위나,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 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을 먹여 살릴 만한 재정이 탄탄하지 않다. 그들을 정착시키는 문제는 자국의 국민들의 직업을 구하는 경쟁이 심화되고 있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래서 유럽 각국의 나라는 난민들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난민들에 대한 대처 방안을 선택하고 있다.

 

나 또한 우리나라에 당장 난민들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먼나라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난민들로 인해 생기는 문제도 그저 흘러 넘길만한 사소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어쨌든 처음에는 난민들이 왜 생길까 궁금했다. 난민들이 생기는 이유는 아프리카의 내전 문제 때문이지만, 결국 그것도 알고보면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의 국가들을 자기 마음대로 국경을 나누고 강대국들의 욕심으로 경제를 성장시킨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난민 발생에 대한 책임이 유럽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민 발생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난민들을 받아들이는 등의 정책적인 대안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제국주의 시대에 강대국들이 얼마나 약소국들을 핍박했는가? 경제 성장은 더디고 정치사회적인 다양한 문제점을 가지게 된 것도 결국 첫단추를 잘못 끼우게 만든 강대국들이 아닐까? 세월이 많이 지나서 그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 졌지만 말이다. 어쨌든 슬라보예 지젝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었다.

 

앞으로도 난민들이 많이 발생할 것이고 여러 나라에서 테러가 일어날 것이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들의 '세계적 연대'라고 한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어떤 '행동'이라도 하는 것이 세상을 향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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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과 도덕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 사회평론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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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결혼의 관념

 

 

<결혼은 미친짓이다>라는 책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그 책을 원작으로 영화까지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주 오래 예전부터 인간들은 '결혼'이 무엇인지, 왜 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을 해왔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저술가이며,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한 버트런드 러셀도 이러한 고민의 결과를 이 책으로 내놓았다.

 

버트런드 러셀은 사상가, 철학자, 수학자로서 강의와 집필에 몰두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실천적 지식인으로 변모해 나갔다. 러셀은 전쟁 중에 징병에 대한 반대 문건을 쓴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 받지만 납부를 거부해 대학의 강의권을 박탈 당하기도 했다. 2년 후에는 전쟁에 반대한 글을 썼다는 이유로 6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니, 그가 얼마나 실천적 지식인으로서 열심히 사회 활동을 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결혼과 도덕>은 1929년에 출간되었지만 그 당시 금기시되던 도발적인 성 담론인, 결혼과 외도, 성매매 등을 다루고 있다. 이 책으로 인해 러셀은 1940년 뉴욕시립대학교의 임용이 취소되기도 했다. 이 책은 1929년에 출간되었지만 지금의 우리 사회 현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결혼관에 대한 현재 우리의 모습이 반영되어 있어서 러셀의 필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우리는 삼포, 오포, 칠포 세대라고 부른다. 스스로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던지는 농담은 우리의 가슴에 씁쓸한 무언가를 남긴다. 이러한 '포기' 세대의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상황은 연애와 결혼, 출산의 포기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누군가와 결혼해서 하나의 가정을 이룰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자녀를 낳아도 제대로 키울 수 없고 또 다른 흙수저 계급을 양산할 뿐인 현 상황에서 어느 누가 결혼해서 자녀를 낳겠는가?

 

버트런드 러셀은 오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사회문화적인 결혼과 성 문제를 분석하고 있었다. 원시 부족 사회에서는 모계 사회가 중심을 이루는데, 그때는 생물학적인 아버지보다는 외삼촌에 대한 의지가 더 높았다고 한다. 아버지와도 관계를 맺지만 외삼촌에 의해 가족과 부족의 문화가 전달되는 것이다. 그때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이후에 종교적인 문제로서 순결과 일부일처제가 받아 들여지면서 오늘날의 결혼과 가정 생활의 책임감이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일부일처제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누군인지 알아야 했기 때문에 처녀의 순결이 중요했고, 결혼 이후에도 여자의 외도가 심각하게 받아들여 졌다. 1929년에 버트런드 러셀은 이 책을 출판하면서 우리의 결혼 문화가 예전의 모계사회 때로 다시 돌아가는 양상이 보인다고 분석하였다. 러셀의 분석이 현재 우리의 사회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측면이 있어서 그의 예측력에 혀를 내둘렀다.

 

현재 우리 사회는 법적으로 '결혼'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한다. 혼자 즐기다가 죽고 싶다는 사고방식을 조금씩 받아 들이고 있는 것이다. 러셀은 바로 그런 측면에서 아이가 생기지 않은 경우라면 누구나 결혼을 무효로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현재 법 조항에서 살펴보면, 상대방에게 사기와 같은 큰 잘못이 없다면 결혼 무효는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 이 얼마나 획기적인 생각인가? 상대방의 외도를 처벌할 수 있는 간통죄가 우리나라에서는 2015년에 겨우 폐지 되었다. 성 자체는 개인의 자유라는 측면을 더 높게 인정한 결과일 것이다.

 

성 문화를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 인간은 결혼 제도 자체가 불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왜 우리는 그 힘든 결혼을 하기 위해서 아직도 난리인 것일까? 사회문화적인 제도이기 때문에? 하나의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한 인간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자녀를 낳아야 한다는 종족 보존 때문에? 다른 무엇보다도 100세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40년 넘게 한 사람과만 결혼 관계를 유지하여 가깝게 지낸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퍼지고 있기도 하다.

