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항설백물어 (교고쿠 나츠히코) - 마타이치 일행의 활약 그 두번째!

속 항설백물어 - 항간에 떠도는 백 가지 기묘한 이야기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2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금정 옮김 / 비채 / 2011년 7월

"항설백물어"에 이어, 마타이치 일당들의 활약이 계속된다.

"항설백물어"를 재미있게 읽어서, "속 항설백물어"도 손에 들었다.  전편에 이어 이번에도 마타이치, 지헤이, 오긴 등은 치밀한 준비와 작전, 그리고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한편의 요괴소동 연극을 벌이고 실제 사건들을 해결한다.  특히 이번 작품들에서는 괴담 작가 모모스케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점이 전편과 달랐다.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에 서있는 모모스케의 고뇌도 담고, 그래서 양쪽을 오가며 절묘하게 두 세계를 잇는 역할을 하게 되는 모모스케의 눈으로 사건을 바라보게끔 한다.  거기에 각 등장인물의 과거사가 조금씩 드러나는 점도 흥미롭다.  처음부터 소악당일 것만 같았던 그네들도, 어떤 시절과 과정을 거쳐서 현재에 이르렀는지, 어떤 사연을 안고 소악당이 되었는지가 밝혀지며 작품에 흥미를 더한다.

어떻게 사건이 구성되고 진행되는지를 이미 전편에서 다 알게된 터라, 약간의 흥미와 긴장감이 떨어질 수 밖에 없긴 하지만, 이 작품 역시 재미있게 읽었다.  총 6편의 이야기가 실려있고, 그 이야기들이 시간순으로 조금씩 연결되며 세월이 흘러감도 묘사되어 있다.  에도 시대를 살아가는 당시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면서, 치밀하게 사건과 해결을 구성한 작가의 능력이 돋보이는 시대물이었다.  "후 항설백물어"도 출간된 모양인데, 얼른 한국어판을 보고 싶다.

죽지그래 (교고쿠 나츠히코) - 죽고 싶다는 말의 모순

죽지그래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권남희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8월

교고쿠 나츠히코의 작품치고는 참 평소 그의 작풍과는 많이 다른 느낌의 작품이었다. 

'아사미'라는 여자가 살해당하고, 평소 그와 '아는 사이'라는 청년 겐야는 그녀와 관련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아사미에 대해 듣고싶어한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계약 회사의 상사, 옆집 여자, 생모, 야쿠자 애인, 그리고 그녀의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까지, 그들을 차례로 만나며 같은 질문을 던지고 제각각의 답을 듣는다.  그러나 한결같은 건, 모두들 어느새 아사미의 얘기에서 시작해 자신의 얘기를 펼쳐놓으며 신세한탄과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  저마다 아사미에게 이런저런 상처를 줬던 사실이 드러나며,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불우한 삶을 변명하느라 급급한 그들에게, 겐야는 '그럼 죽지 그래?'하는 한마디를 던진다. 

정작 징징거리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타인을 할퀴고 상처주는 사람들은 삶에 대한 끈질긴 집착을 보이고, 힘든 삶 속에서도 항상 웃고 감내하며 모든 것을 받아들이던 아사미는 정작 죽고 싶다는 말을 꺼내며 자살인지 타살인지 모호한 상태로 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사실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으로 의도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 역시 초반에 이 부분이 파악이 돼서 별다른 반전도 없었고, 오히려, 죽은 이와 살아남은 사람들 사이의 극명한 아이러니를 그림으로서 우리 자신과 이웃들의 삶을 다시금 들여다보고자 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악녀에 대하여 (아리요시 사와코) - 한 사람의 악녀가 만들어놓은 다중의 이미지

악녀에 대하여
아리요시 사와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2월

도쿄의 고층빌딩 사무실에서 추락하여 죽은 미모의 여성 사업가, 도미노코지 기미코.  자살인지 타살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르뽀 작가가 그녀를 아는 주변인물 27명을 찾아다니며 기미코의 진실을 추적하고자 한다.  어떤 이는 그녀를 순수하고 천사로, 어떤 이는 사기꾼에 악랄한 가식덩어리로 묘사하고, 저마다의 관점에서 보고 겪은 그녀를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그녀의 죽음에 대한 진실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천사인가 악녀인가, 그녀의 진실된 생전 모습이 무엇인지에 촛점을 두고, 갑론을박, 각자의 평가로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가 이 작품의 묘미이다.  즉, 극과 극을 오가는 평가들 속에서, 그녀의 삶을 어린 시절부터 죽음 직전까지 오가며 타인의 입을 통해 재구성하고 있다.  출생의 비밀을 안고(?) 태어나서 남다른 실력과 발군의 노력으로 화려한 성공에 이르른 미모의 사업가.  아름다움과 순수, 정직만을 추구하며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었다는 평가 속에서, 천성적인 거짓말쟁이에 몇 겹의 가면을 쓰고 이중, 삼중의 생활을 하며 주변인물들을 철저히 속여왔다는 정황이 드러나기도 하고, 일견 강해보이지만 여리고 약한 여자라는 모습과, 모든 상황과 자신의 이미지를 조작하고 돈에 대한 천부적인 집착과 감각을 통해 거대한 부를 이룬 듯 보이지만 모든 게 모래성같이 부식하고 허물어지기 직전의 성공이었다는 추정까지, 어느 것이 허구이고 어디까지가 기미코가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인지를 가늠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 가는 것이 흥미진진하고 즐거웠다.  희대의 악녀, 일종의 소시오패스로 여겨지는 기미코의 불꽃 같은 짧은 일생을 27명의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듣는 과정이 색다르면서도, 작가의 뛰어난 입담에 어느새 진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온전히 정신을 빼앗기는 체험이었다.

