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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인
쓰카사키 시로 지음, 고재운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다소 추리소설스러운(?) 번역본 제목과는 달리 원제가 "게놈 해저드 (Genome Hazard)"라는 걸 보면서 다소 의아해했다. 거기다가, 과학기술적 도움을 받은 누구에게 감사드린다는 작가의 서문을 보면서, 이거 추리소설이 아니라 SF소설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첫장을 펼쳤다.
시작하자마자 전개된 사건은, 퇴근 후 집에 돌아온 주인공 남자가, 거실 바닥에 쓰러져 죽은 아내의 시체를 발견하고, 잇달아 걸려온 전화는 바로 아내로부터 걸려온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일로 출발한다. 때마침 집으로 찾아온 두 형사, 그들을 피해 달아나던 주인공을 향해 발사된 총알, 영문도 모른 채 사면초가에 빠진 그 앞에 나타난 한 여성. 이렇게 사건은 정신없이 연달아치며 시작되고, 주인공은 점차 자신의 기억 속에 다른 이의 기억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렇게 타인의 기억이 자신의 뇌에 이식되었다는 설정은 다분히 SF적이기는 하나, 어쩌면 미래의 사실일 수도 있겠다. 자신이 '나'라고 믿고 있던 존재가, 나의 현실, 나의 과거, 나의 주변이라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이 실제로는 타인일 수 있고, 타인의 현실, 타인의 과거라는 경악스러운 사실... 그러나 그것만이 이 모든 말도 안되는 비현실적이고 모순된 현실을 설명해주는 길이다. 죽은 아내의 옆에서 아내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는 이 엄청난 모순으로부터 시작되는 사건이 흥미롭다.
처음에는 모든 게 비현실적이고 SF적이라고만 생각하며 읽어나갔는데, 막판에 몇차례의 반전 끝에 드러난 진실은 추리의 성격을 짙게 띈 점이 인상적이었고, 어쩌면 처음부터 철저히 추리소설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다만, 그 강렬한 SF적 설정에 잠시 눈이 흐려젔을 뿐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