 

'결혼'은 대체 무엇일까? 러셀은 '행복한 결혼'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행복한 결혼의 정수는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육체적으로나 지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깊이 있는 친밀감을 유지하는 데 있다. 이런 요건들이 충족될 때 남녀 간의 진지한 사랑은 인간의 모든 체험 가운데서 가장 풍요로운 것이 된다. 이런 사랑은 모든 위대하고 귀중한 것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의 도덕을 필요로 하며, 더 큰 것을 위해서 작은 것을 희생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희생은 자발적인 것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 희생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사랑의 토대 자체를 파괴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인생의 동반자'일 것이다. 세상에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결혼도 '교육과 상담'이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하는 '배워야 하는 대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과의 만남은 우주의 신비다. 그 신비스러운 행위의 소중함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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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 읽기, 쓰기, 고독, 연대에 관하여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 반비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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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지점

 

 

'엄마'라는 단어를 들을 때 우리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내가 어린 시절에는 엄마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하지만 조금 자라고 나서 사고하는 능력이 생길 때면 엄마라는 존재를 밀어내기에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엄마는 나의 삶을 재미없고 지루하게 만든다. 나에게 밥 먹어라, 씻어라, 일찍 자라, 공부해라,,, 라는 잔소리를 늘어 놓으면서 말이다. 내가 자랄수록 엄마는 늙고 병들어 간다. 하지만 내가 자라는 사이에는 엄마의 시간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내가 나의 시간을 누리기 시작할 때쯤에 엄마의 시간이 폭발물처럼 터지고 만다. 엄마의 몸 이곳저곳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그때서야 나는 엄마의 존재를 마주하게 된다. 엄마가 어린 나를 돌봐준 것처럼, 이제는 나도 엄마를 돌볼 차례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 거꾸로 된 상황이 내게는 너무나 어색하기만 하다. 엄마는 언제나 '위대한' 엄마이기 때문이다. 결국 깨닫게 된다. 엄마도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이 책처럼 자신의 엄마를 객관적으로 서술한 책은 없었던 것 같다. 자신의 어린 시절의 아픔과 엄마오 자신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와 엄마와의 관계, 그리고 아주 옛날에 할머니가 편찮으셨던 기억이 자꾸 괴롭게 떠올랐다. 엄마와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늚음과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왜 인간은 늙으면서 죽어야 하는 걸까? 늙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얼마 전 하나의 뉴스를 접했다. 안락사를 허용한 유럽의 한 국가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요양원에서 간호사로서 늙은 사람들을 돌보아 왔던 한 여자가 늙고 병들기 전에 안락사를 신청했다는 것이다. 자녀가 모두 자라서 자신의 삶을 꾸려 나가게 된 후에 남편의 동의를 얻어 모든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그 여자는 늙고 병든 사람들을 계속 보아 왔기 때문에 자신은 남에게 도움이나 간호를 받기가 절대로 싫었기 때문에 안락사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 여자의 선택을 응원해 준 남편과 자녀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같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요즘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자신들도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한다. 노후 대책이 점점 불안해지는 상황에서 늙고 병들어 고생하는 것보다는 깔끔하게 죽음을 선택하는 것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부모님의 인생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인식이 되었다. 유교 사상 때문인지 뭔지는 몰라도 부모님이 고통스러워 하는 것보다 안락사를 시키는 것이 불효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알츠하이머 질병, 즉 치매가 너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라는 영화도 있었듯이 자신의 기억을 잃어버리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모두 '나의 기억'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런 기억이 점차 사라진다니? 그러면서 아주 사소한 것도 잊어 버리면서 결국 '한 사람'으로서 구실을 못하게 된다니,,, 주변 사람들을 그렇게 고생시킬 것이라면 먼저 죽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은 게 아닐까? 그것이 고통스러운 인생을 사는 것보다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필자인 리베카 솔닛은 엄마와 살면서 계속 마찰을 겪어 왔다. 서로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엄마가 알츠하이머에 걸리며 너무나 연약해 지셨다. 엄마를 간호하게 되면서 감정적으로 쌓여 있던 좋지 않았던 감정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엄마의 사건을 겪으며 필자는 자신의 인생에 화해를 건네며 도전 의식을 불태웠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결정적 순간'이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랜드캐년에서 리프팅을 탈 수 있는 제안에 '네!'라고 답한 순간이었다. 나도 그 순간이 무엇일까 고민해 보았는데,,, 내게는 아직 오지 않은 게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은 필자인 리베카 솔닛의 에세이적 글쓰기다. 알츠하이머 병에 걸린 엄마의 이야기가 뼈대를 이루고 있고, 곁가지로 자신의 읽기, 쓰기, 고독함 등의 인생에 대한 개인적인 사유가 적혀 있었다. 그러한 사유들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고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 급하게 읽는 독서가 아니라 오랜 시간을 갖고 천천히 읽는 '느린 독서'를 추천하는 책이었다.

 

끝없는 이야기의 실타래를 따라 이야기의 세계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우리'가 '이 곳'에 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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