무빙데이 (조너선 스톤) - 살아남은 자의 귀환

무빙데이
조너선 스톤 지음, 김무겸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7년 2월

72살의 '노인' 스탠리 페케는 부유한 유태인 사업가로 여유로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아내 로즈와 함께 40년을 살던 집을 팔고 산타바바라로 이사하려던 그에게, 사기꾼 닉 일당이 이삿짐 센터 직원을 가장하여 그의 집을 방문한다.  이삿짐을 포장하고 이송하려는 줄만 알고 그들의 절도 행각을 지켜보기만 했던 그는, 다음날 찾아온 진짜 이삿짐 센터 직원의 방문으로 자신의 소중한 짐들이 모두 도난당한 걸 깨닫게 된다.  노화를 느끼며 조용한 말년을 계획하던 스탠리는 이 일로 말미암아 자신 속에 숨어있던 과거의 '생존자'를 꺼내놓는다. 

홀로코스트 속에서 살아남았던 생존자 스탠리.  7살 나이로 나치를 피해 홀로 미국으로 건너와 성공을 이뤄냈던 그는, 누구보다도 자립적이고 심지어 자식과도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철저히 독립적이고 고독한 내면을 지닌 채 살아왔다.  생물학적 나이로 노인에 속하게 된 그였지만, 타고난 체력과 정력, 그리고 과거로부터 배웠던 생존전략을 이용하여 젊은 악당을 응징하고 자신의 것을 찾고자 한다.  이제 스탠리의 복수가 시작되고, 거리의 소년으로 자라난 악당 닉 역시 스탠리가 만만치 않은 노인임을 알아채고 맞서게 된다. 

홀로코스트에서 생존한 스탠리와 타고난 영리함으로 사기의 세계를 살아온 닉의 대결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흥미진진하고, 누가 끝까지 살아남을 것일지 지켜보는 내내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가독성이 높아서 책을 잡은 순간부터 쉼없이 읽어내려갔다.  단순한 사기, 반격, 추적, 복수 등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끔찍한 과거와 전 생애가 한 절도 사건으로 인해 촉발되어 현재로 소환된다는 발상과 배경이 이 작품을 차별화시키고 깊이를 더해주는 것 같다.  노인은 신체적, 정신적, 지적으로 약해진 존재라는 고정관념을 뒤집으며, 어두운 과거로부터 강건하게 살아남은 스탠리의 활약을 그려냄으로써 통쾌한 반전도 이끌어낸다.  아울러 후반부에 드러난 그의 어두운 내면, 절망, 왜곡된 욕망 등이 가미됨으로써 뒤틀어진 역사 속에서 굴절된 개인의 삶의 모습도 그려지는 것 또한 작품의 깊이를 더한다는 생각이다.  흥미롭고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저지먼트 (고바야시 유카) - 미래에 재현되는 함무라비 법전

저지먼트 - 복수를 집행하는 심판자들, 제33회 소설추리 신인상 수상작
고바야시 유카 지음, 이영미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7년 3월

가상의 미래, 일본에는 '복수법'이 집행된다.  끔찍한 범죄에 의해 죽은 피해자의 가족들이 가해자의 수법 그대로 가해자에게 형벌을 가하는 방식이다.  일반 법률에 의한 처벌 대신 직접 형을 집행하는 복수법을 선택한 피해자 유족들의 이야기 다섯 편의 연작이다.

너무나 잔인하게 사람을 해하고 죽이는 범죄가 형형한 시대, '복수감찰관' 도리타니 아야노는 피해자 유족이 가해자에게 형벌을 가하고 마침내 죽이는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며 감찰하는 교도관이다.  이 과정에서 도리타니가 느끼는 고뇌는 일반인들과 다름이 없다.  똑같은 방식으로 잔인하게 고문하고 살해하는 과정 끝에 후련함과 안정을 찾은 이도 있지만, 가해자와 똑같은 괴물이 됐다고 자책하며 절망하는 사람도 있고, 복수법의 찬반 양론은 쉽사리 결정을 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과연 복수가 피해자의 고통을 구워하는 방법인지 또다른 고통과 복수는 낳는 악의 고리일 뿐인지, 어쩌면 정답이 없는 문제일 수도 있는 이 난제 앞에 도리타니의 시선을 통해 우리 모두는 같은 고민을 할 것 같다.  복수법이 집행되는 동안 그나마 마음의 위안이라 할 수 있는 건, 가해자들이 하나같이 반성이나 후회의 기색은 없이 끝까지 철저한 악인이라는 것, 인간의 마음이라고는 없는 절대적 악인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라고나 할까...